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닐봉투가 없는 나라.
플라스틱 쓰레기는 어느 나라에서나 골칫거리다. 그 중에서도 비닐을 비롯한 포장재가 세계 플라스틱 사용량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특히 저개발국을 돌아다니다 보면 온갖 쓰레기, 비닐과 캔 따위가 골목을 채우고 있다. 실개천에도, 바닷가에도, 수풀 사이에도. 글로벌화가 낳은 상품의 범람과, 쓰레기를 분리하고 수거하고 처리할 행정력이 부족한 저개발국의 현실이 결합된 것이 길가의 쓰레기들이다.
길에 쓰레기가 없는 나라가 있다면? 비닐봉투가 없는 나라가 있다면? 그게 르완다다. 물론 비닐로 포장된 상품이야 있지만 어떤 가게에서든 물건을 담는 용도로 비닐봉투를 쓸 수는 없다.
국제뉴스를 좀 본 사람들에게 ‘제노사이드’ ‘학살’ ‘내전’으로 각인돼 있는 르완다를 설명하면서 비닐봉지 얘기부터 꺼낸 것이 이상하게 들릴 지 모르지만, 이 나라를 가본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다. 깨끗한 나라. 르완다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이것이다. ‘깨끗하다.’
올 여름 동아프리카의 르완다를 방문했다. 제노사이드가 벌어진 것이 1994년이었으니 벌써 30년, 그리고 올해엔 대선도 있었다. 정치상황에 당연히 관심이 생겼지만 수도 키갈리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머리 속에 박힌 것은 압도적인 깨끗함이었다. 자세히 보면 허름하지만 얼핏 보기엔 고급 빌라촌처럼 보이는 깔끔한 집들이 키갈리의 언덕들을 채우고 있다. 대륙 전체에서 11개국,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만 9개국을 다녀봤지만 이 나라의 깔끔함은 경이로웠다. 아시아의 개도국들이나 관광객 많은 유럽국들 어디를 떠올려봐도 르완다는 예외적이었다.
사람이 사는 곳은 이렇게 단정하기가 힘들다. 누군가는 의도치 않게 물건을 흘릴 수도 있고, 어느 집은 골목 청소를 소홀히 할 수도 있고, 또 어느 마을은 길가의 덤불이 무성해지도록 게으름을 피울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 일이 없게 하려면 유언무언의 강압이나 심리적 강박이 필요하게 마련이다. 기묘할 정도의 깨끗함 속에서 느껴지는 압박감. 연중 내내 더위도 추위도 없는 내륙의 고지대, 건기의 쾌적함 속에서도 어떤지 주위를 둘러보고 행동을 조심하게 만드는 미묘한 압박감이 공기 속을 떠돌고 있는 듯했다. 우리는 내전에 피흘리던 옛날의 그 나라가 아닙니다, 이렇게 정돈되고 깨끗하고 안전한 나라를 만들었어요, 하고 세계에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을 느낀 사람은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싱가포르를 가리켜 ‘잘 사는 북한’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표현을 빌면 르완다는 ‘가난한 싱가포르’ 같은 느낌을 준다.
르완다는 2008년 비닐봉투의 제조, 사용, 수입, 판매를 금지했다. 여전히 저개발 상태인 르완다가 이런 조치를 취한 것에 대해 찬사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이 그럴 때냐, 발전부터 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개발과 환경,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어려운 주제다. 올해 세계는 더웠다. 기후변화는 점점 심해지고, ‘사상 최고기온’ 기록은 해마다 경신된다. 더위가 심해지면 전력 소비가 늘어난다. 남아시아의 인도는 점점 더 자주 열파(heat wave)라 불리는 폭염과 가뭄을 겪는다.
14억 명이 사는 지구상 최대 인구대국 인도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탄소를 많이 내뿜는 나라다. 하지만 1인당 온실가스 배출량은 미국의 7분의1에 불과하다. “인도인들이 모두 에어컨을 튼다면 지구는 어떻게 될까”는 질문을 접한 적 있다. 인도야말로 덥다. 인도 사람들도 에어컨을 틀 수 있을 정도로 경제가 발전해야 하고, 전력 생산량도 늘려야 한다. 어떻게 하면 탄소 배출을 줄이면서 전기를 만들까 고민할 문제이지, 저개발국이 더 발전할까봐 걱정할 일은 아니다.
