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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엘리엇, <대서양의 두 제국>

딸기21 2023. 1. 28.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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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양의 두 제국 - 영국령 아메리카와 에스파냐령 아메리카 1492~1830  | 트랜스라틴 총서 19
존 H. 엘리엇 (지은이), 김원중 (옮긴이). 그린비 2017-08-30

 

갈레아노의 <불의 기억>을 읽고 다른 책들도 좀 샀는데, <수탈된 대지>를 연달아 읽기 전에 오랫동안 꽂아두고 있던 이 책을 먼저 읽는 게 좋겠다 싶어 꺼내들었다. 일종의 크로스체크랄까. 결론적으로, 아주 도움이 됐다. 

 

갈레아노의 책이 '얻어맞고 억눌리고 싸운' 사람들의 이야기라면, 영국 학자 엘리엇의 이 책은 반대다.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책의 주제이자 목적은 두 제국의 지배를 받은 아메리카, 즉 미국과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적 경로가 어떻게 발전해갔으며 무엇이 그들을 다르게 만들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식민지 정복 이후 두 아메리카 세계의 궤적을 훑고, 두 아메리카가 '모국'과 맺은 관계가 어떻게 변해갔는지를 짚는다. 두 아메리카 내부의, 두 아메리카 사이의, 두 아메리카와 다른 세계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상호작용하면서 식민통치 시대를 겪었는지를 보여준다. 

 

이 책에 얻어맞고 억눌리고 싸운 사람들의 이야기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갈레아노의 책과는 정반대로 이 책에서는 '제국 체제' 혹은 제국체제에서 파생된 아메리카 지배체제, 그러니까 지배자들과 엘리트들과 제도와 기구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에스파냐와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의 역사를 연구해온 학자가, 에스파냐 정복자들이 저지른 만행과 원주민들이 겪은 참상을 모를 리는 없다. 책의 주제가 지배하는 쪽에 맞춰져 있을 뿐이다. 

 

단순한 역사서는 아니다. 본문만 1000쪽에 달하는 이 방대한 책에서 저자는 두 아메리카를 다루는 세계의 편견과 맞선다. 백인들의 역사, 백인 중심주의 편견에 맞서서 우리는 '백인들이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잔인하게 핍박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편견에도 언제나 다양한 결이 있다. '스페인은 잔인했다'라고 말할 때, 은근슬쩍 영국(+미국)의 잔인함은 가려지는 경향이 있다.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잔혹하고 무능하고 부패했던 에스파냐 제국을 비난할 때, 지금의 히스패닉 아메리카의 무능과 부패와 못남까지 뭉뚱그려 재단하게 된다. '라틴계는 게으르고 부패했다'라는 편견이 라틴아메리카(그리고 남유럽)를 바라볼 때 아직도 얼마나 위세를 떨치는가 말이다.

 

하지만 에스파냐는 에스파냐 나름의 사정이 있었고, 영국령 아메리카와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의 과거가 미래를 예정케 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여러가지 지리적, 경제적 그리고 우연적인 요인들의 결합이 결과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에스파냐와 그 아메리카 영토에 대한 18세기 유럽의 진부한 편견은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독립 이후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는 경제적 후진성과 정치적 실패의 연대기로 간주됐고 그들의 성취는 간과되고 무시됐다. 에스파냐 아메리카 제국의 폐허 위에 세워진 공화국들의 19~20세기 역사도 결함을 부각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런 결함 가운데 어떤 것들은 독립하고 나서 2세기 동안 발생한 국제적인 상황과 세계적인 힘의 균형의 산물이었고, 어떤 것들은 북아메리카인들이 영국에 대항하여 수행한 것보다 훨씬 잔혹하고 장기적이었던 독립투쟁의 생물이었다. 어떤 것들은 거의 무제한적으로 다양한 방대한 땅덩어리를 가진 지리적·환경적 특징에서 유래한 것이었으며 또 어떤 것들은 식민지 사회들과 그 지배자들의 문화적·사회적·제도적 특징에 기인한 것이었다.
에스파냐의 유산을 재난과 실패의 근본 원인으로 비난하는 것은 정복과 식민화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흑색 전설’의 대서사를 식민지 이후까지 연장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아메리카에서 에스파냐 정복자들이 자행한 만행을 중심으로 축적된 이야기들로서, 프로테스탄트 유럽이 에스파냐와 싸우는 과정에서 생겨난 강력한 반가톨릭적 요소까지 거기에 더해졌다.
-969~970쪽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이렇게 말한다.

 

에스파냐의 아메리카 제국은 단순히 국왕의 금고를 채울 귀금속을 생산하고 수출하는 메카니즘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새로 발견된 땅을 영토로 통합하기 위해 의식적이고 일관되고 중앙집권적으로 통제하려는 시도였다. 그들은 300년 동안 존속할 제국의 기구들을 만들었고 정복된 땅을 유럽의 요구에 부응하게끔 재단된 모습으로 바꾸었다.
세대가 거듭될수록 점점 더 인종적으로 복잡해져 간 이 문명은 교회와 국가라는 공통의 기구, 공통의 종교와 언어, 에스파냐의 후손으로 이루어진 엘리트층의 존재, 그리고 16세기 에스파냐 신스콜라주의 철학자들에 의해 재구성된 정치질서와 사회질서에 따라 나름 일관성을 가졌다. 공동선의 성취를 지향하는 사회에 대한 신 스콜라주의 철학자들의 유기체적 개념은 배타적이라기보다는 포괄적이었다. 
-980쪽

 


아메리카의 식민화는 다른 모든 식민화와 마찬가지로 외부로부터 수입된 태도 혹은 기술과, 대개는 매우 완고한 해당 지역의 조건 간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루이스 하츠는 1964년에 펴낸 책에서 새로 건설된 해외령 사회를 ‘서유럽 세계를 근대 세계로 바꿔놓은 혁명의 과정에서 떨어져 나온 유럽이라는 더 큰 전체의 작은 파편들’이라고 묘사한 바 있다. 식민지 사회들의 두드러진 특징은 그 사회들이 태동할 당시 모국 사회가 갖고 있던 특징들이며 모국 사회가 새로운 발전 단계로 이전해 갈 때도 식민지의 후손들은 타임캡슐에 갇혀 거기에서 쉽게 빠져 나올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하츠가 말한 부동적인 식민지 사회는 프레더릭 터너와 그 지지자들이 ‘프런티어’라는 조건에 대응하여 출연했다고 주장한 혁신적인 식민지 사회의 안티테제였다. 이 가설에서 ‘아메리카적’이란 말은 곧 북아메리카적임을 의미했다. 그러나 프런티어가 갖는 보편성은 이 가설을 어렵지 않게 다른 지역으로도 확대될 수 있게 만들었다.

