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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슬라프 주보크, <실패한 제국>

딸기21 2022. 10. 4.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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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제국 - 냉전시대 소련의 역사 1, 2 A Failed Empire
블라디슬라프 M. 주보크. 김남섭 옮김. 아카넷

소련 사람이 쓴 소련 역사책. 아주 재미있었음.

소련 출신으로 영국 LSE 교수인 저자는 20세기 러시아사 전문가라고 하는데, '혁명'과 '제국'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로 소련을 분석한다. 혁명으로 세워진 거대한 제국. 혹은, 혁명으로 세워졌지만 제국이 되고자 했고 끝내는 '실패한 제국'이 되고 만 나라. 혁명-제국 패러다임이라고 저자는 이름을 붙였지만 그 분석틀을 일관되게 강조했다기보다는 기록과 자료들을 꼼꼼히 뒤져 소련 시기의 정책 결정과정을 재구성한 책으로 보는 편이 낫겠다.

전체적인 서술은 지도자 중심으로 돼 있다. 저자는 지도자의 개인적인 특성은 때로는 흔히들 얘기하는 것보다 더 큰 역할을 하곤 한다고 강조한다. 스탈린, 흐루쇼프, 브레즈네프, 그리고 고르바초프. 이런 지도자들의 성격과 기질이 소련의 정책, 그 중에서도 데탕트와 페레스트로이카 같은 대외정책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설명하는데, 아주 재미있다.

책을 읽으면서 '소련에 대해선 내가 정말 모르고 있었구나'를 절감했다. 음... 그러니까, 그냥 낯선 나라에 대해 지식이 없는 백지상태라는 것이 아니다. 백지상태로 말하자면 소련보다 더 잘 모르는 나라들이 훨씬 많으니까. 성장기와 그 이후까지 오랜 기간 동안 소련은 '알 수도 없고 알려 해서도 안 되는 나라'였기 때문에 저 크고 중요한(중요했던) 나라에 대해서는 암흑상태일 수밖에 없었음을 새삼 깨달았다고나 할까. 소련 사람이 쓴 소련 역사에 대한 책/글을 읽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고, 그것이 재미의 한 포인트가 됐다.

또 하나, 책이 출간된 것은 2007년이고 국내에 번역된 것은 2016년이다. 번역되자마자 입수한 뒤 책꽂이에 꽂아 두고 있다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보며 불현듯 떠올라 펼쳤으니, 저자가 쓴 내용과 지금의 상황에는 15년이라는 시차가 있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저자는 지금 러시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2000년대 중반의 러시아에 대한 평가와 지금의 평가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2022년에 책을 읽기를 잘 했다. 2016년에 읽었더라면 한 가지 재미포인트가 줄어들었을 수도 있으니까(라는 되도 않는 소리를 지껄여본다).

오늘날 러시아는 소련의 부담을 지우고 소련을 파멸시킨 권위주의 체제와 서방과의 대결이라는 유혹에 다시 빠져든 것 같다. 이는 1945년 이후 스탈린이 걸었던 과거를 재평가하고 그 후의 소련 지도부들이 더욱 선진적이고 훨씬 부유한 적들에 맞서 그렇게 오랫동안 왜 그리고 어떻게 대결을 지속했는지를 이해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이다.
필자는 소련이 '악의 제국'으로 간주되는 것은 역사의 희화화라고 생각한다. 특히 스탈린 통치 아래에서 많은 악이 존재했으나 소련 역사에는 2차 대전에서 나치 독일과 일본에 거둔 승리, 스푸트니크의 발사와 최초의 우주인, 문화적 성취와 스포츠 업적, 그리고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그의 '신사고'의 출현 같은 인류의 영감을 준 위대한 사건들도 많았다.
어떤 역사가(각주를 보니 Odd Arne Westad)가 미국을 '자유의 제국'이라고 부르고 소련을 '정의의 제국'이라고 규정한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이 책은 우익의 악의와 좌익의 낭만주의를 배제하고 소련이라는 대안을 살펴보려는 시도이다.
-16쪽

고르바초프는 점잖게 빠져나오는 데는 성공했으나 제대로 편입하는 데는 실패했다. ... 그들은 자신들의 개혁주의 역량을 압도해 버린 고립주의와 민족주의라는 힘을 풀어놓았다. 훨씬 더 중요한 사실로는 고르바초프 지도부가 인민들의 경제적 기업가 정신을 불러일으켜 소련 경제를 세계 시장의 힘에 적응시킬 수 있는 전략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17쪽