세계 인구가 100억명에 이를 2050년이 되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가 차지하는 비중이 20%를 넘게 된다 하는 이야기도 듣는다. 인구가 늘어난다는 것은 영유아 사망률이 떨어진다는 얘기이고, 점점 더 살만하게 되어간다는 것이고, 이 나라들의 총생산(GDP)이 커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들이 저개발국에서 일어나는 것을 환영하기는커녕, 조금 더 잘사는 나라에 사는 이들은 섣부른 걱정을 한다.
그런 걱정의 또다른 일면이 ‘먼저 발전부터 하고 나서’라는 논리 속에 스며 있다. 우선 경제부터 키워야지, 잘 사는 나라들이야 환경을 고민해야 하지만 갈 길 바쁜 나라들이 어떻게 그런 걸 신경 쓰겠어? 르완다의 비닐봉투 금지령은 그런 인식에 묵직한 타격을 가한다. 산업혁명 이래로 ‘발전한’ 나라들은 지구를 더럽히며 부자가 됐다. 이제부터 좀 더 잘 살고 싶은 나라들은 그 길을 따라가야 할까? 마찬가지로 지구를 더럽히면서? 그러지 않고서 발전할 방법은 없을까. 인구 1400만명에 면적 2만6000km2, 동아프리카의 이 작은 나라가 그 길을 걷고자 한다.
르완다와 콩고민주공화국, 우간다가 만나는 국경지대에 거대한 키부(Kivu) 호수와 열대우림이 있다. 흔히들 연상하는 아프리카의 정글, 밀림이 그곳이다. 화산도 있고 호수도 있고 숲도 있으니 종 다양성의 보고다. 특히 유명한 동물이 있다면 마운틴고릴라다. 전 세계에 1000마리 남짓 밖에 안 남은 마운틴고릴라가 이 3개국이 만나는 숲 지대에서 살아간다.
마운틴고릴라가 가장 많이 사는 곳은 500마리 이상이 거주하는 우간다의 브윈디 국립공원이지만 남쪽에 바로 붙어 있는 르완다의 비룽가(Virunga)가 서방에선 더 유명하다. 미국의 영장류 학자 다이앤 포시(Diane Fossey)가 이곳에서 20년 동안 고릴라를 연구하다가 1985년 의문의 살해를 당했고, 이 사건이 영화로도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포시의 무덤을 해마다 사람들이 찾아가고, 포시의 이름을 딴 연구센터가 만들어져서 그의 일생과 그의 친구였던 고릴라들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야생의 개체수가 워낙 적기 때문에 마운틴고릴라를 보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찾아가기는 매우 까다롭다. 르완다든 우간다든, 생태관광으로 돈을 버는 나라들은 야생을 보호하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가난한 나라니까 시스템이 엉성하겠지 생각하면 오산이다. 마운틴고릴라를 보려면 허가를 받아야 한다. 허가비가 무려 1인당 1500달러다. 우간다로 가면 800달러로 낮아지지만 그래도 적은 돈이 아니다. 그 돈을 받아서 보호구역을 관리한다. 그나마도 두어달 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보호구역에서 모든 것은 인간이 아닌 고릴라를 위해 움직여진다.
고릴라 1000여 마리의 출생과 사망, 가족구성과 가계도를 관리인들과 숲속 마을 주민들이 모두 파악하고 있고, 그들의 안전과 안녕을 면밀히 살피고 지킨다. 고릴라를 만나는 투어에는 레인저(ranger)라 불리는 전문 안내원이 2명 따라붙고, 고릴라들이 있는 곳을 아는 추적꾼(tracker)들이 함께 하며 한정된 숫자로 움직이는 관광객 그룹을 관리한다. 숲속에 어느 정도 들어가면 짐을 모두 내려놓아야 하며, 큰 소리로 웃거나 떠드는 것은 어림도 없다. 코로나19 이후로는 트레킹을 할 때에 마스크를 써야 한다. 감염될까봐서가 아니라, 고릴라들에게 인간이 질병을 옮길까봐서다. 숲 속에서 고릴라를 마주친 그 순간부터 딱 한 시간이 지나면 나가야 한다. 고릴라들의 삶에 방해되니까. 고릴라들의 숲에서 인간은 주인이 아닌 방문객일 뿐이다.
