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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로건, <아랍>

딸기21 2022. 12. 2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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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 오스만 제국에서 아랍혁명까지

유진 로건. 이은정 옮김. 까치

 

우리 까치가 달라졌어요~


회사에 다닐 때 책을 옆에 놔두고 나중에 읽어야지 다음에 읽어야지 하며 차일피일 미루다가 계속 미뤄지더니... 결국은 몇 년이 훌쩍 지나 개정판을 새로 사서 읽었다. 


중동에 대한 책을 마지막으로 읽은 지 꽤 오래됐다. 다른 것도 더 알 게 많은데 몇 권 그래도 읽어 봤으니 그 동네는 좀 후순위로 미뤄둬야지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아랍이라는 제목의 책을 지금 읽는다고 딱히 도움이 되는 게 있을까 싶었는데 뜻밖에도 너무너무 재미있었다. 아랍 세계에 대해서 한 권의 책을 권하라고 한다면 단연 이 책이다. 당대 현지인들의 기록을 뒤져가며 그곳 사람들의 생각을 전해준다는 것이 큰 강점이고 최근세사까지 담은 것이 두 번째 강점이다. 

처음에 중동 책을 읽을 때는 사실 몇 권 출간돼 있지 않아 편했다.  그 다음에는 좀 굵직한 책들이 나왔으므로 큰 줄기를 잡는 것에 신경을 많이 썼다. 그 뒤에는 여러 지역들을 담은 책을 보면서 범위를 넓히는 데 치중했던 것 같다. 

 

그리고는 지정학 관련 책이나 세부적인 지식이 많이 나와 있는 책들을 읽었는데 이번에는 아랍을 읽으면서 그동안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아왔던 일화들에 꽂혔다. 뭔가를 공부하거나 책을 읽을 때 사람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이 책에는 인물들 이야기가 많다. 그 인물들을 둘러싼 에피소드를 보면서 그 시절 사람들이 어떻게 느꼈을까 상상해 보고, 그러다 보면 어쩐지 흥분도 되고, 또 그 시절 그곳 사람인 양 실망도 하고 그런 것이 재미난 독서 경험이었다.

 

현대의 아랍인들은 대내외적으로 당면한 주요 도전들을 해결하고자 노력해 왔다 외세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했었고 개혁을 종용하는 가운데 시민들에게 덜 독재적이고 더 책임감 있는 정부를 만들고자 했다. 이것들이 현대 아랍사의 큰 테마이자 이 책의 집필을 구제화시킨 주제이다.
아랍인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특히 이슬람이 출연하고 첫 5세기 동안의 역사 즉 기원후 7세기에서 12세기까지의 역사를 말이다. 이때는 다마스쿠스, 바그다드, 카이로, 코르도바에 기반한 이슬람 대제국들이 세계 정세를 좌지우지했다. 
-15쪽

수니 이슬람 제국의 중심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스탄불은 다마스쿠스에서 1500km, 바그다드에서 2200km, 카이로에서 육로로 3800km 떨어져 있었다. 게다가 오스만 제국의 행정 언어는 투르크어였다. 이렇게 아랍인들은 다른 민족의 통치 하에 근대를 항해하기 시작했다.
18세기에 이르러 규칙이 상당히 달라졌다. 17세기의 절정에 달했던 오스만 제국은 1699년 처음으로 유럽의 경쟁자들에게 크로아티아, 헝가리, 트란실바니아, 우크라이나의 포돌리아를 상실하게 되었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지역 지도자들이 이집트, 팔레스타인, 레바논, 시리아, 이라크, 아라비아에서 오스만 통치에 심각한 도전을 제기했다.
-16~17쪽

지난 2세기 대부분의 시간 동안 아랍인들은 외세로부터 독립하기 위해서 분투했다. 동시에 아랍 국민들은 자국 통치자들의 독재 권력을 억제하고자 했었다. 아랍의 봄 혁명은 책임 있는 정부와 법의 지배를 위해서 싸워온 한 세기간의 투쟁의 새로운 장을 의미한다.
19세기 초반에 유럽을 방문한 아랍인들은 파리와 런던에서 조우한 새로운 정치 사상에 매혹되어 돌아왔다. 이집트의 종교 지도자 알타흐타위는 1814년 프랑스 헌장의 74개 조항 전부를 1831년 파리에서 돌아오자마자 아랍어로 번역했다. 그 글에 고무된 튀니지 출신의 개혁가 카이르 알 딘 알 튀니시는 튀니지 총독의 자의적인 통치를 제한하는 헌법을 제창했다. 헌법을 도입한 첫 두 아랍 국가인 튀니지(1861년), 이집트(1882년)가 가장 먼저 아랍의 봄 혁명을 경험하게 된 것은 아마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21쪽 

1923년의 이집트 헌법과 1925년의 이라크 헌법, 1926년의 레바논 헌법, 1930년의 시리아 헌장은 각각 합법적인 정부 및 법의 지배를 기반으로 유럽 식민지 열강으로부터 독립을 성취하기 위한 아랍인들의 투쟁을 표현한 것이었다. 식민당국들은 전력을 다해 아랍의 주권을 약화시켰다. 이렇게 자유입헌정부는 유럽의 식민통치가 길어지면서 훼손됐다팔레스타인 전쟁에서의 패배 여파는 아랍 자유주의에 대한 거부로 나타났다.
아랍 세계는 시리아(1949),  이집트(1952), 이라크(1958), 예멘(1962), 리비아(1969)에서 발생한 군부 쿠데타로 새로운 혁명의 시대로 진입했고 기술관료적 정부의 수장으로서 결단력 있고 실천력이 뛰어난 이들이 권좌에 오르게 되었다. 새로운 군사 독재자들은 사회 정의와 경제 발전, 강한 군사력, 외부 영향으로부터의 독립을 약속했다. 대신 시민들에게 전적인 복종을 요구했다. 그것은 일종의 사회적 계약이었고 거의 반세기 동안 아랍 시민들은 정부에 대한 답례로 전제적인 통치를 억제하려는 노력을 기꺼이 미루었다. 
21세기 초 아랍 사회의 오래된 계약은 깨졌다. 2000년경 부유한 산유국을 제외한 어떤 국가도 자신들의 약속을 이행할 능력이 없었다. 물론 튀니지에서 출현한 헌법 질서가 아랍의 미래 사회질서의 전조가 될지 또는 아랍의 봄의 유일한 성공 사례가 될지를 판단하기에는 아직은 시기상조이다. 
-22쪽

 

서문이 아주 재미있었다!

 

맘루크 검객과 오스만 소총수의 운명적인 무력 충돌은 아랍 세계의 중세가 끝나고 근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오스만의 정복은 이슬람 등장 이후 처음으로 아랍 세계가 비아랍인의 지배를 받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1517년부터 아랍 밖의 수도들에서 정해진 규칙에 따라서 아랍인의 사회적 지위가 협의됐고, 이와 같은 정치적 현실은 근대 아랍 역사의 본질적인 특징 중 하나가 되었다.
오스만은 여러 면에서 맘루크인과 비슷했다. 두 제국의 지배계층은 기독교도 노예 출신이었다. 또한 두 제국은 모두 종교법을 준수하고 강력한 군을 통해서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이슬람 영역을 지키는 관료 제국이었다. 수니 무슬림이었던 대다수의 아랍인들에게 오스만은 충분히 수용 가능한 통치자였다. 외세의 지배에 반대하는 뚜렷한 아랍 정체성을 언급하기에는 아직 시기상조였다. 아랍인들은 오스만 통치로의 변화를 이념적이기보다는 실용적으로 평가했다. 투르크 통치가 아랍인들에게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보다는 법과 질서 합리적인 세금 같은 문제들에 더욱더 관심이 많았다.
-34~35쪽

 

마론파는 7세기 후반에 기독교 경쟁 분파(당시에는 비잔틴 제국)의 박해를 피해 레바논산맥 북쪽의 은신처를 마련했다. 
중세 십자군을 후원했던 마론파는 그때부터 바티칸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드루즈파는 11세기에 카이로에서 발원했는데 반체제적인 시아파 무슬림 일부가 이집트에서의 박해를 피해서 도망쳐 왔다. 레바논산맥 남부에 고립돼 살아온 그들은 독특하면서도 매우 비밀스러운 신앙 형태를 갖게 되었다. 종교집단이자 정치 공동체로서 드루즈파는 마론파와 기독교인들의 전적인 협력 아래 마운트레바논의 정치 질서를 장악했다.
마운트레바논의 군주였던 파크르 알 딘 2세(1572 경~1635)는 마치 마키아벨리 작품 속의 인물 같은 사람이었다. 그의 수법은 확실히 오스만 동료들보다는 체사레 보르자의 것에 더 가까웠다. 오스만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드루즈의 마키아벨리는 1608년 피렌체의 메디치가와 동맹 조약을 체결했다. 메디치가는 레반트 무역에서 특권적인 지위를 인정받는 대가로 파크르 알 딘에게 무기를 제공하고 요새화 작업을 돕기로 했다.
... 오스만의 압박을 피해 토스카나로 간 파크르 알 딘은 5년간 망명 생활을 하면서 아랍과 유럽의 군주가 동등한 입장에서 만나 서로의 관습과 풍속을 세심하게 관찰할 수 있는 귀한 순간을 경험했다. 파크르 알 딘과 가신들은 메디치 궁의 운용과 르네상스 과학기술의 현황, 주민들의 여러 관습들을 직접 목격했다. 피렌체 대성당을 방문했고 조토의 종탑과 브루넬레스키의 돔에도 올라갔다. 그러나 이슬람 문화의 우월함과 오스만 제국이 당대 가장 강력한 국가라는 파크르 알 딘의 믿음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52~54쪽

 

피렌체의 레바논인. 재미있다.

