미국이 우크라이나 종전 협상에 이어 곧바로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을 중단시키기 위한 중재에 나섰다. 팔레스타인 땅인 가자지구에서 주민들을 내보내고 ‘리비에라(해안 휴양지)’로 만들겠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구상과, 이런 발상에 반대하는 아랍-이슬람권 공동구상이 맞부딪치고 있다.
가자를 둘러싼 상황은 이달 들어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다. 트럼프는 취임 전인 작년 12월 초 소셜미디어에 “내가 취임하기 전에 (하마스는) 가자지구 포로들을 석방해라, 그러지 않으면 지옥에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는 글을 올렸다. 12월 말과 올 1월 초에도 그는 같은 발언을 반복했다. 그러더니 최근 하마스와 미국 측이 직접 접촉을 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트럼프 대통령의 특사 애덤 볼러가 몇 주 동안 카타르 도하에서 하마스 측 인사들과 만났다는 것이다. 미국 온라인 매체 악시오스가 보도를 했고, 백악관도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트럼프는 접촉 사실이 알려진 직후인 지난 5일 다시 하마스를 향해서 “인질을 즉시 석방하지 않으면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앞에서는 위협, 뒤에서는 필요하면 누구와도 협상하는 트럼프식 외교의 단면이었다.
근 30년만의 직접 접촉, 트럼프식 외교의 단면
세상의 관심은 “가자지구를 리비에라로 만들겠다”는, 부동산 개발업자의 터무니없는 핑크빛 착상처럼 보이는 제안에 쏠려 있지만 직접 접촉의 의미는 작지 않다. 미국 정부의 원칙은 “테러범과는 협상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미국 국무부는 1997년 하마스를 테러조직으로 규정했다. 그래서 그 때부터 지금까지 직접 대화를 하지 않았으며 반드시 중간에 카타르, 이집트 같은 나라들을 중재국으로 끼고 협상을 했다. 그런데 트럼프 정부가 직접 하마스와 만난 것이다.

처음에 미국이 하마스와 협상하면서 주로 논의한 것은 미국인 인질 석방과 유해 송환 문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마스와 접촉한 애덤 볼러 특사의 직책 자체가 납치 관련 특사다. 그런데 휴전안을 비롯해 하마스와 더 폭넓은 논의를 한 사실이 알려졌다. 트럼프가 겉으로는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편들고 무기를 넘겨주고 있지만 동시에 하마스와 접촉하고 있으니, 지금 격앙되고 초조해진 것은 오히려 이스라엘일 수도 있다. ‘직접 접촉’ 보도가 나온 뒤 이스라엘 총리실은 “미국에 우리 입장을 표명했다”는 짧은 성명만 냈으나, 이스라엘 고위 관리들은 대놓고 불만을 터뜨렸다. 볼러 특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이스라엘 언론 인터뷰에서 하마스와 언제부터 몇 번 만났는지 밝히기를 거부했고, 이스라엘 측의 불만에 대해서는 “우리는 이스라엘의 대리인이 아니다”라고 했다.
현재까지 나온 내용들을 종합해보면 미국과 하마스가 논의한 방안은 하마스가 무장을 해제하고 가자지구에서의 정치권력을 포기하는 것을 전제로 한 5~10년 동안의 장기 휴전안이다. 볼러 특사는 CNN 등 미국 언론들과 만나 “장기 휴전도 지평선 위에 올라와 있다”고 했다. 무장을 포기하고 가자지구에서 정당 활동까지 아예 그만두라는 것은 하마스에게는 존재 근거를 흔드는 요구일 수 있지만, 지금 상황에서 선택지가 별로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 모든 것이 가자지구를 휴양지로 만들겠다는 계획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것일까? 트럼프가 머릿속에 얼마나 구체적인 ‘가자 리비에라 만들기 플랜’을 갖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연설에서 직접 말한 것들을 보면 몇 가지 내용이 있다. 첫째, 미국이 가자지구를 ‘소유’한다. 그리고 현장의 불발탄을 비롯해 무기들을 해체할 책임을 진다. 둘째, 미국이 가자지구를 직접 개발해 “누구도 본 적 없는 웅장한 지역으로 재건”한다. 세째, 가자지구를 국제적인 곳으로 만들 수 있다. 가자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요르단과 이집트도 “협력할 것이라 믿는다.”