밀렵이나 불법 벌목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다이앤 포시의 시대가 아니다. 아프리카의 숲을 지키는 것은 그 대륙의 국가들이다. 종 다양성을 지켜나갈 책임을 떠안은 그들은 부자 나라들에 구걸하는 게 아니라 그 임무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것이다. 야생을 지키는 것은 쉽지도 않고 단순하지도 않은 과제다.
2015년 아프리카 남부의 짐바브웨에서 미개한 미국인이 보호 대상이던 ‘세실’이라는 사자를 죽였다. 야생 동물의 뿔이나 머리나 가죽 따위를 자랑삼아 수집하는 이른바 ‘트로피 헌터’들이 도마에 올랐다. 코끼리나 코뿔소, 하마는 어금니와 이빨 때문에 밀렵의 희생양이 되곤 한다. 과거엔 미국과 유럽 부자들이 문제였지만 지금은 중국의 ‘수집가’들이 최대 수요자다. 코끼리를 지키기 위해 세계가 움직였고 지금은 개체 수가 많아졌다. 특히 보호를 잘 한 나라들은 요즘엔 오히려 코끼리가 너무 많아 문제다. 올 3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발전 모델로 꼽히는 보츠와나가 코끼리 사냥 여행을 금지시킨 독일에 항의한 일이 있었다. 이 나라는 코끼리가 13만 마리나 되는데 매년 6000마리씩 늘어나고 있어서 골치다. 그런데 멀리 유럽 국가가 동물 보호를 이야기하면서 윤리를 운운하는 게 불만이었던 것이다.
보츠와나와 독일 가운데 어느 한쪽이 나쁘다고 잘라 말할 수는 없다. 54개국이 존재하는 이 대륙의 이슈 중에 어느 하나 복잡하지 않은 것은 없다. 모든 일은 다면적이다. 개발과 보존의 딜레마는 그 복잡한 일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보다 어쩌면 더 복잡한 또다른 딜레마는 민주주의다. 르완다의 너무 깨끗한 골목, 거기서 느껴지는 권위주의의 압박감을 곱씹기 위해 30년 전의 르완다 학살을 되짚어 본다.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막는 것이 이후 이 나라의 지상과제가 됐기 때문이다.
학살을 간략히 설명하면 르완다가 벨기에의 식민통치로부터 독립해 1962년 공화국을 세우면서 인구 다수를 차지하는 후투족이 권력을 잡았다. 이미 그 전 몇 년 동안 벨기에 통치 시절의 기득권이었던 소수민족 투치를 겨냥한 폭력사태가 벌어졌다. 후투 정권은 투치를 억압했고 1990년대 들어와 점점 조직적 학살로 변해갔다. 후투 독재정권에 맞선 민주화 투쟁에는 투치가 많이 참여했고, 탄압을 피해 상당수가 우간다를 비롯한 이웃나라들로 피신해갔다.
키가 크고 코가 높고 얼굴이 갸름한 투치, 코가 낮고 넓은 후투. 일각에서는 후투와 투치의 이런 구분 자체를 벨기에가 의도적으로 만들었으며, 분할 통치를 위한 거짓된 종족 구분이라 말하기도 한다. 벨기에의 이간책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공정하게 말하면 이전부터 있던 구분을 벨기에가 제도화, 고착화했다고 봐야 한다. 르완다의 민속박물관 등에 가면 근대 이전 시기에 르완다를 지배한 ‘투치 왕국’들의 자취를 볼 수 있다. 후투족 대통령이 의문의 항공기 사고로 숨진 뒤 투치 대학살이 시작됐다.
희생자가 2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 적도 있지만 이후 오랜 조사를 거쳐 르완다 정부가 확인한 학살 사망자는 80만~100만명이다. 200만 명이든 80만 명이든 어마어마한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키갈리 제노사이드 메모리얼에만 25만명이 묻혀 있다. 종족이나 언어, 종교 같은 정체성을 잣대로 대량학살을 자행하거나 문화적 말살을 시도하는 것을 제노사이드라 부른다. 유대인들의 ‘홀로코스트’ 이후에, 제노사이드라는 낯선 용어를 세계가 알게 만든 사건이 르완다 대학살이었다.