 

아랍 영토는 어느 모로보나 이스탄불에게 덜 중요한 지역이었다. 오스만은 아랍보다는 발칸이나 아나톨리아의 세입과 군대에 더욱 의존하고 있었다. 다마스쿠스나 카이로의 통치자들이 일으킨 문제보다는 빈이나 모스크바의 도전을 더 우려했다.
1699년 오스트리아는 오스만을 격퇴하고 카를로비츠 조약을 통해서 헝가리와 트란실바니아 폴란드의 일부를 보상받았다.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는 흑해 지역과 코카서스에서 오스만을 압박했다. 오스만 정부의 딜레마는 아랍 의 도전에 대처하기 위해 필요한 자원들을 마음대로 동원하려면 무엇보다도 우선 유럽 변경의 안정을 확보해야만 한다는 점이었다.
사우디의 와하비 연맹은 성도인 메카와 메디나를 장악하고 해마다 성도로 향하는 오스만 순례단을 방해하면서 가장 심각한 위협 세력이 되었다. 반면 알제리나 튀니스, 예멘 같이 더 먼 지역들은 광범위한 자치권을 누리는 대신에 해마다 조공을 바치며 술탄의 가신으로 남는 것에 만족했다.
이러한 지역 통치자들은 결코 아랍 운동에 나서지 않았다. 뿔뿔이 흩어져 있던 그들은 오스만 중앙에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집트의 맘루크가 북부 팔레스타인의 지역 통치자와 동맹을 체결했을 때처럼 서로 뭉칠 경우 그들은 오스만 지방 전체를 정복할 수 있는 역량을 발휘하기도 했다. 
-68~69쪽

20세기의 중동이 석유 덕분에 중요해졌다면 18세기 동부 지중해에 엄청난 부를 가져다 준 것은 면화였다. 영국 랭커셔의 공장들이 주로 서인도 제도나 아메리카 식민지에 의존했다면 프랑스는 면화 수입의 대부분을 오스만 시장에 의존했다.
방적과 방직 기술이 산업혁명을 이끌며 발전하면서 유럽의 면화 수요는 급증했다. 유럽 시장에서 가장 높이 쳐주던 면화는 북부 팔레스타인의 갈릴리에서 생산되던 면화였다. 갈릴리 면화가 양산한 엄청난 부 덕분에 시리아의 지역 통치자는 야심을 키우며 오스만 지배에 도전할 정도로 강력해졌다.
그 당시 갈릴리의 유력자는 자히르 알 오마르(1690년 경~1775년)이었다. 오스만 총독들과 대립한 이력 때문에 그는 종종 대단한 아랍 또는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자로 묘사되곤 한다. 물론 이것은 매우 시대착오적인 생각이나 사망할 쯤 그는 이미 전설이 되어 있었다.
-70쪽

1821년 그리스에서 민족주의 봉기가 일어났다. 오스만 제국에서 발생한 공개적인 첫 민족 봉기였던 그리스 전쟁은 18세기에 지역 통치자들이 주도한 반란들보다 더 큰 위협이 됐다. 이전의 반란들은 통치자 개인의 야심에 추동되었다면 민족주의는 오스만에 대항해 전 주민들이 봉기하도록 선동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라는 점에서 그 성격이 달랐다. 
프랑스는 무함마드 알리의 이집트와 특별한 관계를 발전시켜 왔다. 이집트 총독은 프랑스의 군 자문가들을 초빙했고 산업화와 공공 사업에 필요한 도움들을 프랑스 기술자들로부터 받았으며 유학생들을 프랑스로 파견해 고등교육을 받도록 했다. 그러나 이집트의 영향력이 그리스로 확대되자 파리의 정부는 딜레마에 빠졌다.
1821년 3월 그리스 중심부와 마케도니아, 크레테, 에게 해의 섬들로 반란이 확산되자 오스만은 무함마드 알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무함마드 알리의 아들 이브라임 파샤가 새롭게 훈련받은 이집트 군을 이끌고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출정했다. 모든 병사들이 토박이 농민들이었던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최초의 이집트 군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08~109쪽

 

바야흐로 민족주의의 시대. 그 도전에 맞선 투르크의 응전, 탄지마트 개혁.

오스만 개혁의 시대는 제2차 이집트 위기가 정점에 이르렀던 1839년에 시작됐다. 유럽으로부터 영토와 통치권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근대국가 세계의 책임 있는 이론으로서 유럽 기준의 치국책을 충실히 지킬 수 있음을 확인시켜줄 필요가 있다고 오스만 정부는 생각했다.
마흐무드 2세 밑에서 일했던 개혁가들은 전대 술탄의 추세 동안에 이미 시작된 변화들을 강화시키고 그의 계승자로 하여금 개혁에 참여하도록 만들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가득 차 있었다. 유럽의 환심을 사기 위한 선전 행위가 대내외적인 위협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개혁에 나선 진심어린 결의와 결합한 것이었다. 
1839년부터 1876년까지 선출 의회를 갖춘 입헌 군주제로 국가 체제를 변화시켰다. 오스만 제국의 이 시기는 탄지마트, 문자 그대로 '재정비'로 잘 알려져 있다. 정부는 인구 조사를 시행하기 시작했고 새로운 토지등록제를 도입해 낡은 세금 대납제를 서구적인 사유재산 개념에 더 가까운 개인 소유제로 대체했다. 지방 행정도 다마스쿠스나 바그다드 같은 주도에서부터 마을 단위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인 통신 통치 체계를 제공하기 위해 철저히 검토됐다.
-128~129쪽

일부 주요 개혁 프로그램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는데 오스만 사회의 수의 무슬림에게 기독교도와 유대인의 사회적 지위에 발생한 변화보다 더 폭발적인 쟁점은 있을 수 없었다. 19세기 내내 유럽 열강은 오스만에 간섭하기 위해 소수 집단의 권익을 구실로 삼았다. 러시아는 동방정교회로 자신의 보호 범위를 넓혔다. 프랑스는 오래전부터 마운트레바논의 마론파 교회와 특별한 관계를 유지해 왔고 19세기에는 오스만의 모든 가톨릭 공동체의 공식적인 후원자를 자처했다.
영국은 이 일대의 어떤 교회와도 역사적인 유대관계가 없었음에도 유대인과 드루즈파, 그리고 아랍 세계의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 주위로 모여드는 소규모 개종자 집단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했다.
-131쪽

 

이어지는 저항의 시대.

아랍인과 베르베르는 알제의 간섭을 받지 않았고 알제나 콩스탕틴, 오랑 같은 주요 도시들 밖에서는 오스만 지배 체제에 저항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알제 섭정국의 몰락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프랑스가 알제리 해안평원의 식민화에 착수하자 현지 부족들은 오랑 서쪽에서부터 저항 운동을 조직했다. 그 중심이 된 카디리야(Qadiriyya) 교단은 서부 알제리에 있었던 가장 강력한 수피 교단 중 하나였다.
1832년 11월에 24살의 압드 알 카디르(1808~1883)는 아미르, 즉 프랑스 통치에 맞서 연합한 부족들의 지도자로 추대됐다. 향후 15년 동안 그는 프랑스에 맞서 지속적인 저항 운동을 벌이며 알제리인들을 규합했다. 살아 생전에 이미 서구와 아랍 세계에서 전설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63쪽

그러나 알 카디르는 프랑스가 알제리 민중에게 행사한 엄청난 폭력을 예상하지 못했다. 비조 장군은 저항 운동을 대중이 지지하지 못하도록 내륙에서 초토화 작전을 벌였다. 마을을 불태우고 가축을 몰아냈으며 수확물을 파괴하고 과실 나무들의 뿌리를 뽑아버렸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가 죽임을 당했다. 부족과 마을들은 보복을 피하기 위해서 알 카디르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결국 1843년 11월에 그는 추종자들과 함께 모로코로 망명했다. 프랑스는 그를 프랑스로 이송해 투옥시켰다. 1852년이 돼서야 루이 나폴레옹에 의해 복권될 수 있었다. 알제리의 통치자는 하얀 말을 타고 파리를 순회하며 대통령과 함께 프랑스군을 사열했다. 비록 알제리로 돌아가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지만 프랑스는 그에게 평생 연금과 그가 선택한 망명지로 타고 갈 증기선을 제공했다. 알 카디르는 다마스쿠스에 정착해 영웅으로 환대받았고 남은 생애 동안 학자로 살면서 이슬람 신비주의에 귀의했다.
-166~168쪽

 