실제 추진하겠다는 구상일까, 트럼프식 협상용 카드일까. 트럼프의 뇌 속을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신호를 읽을 수는 있다. 특사 자체가 신호다. 대통령이 특사를 보낼 때에는 해당 이슈에 밝은 사람이나, 메시지에 부합하는 사람을 보낸다. 트럼프의 납치 특사로 하마스와 만난 볼러가 어떤 사람인지 보자.
납치 특사 된 ‘쿠슈너 룸메이트’
1973년생, 뉴욕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다.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을 졸업하고 벤처캐피털 회사에서 잠시 일했다. 의료 장비를 관리하는 회사, 재택 의료서비스회사를 세워 경영한 경험이 있다. 초반 경력을 보면 중동이나 지역 분쟁, 국제정치와는 거리가 멀었던 셈이다. 그런데 트럼프 정부 때인 2018년 정부 영역으로 이동했다. 트럼프의 사위로 집권 1기 때 중동 정책에 깊숙이 관여한 재러드 쿠슈너와 와튼스쿨 시절 룸메이트였다고 하는데 그 인연이 작용한 것일까. 볼러는 보건복지부 산하 메디케어/메디케이드(건강보험) 혁신센터 소장을 맡았다. 전임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건강보험인 ‘오바마케어’를 무산시키는 역할을 맡았던 셈이다. 코로나19 팬데믹 때에는 백악관의 태스크포스를 이끌었다. 워프스피드 작전이라 이름붙여졌던 이 태스크포스는 결과적으로 엄청난 실패였음이 미국의 코로나19 사망자 수를 통해 확인됐다.

여기까지 보면 정부에 들어간 뒤에도 중동이나 국제정치와는 연결고리가 없다. 굳이 찾자면 2019년 국제개발금융공사(DFC) 대표를 지낸 것 정도를 들 수 있다. DFC는 해외 투자와 관련된 기관들을 통폐합해 트럼프 1기 정부가 만든 기관이다. 명분은 개도국들에 투자하기 위한 기관인데 볼러가 최고경영자를 맡은 시기에 미국 기업들에게 대출을 해줘서 비난을 받았다. 트럼프가 2기 들어와서 저개발국 원조를 수십년 동안 맡아 해온 국제개발처(USAID)를 무력화하고 있는데, 국제개발처를 DFC 밑으로 보내 감독을 받게 하거나 아예 통합해버릴 거라는 얘기도 있다.
볼러는 이 기구를 이끌 때 코소보, 아프가니스탄 등등 세계 곳곳의 투자 협상에 관여했다. 또 쿠슈너가 이스라엘과 아랍국가들 간 ‘아브라함 협정’이라는 대대적인 화해 협상을 추진할 때에도 참여했다. 그가 맡은 분야는 주로 경제협력, 구체적으로 말하면 미국 기업들을 위한 거래 협상이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하마스와 인질 석방 협상에 나섰다.
볼러보다 좀 더 포괄적인 역할을 맡은 트럼프의 중동 특사는 스티븐 위트코프다. 이 사람은 부동산 관련 변호사로 시작해 부동산 투자자로 나서서 개발회사를 운영해왔고, 트럼프 1기 때 역시 볼러처럼 코로나19와 관련해 정부와 연을 맺었다. 코로나19의 경제적 영향에 맞서기 위한 ‘위대한 미국 경제부흥 산업그룹’의 일원이었던 것이다. 그러더니 트럼프 2기가 공식 시작되기도 전부터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휴전 협상에 개입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사실상의 특사 역할도 했다.
그러니 트럼프 정부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재건이라고 하지만 결국 개발, 그 중에서도 부동산 개발, 무엇보다 미국 투자자들을 위한 개발이다. 과연 가능할까?
[알자지라] Trump’s Gaza ‘plan’: What it is, why it’s unworkable and globally rejected
트럼프는 가자지구가 미국 소유가 될 것이라면서도 “미군 병사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스라엘은 “연구해볼 가치가 있는 방안”이라고 했지만 이집트,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는 반대한다고 못박았다. 미국이 가자지구를 통제한다는 것은 국제법으로 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240만 명 이상이 살아온 땅이다. 팔레스타인 남쪽의 이집트와 동쪽의 요르단에 주민들을 떠넘기자는 것은 이스라엘 극우파의 주장이었고 트럼프가 이를 부추기고 있지만, 이집트나 요르단이 이를 받아들일 리 만무하다.