피해 규모가 엄청나기도 했지만, 학살이 벌어진 나라들 중에서 르완다를 자꾸 들여다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힘겨운 진상 규명과 처벌, 그리고 재발을 막기 위한 피눈물 나는 노력 때문이다. 학살이 끝나고 1996~1997년부터 학살자들에 대한 재판이 시작됐다. 이전까지 후투, 투치 가리지 않고 한 마을에 섞여 살던 사람들이었다. 내 남편이 내 오빠를 죽이고, 이웃집 남성이 내 여동생을 강간하고, 엊그제까지 함께 놀던 이웃이 학살자들에게 내 아이들을 넘겼다.
이런 상황에서 누구를 어느 정도까지 처벌해야 할까. 피해자가 많은 만큼 가해자도 많은데 말이다. 이 비극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과정은 힘들 수밖에 없다. 반인도 범죄 진상규명의 모태가 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실화해위원회’조차도 그 많은 백인들을 다 처벌하는 것이 무리라 생각해 사면에 초점을 맞췄고 결국엔 ‘고백과 면죄 위원회’라는 비아냥을 들었는데 말이다.
‘블러디 다이아몬드’로 유명한 서아프리카 내전의 당사국 시에라리온이나 크메르 루주의 대학살을 겪은 캄보디아, 르완다와 비슷한 시기에 탈냉전의 혼돈을 참혹하게 겪었던 옛 유고연방 등은 이 과정을 국제법정에 맡기거나 유엔 등의 도움으로 아직까지 재판을 진행 중이다. 하지만 국제사회가 개입하게 되면 그 나라 사람들이 스스로 과거와 대면하고 화해를 모색하기가 오히려 힘들어진다. 심지어 가해자들은 자기네들이 정치적으로 부당한 핍박을 받고 있다면서 진상 규명과 처벌의 정당성을 부인하곤 한다.
르완다는 이 어려운 과정을 해냈다. 다른 나라가 개입된 일에 대해서는 탄자니아에 설치된 유엔 국제형사재판소(ICTR)가 재판을 했고, 르완다 내에서 벌어진 일은 스스로 조사하고 처벌했다. 우간다에 피신해 힘을 키웠던 르완다애국전선(RPF)이 들어와 내전을 끝내고 집권했으나 사법체계가 거의 무너진 상태였다. 애국전선 정부는 그래서 가카카(Gacaca)라고 불리는 ‘동네 법원’을 만들었다. 행정구역마다 가카카 법정을 꾸리고, 가해자를 찾아내고 처벌하게 했다. 가카카는 전통 사회에서 원로들이 모이던 마을 마당을 가리키는 단어에서 나왔다. 말 뜻 그대로 풀어보면 ‘키작은 풀’이라고 하니 말 그대로 민초들의 법정이었던 것이다.
제노사이드 뒤에 만들어진 르완다 헌법은 폭력 사태가 재발하는 것을 막는 데 초점을 맞췄다. 신분증에는 부족 표기가 사라졌고 부족 갈등을 부추기고 선동하는 것은 중대한 범죄가 된다. 또 하나의 축은 젠더 평등이다. 사내는 죽이고 여자는 강간한다, 혹은 강간하고 죽인다. 이것이 제노사이드, ‘씨를 말린다’는 것의 본질이다. 내전 때 후투 선동가들은 ‘후투 10계명’이라는 걸 만들어서 투치를 죽이라고 부추겼다. 그 중 첫째, 둘째, 세째 계명이 투치 여성들, 투치와 관계된 후투 여성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그래서 르완다는 여성들의 역량을 강화하는 것을 중시한다. 정부뿐 아니라 여성들 스스로의 노력도 크다. 세상 일에 의문을 가지라는 의미에서 브랜드 이름을 정한 ‘퀘스천’이라는 커피 회사가 있다. 협동조합 농장에서 직접 커피를 키워 가공하고 키갈리 시내 카페에서 커피와 원두를 판다. 서울 어느 카페와 비교해도 손색 없는 세련된 카페다. 퀘스천 커피는 농장부터 카페까지 여성들이 운영한다. 내전 때 다치거나 가족을 잃은 여성들이 만든 바구니 등 전통공예품 조합 같은 것들도 많다.