-1820년대 이집트에 소개된 인쇄기는 중동에 투입된 수입된 초기 산업 제품 중 하나였다. 무함마드 알리는 인쇄 기술과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서 이탈리아 밀라노로 초기 기술 파견단 중에 하나를 보냈다. 얼마 후에 이집트 정부는 아랍으로 발행된 최초의 정기 간행물인 관보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베이루트와 카이로가 아랍 세계에서 언론 및 출판의 주요 중심지로 부상했고 그 도시들은 현재도 그렇다. 19세기 중반의 레바논은 아랍으로 '나흐다' 즉 르네상스라고 알려진 문예부흥 운동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인쇄기의 힘에 고무된 무슬림과 기독교도 지식인들은 사전과 백과사전을 집필하고 아랍 문학과 사상의 위대한 고전들을 출발하는 데 열성이었다. 나흐다는 아랍인들이 오스만 이전 시대의 영광에 대해서 논하기 시작한 지성적인 재발견과 문화적 표현의 짜릿한 순간이었다. 운동은 종파나 종교에 상관없이 아랍어로 말하는 모든 사람을 포용했고 아랍 정치에 매우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개념, 아랍인은 공통된 언어와 문화, 역사로 정의될 수 있는 하나의 민족이라는 개념의 씨앗을 뿌렸다.
1870년대 말경부터 오스만 정부는 새로운 언론 통제를 시작했고 많은 언론인과 지식인이 시리아와 레바논에서 이집트로 옮겨오면서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개인 출판의 시대가 열렸다. 19세기의 마지막 25년 동안 160개가 넘는 아랍의 신문과 잡지가 이집트에서 발행됐다. 오늘날 아랍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신문 중의 하나인 알아흐람('피라미드들')은 1870년대 초에 베이루트에서 알렉산드리아로 이주한 타클라 형제에 의해서 창간됐다. 타클라 형제는 로이터 서비스를 구독하기 위해 알렉산드리아의 전신국을 이용했다. 베이루트의 신문들이 여전히 우편에 의존하던 것과는 달리 알아흐람은 사건 발생 후 수일 내에 심지어는 몇 시간 만에 국내외 소식들을 전달했다.
-195~196쪽

 

이 부분을 읽다 보니 여러 생각이 들었다. 2014년, '아랍의 봄 그 후 3년'을 취재하러 이집트에 갔을 때 알아흐람을 방문했고 기자도 만났다. 아랍의 봄 뒤 짧았던 해빙기 동안 자유로운 언론으로 나아가는 듯했던 이 신문이, 이미 내가 갔을 때에는 정권의 나팔수 노릇으로 돌아가 있었다. 역사가 길다고 해서 제대로 된 무언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북아프리카가 유럽의 식민지배를 받게 되면서 오스만 세계와 단절되자 민족주의는 외세의 지배에 맞서는 하나의 대안으로서 부상했다. 실제로 제국주의는 북아프리카에서 민족주의가 등장하는 데 필요한 중요한 두 가지 구성 요소를 제공했다. 해방될 민족 영토의 경계를 명시한 국경선과 공동의 해방 투쟁으로 주민을 결집시킬 공동의 적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고 외세의 점령에 맞서는 단순한 저항이 민족주의 운동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명확한 이데올로기적 기반이 결핍돼 있었던 알제리의 알 카디르의 전쟁이나 이집트에서의 우라비 반란처럼 말이다. 민족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정치운동은 군이 패하거나 지도자가 유배되는 순간 외세의 지배로부터 독립하는 데 필요한 동력을 제공할 수 없었다. 
-198쪽

유럽이 북아프리카를 점령한 뒤에야 민족적인 자각의 과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집트인, 리비아인, 튀니지인, 알제리인 또는 모로코인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였을까. 아랍 세계의 대다수 사람들에게 이러한 호칭들은 어떤 의미 있는 정체성에도 맞지 않았다. 
유일하게 이집트만이 1차 대전 이전에 중요한 민족주의적인 요소를 겪었다. 개혁 성향의 이슬람 종교지도자들이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이슬람적 대응 방식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와 동시에 이슬람 근대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은 다른 종류의 개혁가들도 세속주의적인 민족주의 의제에 착수했다.
알사이드 자말 알딘 알 아프가니(1839~1897)와 셰이크 무함마드 압두(1849-1905)는 19세기 말에 이슬람과 근대성에 관한 논쟁을 구체화했다. 알 아프가니의 정치철학의 핵심은 이집트와 튀니지, 오스만 제국의 탄지마트 개혁가들처럼 이슬람 국가를 정치적으로 강하고 번영하게 만드는 방법에 있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현재의 무슬림들이 종교 원리에 따라 산다면 그들의 나라는 예전의 힘을 회복하고 유럽이 제기한 위협을 극복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알 아프가니는 쇄신된 이슬람의 원칙에 기반하는 동시에 무슬림 통치자의 권력에 분명한 제한을 두는 헌법을 통해서 통치자의 힘을 제약하고 전 세계 무슬림 공동체들이 범이슬람 연대에 나설 수 있도록 촉구하기를 희망했다. 
급진적인 그의 새로운 사상은 민족주의자 아흐마드 루트피 알 사이드와 사아드 자글룰, 위대한 이슬람 근대주의자 셰이크 무함마드 압두 등을 포함해서 알 아즈하르의 재능 있는 젊은 세대의 학자들을 불타오르게 했다.
-199~200쪽

1930년대 동안 와프드당은 영국에게서 독립을 쟁취하라는 압박을 점점 더 거세게 받았다.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이집트는 아랍 근대사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다당제적 민주주의를 달성했다. 1923년의 헌법으로 정치적 다원주의와 양원제 선거, 성인 남성의 참정권, 언론 자유가 도입됐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의 시대는 이집트 정치의 황금기보다는 분열적인 당파주의 시기로 더 자주 기억되곤 한다. 영국과 군주, 와프드당 3자 간의 경쟁으로 이집트 정치는 커다란 분열을 겪었다. 푸아드 국왕은 의회의 감시로부터 왕권을 보호하고자 영국보다 더 열심히 와프드와 대립하곤 했다. 
이집트인들은 1924년에 처음으로 투표를 했다. 민족주의 운동의 영웅 자글룰이 이끄는 와프드당이 압승을 거두고 하원 의석의 90%를 차지했다. 푸아드 왕은 그를 총리로 지명했다. 자글룰은 완전 독립을 성취하기 위해 곧 영국과 협상을 개시했다.
수단이 문제가 됐다. 이집트는 무함마드 알리가 지배하던 1820년대에 수단을 처음으로 정복했다. 1885년 마흐디의 반란으로 수단에서 쫓겨난 이집트는 1890년대 후반 수단을 재정복하기 위해 영국과 힘을 합쳤다. 1899년에 크로머 경은 이집트의 협조 아래 대영제국에 수단을 추가하기 위해서 공동통치(콘도미니엄)라고 불리는 새로운 형태의 식민주의를 고안해냈다. 그 이후로 영국과 이집트는 수단이 실제로는 자신들의 소유라고 주장해 왔다.
-270~271쪽

 

근대 아랍 페미니즘의 본산이었던 이집트.

 

이집트가 민족주의 시대로 들어설 무렵에 알 아프가니와 무함마드 압두는 이슬람을 민족 정체성의 필수 불가결한 일부분으로 만들었다. 무함마드 압두의 추정자들은 무슬림의 처지를 논의하는 가운데 이슬람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 변화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변호사 카심 아민(1863~1908)은 독립을 위한 민족투쟁의 기초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증진시키는 것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고 그 누구보다 단호하게 주장했다. 1900년에 이집트 여성은 단 1%만이 읽고 쓸 수 있었다. 그 당시 카심 아민이 주장했었고 오늘날 아랍 인간개발보고서의 저자들이 여전히 주장하는 것처럼 여성의 권한을 박탈하면서 아랍 세계 전체는 무력화되었다.
카심 아민의 1899년 저서 <여성 해방>은 개혁가와 보수주의자, 민족주의자 지식인들 사이에서 격렬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저작들이 불러온 논란은 결국 변화를 가져왔다 20년도 지나지 않아서 이집트 엘리트 여성들이 민족주의 운동에 참여하며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202~203쪽

자글룰과 동료들은 1919년 3월 8일 체포돼 몰타로 추방됐다. 1919년의 이집트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전국적인 소요가 일어났다. 유구한 알 아즈하르 사원 대학이 봉기의 주축이 됐다. 대다수의 이집트인들에게 이것은 국가의 정치 활동에 최초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것은 아랍 역사에서 최초의 진정한 민족주의 운동이었고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지방에서 도시에 이르기까지 대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1919년에 이집트 여성들도 처음으로 국가 정치에 참여했다. 그들을 이끈 사람은 후다 샤라위라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여성을 위한 사회운동을 조직화하기 시작했다. 이집트 대학으로 프랑스의 페미니스트를 초청해 동서양 여성의 삶을 비교하고 베일 착용 같은 사회 관행들을 논의하는 강연을 열었다. 이를 시작으로 여성 해방을 공개적으로 주창한 최초의 이집트 페미니스트 여성인 말락 히프니 나시프(1886~1918)을 포함하여 이집트 여성들이 발표하는 강연들이 정기적으로 열렸다.
1914년 샤라위는 레바논 작가 마이 지아다와 최초의 여성 잡지 중의 하나를 창간한 라비바 하심을 비롯해 아랍 여성문학의 개척자들을 모아 여성지식인협회를 설립하기 위한 모임을 주최했다.-234~235쪽