-8~9쪽

 

제임스 랭은 <정복과 교역: 아메리카의 에스파냐와 잉글랜드>에서 아메리카의 에스파냐 식민지를 ‘정복 제국’으로, 영국 식민지를 ‘상업 제국’으로 정리했다. 하지만 영국령 아메리카와 에스파냐령 아메리카는 한편으로는 고립돼 있는 카리브해의 제도들과 다른 한편으로는 본토의 영토들을 포함하는 광대하고 다양한 정치체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 가운데 다수는 멀리 떨어져 있으며 기후와 지형적 차이로 날카롭게 구분된다.

유럽인들은 원주민 사회 구성원들을 ‘인디언’이라는 편리한 이름으로 뭉뚱그려 불렀지만 그 원주민들은 적어도 16세기 잉글랜드 주민과 카스티야 주민이 다른 것만큼이나 서로 달랐다. 

-13쪽

 

제국 중심부에서 나타난 이념과 관심사의 변화는 제국 정책의 변화로 나타났다. 영국령 아메리카와 에스파냐령 아메리카는 고정된 형태로 머물러 있지 않고 시간의 흐름과 함께 변해가는 정치체들이었다.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의 첫 번째 식민지가 확실하게 자리 잡은 것은 16세기 초이다. 에스파냐인들은 아메리카 정주 사업의 선구자였고 나중에 도착한 영국인들은 에스파냐인들의 선례를 참고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의 비교는 자기 안에 갇힌 두 문화 세계 간의 비교가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잘 알고 있었고 필요하다면 상대방의 생각이라도 빌릴 수 있는 두 문화 세계 간의 비교다. 에스파냐의 제국 이념이 16세기 영국인들에게 영향을 줬다면 에스파냐인들은 18세기 영국의 제국 이념을 채용하기 위해 애썼다. 이와 비슷한 과정이 식민지 사회 내에서도 일어났다.

-15쪽

 

역사적으로 카스티야와 잉글랜드는 모두 아메리카 식민화에 나서기 오래 전에 이미 원 식민 강국이었다. 중세시대 잉글랜드는 브리티시 제도 내 비잉글랜드 지역으로의 공격적인 팽창 정책을 추구했었다. 스코틀랜드인들을 상대로 한 싸움은 실패했지만 그 실패는 웨일스인들과의 싸움에서 거둔 승리로 균형이 맞춰졌다. 엘리자베스의 치세 들어 아일랜드에 대한 새로운 식민지 개척 사업이 한층 강력하게 추진됐다. 마찬가지로 레콘키스타의 땅인 중세 에스파냐에서도 정복과 식민화의 결합이 굳건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것은 주민의 대규모 이주를 포함했다. 

-69~70쪽

 

에스파냐가 영국의 해외 제국 사업에 자극을 주고 선례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지만 영국은 자신들의 뒷마당에서도 얼마든지 좋은 선례를 찾을 수 있었다. 아일랜드는 재정복된 그라나다 왕국과 마찬가지로 식민지였으며 안달루시아 지역과 마찬가지로 유용한 제국 건설의 실습장이 되어줬다. 아메리카 프로젝트를 입안하는데 가장 적극적이었던 엘리자베스 시대 인물들이 대부분 아일랜드 플랜테이션 계획에 깊이 개입한 사람들이었음은 우연이 아니다. 아일랜드에서 무역, 사략, 식민지 개척으로 사업을 시작한 소위 웨스트 컨트리 커넥션은 아메리카 정복자와 정주자들을 다수 배출한 에스파냐의 엑스트레마두라 커넥션의 영국판이라 할 만했다. 

-85~86쪽

 

에스파냐인들의 아메리카 이주는 처음부터 통제된 이주였으며 그 통제는 필요와 우선순위 변화에 따라 강화 혹은 완화됐다. 이것은 압도적으로 카스티야 주민들의 이주였으며 그 중에서도 남쪽 안달루시아 주민이 총 이주자 가운데 약 3분의 1을 차지했다. 에스파냐인이 아닌 사람들은 아메리카로의 이주에서 공식적으로는 배제됐다. 유대인, 무어인, 집시, 이단자도 인디아스에 가는 것이 금지됐다.

-149쪽

 

앵글로아메리카 세계 전역에서 대서양 횡단 이주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계약 노동자였다. 이 부자유한 백인 노동자들은 서인도제도와 체서피크의 플랜테이션 소유자들이 보다 순종적인 노동력을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에게서 발견하게 될 때까지 영국령 아메리카의 식민 사업과 개발에서 가장 중요한 노동력이었다. 

-160쪽

 

아메리카의 모든 주민들을 편의상 인디오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는 했지만 에스파냐인들은 원주민들 사이에 상당한 문화적, 인종적 차이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코르테스는 멕시코 내륙으로 진군할 때 같은 에스파냐인인 헤로니모 데 아길라르(유카탄에서 8년 동안 인디언들의 포로로 잡혀 있었기 때문에 촌탈 마야어를 유창하게 말할 수 있었다), 도냐 마리나(유명한 말린체. 마야인들과 오랫동안 같이 살아 마야어를 잘 알았으나 원래 사용하던 언어는 멕시카족의 나와어였다)로부터 언어상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우연히 공통으로 말할 줄 알았던 마야어를 통해 멕시카족의 세계와 소통할 수 있었던 것이다.