가정 폭력을 비롯해 여성을 상대로 한 폭력은 매우 엄하게 처벌한다. 남편에게 맞은 아내가 신고하면 바로 경찰이 출동한다. 칼로 물베기라며 조치를 미루거나 ‘데이트 폭력’이라 소홀히 다뤄 여성들을 계속 희생시키는 나라와는 다르다. 전직 대통령 딸조차 이혼할 때 돈을 받으려면 ‘재산 형성 기여도’를 따져야 하는 한국과 달리 르완다에서는 결혼을 하면 모든 재산을 부부가 50 대 50으로 등록한다.
의회에서 여성 의원 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가 르완다다. 하원 80석 중에 여성이 49석(61%)을 차지한다. 국제의회연맹(IPU)은 2022년부터 의회민주주의에 기여한 세계의 의원을 뽑아 기구 설립자의 이름을 딴 크레머-패시 상을 준다. 첫해 성평등 측면에서 멕시코의 여성의원이 수상자로 선정됐는데 시상식은 의회 평등의 대명사인 르완다 수도 키갈리에서 열렸다. 성평등지수(Gender Gap Index)에서 이 나라는 항상 상위권을 차지한다. 경제력이 낮고 다른 나라들이 치고 올라오면서 2024년 지수에서는 세계 랭킹 39위였지만 그 전해 보고서에서는 12위였다. 한국은 94위다. 더 놀라운 것은 여성 ‘할당’이 공공부문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선출직이나 정부기관 뿐 아니라 사기업이든 재단이든 모든 조직에서는 이사회 멤버의 30%를 여성에 할당한다. 그러니 여성이 과반인 기구나 회의도 많다.
남성 변호사 앙투안 씨를 만나 젠더 평등에 대한 의견을 물었더니 서랍을 뒤진다. 아내와 자신의 몫이 동등하게 표시된 ‘집 문서’를 꺼내 보여준다. 나이든 나이든 세대 중에는 반발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자신은 젠더 평등이 지향하는 가치가 옳다고 믿는다고 했다. 딸들을 학교에 잘 보내지 않는 경향이 있기는 했지만, 르완다에서는 여성들이 존중받는 전통문화가 있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아프리카의 다른 나라들이나 중남미의 토착민 부족문화에 남아 있는 것 같은, 마을의 웃어른인 여성들이 발언권을 갖는 관행을 뜻하는 듯했다.
마찬가지로 학살을 겪은 서아프리카의 라이베리아에서도 국가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여성들이 내전 세력들의 무장 해제와 마을 살리기에 큰 역할을 맡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르완다 남성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공격적인 느낌을 주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것이 생활화된 듯한, 공손하고 조심스런 태도에 깜짝 놀라게 된다. ‘쩍벌남’에 익숙한 사회에서 살아온 여성으로서, 혼잡한 곳에서 팔다리를 마구 휘두르며 다닐 수 있게 만드는 그 무의식 속의 권력을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이다.
물론 폴 카가메 대통령을 비롯한 르완다의 정치지도자들은 여전히 남성이다. 더 큰 문제는 모든 측면의 군사화다. 애국전선 정권이 재구축한 르완다군은 강하고 규율 잡힌 군대다. 군대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 ‘군기가 잡혀 있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것의 한 측면이 지나치게 깨끗하고 너무나도 안전한 사회일 것이다. 늦은 밤 키갈리 거리를 여성 혼자 돌아다녀도 위험할 일은 없다. 여성 혼자 여행해도 안전한 나라로 일본과 르완다를 꼽은 동영상을 본 적도 있다.
