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불의 기억>, 갈레아노가 들려주는 아메리카 서사시

딸기21 2023. 1. 5. 12:28
728x90

불의 기억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박병규 옮김. 따님. 

 

 

갈레아노의 <축구, 그 빛과 그림자>, <거꾸로 된 세상의 학교>, 그리고 <시간의 목소리> 모두 너무 좋았다.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불의 기억>을 읽지 않은 게 늘 아쉬웠는데 누구누구님의 뽐뿌질에 결국 넘어가 작년에 책을 샀다. 그리고 올해의 첫 책은 이걸로 정했다!

 

역사책 아닌 역사이야기, 책이라기보다는 노래이고 시이고 이야기. 처참하면서도 아름답고, 생생하다. 유럽인들의 문법대로 정리하지 않아도 '역사는 현재다'. 마음과 기억 속에 남아 있으니까. 노래와 그림 속에 살아 있으니까. 갈레아노가 보여주는 것은 그런 노래, 그런 그림들이다. 신랄함과 함께 특유의 유머가 살아 있다. 그래서 더 신랄하다.

 

"북쪽 지방의 큰 호수 옆에 살던 소녀는 문득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놀라운 세계에 눈을 뜬 소녀는 모험의 길을 떠났다." (1권 31쪽) 

 

맨 앞부분은 아메리카의 민담과 신화로 이뤄져 있는데, 이 문장이 정말 맘에 들었다. 하지만 이 소녀의 정체가 알고 보니 청개구리였다는. ㅎㅎ 

이런 이야기들 속에는 생소한 남미의 동물과 새와 식물들이 등장한다. 쥐의 밤, 맥의 밤, 타투의 밤(1권 34쪽)을 말한 것이라든가. 역시 맥은 중요하다! 그런데 타투는 새인데 어떤 새인지 잘 모르겠다. 하나 더, 아이다 부족의 토템인 까마귀는 '세상을 창조한 위대한 신의 손자'였는데 빛의 상자를 깨뜨려서 온 우주가 빛으로 가득 차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들에게도 빛은 까마귀였구나. 

딸기 이야기도 나온다. "모양도 색깔도 심장과 비슷한 진기한 과일은 이빨에 대기만 해도 단물이 터져나온다." (1권 269쪽)

 

신들은 이렇게 요구했다. 불을 갖고 싶으면 흑요석 칼로 너희들의 가슴을 갈라 심장을 바쳐라.

키체 부족은 포로들의 피를 바치고 추위를 모면했다. 카치켈 부족은 신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키체 부족과 함께 마야의 후손인 그들은 연기 속으로 살금살금 들어가 불을 훔쳐왔다. 그리고 산속 깊은 동굴에 숨겨두었다. (1권 38쪽)

 

신들은 나빴고, 카치켈 부족은 현명했다. 

 

태양의 아들 파차카막은 갓 태어난 아이의 사지를 찢어버렸다. 그는 동생의 조각난 시신을 세상에 뿌렸다. 죽은 아이의 이에서 옥수수 싹이 돋았다. 갈비뼈에서는 유카가 자라났다. 피는 땅을 기름지게 만들었고, 살덩이에서는 세상에 그늘을 주는 나무와 과일을 주는 나무가 자라났다. (1권 61쪽) 

 

"사내와 살을 맞댄 적도 없는 추장 딸의 뱃속에서 사내아이가 자랐다." 이 아이, '마니'는 "태어나고 며칠 뒤부터 말을 하고 뛰어다녔다. 마니는 아프지도 않았다. 그런데 한 살이 되자 '나는 죽을 거야' 라고 말하더니 정말 죽었다. 얼마 후 아이의 무덤에서 누구도 본 적이 없는 식물의 싹이 돋았다. 어느 날 마니가 묻힌 땅이 벌어졌다. 추장은 그 속에 손을 넣어 크고 통통한 뿌리를 꺼냈다. 돌로 찧어 반죽을 만든 다음 물기를 짜냈다. 그리고 화덕의 온기로 누구나 먹을 수 있는 빵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이 뿌리를 '마니 오카', 즉 '마니의 집'이라고 불렀다. 아마존 유역에서는 유카를 만디오카라고 한다." (1권 64쪽)

 

유카, 만디오카, 마니오카, 마니옥. 결국 다 카사바이다. 카사바 전분으로 만든 것은 타피오카인데 그러면 타피오카의 오카도 '집'이란 뜻인가? 카사바는 언제나 관심 가는 식물 혹은 먹거리이기 때문에 기록해 둠.

 

옥수수 이야기도 많이 나온다. 마야-키체 부족 신화에 따르면 신들이 처음엔 그들을 진흙으로 만들었다가 나무로 만들었다가 계속 실패해 옥수수로 빚었다고 한다. (1권 61쪽)

 

병사들은 반란에 가담한 마을의 갓 심은 옥수수밭에 불을 지른다. 가장 신성한 것을 해치는 것이다.

옥수수는 살아 있다. 불에 태우면 괴로워하고 밟으면 화를 낸다. 원주민들이 옥수수 꿈을 꾸듯이, 옥수수는 원주민 꿈을 꾼다. 옥수수는 시간과 공간을 지배하고, 옥수수 반죽에서 태어난 마야인들의 역사를 관장한다. (2권 67쪽)

 

그런가 하면 감자도 나오는데, '갈매기의 섬 칠로에의 추장'이 분별없이 신들의 사랑을 엿보려 했단다. "신들은 분별없는 추장을 땅 속에 파묻어 모두의 식량으로 만들었다. 게다가 호기심에 대한 벌로서 볼 수 없는 눈으로 온몸을 덮어버렸다."(1권 65쪽) 무심결에 넘기면서 '무슨 얘기야' 했다가 다시 앞쪽을 보니, 이야기 토막의 제목이 '감자'였다. 이런 이야기들은 정말 재미있다. 

 

용설란은 마치 칼처럼 생긴 푸른 잎 덕분에 가뭄과 우박, 멕시코 사막의 불타는 한낮과 얼음장 같은 밤을 끄떡없이 견딘다. 풀케는 '젖을 주는 나무'인 용설란으로 만든다. 용설란은 가축의 먹이가 되고 들보와 지붕널, 울타리 기둥, 땔감도 준다. 용설란의 살집 좋은 잎은 밧줄, 주머니, 깔개, 비누, 고문서의 종이를 주며 가시는 바늘과 핀을 준다.

건조한 메스키탈 계곡에서 꽃이 핀 용설란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꽃대가 올라오자마자 거세해버리기 때문이다. 꽃대가 잘린 용설란을 뒤집어놓으면 풀케가 흘러나온다. (2권 125쪽)

 

말레이의 타로, 멕시코의 용설란, 마야의 옥수수... 이런 이야기들은 흥미로우면서도 슬프다. 

 

이제 책의 본론으로 들어가서. 세 권으로 묶여 있는 책은 처절한 저항과 잔혹한 학살과 고문의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1511년, 쿠바-야라]
카리브해 섬들, 이 하느님의 땅에서는 삶보다 죽음을 택하는 원주민들이 많다. 나무에 목을 매거나 아이들과 함께 독을 마신다. 침략자들은 이처럼 처절한 저항을 막을 수는 없지만 설명할 수는 있다.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오비에도의 말에 따르면 원주민들은 "너무 미개하여 모든 것은 모든 사람의 소유라고 생각하고, 천성이 게으르고 방탕하다. 그래서 일하기가 싫어 틈만 나면 독을 마시거나 제 목을 매단다."
... 추장은 사로잡혔다. 지금 그는 통나무에 묶여 있다. 곧 재가 될 운명이다. 장박불에 삼켜지기 전에 신부가 다가온다. 추장이 묻는다.
-천국에도 기독교인들이 있는가?
-그렇다.
추장은 결코 천국에는 가지 않겠다고 한다. 장작 타는 소리가 요란하다.
(1권 101쪽)

 

불길이 타이로나 부족의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마을이 타고, 초목이 타고, 옥수수밭과 목화밭이 타고, 유카밭과 감자밭이 타고, 과수원이 탄다. 인간의 역사를 물들인 보복의 불길이 그들의 흔적을 없앤다. 75년 동안 항거해온 타이로나 부족이 뿔뿔이 흩어져 산속으로 쫓기고 있다. 이제 정복자들은 그들의 땅을 차지하고 그들의 기억을 지워버릴 것이다. 물고기도 옥수수도 없는 깊은 산속에 고립시켜, 그들이 함께 어울려 부르던 노래를 잊게 할 것이다. 그들이 화려한 문양의 무명 망토를 입고 번쩍이는 돌과 황금 목걸이로 치장하던 자유민의 강력한 공동체였다는 사실을 잊게 할 것이다. 그들의 조상이 재규어라는 사실을 다시는 기억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1권 259쪽)

 

하지만 공동의 기억은 그렇게 없애버릴 수 없는 것이다. 갈레아노가 전해주는 역사는 사람들의 몸과 기억에 새겨진 것들, 자연에 스며 있는 것들이다. 여러 구절에서 라나지트 구하의 책에 나온 타고르의 글, '경이의 순간'을 떠올리게 된다. 