-166쪽

 

아메리카는 유럽인들, 그 중에서도 에스파냐인들에게 너무나 광범한 문화적, 사회적 차이를 보여줬기 때문에 이 놀라운 다양성의 원인이 무엇일까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과 세계 여러 민족들의 발전 단계에 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에스파냐인들이 아스테카 제국과 잉카 제국을 발견한 것은 야만성에 대한 유럽인들의 전통적인 개념에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 에스파냐인들은 항상 서로 싸우고 내적인 통일성을 갖지 못한 18개가 넘는 정치 체제로 분열돼 있는 유카탄반도의 복잡한 정치적 사회적 시스템을 발견하고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와 비슷한 통일성의 부재는 오늘날의 북부 콜롬비아 지역 여러 농업 공동체들 사이에서도 나타났다. 

후에 누에바그라나다 왕국이라고 불리게 될 이 지역의 무이스카 족은 마야족과 달리 에스파냐인들에게 저항하지 않은 온순한 부족이었다. 그러나 칠레의 아라와크 족은 끝까지 싸우려고 했고 수렵채집 생활을 하는 북부 멕시코의 치치메카족은 유럽인들의 전통적 야만인상과 완전히 일치했다.

북아메리카의 부족들 가운데에서는 미시시피 하류에 살던 내치즈 인디언의 위계적인 사회와 알공퀸어를 사용하는 포와탄 ‘제국’ 정도만이 몬테수마와 아타왈파가 다스리던 중앙집권적 정치체와 겨우 비교할 수 있을 정도의 모습을 보였다. 영국인들이 처음 정주한 지역에는 에스파냐인들이 경탄에 마지않았던 도시가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 점은 북미 원주민들이 야만인, 미개인의 이미지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171쪽

 

아메리카에서 관계의 형태는 당시 상황뿐만 아니라 과거의 경험에 의해서도 결정됐다. 중세 에스파냐의 기독교도들은 수세기 동안 이슬람 문명과 공존해왔고 신념보다는 필요성 때문에 관용이 오랫동안 우세했다. 어떤 것으로도 자신들보다 문화적으로 열등하다고 할 수 없는, 인종적으로 다른 사회를 상대로 해서 갖고 있던 장기적이고 때로 풍요롭기도 했던 상호작용의 경험을 완전히 지워버릴 수는 없었다. 

반면 중세 영국인들은 아일랜드 지배권을 확립해가는 과정에서 그곳의 낯설고 야만적인 민족에 비해 자신들이 모든 점에서 우월하다는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220~221쪽

 

아메리카 문명은 옥수수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메소아메리카와 안데스 사회가 거대한 인구를 부양하고 농업 잉여를 창출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파종량 대 수확량의 비율이 1대 60이 넘었던 옥수수 덕분이었다. 근대 초 유럽의 밀은 그 비율이 1 대 6에 불과했다.

북쪽 잉글랜드인 정주자들은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어서였겠지만 훨씬 더 높은 적응력을 보여줬다. 인디언들의 옥수수는 그들의 식단에서도 필수 요소가 됐다. 에스파냐인들의 정주지역에서는 카리브 제도를 제외하고는 방대한 규모의 땅이 밀밭으로 바뀌었다. 

소 양 말 염소 등 유럽산 가축의 도입과 급속한 번식으로 아메리카 영토는 더 극적으로 변했다. 옥수수 밭을 짓밟고 돌아다니고 인디언들의 농업에 엄청난 해를 끼쳤던 가축들의 출연은 백인 정주자들에게는 또 한 번의 기회를 제공했는데, 성장 일로에 있던 국내 시장을 염두에 두고 목축업에 뛰어들게 한 것이 그것이었다. 말과 소의 사육으로 특히 멕시코 북부와 페루의 시에라 구릉지대에 아시엔다 혹은 에스탄시아라고 알려진 대규모 영지들이 만들어졌다.

-246~247쪽 

 

진주는 베네수엘라의 쿠마나 해안에서 콜롬버스에 의해 처음 발견됐고 쿠바구아 섬의 양식장에서 체계적으로 양식됐다. 염료도 수요가 컸다. 1926년 전통적인 베네치아의 진홍색보다 훨씬 우수한 붉은색을 내는 염료 원료인 코치닐이 멕시코에서 유럽으로 처음 수출됐다. 이어서 인디고가 중아메리카의 수출 작물로 대두했다. 유럽 시장에서 팔린 다른 아메리카산 작물들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카카오였다.

구세계에서 신세계로 이식된 품목에 기반한 수출도 있었다. 가축들에게서 얻어지는 짐승 가죽과 콜롬버스가 두 번째 항해 때 에스파뇰라로 갖고 간 사탕수수가 그것이다. 1520년대 들어 에스파뇰라의 부유한 엔코멘데로들이 제당소를 만들기 시작했고 이것이 에스파냐령 앤틸리스 제도에서 발전하게 되는 플랜테이션 경제의 시작이었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설탕 생산은 아메리카 본토로 옮겨갔다. 

-250~251쪽

 

16세기 중반부터 에스코네랑 아메리카는 눈에 띄게 은에 기반을 둔 제국이 됐고 에스파냐의 인디아스 제국은 대유럽 수출 무역에서 한 가지 주력 상품인 은에 지나치게 의존적이게 됐다. 

단일 품목에 의존하는 현상은 발전 초기 단계의 다른 아메리카 식민지의 사회에서도 나타나는 독특한 현상이 됐다.

제임스타운 식민지에게는 지역 토양이 담배 경제에 적절하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돌파구가 마련됐다. 1620년대에 버지니아에서 담배 경제가 시작됐고 1630년대와 1640년대에는 새로 건설된 메릴랜드로 확대됐다. 사탕수수는 바베이도스 섬에 비슷한 효과를 가져다 줬다. 설탕 수출은 면화 수출과 함께 바베이도스를 17세기 후반 영국령 아메리카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 만들어 놓았다.