반대쪽 측면은 다른 목소리가 존재하기 힘들고 통제가 강하다는 것이다. 불가능할 정도의 깨끗함을 가능하게 한 것은 촘촘히 조직화된, ‘쓰레기 5호 담당제’와도 같은 위계적인 행정과 주민들의 순응이다. 학살을 딛고 일어선 모습을 세계에 보여줘야 한다는 집념과 함께, 카가메 정부가 “빌딩을 지으라”고 지시하면 역시나 정부 지시에 따라 대출해주는 은행 돈을 빌려 건물을 올려야 하는 것이 이 나라라고 앙투안은 말했다.
이처럼 억압적인 측면이 있으며 게다가 권위주의가 점점 강해지고 있다 하지만, 30년만에 이처럼 나라를 바꾼 카가메에게는 경외감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이 된 것은 2000년이지만 애국전선 사령관으로서 내전을 진압한 이후 국방장관과 부통령을 지내던 동안에도 실질적인 권력자였으니 사실상 30년 통치다. 때마침 7월 15일은 대통령 선거일이었고 곳곳에서 애국전선의 표시들을 볼 수 있었다. 특이하게도 슬로건이나 텍스트는 없이 정당 색깔인 하늘색과 빨간색과 흰색으로 구성된 깃발이나 현수막만 눈에 띄었다. 키갈리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던 중에 선거 유세 집회를 봤다. 동원된 군중들, 똑같은 티셔츠. 한 줌의 야당 지지자들도 봤지만 얼핏 봐서는 며칠 뒤 대선이 있다는 걸 알 수도 없을 정도로 선거 분위기는 없었다. 당연히 카가메는 당선됐다. 98.2%의 투표율, 99.2%의 득표율로 4선에 성공했다.
북쪽 우간다 국경에 가까운 녕웨(Nyungwe)에서 만난 한 중령은 “카가메를 지지한다”고 말했다. 선거가 일주일 남았지만 이미 그 한 주 전부터 ‘만일의 혼란에 대비해’ 국경 지대에 군인들이 배치돼 있었다. 키갈리에 살지만 녕웨에 배치된 그는 제노사이드 시절의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를 말하면서 “지금 우리 군대는 강하고, 규율이 잡혀 있고, 우리나라는 안전하고, 안정돼 있다”고 강조했다. 그 규율 잡힌 르완다 군대가 이웃한 콩고민주공화국으로 툭하면 넘어가서 콩고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의 천연자원을 약탈해오곤 한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지만.
카가메를 예찬하는 그가 군인 신분이라는 점을 굳이 감안할 필요는 없었다. 카가메 정부의 억압성을 비판하는 변호사 앙투안도 “부정선거는 없다, 부정을 저지를 필요조차 없다”고 담담히 말했다. 67세 카가메는 아마도 다음 대선에서도, 혹은 그 다음 대선에서도 승리할 것이다.
30년 동안 이뤄낸 르완다의 안정은 국제사회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고, 그간 서방도 이 나라에 대해서는 칭찬 일색이었다. 그러다가 최근 몇 년 사이에 카가메의 장기집권과 권위주의 통치에 대한 비판이 늘고 있던 차였다. 그렇다고 독재자라 폄하할 수는 없다. 세상 어디서든 불안보다는 안전이, 무질서보다는 질서가 낫다. 체제비판적인 앙투안에게 “다른 나라에 가서 살고 싶으냐”고 물었다. 그는 케냐에 다녀온 경험을 이야기했다. “나이로비에서는 횡단보도나 신호등이 없어서 길을 건너지 못하겠더라. 거기 가면 르완다 사람들은 아무도 길을 못 건널 거다.”
매달 한번씩 전국 마을마다 나가서 새마을운동 식의 청소를 해야 하지만, 과자봉지와 과일껍질과 콜라캔이 굴러다니는 동네에서 사는 것보다는 청소하라는 위로부터의 지시에 순응하며 사는 편이 낫다. 범죄와 유혈사태를 걱정하며 사는 것보다야 강한 군대와 결합된 권위적인 통치자가 안전을 지켜주는 곳에서 사는 게 누구에게든 낫지 않을까. 당장 이웃한 콩고민주공화국의 국경지대만 해도 벌써 30년 가까이 무장세력의 분규를 겪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카가메는 흔한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권력 찬탈자가 아니라 내전을 끝낸 영웅이다. 정부는 그것을 해방, 리버레이션이라고 부른다. 이 나라의 ‘해방 기념일’은 벨기에로부터 독립된 날이 아니라 우간다에서 훈련받은 애국전선이 들어와 키갈리의 학살을 끝낸 날이다.