 

[1524년, 과테말라-켓살테낭고]
시인은 페드로 데 알바라도 이야기를 하리라. 그리고 그와 함께 와서 공포를 가르쳐준 자들의 이야기도 하리라. ... 시인은 흘러가는 구름과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가리킬 것이다. 시인은 부는 바람에서 역사를 냄새 맡고, 강변의 조약돌에서 역사를 만지고, 잎 속의 풀잎에서 역사를 맛보는 법을 가르칠 것이다. 슬픔을 곱씹는 사람처럼,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1권 131쪽)

[1562년, 멕시코-마니]
종교재판관 디에고 데 란다가 마야인의 책들을 하나씩 불속으로 던진다. 이 저녁, 8세기에 걸친 마야의 문학이 재로 변하고 있다. 나무껍질로 만든 두루마리 책 속의 기호와 그림들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마야의 사제들은 멧돼지 털로 기호와 그림을 책장에 그려넣었다. 이 책을 읽은 후손들은 자신의 뿌리를 찾고 별의 움직임과 일식과 월식의 주기와 신들의 예언을 들었으며, 비를 부르고 좋은 옥수수를 수확할 줄 알았다.
종이로 만든 기억의 집이 불에 탈 때, 입으로 피신한 기억은 이 입에서 저 입으로 옮겨가며 인간과 신의 영광을 노래하고, 몸으로 피신한 기억은 풀피리 선율과 거북껍질과 속 빈 통나무 장단에 맞춰 춤을 출 것이다. (1권 213쪽)

 

정복자들이 저지른 폭력이 원주민들의 이야기를 없애지 못했듯이, 정복자들이 심어놓은 종교와 문화는 아메리카에서 뒤틀리고 새로 꾸며지면서 원주민들의 모습을 갖게 된다.

 

[1531년, 멕시코-멕시코시티]
빛으로 옷을 입은 여인은 후안 디에고에게 나우아틀어로 말한다. "내가 신의 어머니이니라."
수마라가 주교는 이 이야기를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주교는 스페인 국왕이 공식적으로 임명한 '원주민 보호자'이며, 동시에 원주민의 얼굴에 주인 이름을 새기는 '낙인 관리자'이다. 또한 악마의 손으로 그려졌다며 아스테카 고문서를 불 속에 던지고, 5백개의 신전과 2만개의 우상을 파괴한 인물이다.
주교는 의심을 떨쳐버리지 못하면서도, 후안 디에고가 본 것은 과달루페 성모라고 선언한다. 에스트레마두라에서 태어나 스페인의 뜨거운 햇볕에 그을린 과달루페 성모가 이제 아스테카 땅에 들어와 정복당한 자들의 어머니가 된다. (1권 139쪽)

[1583년, 볼리비아-코파카바나]
성모가 부들개지 배를 타고 티티카카 호를 건넌다. 이 성모상은 포토시의 원주민 조각가 유판키에 의해 만들어졌다. 원주민은 유럽의 모델을 그대로 따라서 그리거나 조각할 수 있을 뿐이다. 유판키도 금지 사항을 위반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포토시의 칸델라리아 성모와 똑같은 상을 조각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손은 그의 생각을 따르지 않았다. 그의 손에서 성모상의 가슴은 넓어지고 상체는 길어졌으며 다리는 짧아졌다. 또한 원주민처럼 넓은 얼굴에 두터운 입술과 상처투성이의 땅을 애처롭게 응시하는 가늘고 째진 눈을 갖게 되었다. (1권 237쪽)

 

작가가 얘기하는 '정복자들의 역사'도 흔히 포장돼 전해지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비참한 탐욕의 노예들, 흉하고 더러운 자들의 역사다.

 

[1528년 스페인-마드리드]
카를 5세는 대추나무에 연 걸리듯 빚이 많다. 카를 5세는 어금니가 아려오는 통증을 참으며, 베네수엘라를 탐험하고 약탈하고 통치하는 권한을 벨저 가문에게 양도하는 문서에 서명한다. 이후 오랫동안 베네수엘라 총독은 독일인 차지가 될 것이다. 최초의 독일인 총독 암브로시오 알핀거는 모든 원주민에게 낙인을 찍어 산타마르타, 자메이카, 산토도밍고의 노예시장에 내다팔 것이다. 그리고 목에 화살을 맞고 죽을 것이다. (1권 135쪽)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노예들은 원주민의 형제였고, 때로는 적이였고, 원주민과 함께 아메리카의 가장 비참한 존재들이었다. 16세기로 넘어오면서 대서양 노예무역의 '상품'이었던 흑인 노예들의 이야기가 원주민 이야기 못잖게 많이 등장한다.

 

[1553년, 베네수엘라-산페드로 강변]
흑인 노예 미겔의 몸은 성한 데가 없었다. 감독은 언제나 "몸으로 갚아!"라고 말했다. 또 한바탕 매질을 하려고 달려들었을 때 미겔은 칼을 빼앗아 숲속으로 숨었다. 얼마 뒤 부리아 광산의 흑인 노예들도 도망쳤다. 원주민들도 흑인 노예들과 합류했다. 이렇게 탄생한 작은 군대가 지난해 여러 광산과 새 도시 바르키시메토를 공격했다.
이후 반란군은 산속 깊숙이 들어가 산페드로 강변에 자유민의 왕국을 세웠다. 히리하라 원주민들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검게 칠해 흑인이 되어, 흑인 노예들과 함께 미겔을 왕으로 추대했다.
(1권 187쪽)

 

1603년, 세사레 리파의 <도상 해석학> 증보판이 로마에서 출판된다. 한 페이지 맨 위에 권력의 상징물들과 함께 유럽의 여왕이 자리잡고 있다. 여왕은 말과 창을 배경으로 한 손에는 신전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왕홀을 쥐고 있다.
그 아래 오른쪽에 꽃과 과일로 머리를 장식한 아시아 여인이 있다. 커피와 후추와 향을 들고 있고, 뒤에는 낙타가 앉아 기다린다. 왼쪽에 있는 아프리카 여인은 거무스름한 피부의 무어인이다. 코끼리 머리를 장식용 모자로 쓰고 있다. 가슴에는 산호 목걸이가 빛난다. 사자와 뱀, 전갈, 이삭들이 그녀 주변에 보인다.
아메리카 그림은 맨 밑에 있다. 양손에 활과 화살을 든 무서운 얼굴의 여인이다. 올리브색 살갗의 벗은 몸을 깃털로 가리고 있다. 발밑에는 도마뱀과 방금 목이 잘린 사람의 머리가 놓여 있다. (1권 266쪽)

 