나는 모스크바 대학의 학생으로서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을 때 소련의 실패를 붙잡고 씨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사회적 낙관주의 및 높은 기대와 고통스럽고 힘들게 결별하는 일이었다.
내 세대는 흐루쇼프 치하에서 이루어진 제한된 자유화 정신이 점점 희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나는 내 세대가 유럽 계몽주의의 또 다른 모습인 공정하고 번영하는 사회라는 기술관료적 이상에 고무되었음을 깨달았다. 내 세대의 북극성인 진보와 발전이라는 정신이 소련 땅을 완전히 떠나 남한, 타이완, 싱가포르로 옮겨갔고 심지어 중국에서도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을 이미 알았다.
-18쪽

소련의 희망은 거창한 실패의 씁쓸한 자각으로 바뀌었다. '정의의 제국'은 '실패한 제국'으로 판명되었다. 그것은 수 세대의 러시아인들이 검소한 삶에 대한 보상으로 누렸던 사회적 공정성이라는 희망뿐만 아니라 '세계사의 중심'이라는 감정도 파괴했다. 불행히도 20년 뒤 1990년대의 충격으로부터의 회복은 길을 잘못들었다.
소련 시대와 과거의 초강대국에 대한 향수는 과거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항상 수반한 것은 아니었다. 사태의 반전과 2014년 이후의 러시아 우크라이나 갈등은 새로운 골치 아픈 질문을 제기했다. 푸틴은 소련의 재건을 시도할 것인가. 우리는 냉전으로 되돌아가고 있는가. 필자는 똑같은 강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듯이 과거로의 복귀는 없다고 믿는다
-19쪽


나도 궁금하다. 아마 모두가 궁금할 거다.
푸틴의 러시아는 똑같은 강에 두 번 들어가려고 하는 것인지. 그게 과연 가능할지.

푸틴 2기 집권 이전에 쓰인 책이지만, 어쨌든 러시아 학자가 본 '러시아를 위한 변명'도 기록해둠.

1996년에 미국은 폴란드, 체코, 헝가리의 나토 가입을 지지했다. 그때부터 나토는 문호 개방 정책을 채택해 어떤 유럽 나라도 자신의 대열에 합류하도록 요청했다. 냉전 시기 동안 미국은 노르웨이인 역사가 예이르 루네스타의 유명한 말을 빌리면 '초대받은 제국'으로 행동했었다. 이제 나토가 이런 식으로 행동했다. 클린턴 행정부는 나토와 러시아 사이에 특별한 동반자 관계를 제공하겠다고 러시아인들을 안심시켰다. 러시아는 받아들였다.
-22~23쪽

경제 변화의 엄청난 충격은 러시아 사회에서 옐친 정권과 그 민주주의적 경로에 대해 거대한 심리적, 정치적 반발을 자아냈다. 러시아 민족주의가 폭발하면서 대재앙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을 관찰자들은 우려하기 시작했다.
1999년 이 모든 일이 러시아의 대외 정책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반미주의가 빠른 속도로 커져갔다. 러시아 정부는 미국과 미국 사회를 모방하는 대신에 '워싱턴 합의'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러시아에 대해 어떤 혁신적 비전이나 일관된 전략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첫째, 러시아는 전략적 우선 문제로 취급되지 않았다. 둘째, 러시아에 대한 미국의 정치는 미래보다는 과거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스탈린의 전체주의 및 굴라그의 이미지를 유대인 포그롬의 기억 및 후진적인 아시아 전제주의의 신화와 뒤섞었다. 체첸에서의 전쟁에서 러시아군이 보여준 부적절한 잔혹 행위는 이 러시아 혐오증적 이미지를 부활시켰다.
1990년대 말에 미국의 정치 담론에서 러시아는 더 이상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나라가 아니라 약탈되고 파산한 핵무장의 무정부지대이며 세계에서 가장 악질적인 도둑 정치 체제였다.
-26~27쪽

러시아는 터무니없는 이유로 미국 시장에 정상적으로 접근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무역 최혜국 지위를 소련에게 부여하는 것을 거부한 1974년 미국 법률이 러시아에게 적용되었던 것이다. 수많은 미국 민간재단, 비정부기구, 경제·정치자문관, 종교 선교사들이 러시아에 몰려들어 반쯤은 식민지 개척자처럼 행동하면서 러시아인들을 강연과 전향의 대상으로 취급했다.
폴란드, 루마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에서 많은 사람들은 러시아인들도 공산주의와 스탈린주의의 희생자였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이 나라들의 많은 이들은 포스트 공산주의 러시아가 단지 구 제국의 환생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닌가라고 의심했다. 일부 동유럽과 발트 국가의 정치인들은 나토의 목적이 그들을 러시아 제국주의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28쪽


서문에 적힌, '푸틴을 위한 변명'도 적어두자.