1919년의 봉기는 정치혁명이자 사회혁명이었다. 1919년의 봄은 엄격한 사회적 격리 관행에 도전받고 잠시나마 전복된 순간이었다. 이런 사건들 덕분에 알리 파샤 사라위와 후다는 화해할 수 있었고 그들의 결혼 생활은 민족주의적 대의로 연대한 정치적 협력 관계로 변화했다. 샤라위는 그 이후 민족주의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1918년 사아드 자글룰과 영국 고등판무관 윈게이트 경의 운명적인 만남에 동석했었던 샤라위는 자글룰과 함께 와프드, 즉 '대표단'으로 알려진 민족주의 정당을 창립했고 자글룰이 추방되자 당수직을 이어받았다. 그는 자신이 체포될 경우를 대비해 후다가 정치적 공백을 메울 수 있도록 모든 정치적 상황을 상세히 설명했다. 영국은 대중의 격분이 두려워서 감히 여성들을 체포하거나 발포하지 못했기 때문에 여성들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었다.
최초의 여성 시위가 3월 16일 혁명 발생 일주일 만에 일어났다. 3시간의 대치 끝에 시위대는 폭력 사태 없이 해산했다. 영국을 제압한 이집트 여성들의 상징적인 힘이 전국의 민족주의자들을 고무시켰다. 하렘 밖으로 나온 이집트 여성들은 엄청난 에너지와 열정으로 공적 생활에 투신했다. 
엘리트 층 여성들과 노동계층 여성들이 연대하면서 계급 장벽도 넘기 시작했다. 1919년 말에 후다 샤라위와 동료들은 아랍 최초의 여성 정치단체인 와프드당 여성중앙위원회를 조직했다. 1923년 이집트 페미니스트 연합을 만든 그녀와 동료들은 로마에서 열린 페미니스트 회의에서 돌아오던 중에 카이로 기차역에서 공개적으로 베일을 벗어던짐으로써 여성을 가두는 인습들을 산산히 부숴버렸다.
-236~238쪽

 

100년 뒤, 지금의 현실은 참...

 

이라크.

1920년 6월 말 이라크 봉기는 성지인 나자프와 카르발라의 시아파 성직자들이 선동했다. 10월 말에 나자프와 카르발라가 항복하면서 봉기는 종식됐고 대가는 컸다. 영국 추산에 따르면 2200명 이상의 영국 및 인도 병사들과 약 8450명의 이라크인들이 죽거나 다쳤다.
이라크에서 '1910년 혁명'으로 언급되는 이 봉기는 미국에서 1776년의 미국 혁명이 가지는 의미에 비견될 만큼 현대 이라크의 민족주의 신화 속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두 혁명은 사회혁명이라기보다는 외국의 점령에 맞서는 민중 봉기였고 양국 모두에서 민족주의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대부분의 서구인들은 1920년 봉기를 잘 모르지만 몇 세대 동안 이라크 학생들은 민족의 영웅들이 이라크의 렉싱톤과 콩코드인 팔루자와 바쿠바, 나자프에서 외국군과 제국주의에 대항해 어떻게 싸웠는지를 배우며 성장했다.
유럽 열강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중동 근대 국가들의 국경선을 그었다. 아랍인들은 이러한 근원적인 부정의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고 독립이라는 오래된 숙원을 좇으며 2차 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식민지 지배자들과의 싸움에 헌신했다. 
-243~244쪽

1932년 이라크가 안정적인 입헌군주국으로 자리 잡으면서 위임 통치국으로서 영국의 역할은 완수됐다. 국제연맹은 이라크의 독립을 인정했고 새로운 국가를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이라크는 국제연맹의 26년 역사 동안 정회원이 된 유일한 위임 통치령이었다.
성공이라는 외관 뒤에는 전혀 다른 현실이 있었다. 이라크인 대다수는 자신의 나라에서 누리고 있는 영국의 지위를 용납할 수 없었다. 이라크인들의 저항은 1920년의 봉기로 끝나지 않았고 파이살은 여러 면에서 인기 있는 왕이었지만 영국에 의존하게 되면서 자신의 입지를 훼손했다. 
264~265쪽

1930년의 우대 동맹 조약으로 영국과 이라크는 위임 통치를 종식하기로 합의했다. 그런데도 영국이 비공식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 하심 왕정의 합법성을 훼손했고 결국 1958년의 왕정 타도로 이어졌다.
-270쪽

 

걸프.

샤르자와 라스알카이마의 해상 부족들이 갈수록 상선에 큰 위협을 가하자 영국 동인도 회사가 그들과 싸우기 위해 19세기 초 페르시아만에 뛰어들었다. '해적 해안'이라고 불리던 지역을 정복하고 영국은 페르시아만을 영국의 호수로 만들어 버렸다.
1820년 1월 8일 샤르자와 라스알카이마를 통치했던 카시미 가문 뿐 아니라 아부다비와 두바이, 아즈만, 움 알 카이완, 바레인의 수장도 영국 선박에 대한 모든 공격을 영구 중단할 것을 약속한 조약에 서명했고 영국령 항구들에서 교역하는 대가로 일련의 공동 해상 원칙을 수용했다. 이 조건들은 페르시아만의 모든 국가 간의 해상 적대 행위를 불법화한 1853년의 종신 조약에서 재확인됐다. 해적 해안의 극소 국가들은 이제 영국과의 공식 정전협정에서 기인한 명칭인 '트루셜 스테이츠'로 알려지게 되었다. 
오스만 팽창주의에 맞서 영국의 보호를 받고자 했던 쿠웨이트와 카타르도 1899년과 1916년 각각 페르시아만 보호령에 합류했다. 20세기에 석유에 대한 영국의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페르시아만은 더욱더 중요해졌다. 영국이 우선시했던 문제가 인도와의 무역 및 통신이었다면 이제는 석유에 대한 새로운 전략적 이해관계로 관심사가 확장된 것이다. 
-247~248쪽

 

팔레스타인과 레바논.

 

1920년 7월 24일 2000명의 아랍 의용군이 베이루트에서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칸 마이살룬에 모였다. 프랑스군은 마이살룬의 수비대를 휩쓸어 버리고 다마스쿠스로 입성했다. 이렇게 26년간 지속될 불행한 식민지 점령이 시작되었다. 아랍인들에게 이 작은 전투는 영국이 전시에 했던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음을, 우드로 윌슨이 제시했던 민족자결주의의 이상이 파탄났음을, 그리고 수백만 아랍인들의 희망과 숙원을 누르고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주의적 사리사욕이 승리했음을 의미했다. 마이셀루는 원죄와 동일시 되었다. 
-230쪽

무력으로 반란을 진압하겠다고 결정한 영국은 2만 5천 명의 군인과 경찰을 팔레스타인에 파견했는데 1차 대전 종식 이후 해외에 파병된 최대 규모의 영국 군대였다. 1936년과 1940년 사이에 2천 채 정도의 가옥이 파괴됐고 전투원과 무고한 민간인들이 강제 수용소에 억류됐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반란군이 지뢰를 설치하지 못하도록 인간 방패로 동원되기도 했다. 영국 군인들은 1938년 9월 지뢰 폭발로 죽은 동료들의 복수를 하고자 알 바사 마을에서 20명도 넘는 남자들을 버스에 태운 다음 자신들이 매설해 놓은 엄청난 양의 지뢰 위로 지나가게 했다. 전원이 사망했고 영국 군인들은 갈갈이 찢긴 사체를 사진으로 찍은 후 마을 주민들에게 이들의 잔해를 공동묘지에 매장하라고 강요했다. 영국의 과도한 폭력과 연좌제는 학대와 잔악 행위로 더욱 악화됐고 위임 통치에 대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기억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남겼다. 
-291쪽

프랑스는 레바논을 하나의 명확한 민족 공동체라기보다는 폭발 직전인 공동체들의 혼합으로 보았고 레바논의 정치 기관도 이런 관점에서 만들었다. '신조주의(confessionalism)'으로 알려진 제도에 맞게 새로운 행정위원회 내의 직책들을 종교 공동체별로 할당했다. 인구통계학적 가중치에 비례해 종교 공동체들에게 공직이 분배되었음을 의미했다. 레바논 가톨릭 교회의 오랜 후원자였던 프랑스는 레바논을 반드시 기독교 국가로 만들 작정이었다.
지식인들은 점점 종파주의를 불편해하며 하나의 국민적인 정체성을 열망했다. 그러나 프랑스가 독립한 레바논에게 허용한 최초의 국기는 중앙의 삼나무가 그려진 프랑스의 삼색기였다. 
-307쪽

프랑스가 위임 통치의 종식을 선언하자마자 레바논은 독립 준비를 시작했다. 각 종교 공동체의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1943년 '국민협약'으로 알려진 권력분담 협정을 체결했다. 협약에 따라 대통령은 마론파 기독교도가, 총리는 수니 무슬림이, 국회의장은 시아 무슬림이 맡게 됐다. 다른 주요 각료직은 드루즈인과 그리스 정교도, 그 밖의 종교 공동체들 사이에서 분배됐다. 신조주의 원칙을 그대로 내포한 이 협약은 레바논의 정치 발전을 저해하고 국가의 진정한 통합을 방해했다. 이런 방식으로 프랑스는 오랫동안 존속하게 될 분열의 유산을 남겼다.
-343~344쪽


잠시, 이번 카타르 월드컵에서 메시 다음 가는 주인공이었던 모로코.