당시에는 네 개의 대륙을 여성의 모습으로 묘사한 그림들이 유행했다고 한다. 1603년 세사레 리파 버전을 찾아보니 이렇다. (https://www.lehigh.edu/~ejg1/ed/fourcons.htm)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1916년, 볼리비아-포토시]
그리고 군중이 등장한다. 온갖 직종의 장인들, 남을 등쳐먹는 데는 이골이 난 건달과 거지들이 걸어온다. 이들은 성폭력의 소산인 메스티소로서 주인도 노예도 아니며 법률상 말과 무기를 소유할 수도 없다. 물라토가 걸어온다. 법은 이들의 파라솔 사용을 금지했는데, 6대까지 피를 오염시킨다는 오점을 감추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삼보(흑인과 원주민의 혼혈)를 비롯한 온갖 혼혈들이 등장한다. 이 땅에서 만들어지는 피부색은 그야말로 가지가지이다. 성체행렬의 끝에는 원주민들이 과일과 꽃과 따뜻한 음료수를 들고 따른다. 그들은 성모 앞에서 용서와 위안을 간구한다. 흑인 노예들이 멀찌감치서 쓰레기를 치우며 따라온다. (1권 284쪽)

[1618년, 아프리카-루안다]
대양을 건너는 동안 많은 노예들이 죽을 것이다. 살아남은 자들은 아메리카 노예시장에서 팔려 낙인이 찍힐 것이다. 
하지만 결코 자신들의 신을 잊지는 않을 것이다. 남자인 동시에 여자인 신 오살라는 성 제롬과 성녀 바르바라로 가장할 것이다. 오바탈라 신은 예수 그리스도가 되고, 관능의 정령이자 신선한 물의 정령인 오순은 칸델라리아 성모와 콘셉시온 성모와 카리다드 성모와 플라세레스 성모가 될 것이고, 트리니다드 섬에서는 성녀 아나가 되리라. 성 조지와 성 안토니우스와 성 미카엘 뒤에서는 전쟁의 신 오굼의 창이 번쩍이고, 성 나사로의 가면을 쓰고 바바루 신이 노래할 것이다. 천둥과 불의 신 상고는 사도 요한과 성녀 바르바라로 모습을 바꿀 것이다. 엘레구아 신은 쿠바에서도 삶과 죽음의 두 얼굴을 가질 것이며, 에수는 브라질 남부에서 신과 악마의 두 머리를 가지고 위안과 복수를 베풀 것이다. (1권 290쪽)

[1663년, 브라질-바리가 산맥]
포르투갈인들은 바리가 산맥 기슭에 살고 있던 카에테 원주민을 전멸시켰다. 이제 이곳 팔마레스는 도망한 흑인 노예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앙골라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야자수가 식물의 왕이다. 야자수의 섬유질로 옷과 바구니와 부채를 만들고, 잎으로 지붕을 얹거나 잠자리를 만든다. 열매의 살은 그냥 먹거나 술을 빚으며, 등불 기름을 뽑아내기도 한다. 열매 껍질로는 요리 기름을 짜거나 담배 파이프를 만든다.
팔마레스의 흑인들은 출신 지역도 사용 언어도 서로 다르다. 유일한 공용어는 노예선과 사탕수수밭에서 채찍질과 함께 주인들 입에서 뱉어지던 말이다. 지금 팔마레스의 주민들은 아프리카 말들과 과라니어를 섞어 쓰기도 하지만, 그들에게 굴욕을 안겨주었던 포르투갈어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1권 396~397쪽)

[1677년, 앤티가바부다-올드로드]
아는 것이 많은 꿈꾸는 영혼은 알고 있다. 아메리카에서 죽은 흑인은 아프리카에서 부활한다는 사실을. 이 섬의 수많은 흑인 노예들은 아무 것도 먹지 않고 혹은 흙이나 재나 석회만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제 목을 매달기도 한다. 죽는 순간 그들은 하얀 카누를 타고 조상의 땅을 향해 긴 여행을 떠난다.
부리오라는 농장주가 마체테를 쥐고 숲속을 돌아다니며 목을 매단 노예들의 목을 자른다. "목을 매달고 싶으면 매달아라. 하지만 머리는 못 가져간다. 그러니 너희는 고향 땅에 가더라도 머리가 없으니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먹지도 못할 것이다."
또다른 농장주 크립은 잔인하기로 이름난 자인데, 사탕수수 압착기 따위를 수레에 싣고 다닌다. 그리고 한군데 모여서 매듭을 만들고 목을 맬 나뭇가지를 고르고 있는 노예들을 찾으면 말한다. "계속해라. 나도 함께 죽어 너희들을 따라가겠다. 아프리카에 커다란 설탕공장을 사놓았으니, 그곳에서도 너희들은 나를 위해 일해야 한다." (1권 376쪽)

언제나 승자에게만 입술을 허락하는 장밋빛 베일의 귀부인인 역사는 많은 것을 감추리라. 그리하여 브라질 흑인 노예들은 유순하고 쉽게 체념했다고, 심지어는 행복했다고 거짓말을 늘어놓을 것이다.
... 북이 울어대며 아프리카의 늙은 신들을 깨운다. 신들은 길잃은 후손들의 부름을 따라 유형의 이 땅까지 날아와 그들의 몸속으로 들어간다. 그리하여 사랑을 하게 하고, 음악과 환희의 아우성을 이끌어내고, 망가진 삶을 온전하게 만들어준다.
나이지리아와 다호메이에서는 여자의 다산과 땅의 풍요를 빌기 위해 북을 친다. 브라질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이곳 여자들은 노예를 낳으며, 땅은 노예를 잡아먹는다. 이곳에서 울리는 북소리는 풍요가 아니라 복수를 열망한다. (2권 69쪽)

 

정복자들이 원한 것은 금이었고, 가져간 것은 금과 은이었다.

 

[1599년, 파나마-차그레스 강]
이 길은 세상에서 가장 반짝이는 길이다.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이어진 긴 은사(銀絲)의 길이다. 끝없는 노새 행렬이 밀림을 지나간다. 포토시의 은을 등짝이 휘게 지고, 포르토벨로 항구에서 기다리는 갤리언선을 향해 가는 중이다.
오카냐 신부는 차그레스 강변에서 원숭이들을 바라보며 감탄한다. 짐을 나르는 페루 원주민이 오카냐 신부에게 다가와서 말한다. "신부님, 쟤들은 사람입니다. 스페인인들이 알까봐 말을 하지 않을 뿐입니다. 사람인 줄 알면 광산에서 일을 시킬 게 아닙니까?" (1권 256쪽)

 

정복자들의 종이 된 잉카의 후예들.

 

[1588년, 에콰도르-키토]

산프란시스코 교회 안의 설교대 옆 영광의 자리에 아타왈파 황제 가족의 제단이 있다. 그 밑에 망자들이 잠들어 있다. 자신의 아버지와, 또 그 아버지를 죽인 자와 같은 이름을 가진 프란시스코 아타왈파가 한가운데에 묻혀 있다. 그는 스페인군의 대위로서 남쪽지방의 원주민 반란을 진압하고, 카냐리밤바와 쿠예스 부족의 추장들을 사로잡아 키토로 압송했다. 그 공로로 키토 시의 공공사업 책임자가 되었다. 
톨레도 시의 조각가 후안 바우티스타 바스케스가 만든 성 카탈리나의 상은 아타왈파 황제의 손자이자 프란시스코 대위의 아들인 알론소 아타왈파가 스페인에서 보내왔다. 하지만 알론소는 성녀상이 바다를 건너는 동안 마드리드에서 죽었다. 
아타왈파 황제의 손자는 감옥에서 죽었다. 하프와 바이올린과 클라비코드를 즐겨 연주하고, 최고의 재단사가 만든 스페인 옷만 입는 그였지만 오랫동안 집세도 내지 못했다. 귀족은 빚을 갚지 못해도 감옥에 보내지 않는 것이 관례인데도 그는 재단사와 보석상과 모자상의 고발로 감방에 갇히고 말았다. 지금 그의 가족이 황금으로 치장된 재단에 안치하는 성상의 제작비도 지불하지 않았다. (1권 244쪽)

 