크렘린의 관리들은 새로 발견된 러시아식 현실 정치의 안경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았다. 고르바초프의 이상주의적 메시아주의와 옐친의 낭만적 서구주의의 유산은 새 러시아 지도부에게 좋은 의도는 힘보다 덜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러시아는 1990년대처럼 약하고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국가가 더는 아니었다.
크렘린은 매스미디어와 정치뿐만 아니라 대기업도 통제하는 중국식 권위주의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다. 푸틴과 그의 측근 노련한 KGB 요원들은 국가기구를 이용해 대기업을 불시에 단속하고 푸틴의 지인과 그 자식들이 경영하는 국영 독점체인 국가 챔피언들을 창출했다. 푸틴과 그의 부하들은 서방 세력에 의해 조정될 수 있는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서방 세력에 의해 조정될 수 있는 어떤 대중정치 기회도 꼼꼼하게 제거했다.
-32쪽

수백만 명의 젊고 교육받은 러시아인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중간 계급이 출연했다. 이들은 상당한 봉급을 받고 영어를 말하며 유럽, 터키, 이집트, 인도, 태국에서 휴가를 즐겼다. 아파트, 시골 별장, 차량을 소유했으며 정보를 찾아 인터넷을 탐험했다. 러시아인들은 푸틴 치하에서보다 더 잘 살았던 적이 결코 없었다.
-33쪽


몇 년 전 일이기는 하지만 방콕 까오산 거리에 러시아인들이 정말 많더라...

2004년에 러시아인의 58%가 푸틴이 러시아를 존중받는 강대국으로 되돌리기를 원했다. 그들은 신화화된 소련의 과거에 대한 향수를 공유했으며 국가가 통제하는 전자 미디어는 이 향수를 더욱 부채질했다. 이 두 가지 추세, 즉 서방의 확대와 러시아의 부활은 마찰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2005년에 푸틴은 나토 러시아 관계를 국제 테러리즘에 맞서 국제적 안정을 보장하는 데 필요한 동반자 관계로 요약했다. 하지만 2006~2008년에 러시아는 점차 나토와 미국에 도전적으로 되었다.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 것은 러시아를 국제적인 경제적 제정적 제도들로 통합시키는 일이 러시아와 그 나토 인접국 사이의 사소한 마찰에 의해 방해를 받았다는 사실이었다. 처음에는 폴란드, 다음에는 리투아니아와 에스토니아가 러시아의 세계무역기구 가입을 막았다. 동유럽 국가들은 러시아를 우회하고 러시아로부터 유럽의 에너지 독립을 강화시킬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가는 새로운 송유관 건설을 추진했다. 크렘린과 점점 늘어나는 러시아인들은 발트 국가들, 폴란드, 체코를 '러시아 혐오 벨트'로 여겼다.
-35쪽

스탈린이 조지아를 위해 그은 국경은 러시아의 국경과 마찬가지로 분할과 정복의 원리에 바탕을 둔 자의적인 것이었다. 스탈린주의가 캅카스에서 국경을 획정한 방식은 서방 식민주의가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국경을 획정한 방식과 동일했다. 스탈린주의는 큰 민족들은 한 덩어리로 뭉치고 오세티아인을 비롯해 작은 인종 집단은 분할했다.
소련이 붕괴한 후 조지아의 민족주의자들은 오세티아인과 여타 소수인종들의 자체를 없애고 그들을 조지아에서 쫓아내기 위해 군대를 동원했다. 그 대응으로 북캅카스의 비정규군이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서 조지아인들에게 반격을 가해 그들을 격퇴시켰다.
이 길고 피비린내 나는 내부 인종 갈등의 이야기는 당시 세계의 주목을 끌지 못했다. 하지만 2008년에 그것은 나토 러시아 교착 상태라는 배경화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문제가 달라졌다. 동유럽 국가들과 영국은 러시아 제재를 요구했다. 미국의 대 러시아 정책은 일부 미국 동맹국들이 러시아에 대해 품은 역사적 두려움의 인질이 되었다. 러시아가 소련 제국을 부활시키고 있던 두려움은 러시아와 인접한 작은 나라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데 이는 과장된 것이다.-38쪽