 

1942년 11월 미군은 모로코의 비시 군대를 손쉽게 물리쳤다. 두 달 후 루스벨트 대통령과 처칠 총리가 카사블랑카에서 만났다. 모르코의 술탄 모하메드5세를 초대한 저녁 식사 자리에서 루스벨트는 프랑스의 제국주의를 거리낌 없이 비판했다. 하지만 미국은 모로코의 독립 요청을 들어주기는커녕 1943년 6월에 드골의 자유 프랑스에 모로코를 넘겨줬다. 모로코는 외세의 개입 없이 독립을 달성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렇게 했다. 모로코 독립운동의 추진력은 군주와 민족주의자들 간의 협력에서 나왔다.
1944년 1월 이스티크랄, 즉 독립당이라는 민족주의 운동 조직이 모로코의 독립을 주창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모하메드5세가 이스티크랄을 전적으로 지지하면서 프랑스 식민당국과의 충돌은 불가피해졌다. 정치 엘리트들이 이끌던 민족주의 운동이 1940년대 말 노조와 도시 대중에게 확산되자 식민당국은 술탄을 프랑스 제국을 위협하는 음흉한 민족주의 세력을 수장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414~415쪽

 

1948년 전쟁 때 대규모의 이집트 분견대가 남부 팔레스타인의 팔루자 마을에서 포위됐다. 구조의 손길도 없이 몇 주 동안 꼼짝없이 갇힌 이집트 병사들은 큰 배신감을 느꼈다. 하지만 정치의식을 가진 장교들에게는 이 시간이 이집트 군주와 정부의 정치적 파산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그들 가운데에는 가말 압델 나세르와 자카리아 모히 엘 딘, 살라 살렘이 있었다. 자유장교단 소속의 이 세 사람이 훗날 이집트 군주정의 전복을 공모했다.
"우리는 팔레스타인에서 싸우고 있었지만 우리의 꿈은 이집트에 있었다"라고 나세르는 썼다. 아랍-이스라엘 전쟁에서 터득한 경험 덕분에 자유장교단은 자신들을 배신한 정부를 쫓아내고 결국 팔레스타인에서의 패배를 이집트에서의 승리로 전환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381쪽

위기의 순간에도 아랍 지식인들은 팔레스타인의 상실의 원인과 결과에 대해서 상당한 선견지명을 보여줬다. 자기 비판적이고 개혁적인 두 편의 저작물이 1차 아랍 이스라엘 전쟁 직후 등장했다. 하나는 20세기의 위대한 아랍 지식인 중의 한 명인 콘스탄틴 주라이크의 저작이다. 1948년 8월 주라이크가 베이루트에서 발간한 영향력 있는 소논문 <대재앙의 의미(Ma'nat al-Nakba)>로 인해서 이 전쟁에 알나크바라는 아랍어 이름이 붙게 됐다. 
또 다른 획기적인 저서는 무사 알라미라는 팔레스타인 명사가 쓴 것이었다. 그는 1949년 3월에 발표한 소논문 <팔레스타인의 교훈(Ibrat Filastin)>에서 아랍의 완패와 민족 부흥의 길에 대해서 숙고했다. 
아랍 분할의 광경은 두 저자 모두에게 아랍 통합의 필요성을 각인시켰다. 1차 대전 이후의 합의와 영국 및 프랑스의 아랍 세계 분할로 아랍 민족은 분열됐고 약화됐다. 따라서 아랍인들은 연대를 통해서 제국주의 질서의 분할을 극복해야만 하나의 민족으로서 잠재력을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주라이크는 통일이라는 장기적인 목표에 앞서서 기존 아랍 국가들에게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변화들"을 촉구했다. 
반면 알라미는 "아랍의 프로이센"이 등장한다면 무력을 통해서 통합을 달성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아랍 고위층에 포진한 수많은 민족주의자들에게 아랍의 프로이센의 역할은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아랍 시민들은 갈수록 점점 더 통치자에게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민족 독립투쟁을 이끌었던 옛 정치 엘리트들은 제국의 주인들과 손을 잡음으로써 오점을 남겼다. 알라미와 주라이크가 제안한, 연대의 힘으로 현대의 도전에 맞서는 자율적인 시민으로 구성된 대아랍 국가라는 해결책이야말로 확실한 처방전으로 보였다. 
시대가 변하고 있었다. 아랍 통치자들은 팔레스타인에서의 패배로 인해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아랍 민족주의의 부름에 답한 새로운 세대가 자신들의 정부를 첫 표적으로 삼았던 것이다. 
-383~385쪽

팔레스타인 재앙은 진정한 의미에서 아랍 세계에 대한 유럽의 영향력을 종식시켰다. 유럽에서 만들어진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함으로써 유럽은 2차 대전 직후 약점을 드러냈다.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 후 2등 국가로 전락했다.
1949년 시리아, 1952년 이집트, 1958년 이라크에서 권력을 장악한 젊은 장교들은 영국이나 프랑스와 어떤 연계도 없었다. 대신에 그들은 새로운 세계의 강대국들, 미국과 소련에 의지하게 되었다. 제국주의 시대가 끝나고 냉전이라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 아랍인들은 새로운 규칙에 또다시 적응해야만 했다. 
-393쪽

 

아랍의 모색. 이런 이야기들 읽는 것, 참 재미있다.

그리고, 드디어 나세르의 시대.

 

이집트의 농업인구 중 일부만이 1952년의 토지 개혁으로부터 실질적인 혜택을 보았음에도 이집트 시민들은 이 정책에 엄청난 호의를 보였다. 대중의 지지 속에서 군인들은 대담해졌고 정치에도 더욱더 직접적으로 관여하게 됐다. 
군인들은 재빠르게 이집트 정치에서 다당제를 추방했다.
혁명평의회가 군주제를 폐지한 1953년 6월 18일 나세르는 구 체제와 최종적인 결별을 고했다. 이집트는 공화국으로 선포됐고 무함마드 나기브 장군이 초대 대통령으로 지명됐다. 파라오 시대 이후 처음으로 이집트는 토박이 출신 이집트인의 통치를 받게 된 것이었다. 
-406쪽

1954년 10월 26일 무슬림 형제단 단원이 영국과 체결한 철수 협정에 대한 기념 연설을 하던 나세르를 암살하려고 했다. 그러나 나세르는 총알이 주변을 자신의 주변을 지나갈 때조차 영웅적으로 행동했다. 총격에도 위축되지 않고 연설을 잠시 중단했을 뿐이었다. 그가 열성적으로 연설을 재개하자 청중은 감동했고 그의 연설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이집트와 아랍 세계로 전달됐다.
"여러분과 이집트를 위해서 제 피를 쏟겠습니다. 그들이 저를 죽이도록 놔두십시오. 여러분께 자존감과 명예, 자유 정신을 불어넣을 수만 있다면 저는 상관없습니다. 가말 압델 나세르가 죽더라도 여러분 각자가 가말 압델 나세르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너무도 극적인 순간이었고 이집트 대중은 나세르를 자신들의 대변자로 선포했다. 1954년 말부터 그가 사망한 1970년까지 나세르는 이집트의 대통령이었고 아랍 세계의 총사령관이었다. 이전에도, 그 뒤로도 나세르만큼 아랍 무대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아랍 지도자는 없었고 또한 그만큼 세계 정세에 영향력을 끼친 사람도 찾기 힘들다.
-409~410조

나세르는 무기 제공의 대가로 외국 정부들이 막 획득한 이집트의 독립성을 훼손하는 조건들을 반드시 내세운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됐다. 나세르는 처음에는 미국의 도움을 기대하며 접근했다. 미국은 원칙적으로는 도와줄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무기 발주를 진행하기에 앞서 이집트가 지역 방위조약에 가입하기를 원했다. 
1953년 5월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이 이스라엘과 아랍국들 간의 평화협정 체결을 촉구하고 소련을 중동에서 고립시키는 임무를 가지고 카이로를 방문했다. 덜레스는 중동방위기구(MEDO)라는 새로운 지역 방위조약에 가입한다면 미국은 기꺼이 이집트를 도울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나세르는 즉각 거부했다. MEDO는 영국군 주둔을 연장시킬 수 있는 근거를 제공했기 때문에 그 어떤 이집트 지도자라도 허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세르는 이집트인들이 소련의 위협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덜레스에게 이해시킬 수 없었다. 이집트에게 실질적인 위협은 이스라엘이었다. "어떻게 나의 국민들에게 수에즈 운하에서 겨우 60마일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권총을 쥐고 있는 살인자는 등한시하면서 5천 마일이나 떨어진 곳에서 나이프를 쥔 누군가가 걱정된다고 말할 수 있겠소?"
-411쪽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한 작전은 영화 같다.