야마는 온순하면서도 노새보다 민첩하며 높은 산도 잘 오른다. 추위도 잘 견디고 여간해선 지치지도 않으며 무거운 짐도 쉽게 옮긴다. 산속에 사는 원주민들에게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젖과 고기와 멋진 털을 선사하고 훌륭한 운송수단이 되어준다. 그러나 묶이는 것을 싫어하고 함부로 대하는 것도 싫어한다. 강압적인 명령은 듣지 않는다. 야마가 우아한 발걸음을 멈추면 원주민들은 야마에게 사정한다. 때리거나 욕을 하거나 위협하면 땅바닥에 누워 긴 목을 빼고, 신의 창조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눈으로 하늘을 치켜보며 소리없이 숨을 거둔다. (2권 232쪽)

 

리베라 장군이 이끄는 기병대는 케우가이 곶에서 정확한 사격 솜씨로 문명화 사업을 완수하였다. 이제 우루과이에 살아남은 원주민은 한명도 없다. 우루과이 정부는 차루아 부족의 마지막 생존자 4명을 파리의 자연사 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들은 여행가방과 짐들과 함께 화물칸에 실려 바다를 건넜다. 프랑스 사람들은 입장료를 지불하고 멸종위기에 처한 희귀종인 이 야만인들을 구경한다. 과학자들은 그들의 행동과 습관을 관찰하고 신체의 치수를 잰다. 두 달도 지나지 않아서 원주민들은 죽었다. 스스로 매일 조금씩 죽어가서 숨을 거뒀다. (2권 233쪽)

 

억압의 역사는 뒤집으면 곧 저항의 역사다. 원주민들의 역사는 야마의 역사다.

 

[1599년, 칠레-라임페리알]
식민지 통치자들은 이그나시오 데 로욜라의 조카 마르틴을 칠레 총독으로 임명하여 이곳으로 보냈다. 열광적인 사냥꾼이고 제일의 살인자이며 페루에서는 잉카 제국의 마지막 황제 투팍 아마루를 사로잡아 이름을 떨친 그는 칠레에 도착하자마자 원주민을 학살하고, 양을 빼앗고, 농작물을 보조리 불태웠다.
지금 아라우코 부족이 마르틴의 머리를 창에 꿰어들고 거리를 행진한다. 전쟁 가면을 쓰고 가죽 갑옷을 입은 아라우코 기마병들이 칠레 남부를 휩쓸고 있다. 원주민들은 창을 가리키며 말한다. "이것이 내 주인이다. 금을 캐오라고 명령하지도 않고, 장작을 해오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가축을 돌보라고 씨앗을 뿌리라고 수확을 하라고 다그치지도 않는다. 이 주인과 함께 살고 싶다." (1권 257쪽)

 

환영은 고통은 아니었지만 아프게 했고, 죽음은 아니었지만 죽음으로 이끌었다. '양심'이라고 부르는 이 환영은 정복자들 가슴에서 태어나 패자의 복수를 했다. (1권 76쪽)

 

멀리 유럽에서 온 정복자들에게 양심이라는 환영은 별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래도 숨쉬는 양심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정복자들의 '양심'이었던 사람들의 이야기.

 

[1566년, 스페인-마드리드]
라스 카사스 신부가 입술을 달싹거린다. 신부는 최후의 심판에서 자비를 베풀어주기를 주님께 빈다. 한때, 그는 식민지 개척자들이 흑인과 무어인 노예를 부리면 원주민의 처지가 나아질 것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어두운 그의 귀에도 지금 마드리드의 아토차 수도원 지붕을 두들기는 빗방울 소리가 또렷하게 들린다. 신부는 의심과 고뇌를 떨쳐버리고 빗속으로 마지막 여행을 떠나고 있다. 그가 행복을 알았던 녹색의 세계, 인디아스로 떠나고 있다. 야자수잎 지붕에 부딪쳐 튀기는 빗방울을 맞으며 개똥벌레 불빛 아래서 기도서를 읽으며 말한다. 감사합니다 주님. 벽 없는 헛간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강에서 벌거벗은 아이에게 세례를 주면서 말한다. 감사합니다, 주님. 
사제들이 성호를 긋는다. 모래시계의 마지막 모래가 떨어진다. 누군가가 다시 뒤집어놓는다. 시간이 고이지 않도록. (1권 222쪽)

[1767년, 아르헨티나-미시오네스]
스페인 국왕은 장인인 포르투갈 국왕에게 일곱 마을을 품은 푸른 땅을 선물로 주었다. 그 일곱 마을은 우루과이 강 상류 동쪽 예수회 신부들이 설립한 과라니 원주민 선교공동체들이다. 원주민들은 떠나기를 거부했다. 그들 곁에 예수회 신부들이 있다는 사실은 세상이 다 안다. 예수회 신부들은 원주민들을 희생물로 바치려 하지 않는다.
마드리드에서 밀랍으로 봉인된 명령서가 도착한다. 한밤중에 들이닥쳐서 예수회 신부를 포박하고 지체없이 배에 실어 이탈리아로 보낸다. 2천 명도 넘는 예수회 사제들이 추방된다. 스페인 국왕이 로욜라의 아들들을 징계하는 것이다. 이제는 로욜라의 아들이라기보다는 아메리카의 아들이 되어버린 사제들의 죄목은, 원주민 독립왕국을 수립할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다. 과라니족만큼 이를 슬퍼한 사람들은 없다. 과라니족은 신부들을 '카라이'라고 불렀는데, 과라니어로 '선지자'라는 뜻이다. (2권 79쪽)

 

1권이 정복자들의 시대를 다뤘다면 2권은 볼리바르 시대의 이야기들이다. 

 

시몬 로드리게스와 시몬 볼리바르. 

[1796년, 베네수엘라-산 마테오]
루소의 애독자인 스물 다섯의 시몬 로드리게스는 혼혈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학교를 개방하고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함께 수업을 받게 해야 하며, 신사나 사제보다는 미장공, 철공, 목수를 양성하는 것이 국가에 훨씬 이익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제자인 시몬 볼리바르는 열세 살의 베네수엘라 최고 갑부다. 어려서 부모를 잃은 볼리바르는 대저택과 농장들과 함께 천 명이 넘는 흑인 노예도 물려받았다.
시몬 선생과 시몬 학생은 들판에서 자고 여행을 하면서 베네수엘라 땅 구석구석에 대해 함께 배운다. 두 사람은 들불 아래서 <로빈슨 크루소>와 플루타르크의 <영웅전>을 읽고 토론한다. (2권 145쪽)

[1804년, 프랑스-파리]
프랑스인을 증오했던 포병 소위 나폴레옹이 나폴레옹 1세로 등극한다. 노트르담 사원은 초대객들로 넘쳐난다. 그들 가운데 눈 앞에 펼쳐지는 장면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으려고 목을 길게 빼고 있는 베네수엘라 청년이 있다. 스무 살의 시몬 볼리바르는 얼마 전 파리의 한 살롱에서 훔볼트를 만났다. 아메리카 여행에서 갓 돌아온 모험의 현자는 볼리바르에게 말했다. "당신의 나라는 독립이 무르익었지만 저는 그것을 이끌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2권 165쪽)

 

[1810년, 멕시코-아토토닐코]
미겔 이달고 신부는 교회에서 가져온 과달루페 성모의 그림을 창끝에 묶는다. 혁명의 열기와 종교의 열정이 합쳐진다. 멕시코의 과달루페 성모가 스페인의 레메디오스 성모에게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원주민의 성모가 백인 성모에게 도전한 것이다.
멕시코인의 어머니요 여왕인 과달루페 성모는 가브리엘 대천사의 도움으로 테페약 언덕에 성모의 모습으로 나타나기 전까지는 아스테카인들이 토난친(우리 어머니)이라고 부르던 여신이었다. 이제 과달루페 성모는 멕시코의 독립을 위해 피바람을 거슬러 전진한다. (2권 170쪽)

 

스페인은 약해지고 식민지들은 하나둘 독립하지만 어느 하나 순탄한 게 없다. 순탄하기는커녕, 영국과 미국이라는 새 세력의 그늘이 드리워진다.