시민 의식이 성숙돼 있지 않거나 건강한 야당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던 곳에 갑자기 대의민주주의를 이식했을 때 생겨나는 문제들을 우리는 안다. 2011년 ‘아랍의 봄’ 이후 이집트에서 이슬람주의 정치조직이 득세했다가 다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것, 시리아가 내전에 휩싸인 것, 리비아가 동과 서로 갈려 아직도 싸우는 것, 가뜩이나 혼란스러웠던 예멘이 더더욱 난장판이 된 것을 보았다. 하지만 시민 의식과 건전한 야당 세력은 민주주의를 통해 배워 가고 만들어 가는 것이다. 카가메 이후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한때 카가메를 도와 애국전선의 피신과 훈련을 도와줬던 우간다도 똑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우간다의 ‘빅맨’ 요웨리 무세베니는 내전을 끝내고 1986년 대통령이 돼 지금껏 집권하고 있다. 우간다에서 만난 청년 커뮤니티 활동가는 태어난 이래로 무세베니가 아닌 대통령을 본 적이 없다. 무세베니를 지지하는 그에게 “그렇다면 무세베니 이후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었다. “아들이 정권을 물려받으면 된다”고 말하는 그에게 세습은 옳지 않다는, 민주주의는 그런 게 아니라는 충고가 끼어들 틈은 없었다.
다시 르완다로 돌아가 보면, 카가메 정부의 목표는 당연히 개발과 성장이다. 한국 같은 나라가 이들의 모델이다. ‘개발독재’를 활용한 성장이 르완다에서도 가능할까? 오래 전 코트디부아르에서 만난 한국 원로 외교관과의 대화가 기억난다. 그분은 개발독재가 아닌 ‘권위주의형 성장’이라는 다소 순화된 표현을 쓰면서, 그것을 외부에 이식하거나 다른 저개발국들이 따라하는 것은 힘들다고 했다. 한국의 1960~80년대 고속성장은 세계 경제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벗어나 성장하던 시기, 글로벌 무역의 분업구조 속에 저임금 노동집약형 산업으로 자본을 축적하고 중공업으로 갈아탈 수 있었던 시기에 이뤄졌다. 이후의 저개발국들에게는 그렇게 ‘올라탈’ 수 있는 제조업의 흐름이나 성장의 물결이 별로 없다.
제조업 기반이 없는 르완다의 한계는 분명하다. 그래서 기대를 거는 것이 정보기술(IT)이다. 아프리카 대부분 지역이 마찬가지이지만, 르완다에서도 도시의 번화가가 아니면 은행 ATM을 이용하기는 힘들다. 인프라가 열악한 아프리카 국가들은 유선통신의 시대를 건너뛰고 모바일로 이동하는 ‘퀀텀점프’를 하고 있다. 그래서 ATM보다는 모바일 금융이 다른 어느 곳보다 자리잡았다. 르완다이든 우간다이든 누구나 핀테크로 돈 거래를 한다. 현금은 동네 상점에서 푼돈으로나 쓴다.
동아프리카에는 특히 케냐의 핀테크 회사 사파리컴이 만든 엠페사(Mpesa) 같은 핀테크가 외진 구석까지 속속들이 들어가 있다. 키갈리는 도시 전체에 무료 퍼블릭 와이파이가 깔려 있다. 스마트폰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걸로 치면 한국보다 르완다가 더할 듯하다. 배달앱이 인기를 끌고 식당 앞에 배달 오토바이가 줄을 서 있는 것은 한국과 똑같다.