물려받은 문화적 전통, 자원의 성격, 자원의 생산 혹은 판매와 엘리트층과의 관계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서로 다른 반응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어찌 됐든 단일 자원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현상은 불가피하게 장소에 상관없이 식민지 사회에서 이제 막 생겨나고 있던 엘리트들의 생각, 태도, 행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들의 삶, 그들이 사는 사회 전체의 성격은 그 주요 작물의 생산과 소비의 변동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260~263쪽 

 

에스파냐는 잉카의 전례와 최근 발전된 에스파냐인들의 관행을 결합시켜 하나의 강제 노동 제도를 만들었다. 과거 잉카인들이 공공사업 수행에 이용했던 미타 제도를 모델로 하여 순번제로 포토시 광산에 노동력을 지속적으로 공급하게 하는 규정을 만들었다. 안데스의 성인 남성 인디언 중 7분의 1이 매년 포토시에 노동을 제공해야 했다. 미타에 동원된 인디언 노동자들, 미타요들은 쥐꼬리만한 액수이긴 했지만 임금을 받았다. 16세기 말이면 이들의 노동력을 점차 밍가라고 불리는 자발적 노동자들, 즉 돈벌이를 위해 포토시에 찾아온 사람들이 보완했다. 그러나 원주민 인구가 급속히 감소하면서 점차 노동수요를 감당할 수 없게 됐다. 유일한 해결책은 해외로부터 강제 노동력을 수입해 들여오는 것이었다.

-267~268쪽

 

가장 풍요롭고 접근 가능한 노동력 공급원은 검은 아프리카였다. 선례는 이미 있었다. 16세기 초 이베리아 반도, 특히 안달루시아와 포르투갈에는 상당수의 무어인 노예와 아프리카인 노예가 존재했다. 1510년 페르난도가 50명의 노예를 에스파뇰라 금광에 보낸 것은 당시 이베리아 반도 관행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이 무렵만 해도 신세계로 송출된 노예 대부분은 이베리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었으므로 에스파냐 말을 할 줄 알았다. 그러나 대서양 노예무역의 독점 시스템에서 발행되는 아시엔토, 즉 노예공급 계약서가 발급되면서부터는 노예들이 곧바로 아프리카에서 인디아스로 이송될 수 있게 됐다.

-270쪽

 

16세기 마지막 4반세기에 포르투갈 상인들은 라이벌인 제노바 상인들을 제치고 대서양 노예무역을 지배하게 됐다. 15세기와 16세기 초 서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포르투갈의 무역 거점들이 설치되고 리스본이 서유럽 세계에서 노예무역의 중심으로 등장한 결과였다.

포르투갈인들은 1595년부터 1640년까지 노예무역을 독점하면서 25만 명에서 30만 명의 아프리카인을 에스파냐령 아메리카로 실어 보냈는데 그중 다수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통해 비밀리에 수입됐다. 다른 수입항으로는 산토도밍고, 아바나, 베라크루스, 그리고 무엇보다도 카르타헤나가 있었다. 17세기 초에는 국제적인 대서양 노예무역 메커니즘이 이미 확실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272쪽

 

가용한 인디언 노동력도 거의 없고 압도적으로 백인들만으로 이루어진 북아메리카 사회에서 흑인들은 어떤 종류의 신분 상승 기회도 가질 수 없었다. 주인들 입장에서는 천대받는 백인 계약노동자와 노예라는 두 집단을 법적으로 좀 더 분명하게 구분함으로써 둘 사이에 동맹 관계가 생겨나는 것을 막는 것이 이익이었다. 서서히 아프리카인들에 대해 법적인 족쇄가 도입됐고 영국령 아메리카는 돌이킬 수 없이 동산 노예제가 확립되는 쪽으로 발전해 갔다. 라틴아메리카 쪽에서 흑인 노예 노동으로 작동되는 대규모 플랜테이션에서 엄청난 부가 창출된 최초의 가장 놀라운 예는 브라질이었다. 16세기 말이면 아프리카의 노동력에 의존하는 브라질은 세계 최대의 설탕 공급자가 돼 있었다.

-284~285쪽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의 아프리카 노예들은 상황이 참혹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영국령 아메리카의 노예들보다는 운신의 폭이 컸고 신분 상승의 기회도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멀리 끌려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백인들 입장에서는 인디오 원주민들보다 덜 위협적이라고 생각됐다. 그래서 아프리카의 노예들을 감시자나 도우미로 활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에스파냐령 아메리카 노예들은 역설적으로 에스파냐가 잉글랜드와 달리 오랜 노예제 경험을 갖고 있었다는 점 때문에 이득을 보기도 했다. 바로 그 경험이 적어도 사법적으로 노예의 운명을 순화시켜주는 법이나 관행을 발전시켜놨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에바에스파냐 법정에 제기된 수많은 재판 건수는 원주민들과 흑인 노예들이 에스파냐인들의 법규를 이용해 처지를 개선할 줄 알았음을 말해준다. 

아이들은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의 신분을 취하게 되므로 아프리카인 노예 아버지와 인디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삼보들은 원칙적으로 태어날 때 자유로운 신분이었다. 물론 실제로는 인디언들에게 부과되는 부역과 노동에 구속되어 있기 때문에 비참한 삶의 형태만 바뀌는 것이었다. 그래도 어쨌거나 노예제는 자연법과 상충하는 것이었으며 자연법은 히스파니아인들의 사고에 강력한 영향력을 주고 있었다. 그러므로 노예 해방은 영국령 아메리카에서보다는 에스파냐령에서 더 쉽게 획득될 수 있었다.

-288~289쪽

 

중요한 것은 아라곤이 아닌 카스티야의 것을 모델로 한 법과 제도가 아메리카에 이식되었다는 점이다. 카스티야는 이론적으로나 제도적으로 아라곤 왕국들보다는 권위주의적 왕권 행사에 대한 제동 장치를 훨씬 덜 가진 상태였다. 15세기 카스티야의 법률가들은 국왕의 절대적 권력을 주장했고 그들이 아메리카에 이식하고 싶지 않았던 기구 가운데 하나가 의회 즉 코르테스였다. 결국 아메리카에서는 끝까지 코르테스가 생겨나지 않았다. 

-316쪽

 

17세기 말이면 정복자와 피정복자라는 구분선은 인종 간의 뒤섞임으로 점차 흐려지고 있었다. 바야흐로 카스타들의 사회가 형성돼가고 있었다. 카스타라는 말은 원래 에스파냐에서 남과 구분되는 혈통의 인간 집단 혹은 동물 집단을 지칭하던 용어다. 