리비에라 플랜 VS 아랍 얼터너티브… 가자 주민들 목소리는 어디에?
아랍국가들을 대표하는 22개국 정치 협의체인 아랍연맹이 앞장서서 반기를 들었다. 지난 4일 카이로에서 열린 아랍연맹 긴급 정상회의에서 압델 파타 엘시시 이집트 대통령은 ‘가자 2030’이라는 가자지구 재건계획을 내놓았다. 주민 강제이주에 명확히 반대하면서, 이집트는 5개년 계획을 제안했다. 일단 임시주택 20만채를 만들어 집 잃은 피란민들을 수용하고, 뒤이어 영구적인 주택 40만 채를 짓고 가자 공항과 항구를 재건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무기력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당장 가자지구를 통치하기는 힘드니까 우선 임시통치위원회를 만들어서 재건을 진행하자고 했다. 하마스도 재건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만일 있다면’ 참여한다는 한 줄을 붙였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치안유지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군사력을 가진 하마스가 가자지구를 좌지우지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랍국들도 불만이 많았다. 그래서 이집트와 요르단이 팔레스타인 보안군을 훈련시키는 것과 국제평화유지군을 배치하는 것도 포함시켰다.

이 제안을 아랍연맹이 공식 입장으로 채택함으로써 이집트의 계획은 아랍연맹 플랜이 됐다. 트럼프 정부는 곧바로 “현실을 다루지 못하고 있다”고 거부했으나 유럽연합은 아랍연맹 안을 지지했다. 카이로 회의에도 참석한 유럽이사회 의장 안토니우 코스타는 “구체적인 지원을 해줄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는 외교장관 공동 성명에서 주민들을 뿌리 뽑지 않고 가자지구를 재건하기 위한 "현실적인 길"이라고 환영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도 “아랍이 주도하는 계획을 강력하게 지지하며, 완전히 협력하겠다”고 했다. 카이로회담 사흘 뒤에는 이슬람권 57개국 모임인 이슬람협력기구(OIC)도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에서 긴급회의를 열고 아랍연맹 방안을 공식 입장으로 채택했다. 이집트 안은 이제 미국과 이스라엘을 뺀 세계가 지지하는 ‘아랍 대안(Arab Alternative)’로 격상됐다.
‘리비에라 플랜’과 ‘아랍 대안’ 중에 어떤 것도 명확한 승리를 거두기는 어려울 것이다. 당장 휴전 협상부터 타결돼야 한다. 위트코프가 11일 카타르에 도착해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비공개 협상에 관여하고 있는데, 일단 사람들 더 죽어나가는 것부터 막아야 한다. 그럼에도 휴전을 넘어 가자지구에 관한 논의가 재건 플랜 쪽으로 확 중심이동한 것은 사실이다. 휴양지를 만들어 호텔을 짓든 놀이공원을 만들든, 평화가 오고 돈이 돌게 된다면 좋은 일이다. 그것이 200만명을 내쫓는 계획과 함께 진행되는 것만 아니라면 말이다.
[블룸버그] Gaza’s Future: How Trump’s ‘Riviera’ and the Arab Plan Cross Red Lines
재건을 논의하는 것은 당연한데, 그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배제되는 게 문제다. 지금 거론되는 계획들은 모두 외국이 만든 것 아닌가. 이집트든 미국이든, 가자지구 주민들에겐 외국이다. 하마스도 온전히 가자 사람들을 대변한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들은 이스라엘과 함께 수많은 민간인들의 목숨을 앗아간 전쟁범죄 집단이다. 하마스가 가자지구 집권세력이었다고는 하지만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우선시하면서 주민들을 통제하고 옥죈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피란길에 올랐던 가자주민 수십만 명이 종전을 기대하며 집으로(사실은 무너진 집터로) 돌아가고 있다는데, 그들의 삶이 더 무너지지 않기를.
* <주간경향>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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