 

나세르는 외국이 개입할 가능성을 80% 정도로 추정했다. 그것은 일종의 도박이었지만 나세르는 오로지 외국의 지배로부터 이집트의 독립을 지키는 데에 전력 투구해야 한다고 믿었다.
"드 레셉스, 드 레셉스. 그가 10차례 정도 드 레셉스만을 반복하자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실 나세르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는데, 경청하던 유니스 대령이 드 레셉스의 이름이 처음 등장하자마자 라디오를 작업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각하의 연설 나머지 부분은 듣지 못했습니다"라고 훗날 대령은 나세르에게 고백했다. 
-425쪽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수에즈 분쟁을 이해할 수 없었다. 냉전이 한창인 와중에 영국과 프랑스가 여전히 제국주의 세력처럼 행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관점에서 수에즈 위기는 완전히 재앙이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공격하기 딱 6일 전인 10월 23일에 헝가리에서 혁명이 터졌다. 소련은 헝가리에 소련군을 배치하면서도 서구의 침략에 맞서고 있는 나세르의 이집트를 옹호함으로써 도덕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서구가 소련을 저지하기 위한 견고한 전선을 가장 필요로 했던 이 시기에 나토의 결속력이 깨진 것이었다. 아이젠하워는 헝가리에서의 실패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영국과 프랑스에게 돌렸다.
-430쪽

이집트에게 수에즈 위기는 군사적인 패배를 정치적인 승리로 바꾼 전형적인 사례였다. 생존 그 자체만으로도 중요한 정치적 승리로 간주되었고 이집트인들과 아랍 세계 전역의 나세르 신봉자들은 마치 나세르가 이집트의 적들을 실제로 패퇴시키기라도 한 듯이 경축했다.
이스라엘이 제국주의와 연계되면서 아랍 세계가 유대 국가를 인정하거나 평화를 구축하는 것은 물론이고 받아들이는 것조차 더욱더 어려워졌다. 이스라엘을 패퇴시키는 문제는 팔레스타인의 해방 뿐만 아니라 중동에서 제국주의 세력을 일소하는 문제와도 동일시되기에 이르렀다.
영국이야말로 수에즈 위기의 가장 큰 패배자였다. "어떤 아랍의 지도자도 수에즈 위기 이후 영국의 친구이자 나세르의 적일 수 없었다. 수에즈 위기로 영국은 아라비아를 상실했다."
-432쪽

 

아랍 민족주의의 쇠퇴.

 

냉전의 절정기에 워싱턴과 런던 모스크바의 관료들은 하나같이 이라크 혁명이 민족주의의 광풍을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나세르가 이라크의 쿠데타를 배후조종했으며 비옥한 초승달 전역을 통일아랍공화국의 지배 아래 둘 작정이라고 확신했다. 이것이 미국과 영국이 레바논과 요르단의 친서방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서 신속하게 개입한 배경의 부분적인 이유였다.
이집트의 대통령은 처음부터 이라크 혁명에 대해서 걱정을 했다고 한다. 1958년 당시의 아랍 세계의 심각한 변동성과 소련과 미국 사이의 긴장관계를 고려했을 때 지역 내의 또 다른 불안정은 이집트에게 불리할 뿐이기 때문이었다. 나세르는 유고슬라비아에서 티토를 만나던 중에 바그다드에서 쿠데타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다. 그는 흐루쇼프를 만나기 위해서 모스크바로 곧장 날아갔다. 후르쇼프는 "솔직히 우리는 대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소. 제3차 세계대전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단 말이오"라며 나세르에게 충고했다.
카심도 조국을 나세르에게 넘겨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이집트 공산당을 탄압한 카이로 정권에 냉담했다. 5년 동안 카심은 이집트와의 연대가 아닌 경쟁의 길로 이라크를 이끌었고 UAR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UAR에 이라크가 가담하지 않자 아랍주의의 3개의 축인 카이로, 다마스쿠스, 바그다드의 연대를 생각했던 중동 전역의 아랍 민족주의자들은 매우 실망하게 되었다. UAR에 합류하지 않겠다는 이라크의 결정은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아랍 민족주의는 고비를 넘겼고 1950년대 성공의 정상에 도달했던 나세르는 연속적인 좌절과 실패를 겪으면서 패배의 1960년대를 보내야 했다.
-449~451쪽

1967년의 패배로 아랍 정치는 급진적인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패전과 더불어 아랍 대중을 고의적으로 기만한 사실이 아랍 정치지도자들에 대한 신뢰도를 땅에 떨어뜨렸다. 나세르조차 민중의 조소를 비켜가지 못했다. 언제나 전임자에 대해서 인색했던 사다트는 패배 이후 어떻게 "사람들이 아무데서나 [나세르를] 비웃고 웃음거리로 만들었는지"를 떠올렸다. 다른 아랍 지도자들은 거인 나세르가 대좌에서 나가떨어지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483쪽

아랍의 패배로 이스라엘과의 모든 비밀 협상은 종식됐다. 하르툼 정상회담은 아랍 외교의 '3불 원칙'- 유대국가 승인 거부, 이스라엘 관료들과의 협상 거부, 아랍국가와 이스라엘 간의 강화 거부로 잘 알려져 있다. 이때부터 아랍 정치의 도덕적 우위는 정상회담 결의안의 준수 여부에 따라 결정되었다. 
-485쪽

역설적이게도 1967년의 아랍의 패배로 팔레스타인 무장투쟁은 해방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1948년부터 1967년까지 이집트와 요르단의 통치를 받던 가자와 서안지구가 이제 이스라엘의 점령지가 되면서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은 처음으로 점령지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대변하여 권리를 주장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팔레스타인은 패배한 아랍 국가들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게 됐다. 나세르와 아랍 지도자들은 파타나 다른 팔레스타인 동포들에게 가혹한 제한을 가해왔었다.
-491~492쪽

1970년 9월 28일 후세인과 아라파트를 환송하고 집으로 돌아온 나세르는 심장발작을 일으켰고 오후 5시에 사망했다.
"사람들은 밤늦은 시간임에도 집으로 쏟아져나와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나일 강변의 방송국으로 향했다. '사자가 죽었다.' 이 외침은 카이로에 울려퍼졌고 마을들로 퍼져나가며 이집트를 가득 채웠다. 곧 사람들이 이집트 전역에서 카이로로 몰려들기 시작했고 그 수가 1000만명에 달했다. 정부당국은 사람들이 먹을 곳도 없고 음식마저 부족해지자 기차 운행을 중단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동차나 당나귀를 타고 또는 걸어서 카이로로 왔다."
애도의 물결이 아랍 세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대규모 시위들이 아랍의 주요 도시들에서 벌어졌다. 나세르에 버금가는 지도자는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결코 없었다. 그러나 아랍 민족주의는 이미 소멸한 상태였다. 냉전 노선에 따라 미국의 우방국이 되거나 소련의 열성 당원이 된 아랍 국가들을 가르는 단층선을 나세르 외에는 그 누구도 넘나들 수 없었다. 1970년에 아랍 세계는 각자의 이해관계를 가진 별개의 국가들로 확실히 분열되어 있었다.
-503쪽

 

나세르의 희망, 나세르에게 걸었던 희망, 나세르의 좌절, 나세르에 대한 실망. 열망, 숭배, 환호, 환멸, 애도. 나세르에 관한 모든 에피소드들이 갑자기 정서적으로 훅 다가와버렸다.

 


1968년 3월 대규모의 이스라엘 원정군이 파타의 사령부를 파괴하기 위해 요르단 강을 건넜다. 팔레스타인 병사들은 이스라엘군이 철수를 마치기 전에 수많은 이스라엘 차량을 총유탄으로 무력화시켰고 소총으로 수많은 사상자들을 안겨주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카라마흐 전투'는 우세한 군과 싸워서 거둔 승리이자 이스라엘군이 포화 속에서 철수해야 했던 영예의 순간이었다. 의미심장하게도 '카라마(karama)'라는 단어는 아랍으로 영예 또는 존경을 의미한다. 1948년 이후 처음으로 아랍군은 이스라엘에 용감히 맞섰고 자신들의 적이 무적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석유의 시대.