 

[1825년, 볼리비아-포토시]
독립국으로 새로 태어난 스페인 식민지들은 허리도 펴지 못한다. 태어나자마자 목에 매달린 무거운 바위를 끌고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바위는 갈수록 무거워져서 숨통을 조인다. 무기와 병력지원 형태로 영국에 진 빚이 고리대금없자와 상인들의 농간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스페인의 재정복을 두려워하는 신생국들에게는 영국의 국가승인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러나 영국은 자국 공산품의 자유로운 시장을 보장하는 통상우호조약을 맺기 전에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스페인 사람보다 더 가증스러운 것이 외채입니다." 볼리바르는 콜롬비아의 산탄데르 장군에게 편지를 쓴다. 그리고 빚을 갚기 위해 250만 페소를 받고 포토시 광산을 영국인에게 팔았다고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값비싼 포토시 광산은 이제 '포토시, 라파스, 페루 광산협회'라는 영국의 유령회사 소유가 되었다. (2권 213쪽)

[1830년, 베네수엘라-라 과이라]
시몬 볼리바르는 12월 17일에 숨을 거뒀다. 바로 11년 전 그날, 그는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를 합병하여 대콜롬비아 공화국을 탄생시켰다. 뒤이어 에콰도르와 파나마를 품에 안아 광대한 영토를 자랑했던 대콜롬비아 공화국이 이제 시몬 볼리바르의 죽음과 함께 막을 내린다. 
리마 주재 미국 영사 윌리엄 튜더는 볼리바르가 주장하는 노예해방이 미국 남부에 끼칠 악영향뿐만 아니라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아메리카 국가들의 힘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우려했다. 그리고 "미국과 영국은 새로운 강대국의 등장을 저지해야 하는 분명한 이유를 공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영국 제독 플레밍은 발렌시아와 카르타헤나를 부지런히 오가며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의 결별을 부채질했다. (2권 228쪽)

[1848년, 멕시코-과달루페 이달고 마을]
워싱턴의 폴크 대통령은 이제 미국의 영토가 유럽만큼 넓다고 선언한다. 누구도 이 탐욕스러운 젊은 국가의 침략을 저지할 수 없다. 돈도 그들이 가진 무기의 하나이다. 나폴레옹에게서 루이지애나를 샀고, 쿠바를 1억달러에 팔라고 스페인을 유혹하고 있다. 
그러나 정복이 더 영광스럽고 비용도 덜 든다. 미국은 과달루페 이달고 마을에서 멕시코와 조약을 맺는다. 멕시코는 가슴에 총을 들이댄 미국에 영토의 절반을 건네준다. (2권 256쪽)

[1848년, 멕시코-멕시코시티]
멕시코시티의 대광장에서 정복자들이 벌을 나누어준다. 배반자 아일랜드 병사들의 얼굴을 벌겋게 달군 인두로 지진 뒤 목을 매단다. 아일랜드 출신 병사들로 이뤄진 성패트릭 부대는 미국 침략자들과 함께 멕시코에 왔다. 그러나 멕시코를 위해 싸웠다. 얼굴이 불탄 포로들이 교수대에 매달린 채 건들거린다. (2권 257쪽)

[1856년, 니카라과-그라나다]
미국 남부의 신사 윌리엄 워커가 니카라과 대통령에 취임한다. 워커는 지난해 '불사신 부대'를 이끌고 니카라과에 도착했다. 샌프란시스코와 뉴올리언스 부두에서 모집한 해적들로 이뤄진 그의 군대는 살을 파고드는 칼처럼 니카라과로 진입했다. 워커는 이미 30년 전에 폐지된 노예제도를 복원하고 노예매매와 강제노역을 부활시킨다. 그리고 영어를 니카라과의 공식 언어로 선포했다. (2권 284쪽)

 

제 갈 길을 가려 했던 나라들은 모두 새 제국주의 세력의 타깃이 된다.

 

[1865년, 아르헨티나-부에노스아이레스]
연이어 절대권력을 행사한 가스파르 로드리게스 데 프란시아, 카를로스 안토니오 로페스와 그의 아들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 치하의 파라과이는 대표적인 위험 국가로 낙인이 찍혔다. 파라과이에는 명령하는 지주도 투기를 일삼는 상인도 사람의 숨통을 조이는 고리대금업자도 없다. 외국 자본이나 세계 시장에 종속되지도 않았다. 외세의 올가미에 얽매인 이웃 국가들과 달리 파라과이는 빚 한푼 없이 제 발로 걸어간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재 영국 대사 에드워드 손톤이 액막이 의식을 집전하는 최고위 사제다.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우루과이는 거만한 파라과이의 가슴에 총검을 꽂아 악마를 축출할 것이다.
... 파라과이와의 전쟁은 흡혈귀 같은 항구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지방반군 사이에 반세기 동안이나 지속된 전쟁의 연장선 위에 있다. 우루과이 출신 베나시오 플로레스는 아르헨티나 대통령 사르미엔토가 가우초 반군을 궤멸시키도록 도운 보상으로 우루과이 대통령이 됐다. 브라질 함대와 아르헨티나의 무기가 플로레스를 권좌에 앉혔다.
이렇게 해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동맹이 이제 '3국 동맹'이 되었다. 영국의 지지와 차관을 바탕으로 3국은 파라과이를 악마로부터 구원하기로 합의하고 협정에 서명했다. 이 전쟁은 자유의 이름으로 치러질 것이다. 2백만 명의 흑인 노예를 부리는 브라질이 노예 한 명 없는 파라과이의 자유를 약속한 것이다. (2권 303~304쪽)

파라과이는 절멸했지만 말은 살아남았다. 원주민의 말 과라니어는 신비한 힘을 지니고 있다. 정복당한 자들의 언어가 정복자들을 정복했다. 경멸과 금지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이 나라의 첫째 언어이고, 법이야 어떻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 땅에서는 언제까지나 모기를 '악마의 손톱'이라고 부르고, 잠자리를 '악마의 조랑말'이라고 부를 것이다. 별은 '달의 불꽃'이고 황혼은 '밤의 입'일 것이다. 
전쟁 중에도 파라과이 병사들은 과라니어로 암호를 만들고 서로를 격려하며 노래를 불렀다. 지금도 죽은 자들은 과라니어로 침묵을 지키고 있다. (2권 318쪽)

호세 마누엘 발마세다 대통령은 국내산업을 육성하여 "스스로 생산한 것으로 살아가는 칠레"를 만들려고 했다. 초석 시대는 칠레에 회한밖에 남기지 않으리라고 내다본 것이다. 노동자들의 임금을 인상하고, 전국에 학교를 세웠다. 철도와 도로를 건설하여 길다랗게 생긴 칠레 땅에 대동맥을 심었다. 철도를 국유화하고 은행의 터무니없는 금리와 초석 회사들의 탐욕에 종지부를 찍으려고 했고, 이에 신성한 영국 자본은 모욕과 함께 위협을 느꼈다.
존 토머스 노스가 양심을 매수하고 정의를 왜곡하는 데 쏟아부은 막대한 자금이 큰 힘을 발휘했다. <사우스아메리카저널>이 쿠데타의 성공을 알린다. 은행가 에두아르도 마테가 쿠데타를 축하한다. "칠레의 주인은 자본과 땅을 가진 바로 우리들이다. 나머지 모두는 우리가 조종하고 팔 수도 있는 자들이다." 발마세다는 총으로 자신의 목숨을 끊었다. (2권 357쪽)

 

과라니가 죽어서도 과라니어로 침묵할 때, 쿠바 동쪽 밀림에서는 '맘비'들이 싸운다. "바다 건너 콩고에서는 산적이나 반란자를 가리키는 맘비가 이곳에서는 인간이 되기 위해 투쟁하는 노예를 일컫는 말이 되었다."(2권 326쪽)

 

이제 광산의 시대는 거의 끝나고 환금작물의 시대로 바뀐다. 