에스파냐 남성과 인디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메스티소들이 첫 번째 카스타였다. 여기에 곧 크리오요와 흑인 사이에 태어난 물라토, 인디언과 흑인 사이에 태어난 삼보 등 여러 카스타들이 속속 등장했다. 에스파냐 남성과 메스티소 여성(메스티사)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을 카스티소라 했고 인디언 남성과 메스티사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코요테라 불렀다. 로보(늑대, 인디언 남성과 아프리카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에게서 태어난 아이는 치노라 불렸다.

세월이 지나면서 적어도 단 몇 방울이라도 인디언 피가 섞이지 않은 크리오요는 없게 됐고 새로 아메리카에 도착한 에스파냐인들, 즉 가추핀들은 그 사실을 자주 상기시키곤 했다. 원래 이베리아에서 순혈령은 유대인과 무어인을 조상으로 둔 사람들을 배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 낙인이 인디아스에서는 인디언 혹은 아프리카인의 피에 오염된 사람들로 바뀌었다. 

그러나 카스타 사이의 차단 장벽이 결코 극복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누에바에스파냐에서 인디언 피로 인한 불명예는 피부색 질서에서 한 단계 상위에 속한 카스트 집안과 세 세대 이상 연속해서 결혼하면 제거될 수 있었다. 에스파냐인과 인디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의 불명예는 증손자대에 가면 없어졌다. 즉 에스파냐인과 인디언 여성이 낳은 아이는 메스티소이고 메스티소와 에스파냐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카스티소이며 카스티소와 에스파냐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에스파냐인이었다. 이미 16세기 말부터 정실 부인에게서 태어난 메스티소는 국왕으로부터 에스파냐인임을 인정받는 증명서를 구입할 수 있었다. 

-430~434쪽

 

‘영국의 자유’라는 개념은 상당히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고 17세기 영국의 혁명적 격변은 폭넓은 공적 논쟁을 부추겼으며 그 과정에서 영국의 대서양 공동체에서 인권에 대한 신념을 공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 북아메리카에서 투표권을 갖기 위해서는 40파운드 이상의 부동산을 소유해야 했는데 그 기준은 상당히 낮은 편이어서 매서추세츠 뉴욕 펜실베이니아의 자유 신분의 성인 남자 대부분이 별 어려움 없이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557쪽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의 모든 종교적 실험 가운데 가장 야심적인 실험은 브라질과 파라과이 간 정글 경계 지역에서 과라니족을 상대로 예수회가 펼친 실험이었다. 예수회 수사들은 에스파냐 식민 정주자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증명서를 정부로부터 획득한 다음 1609년부터 유명한 선교 마을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18세기 최전성기에 예수회는 10만 평방킬로미터 면적에 약 30개의 공동체를 만들어 15만 명 가량의 과라니족을 수용했다. 경제적으로 자급자족적이고 이웃 브라질에서 넘어오는 노예 사냥꾼 반데이란치들에 맞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조직화돼 있던 이들은 한 세기 반 동안 생존 가능한 공동체임을 입증해 보였다. 

-466쪽

 

북아메리카에서 ‘신의 섭리’라는 비전은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의 구분을 뛰어넘어 프란치스코회 수사들과 퓨리탄 모두에게 아메리카의 심판과 구원의 위대한 드라마를 위한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은 인디언의 개종을 핵심적 요소로 본 반면에 퓨리탄들의 관점은 배타적이었으며 ‘선택된 사람들의 구원’이라는 용어로 틀이 짜여져 있었다. 

-472쪽

 

인디아스가 기독교화되면서 아메리카의 도시와 마을들은 자체 수호성인을 갖게 됐다. 성상들 가운데는 1574년 멕시코시티의 수호성인이 된 로스 레메디오스의 성모상처럼 정복자들의 안장주머니에 실려 에스파냐에서 바다를 건너간 것도 있었다. 지역 인디언들에 의해 조잡하게 조각됐다가 후에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상으로 된 것도 있었는데 티티카카 호수 인근에 있는 것으로서 원래는 인디언들의 성소였다가 후에 기독교 성소로 바뀐 코파카바나의 성모 마리아상이 그런 경우였다. 

성모 마리아의 발현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1531년 후안 디에고라는 멕시코의 한 가난한 인디언에게 나타난 성모였다. 처음에는 숭배가 대체로 인디언들에게 국한됐지만 누에바에스파냐 크리오요들이 위상을 확립하려 분투하던 17세기에 그 숭배에 동참하게 됐고 이를 계기로 과달루페의 성모 마리아는 멕시코인의 열망과 멕시코인의 정체성의 상징이 되기에 이르렀다.

-491쪽

 

교회는 여러 지구에서 대규모 재산 소유자가 됐다. 식민시대가 끝날 무렵 멕시코시티의 도시 재산 가운데 47%가 교회의 수중에 있었다. 그중에서도 예수회는 가장 성공적인 토지 소유자였다. 예수회는 18세기에 추방될 무렵 아메리카에 400개가 넘는 아시엔다를 갖고 있었다. 교회의 권력과 재산의 제한이 가해지는 것은 18세기 부르봉 왕조의 개혁이 도입되고 나서였다. 그러나 교회의 재산이 부정적인 결과만을 가져오지는 않았다. 여러 교회 단체들이 식민지 재원 가운데 상당 부분을 흡수하기는 했지만 적어도 이 재원은 인디아스 밖으로 유출되지는 않았다. 

-509~511쪽

 

16세기 에스파냐가 모두가 따라야 할 모델이었다면 17세기 후반의 에스파냐는 모두가 따르지 말아야 할 반면교사였다. 에스파냐인들이 그처럼 등한시했던 교역이 영국에서는 진정한 이익에 기여하는 핵심으로 간주돼 가고 있었다. 17세기 후반 식민지 시장의 급성장과 활발해진 대서양 무역이 본국에 가져다 준 새로운 부는 수많은 경제 논문들보다 더 큰 목소리로 진실을 웅변하고 있었다. 아메리카 정주지들이 잉글랜드의 힘과 번영에 필수적인 제국의 전초기지라는 사실이 국민의 의식 속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영국 제국은 해상제국, 상업제국이 될 것이었고 그런 만큼 영국은 스스로를 에스파냐라는 육지에 기반을 둔 정복 제국의 안티테제로 생각했다. 