그럼에도 아직은 저개발국인 것은 분명하다. 1인당 실질 GDP 3000달러, 그냥 저개발이 아니라 세계에서도 최빈국 가운데 하나다. 학살 당시를 담은 <호텔 르완다>라는 유명한 영화가 있는데 거기 나오는 키갈리의 호텔 이름이 밀 콜린스다. 밀 콜린스라는 영어식 발음으로 유명해졌지만 프랑스어로 ‘천 개의 언덕을 가진 나라(pays des mille collines)‘에서 따온 표현이다. 르완다는 평지가 없다. 국토 전체가 산악 고지대일 뿐 아니라, 수도 키갈리조차도 평지를 찾을 수 없는 구릉들로 이뤄져 있다. 경제 규모는 작고 산업단지를 만들 평지도 없고 더군다나 바다와 접하지 않는 내륙국가다. 영국의 개발경제학자 폴 콜리어는 아프리카 내륙의 지리적 한계를 지적하면서 ’내륙국가의 덫‘이라고 표현했다. 르완다는 그 덫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제노사이드는 재발하지 않을까. 그토록 고군분투해왔는데, 지금은 ‘그 때’와 얼마나 달라졌을까. 앙투안은 “만일 지금 갈등이 터져나온다면 부족 문제가 아니라 빈부격차 때문일 것”이라며 “10대인 내 아들만 해도 투치니 후투니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고 했다.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경제적 갈등은 너무 쉽게 남탓의 외피를 쓴다. 남의 부족 탓, 이민자 탓, 한국의 경우는 ‘여자들 탓’. 르완다 상황에 대해 긍정적, 부정적인 측면을 같이 전해준 중령님도 변호사님도 실은 모두 투치족이었다. 그들이 사회의 윗층을 구성하고 있다.
르완다 정부는 제노사이드 이후 인구 85%를 차지하는 후투와 14%인 투치, 1%인 트와를 모두 ‘바냐르완다’ 즉 ‘르완다 민족’으로 재규정했다. 그런데 부족을 구분하지 말라던 카가메 정권이 요즘 들어 제노사이드를 ‘투치에 대한 학살’로 재규정하고 있다. 투치족이 많이 희생된 것은 사실이지만 대학살에 반대한 후투족들도 목숨을 잃었고 투치족의 후투 보복학살도 있었다. 한때 비하적인 표현으로 ‘피그미’라 불렸던 트와(Twa)족은 3만명 가운데 1만 명이 희생됐다. ‘투치 대학살’로 규정되는 순간 그들의 존재는 사라지고 ‘피해자 정서’를 자극하게 된다.
무엇보다, 상처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30년이 지났다지만, 70년간 눌러놓았음에도 끝내 터져나온 옛 유고연방의 유혈 충돌을 생각해보면 낙관할 수만은 어렵다. 지난해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와, 세르비아계에 의한 학살이 벌어졌던 변경 도시 스레브레니차를 방문했다. 유서깊고 아름다운 도시 곳곳에서 불쑥불쑥 학살의 기억을 들이미는 하얀 비석들. 30년은 오랜 시간인 것 같지만 나이를 먹어본 사람들은 안다. 30년 전의 추억들도 생생하다는 것을. 그러니 가족을 잃은 그 참혹한 기억이 잊혀질 리 없다. 묻어둔 기억들은 저들의 영혼을 얼마나 파들어갔을까.
르완다는 깨끗하고 안전하고 아름다웠다. 커피는 맛있고, 사람들은 상냥했다. 내전 이후 30년, 이 나라는 힘겨운 길을 그럭저럭 잘 걸어왔다. 영국의 보수당 정권이 이주자들을 르완다로 보내버리겠다고 하자 영국 언론들은 이주자들의 인권을 걱정하며 르완다가 얼마나 열악한지를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노동당 키어 스타머 정부가 들어서면서 ‘르완다 계획’을 철회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르완다는 그런 열악한 지옥 같은 나라가 아니다.
이 나라가 이뤄낸 성취는 보기에 따라선 눈부시다. 그러나 앞으로 어디로 갈지, 아직은 모른다. 국경마을 기사쿠라에서 만난 마숨부코씨는 정규교육을 거의 못 받은 60대 남성이지만 여러 나라의 말을 했다. 관심이 많아 독학으로 외국어를 익혔다면서, 왓츠앱으로 연락하며 한국어를 가르쳐달라고 했다. 그의 가족은 흙집 안에서 낯선 이방인을 맞으며 전통 바나나술을 담그는 법을 보여줬다. 마숨부코의 아들과 손주들에게 더 나은 삶의 기회가 펼쳐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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