 

세계 시장에 인조 염료가 확산되고 있어서 과테말라가 수출하는 연지와 쪽과 양홍을 구입하는 사람은 이제 없다. 지금은 커피의 시대이다. 시장은 커피를 요구하고 커피는 땅과 일손과 기차와 항구를 요구한다. 자유주의를 내세운 정권이 원주민을 국가에 통합시킨다는 명분 아래 그들을 커피 농장의 노예로 만든다. 식민시대의 강제노동이 부활한 것이다. 병사들이 커피 농장을 돌아다니며 원주민들을 나누어 준다. (2권 334쪽)

런던 시장에서 소고기 수요가 폭발하고 이와 함께 아르헨티나 변경도 폭발한다. 팜파스의 대농장을 남쪽과 서쪽으로 확장하기 위해 광대한 공간을 청소한다. 훌리오 아르헨티노 로카 장군은 파타고니아의 촌락을 불태우고 원주민과 타조를 사격 연습하듯 쏘아죽임으로써 파라과의 침략 전쟁과 가우초 학살 전쟁에서 얻은 명성을 더욱 빛낸다. (2권 335쪽)

잉카인들은 구아노가 죽은 땅도 살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유럽인들은 훔볼트가 구아노를 유럽에 가져 가기 전까지는 땅이 기름진 이유를 알지 못했다.
악취나는 구아노를 가득 싣고 유럽으로 떠난 배들은 리마의 산책로를 장식할 이탈리아 카라라산 대리석으로 만든 조상들을 실어왔다. 또 영국산 천과 보르도산 포도주도 실어왔고, 이 때문에 남부 산악지대의 직물산업과 모케과의 양조산업이 무너졌다. 집들이 통째로 런던에서 수입되고, 호텔도 요리사까지 곁들여서 통째로 파리에서 수입되었다. 40년이 지나자 친차 섬들은 평평해졌다. 페루는 1천2백만 톤의 구아노를 팔아 번 돈의 두배를 사치품을 수입하는 데 썼다. 남은 것은 빚뿐이다. (2권 338쪽)

[1896년, 브라질-마나우스]
원주민들은 카우초, '눈물을 흘리는 나무'라고 부른다. 이 나무에 칼집을 내면 젖이 맺히기 때문이다. 깔대기 모양으로 접은 바나나 잎에 받아서 햇빛이나 연기에 굳혀가며 형태를 만든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원주민들은 이 야생 젖으로 오래가는 횃불과 깨지지 않는 그릇을 만들었고, 빗물을 비웃는 지붕과 통통 튀며 날아다니는 공을 만들었다.
반세기 전 찰스 굿이어와 토머스 핸코크가 고무를 부서지지도 물러지지도 않게 하는 방법을 찾기 전에는 수많은 신발이 아마존 정글에서 보스턴 항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들의 발견과 함께 미국은 추위와 습기와 눈에서도 끄떡이 없는 신발을 한 해에 500만 켤레나 생산하기 시작했다. 현대 생활은 상처를 입으며 눈물을 흘리는 거대한 나무를 중심으로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다.
원숭이와 미치광이들의 세상으로 여겨지던 환상의 아마존 정글이 이제 '유나이티드 스트리츠 고무회사'와 '아마존 고무회사' 같은 외국 기업들의 사냥터가 되었다.
마나우스와 벨렝은 브라질의 고무 도시이다. 페루 쪽 아마존의 고무도시로는 이키토스가 있다. 이 세 아마존 도시의 거리는 유럽에서 수입한 포석으로 덮여 있고 밤이면 파리와 부다페스트 바그다드와 인근에서 온 몸파는 아가씨들로 넘친다. 누가 숲에서 고무를 채취할까. 브라질 북동부에서 온 농부들이다. 그들은 계약과 함께 푸른 감옥에 갇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음으로써 노예 신세와 지독한 고립에서 벗어난다. 페루의 고무 채취 노동자는 원주민이다. 영원할 것 같았던 고무의 황금 시대에 페루의 많은 원주민 부족이 전멸했다. (2권 374~375쪽) 

 

아마존에서 아시아로 건너간 고무시대에 관해서는 <사라진 버려진 남겨진> 쓰면서 정리했던 포드란자에 관한 글 참고. 아시아 고무시대에 대한 설명은 강희정 선배의 <아편과 깡통의 궁전>에 잘 나와 있고.

 

커피의 시대, 담배의 시대. 미국의 담배공장에서 노동자를 학습시키는 호세 마르티.

피델 카스트로가 그 유명한 재판에서 최후진술을 하면서 얘기한 마르티. 

 

피델 카스트로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

 

호세 마르티

마르티는 혁명 없이는 쿠바를 바로 세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3년 전 그는 플로리다 해안에서 '쿠바 혁명당'을 만들었다. 이 당은 탐파와 키웨스트의 담배공장들에서 태어났다. 담배공장들은 노동자 대학교가 되었다. 항상 누군가가 읽어주는 책이나 글을 들으며 노동자들은 조용히 일한다. 그들은 매일 새로운 사상과 소식을 접하고, 세계의 역사와 놀라운 상상의 공간을 여행한다. (2권 365쪽)

모두 짐을 지고 산을 오를 때 마르티는 자주 넘어졌습니다. 내가 일으켜주려고 할 때마다 그는 "됐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발목에는 어렸을 때 스페인 사람들이 채웠던 족쇄의 깊은 자국이 남아 있었어요. (2권 368쪽)

"미국이 앤틸리스 제도까지 진출하여 엄청난 힘으로 우리 아메리카를 짓밟지 못하도록 빨리 쿠바의 독립을 이루는 것이 나의 의무입니다." 호세 마르티는 피를 쏟는 심정으로 쓴다. "아메리카 민중이 그들을 경멸하는 난폭하고 잔인한 미국의 손아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쿠바인들이 싸우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메리카 민중의 생사를 가르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패배는 있을 수 없습니다." (2권 368쪽) 

 

학자들, 그 밖의 사람들.

 

[1801년, 콜롬비아-과타비타 호수]
훔볼트와 봉플랑은 엘도라도 호수의 신비를 푼다. 두 사람은 원주민들이 '금빛 산'이라고 부르는 산의 반짝이는 운모에서 환각을 야기하는 성분을 발견했다. 또 우기에는 물이 불어나 오리노코 강 발원지 인근의 드넓은 평원을 뒤덮었다가 우기가 그치면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작은 호수가 있다는 것도 알아냈다. 훔볼트와 봉플랑은 노새와 카누를 번갈아 타고 여행한 끝에 신성한 과타비타 호수에 도착한다. 이 호수 밑바닥에 무이스카 부족의 보물이 잠자고 있다. (2권 157쪽)

 

책에는 마르크스의 사위 폴 라파르그의 이야기도 나온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즐겁게 읽은 기억이 있는지라. "젊은 라파르그와 마르크스는 서로 싸우고 또 좋아했다. 이제 마르크스의 첫 손자가 태어난다. 아이티 흑인 여자와 자메이카 원주민의 증손자이기도 하다." (2권 315쪽)

 

고갱의 할머니 플로라 트리스탄 얘기도. 

 

폴 고갱은 마지막으로 절망의 손으로 이렇게 쓴다. "우리는 무엇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반세기 전, 고갱의 할머니 플로라 트리스탄도 자신의 책에서 같은 물음을 던졌고, 답을 찾다가 죽었다. 페루의 그녀 집안에서는 결코 그녀의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플로라 트리스탄은 혁명을 전파하는 데 짧은 삶을 바쳤다.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아버지와 고용주의 남편의 노예가 된 여성들의 혁명을 외치다가 프랑스에서 숨을 거뒀다. 보르도의 노동자들이 관값을 지불하고 그녀를 공동묘지에 묻었다. (2권 372쪽)

 

3권은 20세기의 이야기들이다. 많이 아는 내용들이지만 다시 많이 마음이 아프다. 작물의 시대는 석유의 시대와 공존하기 시작했고, 역사는 계속 반복된다. 미국에 밉보이면 죽음. 자본가들과 독재권력에 밉보이면 학살. 