-550쪽

 

영국령 대서양 정치체에서는 제국적 결속이 더욱 강화돼 간 데 반해 에스파냐와 에스파냐의 인디아스 제국 간의 관계는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 차이는 17세기 후반 영국의 국력과 에스파냐의 국력이 변화해 간 서로 다른 궤적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에스파냐의 취약성을 가장 분명히 드러내준 것은 카리브의 섬들과 아메리카 본토의 몇몇 거점이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인들에 점령당한 사실이었다. 영국인들은 벨리즈와 니카라과의 모스키토 해안을, 영국-프랑스-네덜란드 세 나라는 기아나 지역을 점령했다. 유럽인들이 구축한 이 전투기지들은 해적들과 무역의 근거지가 됐다. 특히 자메이카는 해적들의 소굴이었다. 에스파냐의 앤틸리스(안티야스) 제도 섬들은 가난하고 취약한 제국의 전초기지였다 .

-556~557조

 

심각한 균열은 에스파냐 본토에서도 나타나고 있었다. 한 세기 반 동안 대 아메리카 무역의 출발점은 세비야였다. 그러나 과달키비르 강에 토사가 쌓여 항해가 어려워짐에 따라 1670년대부터 세비야가 점점 카디스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아메리카 무역에 대한 세비야 콘술라도의 독점권 상실로부터 이득을 본 사람이 프랑스, 플랑드르, 네덜란드, 영국인 상인만은 아니었다. 이미 16세기 말부터 크리오요 상인들, 특히 멕시코시티와 페루 상인들이 인디아스 무역에서 이익을 볼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아메리카에서 생산되는 점점 더 많은 양의 은이 이 크리오요들에게 강력한 힘을 안겨주고 있었으며 그 힘은 16세기 말 아카풀코와 마닐라를 오가는 태평양 횡단 루트의 개설로 더욱 강해졌다. 대아시아 무역은 크리오요 엘리트들에게 비단, 도자기, 칠기 같은 아시아산 사치품들을 제공함으로써 큰 이익을 남길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다. 이런 사치품 구입은 세비야로 운송됐을 은이 아시아의 상품 공급자들에게 돌아가게 만들었다. 

-560~561쪽

 

국왕의 재정적 어려움이 점점 더 커지면서 다수의 관직이 신설돼 매각됐다. 크리오요 엘리트들은 이 과정의 수혜자였다. 이들은 국왕의 만성적 재정난을 이용해 마드리드와의 정치적 관계에서 점차 독립적으로 되어가고 있었다. 

-566~567

 

점차 지역화돼 간 크리오요들의 아메리카 조국은 공간적으로 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자리를 잡아갔다. 수많은 인디오들의 존재, 멕시코와 안데스에 남아있는 수많은 유물들은 먼 과거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인디오들이 패배하여 이제 위험하지 않게 된 상황에서 적어도 누에바에스파냐에서는 코르테스가 멸망시킨 콜롬버스 이전의 문명 가운데 몇몇 측면을 이상화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다.

그들은 아스테카 선배들, 그리고 코르테스가 감격에 찬 어조로 기술한 위대한 페노치티틀란의 웅장한 과거를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다. 주요 건물들에 그려진, 부리에 뱀을 문 채 선인장 위에 앉아있는 독수리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점차 정복 이전 세계와 이후 세계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아스테카 역사의 일부를 골라 크리오요들의 역사에 포함시키는 과정은 1680년 시구엔사 이 공고라가 멕시코시티에 세운 개선문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개선문에는 1327년 테노치티틀란이 건설된 이후 즉위한 12명의 멕시코 황제의 상이 세워졌는데 전쟁에서 패한 몬테수마와 테노치티틀란을 수호하려다 끝내 실패한 파우테목도 함께 모셔졌다. 

-596~597쪽

 

영국령 아메리카 대부분에서는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그렇게 되지 않았다. 18세기 초 베벌리가 ‘거의 무용한’ 존재라고 간주한 버지니아의 인디언들은 멕시카 문명이 갖고 있던 위대한 고대를 갖고 있지 않았고, 뉴잉글랜드의 인디언들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너무나 가까이에 있었다. 뉴잉글랜드 영주자들에게 안전한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들 뿐이었다. 

영국인 정주자들은 인디언들의 과거가 가진 권위를 자기네 공동체에 부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다른 주장거리를 찾아내 대의명분을 유지해야 했다. 뉴잉글랜드는 ‘언덕 위의 도시’라는 사명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이 부여받은 땅을 개선하고 변화시킬 의무가 있었다. 

이는 18세기 잉글랜드의 상업적 사회 발달 이데올로기와 잘 어울렸다. 17세기 말~ 18세기 초 연국령 아메리카에서는 근면, 활동, 개선이라는 용어를 도처에서 들을 수 있었다.

-601쪽

 

1760년 여름 몬트리올의 항복으로 영국의 캐나다 정복이 완결됐다. 마르티니크 등 남아있던 프랑스령 서인도 제도도 1761~62년 영국에 함락됐다. 1759년 에스파냐에서 카를로스 3세가 즉위할 무렵이면 세계 패권의 균형추는 결정적으로 영국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부르봉 왕가는 1761년 다시 왕가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영국은 1762년 1월 에스파냐에 선제적으로 선전포고를 했다. 영국군은 18세기 전쟁의 범세계적 성격을 입증해주는 두 번에 걸친 과감한 육해군 합동 작전을 펼쳤다. 하나는 포츠머스에서 항해해 간, 그리고 북아메리카에서 온 정규군·지방군과 서인도 제도에서 합류한 영국 원정군이 아바나를 점령한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마드라스에서 필리핀 제도로 파견한 원정군이 아시아와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을 잇는 중계무역항인 마닐라를 점령한 것이었다.

하나는 멕시코만 무역, 다른 하나는 태평양 횡단 무역의 중심이던 두 항구 도시가 거의 동시에 함락된 것은 에스파냐의 위신과 사기에 치명상을 입혔다. 1763년 발효된 파리 조약으로 영국은 캐나다를 그대로 보유하되 과달루프와 마르티니크를 프랑스에게 돌려줬다. 에스파냐는 쿠바를 돌려받는 대신 플로리다를 영국에 넘겨주고 뉴펀들랜드 어장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했으며 프랑스는 동맹국인 에스파냐의 상실을 보상하는 차원에서 루이지애나를 에스파냐에 넘겨줬다(넘겨주지 않았어도 그들은 이 지역을 더는 지킬 수가 없었다). 