 

1950년 경에 산유국들은 기존의 채굴권 조건들에 서서히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미국 회사 엑손, 모빌, 쉐브론, 텍사코가 합작해서 세운 아람코는 사우디 석유에 대한 독점권을 행사하고 있었는데 1949년에는 사우디 정부보다도 3배나 더 많은 수익을 거두었다. 아람코가 미국 연방정부에 낸 세금이 사우디가 거둔 것보다도 무려 약 400만 달러나 더 많았다.
베네수엘라는 1943년에 채굴권 보유자들과 석유 수익을 50대 50으로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아랍국들도 같은 비율로 분할하기로 결정했다. 사우디 정부가 1950년 12월에 아람코 합작 회사와 50대 50 분할을 두고 협상했고 다른 아랍 산유국들도 재빨리 선례를 따랐다.
1960년대가 되자 산유국들은 자국 최고의 인재들을 서구의 주요 대학으로 유학을 보내서 지질학, 석유공학, 경영학을 공부시켰다. 관직으로 복귀한 새로운 세대의 아랍 기술관료들은 외국의 석유회사들이 자국의 천연자원과 국가 경제에 행사하는 권력에 애가 탔다. 압둘라 알 투라이키는 제1세대의 아랍 석유 전문가였다. 이집트에서 아랍 민족주의 교육을 받고 텍사스 대학교에서 화학과 지질학을 수학했고 1948년에 돌아와 1955년에 석유 및 광산 업무 부서를 책임지게 된 그는 석유 산업계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사우디인이 되었다.
-506~507쪽

아랍 산유국들은 1959년에 BP가 석유 공시가를 10% 인하한다는 결정을 내리자 크게 동요했다. 문제는 선유국들에게 사전 통보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1959년 4월 알 투라이키는 카이로 교회에 있는 마아디의 요트 클럽에서 쿠웨이트, 이란, 이라크의 정부 대표들과 비밀리에 만났다. 아랍 석유 관료들은 석유 가격을 방어하고 국영 석유회사 설립을 위한 위원회를 구성하기로 신사협정을 체결했다. 50대 50 수익 분할의 장벽을 깨서 그 비율을 60 대 40으로 조정하는 것이었다. 
알투라이키는 석유 회사들에 맞서서 베네수엘라와 제휴하자는 제안을 들고 이라크를 찾았다. 사우디 석유장관은 범 세계적인 카르텔 형성을 제안했다. 1960년 9월 14일에 이란, 이라크, 쿠웨이트, 사우디, 베네수엘라는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창설을 선포했다.
1956년 알제리 그리고 1959년에 리비아에서 채산성이 있는 양의 석유가 발견됐다. 리비아는 당시 가난하고 후진적인 왕국이었다. 1943년까지 이탈리아의 식민 통치를 받았던 리비아 지역은 연합군이 이탈리아를 점령한 이후에는 영국과 프랑스의 공동 통치를 받았다. 트리폴리타니아, 키레나이카, 페잔 세 지역이 1951년에 독립을 획득한 리비아 연합왕국으로 통합되었다.
영국은 강력한 사누시 교단의 지도자인 사이드 무함마드 이드리스 알 사누시에게 추축국에 맞섰던 전시의 공로에 대한 보상으로 리비아의 왕위를 주었다. 석유가 발견되기도 전인 시굴 단계에서부터 리비아는 자신들의 석유자원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서 열심이었다. 다른 아랍국들과 달리 이드리스 왕 정부는 표적 탐사 지역을 여러 작은 채굴권으로 쪼개서 독립 석유회사들에게 혜택을 주기로 결정했다.
-509쪽

 

1968년에도 9개의 걸프만 연안국들인 바레인, 카타르, 아부다비, 두바이, 샤르자, 라스알카이마, 움 알 카이완, 푸자이라, 아즈만은 영국의 보호령으로 남아 있었다. 통치자들은 석유가 풍족한 자국 영토에 대한 야욕으로 가득 찬 사우디나 이란에 맞서서 소국으로도 생존할 수 있게 해준 협정에 매우 만족했다. 
걸프에서 탈식민화 과정을 촉발한 것은 트루셜 스테이츠를 통치하던 셰이크들이 아닌 영국이었다. 1968년 1월에 해럴드 윌슨의 노동당 정부는 1971년 말까지 수에즈 동부에서 영국 병력을 철수하겠다고 발표하여 걸프의 통치자들을 매우 놀라게 했다.
셰이크들의 첫 반응은 영국이 떠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영국이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이 지역을 보호한다는 협정의 의무에서 벗어나는 것을 거부했다. 사우디는 아부다비의 대부분 지역에 대해서 권리를 주장하고 있었고 이란은 섬나라인 바레인과 군소 섬들에 대한 통치권을 선포했다.
1970년 이란의 샤는 바레인에 대한 권리 주장을 단념했다. 이에 바레인의 통치자 셰이크 이사 빈 살만은 다른 트루셜 스테이츠와의 통합 논의를 중단하고 1971년 8월 14일에 독립을 선언했다. 바레인의 이웃이자 오랜 경쟁자인 카타르도 재빨리 9월 3일 선례를 따랐다. 
남은 7개 국가 사이의 이견은 상당했지만 극복할 수 없는 정도는 아니었다. 영국의 철수기한이 다가오자 11월 25일6개국은 아랍에미리트연합국을 형성하는 데에 합의했고 결국 라스알카이마도 합류했다. 
514~515쪽

 

PLO가 망명정부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국제사회에 새로운 모습을 확실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1973년 아라파트는 사이드 함마미를 PLO 대표로 지명해 런던으로 파견했다. 함마미는 이-팔 분쟁에 대한 해결책으로 두 국가 해법을 주장하는 논설을 타임스에 발표했다. 
우리 아브네리라는 이스라엘 언론인이자 평화활동가가 함마미의 논설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 10대의 나이로 이르군에 가담했었던 그는 훗날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과 이야기하는 자신을 비난하는 이들에게 "당신들은 테러리즘에 관해서 나에게 뭐라 할 수 없소, 내가 바로 테러리스트였으니까 말이오"라며 입을 다물게 했다. 
3선의원으로 헌신적인 시오니스트였음에도 아브네리는 오래 전부터 두 국가 해법을 지지해왔다. 메나헴 베긴은 "아랍인 아브네리는 어디에 있소"라고 물으며 그를 비웃곤 했다.
1973년 12월 함마미는 타임스에 두 번째 칼럼을 썼다. 이번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상호 인정을 주장했다. 아브네리는 함마미와 접촉해보기로 결심했다. 폭력적인 테러가 난무하던 1970년대 초에 팔레스타인 과격분자들이나 모사드나 모두 적들을 암살하는 데에 열심이었다. 함마미와 아브네리는 이러한 위험을 감수하면서 만남을 가졌다. 분쟁을 평화롭게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두 국가 해법뿐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535-536쪽


 

1977년 5월 베긴의 리쿠드당이 처음으로 노동당을 제치고 승리를 거두었다. 대이스라엘을 주창하는 전직 테러리스트보다도 더 비타협적인 협상 파트너를 상상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모로코 왕 하산2세와 루마니아 대통령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를 통해 이집트 대통령에게 회유적인 메시지를 보내 첫 접촉을 시도한 이는 다름 아닌 베긴이었다. 사다트는 심사숙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정치인들이 반대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평화운동 도모에 도움이 될 완벽한 외부 인사를 선택했다.
부트로스갈리는 콥트 기독교도였고 부인은 저명한 유대인 가문의 일원이었다. "저는 그들의 나라에 갈 준비가 돼 있으며 심지어는 이스라엘 국회에서 그들과 이야기할 준비도 돼 있습니다." 부트로스갈리는 사다트의 이 연설을 경청하려고 회기에 참석했던 아라파트 의장이 "이 말에 가장 먼저 우레 같은 박수를 친 사람이었다"라고 회고했다. "아라파트나 나의 동료들, 그리고 나 역시 대통령이 암시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일주일 후에 부트로스갈리는 무바라크 부통령이 "다음주 이스라엘에서 대통령이 발표할" 연설문의 초안 작성을 부탁했을 때 사다트의 말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게 됐다.
-553~554쪽

 

대다수의 레바논인들은 1975년의 내전이 전적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탓이라고 생각했다. 1970년대 중반에도 여전히 마론파 유력 인사 중의 한 사람이었던 카밀 샤문 전 대통령에게 이 분쟁은 결코 내전이 아니었다. 하지만 
레바논 사람들 간의 불화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였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레바논 정치를 재규정하려는 다툼 속에서 촉매제가 되었을 뿐이었다. 
1970년대 초반에 일부 기독교도들과 무슬림, 드루즈인, 범아랍주의자, 좌파 조직들이 모여서 국민운동이라는 정치연합을 만들었다. 목표는 낡아빠진 종파주의 체제를 전복해 1인1표의 세속적인 민주주의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연합의 수장은 드루즈파 지도자 카말 줌블라트였다. 줌블라트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그의 주장은 과반수의 무슬림이 지배하는 나라로 만들려는 의도로 이해됐다. 현상 옹호자들과 사회혁명 지지자들 간의 충돌이 1975년 봄에 절정에 이르렀다. 
-541-542쪽

시리아가 개입한 1977년부터 베이루트 폭탄테러가 발생한 1983년까지 레바논 내전은 갈수록 복잡해졌다. 1975년 팔레스타인이 연루된 레바논 분파들 간의 내전으로 시작됐지만 1983년에는 직접적으로는 시리아와 이스라엘, 이란, 유럽, 미국이 그리고 간적적으로는 민병대를 지원하고 무기를 제공한 이라크, 리비아, 사우디, 소련 같은 더 많은 나라들이 관련된 지역분쟁이 돼 있었다.
시리아는 내전에서 한쪽이 확실한 승리를 거두지 못하도록 빈번히 편을 바꿔가며 기민하게 행동했다. 좌파 무슬림 민병대를 격퇴하자마자 마론파에게 등을 돌렸고, 새로이 부상한 레바논의 시아 무슬림 세력과 제휴하기도 했다.
-584쪽