 

[1913년, 멕시코-멕시코시티]
대통령 마데로가 지금까지 성역에 머물러온 석유회사들에게 아주 가벼운 세금을 부과하자 미국 전함이 멕시코 항구들로 향하고 있다는 미국 대사의 공표와 함께 우에르타가 반란을 일으켜 국민궁전을 공격한다. 담배연기 자욱한 미국 대사관 응접실에서 멕시코의 운명이 논의된다. 마데로를 차에 태워 멕시코시티를 떠나라고 명령한 다음 그의 차가 출발하자 집중사격하여 벌집을 만들어버린다. 새 대통령 우에르타는 사파타와 판초 비야를 밧줄로 목매달겠다고 선언한다. (3권 36쪽)

[1915년, 멕시코-트랄티사판]
트랄티사판 마을의 낡은 제분소에 사파타의 본부가 있다. 모렐로스 평원의 반란자들의 우두머리는 대농장들을 해체하고 설탕공장과 증류소들을 국유화하고 수백년에 걸쳐 빼앗긴 원주민 공동체들의 토지를 되찾아준다. 모든 일을 공동체 주민 모두가 토론을 통해 결정하는 민주주의가 다시 세워지고, 전통에 대한 자각과 기억이 되살아난다. 토지 매매와 임대가 금지되고 탐욕도 금지된다. 
대통령 자리에 오른 베누스티아노 카란사는 남부와의 전쟁을 다시 시작한다. 이제 막 풍요가 싹트기 시작한 모렐로스 평원을 정부군이 총과 불로 휩쓴다. 트랄티사판에서만 5백명의 원주민을 죽이는 등 학살은 계속된다. 살아서 붙잡힌 사람들은 유카탄 반도 헤네켄 농장들의 노예로 팔려간다. (3권 75~76쪽)

[1922년, 아르헨티나-파타고니아 평원]
3년 전, '애국동맹'의 젊은 귀족들이 부에노스아이레스 교외로 사냥을 갔다. 아무 권한이 없는 그들은 꼬박 일주일 동안 많은 노동자와 유대인을 죽였지만 단 한명도 감옥에 가지 않았다.
이제 이 나라 남쪽의 동토에서는 군대가 노동자들을 상대로 사격연습을 한다. 엑토르 베니뇨 바렐라 중령의 병사들이 광대한 파타고니아 평원에서 파업노동자들을 사살한다. (3권 91쪽)

[1930년, 아르헨티나-부에노스아이레스]
세계의 위기는 육류와 밀 가격의 폭락을 통해 아르헨티나의 대통령 이폴리토 이리고옌을 절벽 끝으로 몰아댄다.
항상 혼자이고 조용하며 다른 시대와 다른 세계에서 온 고집센 늙은 사도 같은 이리고옌은 아직 전화를 사용하지 않고 극장에 가본 적이 없으며, 비행기를 의심하고 자동차도 믿지 않는다. 그는 화려한 연설이 아니라 나지막한 이야기로 한사람 한사람을 조금씩 설득하여 결국 민중을 정복했다.
이리고옌의 운명은 아르헨티나의 석유를 스탠더드오일사와 쉘사에 넘겨주기를 거부했을 때 이미 결정되었다. 게다가 그는 소련과 거래함으로써 가격 재앙을 모면하려고 했다. (3권 130쪽)

[1933년, 파라과이-요르단 진지]
볼리비아와 파라과이가 전쟁을 한다.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잔혹한 정복과 약탈을 겪었고, 가장 가난하고 또 바다가 없는 두 나라가 지도의 보잘것없는 조각을 놓고 서로를 죽인다. 스탠더드오일과 로열더치쉘사가 두나라 국기 뒤에 숨어서 차코 지역의 석유를 차지하기 위해 다투고 있다. (3권 146쪽)

[1937년, 멕시코-멕시코시티]
멕시코는 스페인 전쟁에서 손을 떼지 않는다. 침묵의 친구이고 웅변의 적인 보기 드문 대통령 라사로 카르데나스는 연대를 선언하고 실천한다. 그는 스페인 공화파의 전선에 무기를 보내고 전쟁고아들을 바다 건너 데려온다. 지난 여름 그는 토지개혁을 발표했고, 이후 지속적으로 지역 공동체들에게 토지를 분배해왔다. 
대통령 카르데나스는 아네네킬코 공동체의 가장 좋은 친구이다. 그는 이곳에 찾아와 농부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그들의 권리를 인정하고 대변했다. 아네네킬코의 가장 나쁜 친구는 니콜라스 사파타이다. 에밀리아노 사파타의 큰아들인 그는 가장 기름진 땅을 차지했고, 나머지도 모두 가지고 싶어한다. (3권 168쪽)

어느 화창한 날 카르데나스는 멕시코가 멕시코 땅에서 나는 석유의 주인임을 선언한다. 스탠더드오일과 쉘은 똑같은 방법으로 답한다. 외국 기술자들이 모두 멕시코를 떠난다. 복잡한 계기판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은 한명도 남지 않는다. 이것은 전쟁이다. 라틴아메리카의 전통적인 무기력, "모르기 때문에 할 수도 없다"는 식민시대 관습을 깨기 위한 전쟁이다. 
스탠더드오일은 멕시코를 즉시 침공할 것을 요구한다. 카르데나스는 만약 국경에 미국 병사 한명이라도 나타나면 유정들에 불을 지르도록 명령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루스벨트는 침공을 단념하고 다른 방법을 찾는다. 영국 정부는 멕시코의 석유를 한방울도 사지 않겠다고 발표한다. 프랑스도 영국을 거든다. (3권 169쪽)

[1954년, 과테말라-과테말라 시]
이미 불구가 되어버린 아르벤스 정부를 끝장내는 의식이 시작된다. 용병부대가 국경을 건넌다. 과테말라의 장군들은 총 한방 쏘지 않고 군대를 넘겨준다. 20대 초반의 아르헨티나인 의사 에르네스토 게바라는 민중과 함께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애쓰지만, 사실 그는 무엇으로 어떻게 적을 막아야 할지 모른다. 급조된 시민군은 무기도 없이 거리를 헤맨다. 이 절망의 어두운 날들에 게바라는 천식과 분노의 병을 얻는다. 폭격이 시작되고 2주 뒤, 아르벤스는 한밤중에 대통령궁 계단을 천천히 걸어내려와 길 건너 멕시코 대사관에 몸을 맡긴다. (3권 224쪽)

 

하지만 저항은 사라지지 않는다. 라틴아메리카의 꿈도.

 

[1926년, 니카라과-산 알비노]
"누가 나와 같이 이 땅을 사랑하겠는가?" 광부 스물아홉 명이 앞으로 나선다. 이들이 니카라과 해방군의 최초의 병사들이다. 글을 읽을 줄 모르는 그들은 미국 회사를 위해 하루 15시간 동안 금을 캐내고 우리 같은 숙소에서 겹겹이 쌓여 잠을 잤다. 그들은 다이너마이트로 광산을 폭파한 뒤 산디노를 따라 산으로 들어간다.
푸에르토카베사스의 몸파는 여자들은 베갯머리 이야기를 통해 미국 해병대가 40정의 소총과 7천발의 탄환을 물 밑에 파묻은 곳을 알아냈다. 그녀들의 목숨을 건 도전 덕택에 산디노의 해방군은 최초의 무기를 손에 넣는다. (3권 104쪽)

미국이 니카라과는 스스로를 다스릴 수 없다고 결정했을 때 니카라과의 대서양 해안지대에는 40개의 초등학교가 있었지만 지금은 6개밖에 없다. 니카라과는 점령자의 비용을 지불하느라 빚의 수렁에 점점 더 깊게 빠져들었다. 니카라과 세관은 미국 채권은행들의 손아귀에 있다. 이 은행들이 니카라과 세관의 감사관이자 총수세관으로 클리포드 햄을 임명했다. 햄은 UP통신의 통신원이고 부감사관이자 부수세관인 어빙 린드버그는 AP통신 소속이다. 국제 여론에 산디노를 무법의 산적과 볼셰비키의 앞잡이로 인식시킨 것도 바로 그들이다. (3권 115쪽)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 이야기 또한 흥미진진하면서 슬펐다. 이를 테면 이런 것. "이른바 대가들의 무대인 공식적 예술의 범주를 넘어서면, 천재 판화가 호세 과달루페 포사다가 그의 나라와 그의 시대를 발가벗기고 있다. 어떤 비평가도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다. 두 젊은 예술가가 어려서부터 그를 따라다니긴 하지만 그에겐 제자도 없다. 포사다의 작은 작업실에 늘 와서 동판 위에서 춤추는 그의 조각칼에 넑을 잃는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와 디에고 리베라의 표정은 언제나 미사에 참석한 사람 같다."(3권 52쪽)

 

이젤의 예술은 감금을 자초한다. 그러나 벽화는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을 내보일 수가 있다. 그래서 리베라와 오로스코와 시케이로스는 멕시코의 벽들을 공격한다. 젖은 석회 위에 진정한 나라의 예술이 탄생한다. 멕시코 혁명의 자식들과 이 시대의 탄생과 장례가 그려진다. 두꺼비의 눈과 배를 갖고 물고기의 이빨을 가진 리베라는 벽화를 그리는 날에는 한번도 쉬지 않고 16시간 동안 몰두한다. 항상 허리에 권총을 차고 그림을 그리는 그는 말한다. "불평하는 자들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3권 101쪽)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라는 책을 진짜 오랫동안 책장에 꽂아두고만 있는데 올해 안에 읽어야겠다.