이렇게 프랑스가 북아메리카에서 사실상 추방된 상태에서 이제 영국과 에스파냐가 인구가 희박한 경계 지역과 광대한 인디언들의 내륙 영토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게 되었다.

-720~722쪽

 

에스파냐 장교들은 인디아스의 새로운 직업군인제를 도입했다. 그 후 20~30년 동안 군 복무에 대한 크리오요들의 태도가 바뀌었다. 식민지 명문가의 젊은이들은 에스파냐인 장교 밑에서 복무하는 것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지만 장교들에게 특권이 확산되자 점차 복무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에스파냐 같은 조합적 사회에서는 군대가 성직과 마찬가지로 자체 구성원들에 대한 사법권을 가진 독립적 집단이었다. 멕시코시티부터 산티아고데칠레에 이르기까지 대륙 전체에서 18세기 말경이면 군복을 멋지게 차려입은 크리오요 엘리트의 아들들이 아메리카 군대의 베테랑 장교단에서 반 이상을 차지하게 됐다. 이렇게 해서 18세기 말 부르봉 왕조의 군대 개혁에 의해 19~20세기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군사화의 첫 번째 씨앗이 뿌려졌다. 

-734쪽

 

1767년의 예수회 추방령은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인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상당수가 크리오요들이었던 2200명에 이르는 예수회 수사들의 강제 출국은 유명한 파라과이 인디언 공동체들을 포함해 그들이 지금까지 꾸려오던 경계 지역에 대한 산업활동의 포기를 의미했다. 또 예수회 추방은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의 교육 제도에도 대변동을 초래했다. 이곳에서 예수회가 운영하는 학교들은 수세대에 걸쳐 크리오요 엘리트들을 배출하고 있었다. 추방은 인디아스에게 헌신적인 사제와 교사들을 내쫓는 것이기도 했다. 그 가운데 다수는 자신들이 살았던 아메리카에 대한 깊은 향수를 함께 갖고 떠났다. 

그들의 갑작스러운 추방은 즉각 격렬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이 추방은 점차 속도를 더해가던 행정적, 재정적 개혁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던 크리오요 엘리트들에게는 세상이 급속히 변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755쪽

 

영국령 아메리카인들은 영국인으로서의 헌정상의 권리를 강조하면서 곁에 살고 있던 인디언과 흑인 노예들의 존재에는 눈을 감았다. 그러나 모국의 공격으로부터 조국 인디아스를 수호하려 애쓰던 크리오요들은 다른 인종, 그중에서도 다수를 이루는 원주민 혹은 혼혈인의 존재를 쉽게 무시해 버릴 수가 없었다.

-786쪽

 

안데스는 만성적으로 참혹한 세계였다. 1740년대부터 그곳에서는 끊임없는 농촌 소요가 발생했다. 1776년 대규모 행정개혁이 또 한 번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라플라타 부왕령이 신설돼 알토페루(오늘날의 볼리비아)가 페루 부왕령에서 떨어져 나와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수도로 하는 새 부왕령에 편입됐다. 포토시 광산도 새 부왕령에 편입됐다. 이는 쿠스코 지역의 경제를 크게 악화시켰다. 

호세 가브리엘 콘도르칸키가 기존 질서에 도전한 것은 이런 배경에서였다. 잉카 왕족 출신 카시케(지역 인디언 추장)의 아들로 태어나 예수회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자란 콘도르칸키는 마지막 잉카 투팍아마루의 합법적 후손임을 인정받기 위한 오랜 투쟁을 전개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 경험을 겪고 있었다. 인디언 엘리트층에 속했던 그는 리마에서 에스파냐의 제국 정책에 비판적인 크리오요, 메스티소들과 긴밀한 연계망을 구축해 놓고 있었다. 

잉카 가르실라소가 쓴 <잉카 왕실사>가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투팍아마루는 봉기를 선언하면서 안데스의 강한 문화적 자부심과 안데스인들이 공동체 의식에 호소했다. 북아메리카에서 일어난 폰티악의 폭동도 비슷한 분위기 하에서 발생한 것이었지만 델라웨어 인디언들은 기독교에 노출된 기간이나 강도의 면에서 안데스 원주민들에는 크게 못 미쳤다.

투팍아마루는 운동을 확대시키는 과정에서 서로 조화되지 않는 여러 요소들을 상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폰티악과 달리 그는 서로 다른 인디언 집단들 뿐 아니라 크리오요나 메스티소 같은 비원주민 집단들에게까지 다가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의 운동이 반 유럽적이고 반 에스파냐적인 것이었다고는 해도 그는 메스티소 뿐만 아니라 크리오요까지도 포함시키로 했으며 그의 봉기가 안데스인들의 잉카 부흥운동 개념으로 충만해 있긴 했지만 그리스도교적 색깔로 매우 강하게 덧칠돼 있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집단들 간의 동맹이었고 진정한 의미의 다인종적인 저항 운동이 아니었다. 

특히 그는 쿠스코의 옛 잉카 귀족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지 못했다. 카를 5세는 1940년대에 잉카 귀족들에게 세습 귀족 신분을 허용하는 특허장을 내줬는데 이 귀족들은 크리오요 엘리트들과 빈번히 통혼했고 잉카족 페루 영주의 후손이라는 역사적 지위에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864~868쪽

 

동맹 세력과 균열이 생기자 분노한 투팍아마루는 비인디언 지지자 보호 정책을 포기하고 반도 출신 에스파냐인, 크리오요, 메스티소, 부패한 원주민 지배자들을 즉결 처형했다. 이제 이 운동은 급속하게 피비린내나는 인종 갈등으로 변질돼 갔다. 

장교군, 수비대, 국왕을 지지하는 인디언들로 구성된 국왕군대는 쿠스코 공성을 무산시키고  1781년 4월 초 그를 체포했다. 그는 아내와 아들, 동료들이 처형되는 것을 다 지켜본 다음 쿠스코 대광장에 끌려나와 능지처참형을 당했다. 이 소름 끼치는 광경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준 데는 잉카 국왕의 죽음을 보여주려는 계산이 담겨 있었다. 