시아파는 여전히 국내 종파들 중에서 가장 빈곤하고 정치적인 권리도 가장 많이 박탈당한 처지였지만 수적으로는 레바논에서 가장 큰 공동체였다. 중심지는 레바논에서 가장 가난한 남부 레바논과 북쪽의 베카 계곡이었다. 
1960~70년대에는 다수의 시아들이 바트당이나 레바논 공산당, 시리아 사회민족당 같이 사회 개혁을 약속한 세속주의 정당에 끌렸었다. 레바논 가계의 카리스마적인 이란 성직자 무사 알 사드르가 시아파를 규합하여 '버림받은 자들의 운동(Harakat al-Mahrumin)'으로 알려진 대중 정당을 결성하고 좌파 정당들과 경쟁을 시작한 것이 1970년대였다. 내전이 발생하자마자 이 정당은 아말이라는 자체 민병대를 결성했다. 
아말은 1976년 줌블라트의 연합이나 팔레스타인 운동조직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남부에서 팔레스타인의 영향력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라고 생각한 시리아와 제휴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레바논 시아파와 시리아의 동맹의 시작이었다. 
알 사드르는 1978년 리비아 여행도중 실종됐다. 그는 생전에 이란 혁명을 보지 못했지만 1979년의 혁명은 남부 레바논의 시아파에게 커다란 자극제가 됐다. 호메이니의 초상화가 베이루트 남부 빈민가와 바알베크의 로마 유적지에서 알 사드르의 초상화와 나란히 걸렸다. 
-585~586쪽

 

뒤이어 헤즈볼라, 그리고 로버트 피스크가 "자살 폭파범이라고? 이러한 생각은 상상하기도 힘들 것 같다"(599쪽)고 표현했다는 레바논에서의 자폭테러의 충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저자는 1988년 인티파다에 대해서는 이렇게 표현한다. 

 

돌팔매질을 하는 시위대에 중무장한 병사들이 실탄 사격을 하는 영상에 놀란 국제 여론 때문에 국방장관 라빈은 "완력과 물리력 그리고 구타"를 사용하라고 명령했다. 미국 CBS방송국이 1988년 2월에 나블루스 인근에서 팔레스타인 청년들에게 끔찍한 구타를 가하는 이스라엘 병사들의 영상을 내보내면서 겉으로는 온건해 보이던 이같은 정책의 잔악성이 폭로됐다. 한 병사가 수감자의 팔을 잡아당기며 뼈를 부수기 위해 커다란 돌로 반복적으로 내려치는 장면이 뚜렷하게 보였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폭력적인 대응과는 대조적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비폭력 저항 전략을 고수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들은 결코 화기를 사용하지 않았고, 그 결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테러리스트인 반면 이스라엘은 적에게 포위된 다윗으로 묘사했던 수십 년 간의 서구 여론은 완전히 뒤집어지게 됐다. 
-617쪽

 

국가가 없던 팔레스타인은 물론 튀니지,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 예멘이 아랍의 노동력 수출에 적극 참여했지만 단연코 이집트가 가장 많은 노동력을 수출했다. 산유국으로 향한 아랍 이주노동자는 1970년의 약 68만명에서 1973년 석유 금수조치 이후 130만명으로, 1980년에는 약 300만 명으로 증가했다.
이집트 사회학자 사드 에딘 이브라힘은 산유부국과 산유빈국 간의 노동력과 자본의 교환에 기인한 "새로운 아랍 사회질서"를 발견했다. 이집트가 리비아와 전쟁에 돌입한 1977년 여름에 40만 명의 이집트 노동자 중 누구도 보복으로 추방되지 않았다. 실용주의는 사다트가 이스라엘과 강화를 맺기 위해서 아랍 대열에서 이탈했을 때도 여전히 유효했다. 이집트 인력에 대한 산유국들의 수요는 캠프데이비드 협정 이후 오히려 증가했다.
-561쪽

 

중동에서 가장 막강한 군의 지지와 미국의 전적인 후원 아래 이 일대에서 가장 오랫동안 군림해 온 전제군주가 몰락하자 아랍 정치인들은 점점 더 큰 우려의 눈길로 자국 내 이슬람 정당들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더 이상 아랍 민족주의의 수사를 믿지 않는 새로운 세대가 아랍 세계에서 부상하고 있었다. 새로운 세대는 아랍의 왕과 대통령들이 부정부패로 궁전을 짓고, 공익보다 개인의 권력을 우선시하는 것을 보면서 환멸을 느꼈다. 그들은 소련의 공산주의나 무신론을 좋아하지 않았다. 또한 미국을 아랍 국가들 간의 분할통치를 추구하고 팔레스타인의 권리보다 이스라엘의 이해관계를 독려하는 새로운 제국주의 세력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이란 혁명에서 얻은 교훈은 이슬람이 모든 적들을 합친 것보다도 강하다는 사실이었다. 
-563쪽

 

사이드 쿠트브에 대한 부분은 적어둘 필요가 있음.

 

감옥에서 쿠트브는 이슬람과 정치에 관한 20세기의 가장 권위 있는 저작인 <이정표(Ma'alim fiat-Tariq)>의 일부를 썼다. <이정표>에서 그는 서구 물질주의와 권위적인 아랍 세속 민족주의의 파산에 관한 사유의 정점을 보여줬다. 현대를 규정하는 사회정치적 시스템은 인간이 만든 것이고, 바로 그런 이유로 실패했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것들은 과학과 지식의 새로운 시대를 열기는커녕, 신의 가르침에 대한 무지 즉 자힐리야를 초래했다는 것이었다. 이 단어는 이슬람 이전의 암흑시대를 일컫는 것이었기에 반향이 컸다.
20세기의 자힐리야는 "가치를 창조하고 집단행동의 원칙을 규정하며 삶의 방식을 선택할 권리는 신이 규정한 것과는 상관 없이 인간에게 달려 있다고 주장하는 형식을 취한다"라고 쿠트브는 주장했다.
쿠트브의 전달력은 그 단순성과 직접성에서 기인했다. 그는 많은 아랍 무슬림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들에 근거해 문제-자힐리야-를 진단하고 분명한 이슬람적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의 비판은 제국주의 열강이나 전제적 아랍 정부 모두를 향한 것이었고, 그의 답은 무슬림이 우월하다는 가정에 근거한 희망의 메시지였다.
그러나 쿠트브가 그토록 서구 제국주의 열강을 비난했음에도, 그의 첫 번째 표적은 언제나 아랍 세계의 권위주의적인 정권이었고 특히 나세르의 정부가 그 대상이었다.
-370-371쪽

 

몇 페이지 뒤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오늘날 아랍의 일반 대중들은 1981년의 중동이 얼마나 세속적이었는지를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가장 보수적인 걸프 국가들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서구식 복장이 전통 복장보다 선호됐다. 많은 사람들은 공공연하게 술을 마셨다.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고등교육을 받고 직업을 가지게 되면서 남녀는 공공장소와 일터에서 자유롭게 어울렸다." (567쪽)

 

더 얘기하기엔 입이 아프다... ㅠㅠ

 

책의 뒷부분은 대략 '최근'의 일들인지라.

 

2014년 9월 후티 민병대원들이 어떤 저항도 받지 않고 사나에 입성했다. 그들은 시아파의 변종인 자이드 공동체에 속했는데 이 공동체의 이맘은 1962년 공화주의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수세기 동안 사나에서 예멘을 통치했었다. 역사적으로 자이드파는 주류인 이란의 시아파와 접촉한 적이 거의 없었고, 소수 공동체임에도 예멘에서 종파적 분쟁에 직면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21세기 아랍 세계를 괴롭히는 종파주의의 병폐로 인해 이러한 역사적 특이성은 쉽게 간과되고는 한다. 
-717쪽

 

시위 참가자들과 국제사회는 수많은 내부적 제약들을 간과했다. 아무리 반대파에 의해 매도됐어도 바샤르 알 아사드는 언제나 시리아에서 대폭적인 지지를 향유하고 있었다. 시리아의 소수 공동체인 알라위파, 드루즈파, 이스마일파, 기독교도는 전체 인구의 대략 25퍼센트를 구성한다. 소수 공동체의 많은 사람들은 알라위파 우위의 정부를 이끄는 아사드가 자신들을 차별하는 보수적인 수니파 무슬림 질서에 방어벽 역할을 해준다고 생각한다. 아사드는 또한 집권 바트당 의원들, 즉 민족주의적이고 세속적인 수니 무슬림들로부터도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아사드 정권과 열렬한 지지자들에게 승리란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다. 문자 그대로 알라위파와 바트주의자, 그외아사드 정권과 연계된 이들에게 닥칠 보복적인 집단학살에 대한 두려움이, 항복보다 나라 전체의 초토화를 기꺼이 택한 이유를 설명하는 데에 조금은 도움이 될 것이다.
-7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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