 

또 이런 이야기도 나온다. 멕시코의 저항 투사 판초 비야와 사파타의 부하 길다르도 마가냐가 사로잡힌다. 총살당하기 직전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감옥에 갇힌 두 사람. 마가냐에게 글을 배운 판초 비야는 <삼총사>를 읽고 <돈키호테>를 읽는다. 사막의 사나운 전사 판초 비야는 '마치 연인을 만지듯' 책장을 넘기고, 마가냐는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는가? 이 책은 우리처럼 감옥에 갇힌 사람이 쓴 것이라네." (3권 62쪽)

 

콜롬비아에서 유나이티드 프루트의 이익을 위해 군대가 노동자들을 죽인다. 1928년 아라카타카 마을에서 밤새 학살의 총성이 들려온다. "묘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집의 한 어린 소년이 침대 속에서 소리내어 운다. 세월이 흘러 이 아이는 망각의 역병으로 인해 모든 것의 이름을 잃어버린 한 지역의 비밀을 세상에 밝힐 것이다." (3권 120쪽) 이 아이의 이름은 가르시아 마르케스. 이 작가를 이렇게 소개하는 갈레아노, 읽다가 소름이 돋았다. 

 

네루다 역시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스페인 공화정부에 대한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가리켜 네루다는 "언젠가 그들은 자신의 총알에 심장이 꿰뚫릴 것이라며 저주한다. 그라나다에서는 파시스트들이 네루다의 사랑스런 형제처럼 영원히 자유로운 영혼인 안달루시아의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를 호모에다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을 찍어 쏘아죽였다. 네루다는 피에 젖어 스페인 땅을 가는 곳 없이 헤맨다. 시인은 시가 쇠와 밀가루처럼 쓸모있는 것이 되고, 탄가루를 얼굴에 바르고 기꺼이 몸을 부딪쳐 싸우는 투사가 되기를 바란다."(3권 158쪽)

 

1945년, 폴란드 브로츨라프(라고 돼있지만 브로츠워프라고 써야;;).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피카소가 연설을 한다. 알려지지 않은 이 사건은 폴란드의 브로츨라프에서 열린 '평화를 위한 세계 지성인회의'에서 벌어진다. "내게는 이 자리에 있어야만 하는 한 친구가 있는데..." 피카소는 스페인어의 위대한 시인이자 세계의 위대한 시인으로 언제나 불행한 자의 편에 서고, 지금은 구석에 몰린 개처럼 칠레 경찰에 쫓기고 있는 파블로 네루다에게 경의를 표한다. (3권 201쪽)

 

반면 보르헤스에 대한 소개는 냉담하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놀라운 섬세함과 날카로운 이지로 '수치의 세계 역사'를 말한다. 그러나 그의 나라의 수치에 대해서는 묻지조차 않는다."(3권 153쪽)

 

허상의 도시 브라질리아, 그 도시를 그렇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기에 도시가 완공된 후 성대한 의식에 나타나지도 않았던 오스카르 니에메예르. 직각과 자본주의를 싫어한 건축가.(3권 248쪽) 볼리비아의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싸움을 시작한 다섯 여인의 투쟁(3권 345쪽).

 

미국 역시 '아메리카'의 일부이기에, 1권과 2권에서 북미 원주민들 이야기가 나왔던 것처럼 3권에도 북미의 핍박받던 사람들 이야기가 적잖게 나온다. 이를테면 빨갱이로 몰려 FBI의 추적을 받아왔던 찰리 채플린이라든가, 빈민가 소년에서 세상을 위로하는 사람이 된 루이 암스트롱 같은 사람들. 사코와 반제티, 간첩으로 몰려 사형당한 로젠버그 부부. 매카시즘 광풍 속에서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에밀리아노 사파타를 무뢰한으로 묘사한 영화를 만든 엘리아 카잔(3권 215쪽)의 이름도 등장한다.

 

갈레아노가 축구 이야기를 빼놓을 리 없지. 1958년의 스톡홀름. 스웨덴 월드컵 대회에서 "펠레와 가린차는 흑인은 추운 곳에서 경기를 할 수 없다고 비웃던 자들을 침묵시키며 영웅의 자리에 오른다."

 

소년 티도 아직 못벗은 비쩍 마른 펠레는 경기에 몰두하기로 작정한 신이 그렇게 하듯이 축구를 한다. 경기장 안에서든 밖에서든 그는 자신을 스스로 보살핀다. 얼마 전까지 부두에서 구두를 닦았던 그는 1분의 시간도 헛되이 보내지 않고, 한푼의 돈도 헛되이 쓰지 않는다. 펠레는 높이 날아오르기 위해 태어났다. 그도 그것을 안다. 

볼품없는 다리를 가진 장난꾸러기 새, 가린차는 승리가 아니라 웃음을 위해서 경기하고 결과는 잊어버린다. 해변이든 울퉁불퉁한 작은 운동장이든, 몇 잔의 맥주를 위해서든 그냥이든 그는 기꺼이 공을 차고 달린다. 그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많은 아이들을 돌본다. 언제나 마지막인 듯이 먹고 마신다. 아까운 게 없는 그는 모든 것을 주고, 모든 것을 잃는다. 가린차는 추락하기 위해 태어났다. 그는 그것을 모른다. (3권 242~243쪽)

 

책은 갈레아노가 오랜 망명생활을 끝내고 우루과이로 돌아가는 1984년 끝난다. 그 사이에 민주주의가 다시 숨을 쉬게 된 나라도 있고, 여전히 군사독재정권이 군림하는 나라들도 있다. 라틴아메리카 현대사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 중의 하나, 그 주인공은 아옌데가 될 수밖에 없다. 맨 뒷부분에 나오는 아옌데의 이름은 사람이 아닌 마을의 이름이다.

 

멕시코 나야리트 산간지대에는 이름없는 원주민 공동체가 있었다. 우이촐 부족의 이 공동체는 수백년 동안 이름을 찾아왔다. 카를로스 곤살레스는 쓰레기장을 지나다가 책 한권을 주웠다. 그는 자신의 약속을 지킨 한 남자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공포와 용기로 가득 찬 그 이야기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마을에 이르자 그는 행복에 취해 외친다. "마침내 우리 마을에 이름이 생겼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큰소리로 책을 읽는다. 그리고 150여 가족이 투표했고, 모두 찬성했다. 그들은 마침내 자신들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배반과 죽음의 선택 앞에서 조금도 망설이지 않은 한 사람의 이름을 얻었다. (3권 388쪽)

 

[아옌데의 고별연설]

 

실은 3권 내내 되풀이해서 등장하는 사람이 있다. 카스트로도, 게바라도 아닌 그의 이름은 미겔. 태어나자마자 길바닥에서 죽을뻔했고, 싸우고, 고문당하고, 하지만 살아나고, 죽을 뻔하고, 또 다시 태어나고, 위기를 맞고, 거듭 부활하는 미겔. 갈레아노가 그려보낸 아메리카 서사시의 주인공은 미겔이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