저자는 '그루지야(조지아) 분쟁'을 비롯해 옛소련권 국가들의 러시아 공포증이 과장된 것이었으며 서방에 의해 왜곡됐다고 주장한다. 지금도 그렇게 볼까?

아무튼 2000년대의 러시아는 더이상 탈냉전 직후의 형편없는 국가가 아니었다는 점, 그렇게 만들어준 것이 주로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따른 에너지값 고공행진이었다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듯.

[구정은의 세계] 미국 관리 50명 모아 저녁 대접한 러시아 대사

지정학적 의미에서 러시아는 유럽과 아시아에서 지역 강국으로 그럭저럭 회복될 수 있었으나 러시아가 성공을 거둔 것은 그 자신의 노력이나 광범한 개혁이 아니라 러시아에 유리한 지구적 추세의 결과였다. 중국과 인도로부터의 새로운 에너지 수요에 더해 러시아의 비장의 카드는 잘못된 미국의 정책들이었다.
-41쪽

미국의 군사적 방패와 기지들, 나토의 성급한 추가 확대, 피상적인 민주주의로의 전향 활동은 러시아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충분하거나 현명한 전략이 아닐 것이다. 러시아의 특별한 이해라는 주장 전부를 제국주의에 대한 발작적인 비난으로 대처해서는 안 된다.
-43쪽


이제 본격적인 소련의 역사로.

'대조국전쟁' 동안 '전선 세대' 혹은 '승리자 세대'가 소련에서 등장했다. 일부 사람들에게 그것은 생애의 가장 중요한 경험으로 남았다.
전쟁은 다른 심오한 효과도 있었다. 1941~42년에 소련군이 대대적으로 후퇴할 때 관리들이 보였던 무능력, 대실책 이기주의, 거짓말은 국가 및 당 기관과 많은 권리들의 권위를 손상시켰다. 나치즘에 맞선 정의의 전쟁이라는 풍조와 그들의 외국 경험은 그들로 하여금 정치적 문화적 자유화에 대한 꿈을 꾸도록 부추겼다.
젊은 참전 퇴역 군인들은 국가가 무료 버스 이용권만이 아니라 신뢰와 참정권 확대로 보상해 줄 거라고 기대했다. 그들 중에는 스탈린이 죽은 뒤의 사회적 문화적 해빙에 참여하고 궁극적으로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개혁을 지지할 미래의 자유 사상가들이 있었다.
-64~65쪽

반란적 분위기는 반란으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퇴역 군인들의 대다수는 사회적 무감각으로 침잠했고 일상생활에 적응하려고 애썼다.소극적 태도는 많은 퇴역 군인들이 집으로 들어온 후 느낀 충격과 극도의 피로감에서 주로 비롯되었다.
소련 인민들이 대조국전쟁 때 시작된 "느릿느릿 진행되는 탈스탈린화"를 계속 밀고 나갈 에너지와 제도를 결여한 사실은 특히 중요했다. 러시아인들은 전쟁 동안 경험했던 놀라운 민족적 각성을 개인적 자존과 자율적 시민행동으로 변화시키지 못했다. 동시에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소련 권력이 유럽의 중심부로 유례 없이 나아간 일은 엘리트들과 스탈린 간의 유대를 강화시켰다.
-71쪽

러시아인과 러시아화된 사람들은 스탈린을 전쟁 지도자로서만이 아니라 민족 지도자로서도 존경했다. 전시 동안 '데르자바(강대국)'라는 용어가 사전에 기입되었다. 러시아화 운동이 새로운 국경지대, 특히 발트 3국과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났다 이것은 문화적 압력 이상을 의미했다. 수십만 명의 라트비아인, 에스토니아인, 서부 우크라이나인들이 시베리아와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추방됐다.
-72쪽

러시아인은 국가기구의 가장 중요하고 민감한 부분들 내부에서 비러시아인 특히 유대인들을 대체하며 승진했다. 심지어 소련 군대가 폴란드의 나치 절멸 수용소를 발견하기도 전에 소련 선전 책임자인 알렉산드르 셰르바코프는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당과 국가로부터 유대인들을 정화하는 비밀 운동을 개시했다.
-73쪽


민족갈등을 부추기고 악용한 스탈린.