투팍아마루의 참혹한 죽음은 살아남은 부하들의 복수심을 더욱 불태우고 그 후 2년여 동안 더 넓은 산악 지역에서 야만적인 전쟁이 격화됐다. 반란의 무게 중심은 이제 티티카카 호수 지역과 알토페루로 옮겨갔다. 이곳에서는 최근 지도자 토마스 카타리를 암살로 잃은 아이마라족이 쿠스코에서 넘어온 케추아어를 사용하는 봉기자들과 합세해 라파스 공성에 나섰다. 그러나 케추아어족과 아이마라족 간의 전통적 적대감은 동맹의 균열을 가져왔고 1783년 전쟁은 국왕군의 승리로 종결됐다. 희생자 수는 인디언 10만 명과 에스파냐인 1만 명으로 추정됐는데 당시 붕괴에 휩쓸린 지역의 전체 인구는 120만 명이었다. 

과거의 질서를 회복하려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기억·꿈·기대를 가슴에 묻고 트라우마를 갖게 된 민족을 뒤에 남겼으며 그 트라우마는 식민시대 뿐 아니라 그 이후 페루의 모든 역사에 스며들게 된다. 

-870~871쪽

 

봉기의 실패는 정부의 군사력 못지않게 봉기세력의 내분, 즉 인디언과 크리오요 간 혹은 인디언과 인디언 간의 내분에 기인했다. 이 내분은 회복돼야 할 질서의 성격을 두고 나타난 갈등을 반영했다. 에스파냐인들이 일소된 세상이 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투팍아마루가 처음에 생각한 것처럼 보이는 부활한 잉카가 지배하는 인디언·메스티소·크리오요 연합국가, 그리고 거기에서 안데스인과 에스파냐인의 종교와 문화가 융합된 가운데 새로운 정의와 조화의 시대를 열어나가는 세상이 되어야 하는가를 둘러싼 갈등이었다.

-872쪽

 

영국에게 13개 식민지의 상실은 쓰디쓴 알약이었다. 그러나 그로 인한 좌절감은 캐나다와 서인도 제도, 그리고 인도와 동양에서 새롭고 더 큰 제국을 건설할 수 있다는 전망에 의해 약간은 완화될 수 있었다. 반면 에스파냐에는 아메리카를 상실했을 때 대안이 될 제국이 없었다. 멕시코와 페루의 은 없이 어떤 미래를 미래를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885쪽

 

마드리드는 제국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카를로스 3세가 1788년 프랑스 혁명 직전 죽을 때쯤이면 마드리드가 두려워했던 것이 현실화되기 시작했으니,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의 일단의 크리오요들이 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크리오요 가운데 한 명이 베네수엘라인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였다. 그는 에스파냐 군대에서 복무하면서 펜서콜라에서 영국군과 싸우기도 했고 워싱턴이 오크타운에서 콘월리스의 항복을 받아내는 과정에 도움을 제공하기도 했었다. ‘나는 그들의 독립이 틀림없이 우리의 독립의 단초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미란다의 목소리가 미래의 목소리였다면, 에스파냐가 거의 300년 동안 제국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준 갈등과 적응의 드라마가 마침내 막을 내리고 있었다. 

-888쪽

 

에스파냐는 미국 독립전쟁에 개입한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영국의 해상 봉쇄로 무역은 혼란에 빠졌다. 1788년 즉위한 카를로스 4세의 치세는 시작부터 프랑스 혁명으로 대혼란에 휩싸였다. 1793년 봄 프랑스 혁명정부는 에스파냐에 선전 포고를 했다. 전쟁은 전통적으로 에스파냐 상인들에 의해 인디아스에 재수출되던 프랑스 상품의 공급을 차단시켰으며 큰 이문을 제공해주는 에스파냐령 아메리카 시장을 영국 상인뿐만 아니라 미국 상인들에게까지 해방시켜 놓았다.

에스파냐는 1802년 루이지애나를 프랑스에 넘겨줬지만 이듬해 나폴레옹은 약속을 어기고 그 땅을 미국에 팔아넘겼다. 미국은 단번에 영토가 두 배로 늘어나게 되었고 그렇지 않아도 불안했던 에스파냐의 플로리다 지배는 더욱 취약해졌다. 루이지애나는 결국 1819년 미국에 양보됐으며 그로 인해 미국은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식민화를 시작할 수 있게 됐다.

1804년 재개된 영국과의 전쟁은 에스파냐에게는 대재난이었다. 이번에도 상황 전개의 가장 큰 수혜자는 미국의 무역업자들이었다.

-896~897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에 비해 영국령 아메리카에서 독립으로 가는 과정이 순탄했다면 거기에는 구조적 요인뿐만 아니라 우연적 요인도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 연방주의자들과 반연방주의자들이 논쟁을 벌이고 있을 때 유럽인들의 에너지와 관심은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돌려져 있었다. 나폴레옹 전쟁은 아메리카의 국제 무역 확대를 위한 밝은 전망도 가져다줬다. 유럽이 굶주린 국민들을 먹이기 위해서는 아메리카 국물을 필요로 했다는 점,그리고 남부 주들이 생산하는 면에 대한 영국의 수요가 컸다는 점은 아메리카의 상인, 농민, 농장주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다. 

에스파냐령 아메리카 공화국들이 탄생할 무렵 국제적 상황은 불리했다. 유럽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에스파냐의 대서양 무역 체계는 이미 붕괴됐고 에스파냐의 본토 경제는 ‘반도 전쟁’으로 황폐화된 상태였다. 

-959~960쪽

 

새 공화국들은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는 것을 방해하는 식민지적 유산도 떠안고 있었다. 3세기 동안 관료제적이고 개입주의적인 국가에 지배당해왔던 그들은 독립 후에도 본능적으로 자신들에게 익숙한 통치 체계를 내건하려고 했다. 이는 공화국들이 새 시대의 경제적 도전에 대응하는 능력을 감소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과도한 법령과 지나친 규제, 카스타 차별, 시대착오적인 뒤 봐주기와 네트워크에 의존하는 관행, 부패 등이 그것이었다. 

-961~9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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