1945년에 스탈린은 헝가리와 슬로바키아로부터 루테니아와 부코비나 영토를 합병하여 소련령 우크라이나에 귀속시켰다. 우크라이나 인민들을 대상으로 공산주의 체제가 저지른 많은 끔찍한 범죄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 공산주의 관리들은 이제 스탈린을 우크라이나 영토 수집가로 숭배했다.
소련군이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의 '재통일'을 이룩한 후 그루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의 관리들은 터키와 이란에 속한 '조상 전래의 땅'을 회복할 기회가 왔다는 말을 입밖에 내기 시작했다.
새로운 영토와 영향권 획득이 러시아인이든 비러시아인이든 소련 관리들 사이에 팽창주의와 민족주의의 악령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은 전후 스탈린의 '팍스 소비에티카' 프로젝트의 에너지를 제공했다. 당과 국가 엘리트들이 인접국들의 영토를 탐내는 한 스탈린이 그들을 통제하기는 더욱 수월했다. 제국 프로젝트는 그렇지 않으면 스탈린 체제에 맞서 활동했을 세력을 흡수했던 것이다.
-79~80쪽

스탈린은 산업 재건과 재무장에 돈을 쓰기 위해 소련 인민들 특히 농민과 농업 노동자들을 피폐화하는 전전의 정책으로 돌아갔다. 스탈린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당국과 자신에게 분노하는지를 알았다. 하지만 또한 엘리트들만이 실제적인 위험을 제기하는 것도 알았다.
냉전이 세계를 분열시키고 스탈린의 입지가 탄탄해지게 되는 2년 안에 크렘린 독재자는 점점 더 큰 규모로 엘리트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점점 심해지는 서방과의 대결은 스탈린이 엘리트들에 대한 충분한 통제를 회복할 기회를 주었다. 그것은 또 소련 엘리트들과 관료층을 러시아화하고 강력한 민족주의 테마와 엄격한 인종적 서열 체제의 도움을 받아 소련 사회를 공고히 하는 데 필요한 정당한 이유도 제공했다.
-164~165쪽


이반 뇌제에서 푸틴까지, 크렘린의 역사

참 많이 달랐던 흐루쇼프.

흐루쇼프의 핵 벼랑 끝 전술에서 큰 문제는 분명한 전략적 목표가 결여됐다는 사실이었다. 혁명-제국 패러다임을 변함없이 견지한 결과 흐루쇼프는 1920년대 동안 그랬듯이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의 급진주의자 및 혁명가들에 대한 지지와 서방과의 지정학적 타협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게 됐다. 흐루쇼프의 핵 위협은 소련의 능력 부족을 대체할 수가 없었다. 점점 심해지는 충동적 행동은 이러한 상황을 악화시켰다.
최근에야 비로소 학자들은 미국의 침공에 맞서 쿠바를 보호하는 것이 후르쇼프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됐다. 공산주의의 최종 승리에 대한 믿음과 이 승리를 가속시키고 싶어 하는 욕망은 후르쇼프의 동기와 행동에서 항상적인 요인이었다.
-326~327쪽

가혹한 쿠바 교훈 이후 크렘린 지도자들은 군비 제한이라는 구상을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군부와 거대한 군산복합체 지도자들, 특히 원자력부 수장인 예핌 슬랍스키와 군산위원회의 수장인 드미트리 우스티노프는 군사개발에 대한 어떤 제한에도 계속 반대했다.
그러나 과학계의 강력한 로비가 변화의 토대를 마련했다. 많은 소련 핵과학자들은 세계적인 반핵 운동에 동정적이었다. 1950년대 말부터 1960년 2월 사망할 때까지 이고리 쿠르차토프는 핵실험의 일시적 정지를 위해 열심히 로비를 했다. 사하로프 이론 그룹의 일원이었던 빅토르 아담스키는 미국이 제의했으나 소련이 거부한 조건을 수용하라고 촉구하는 제안서를 흐루쇼프에게 썼다.
1963년 8월 5일 미국-영국-소련 협상의 결과 크렘린에서 제한실험금지조약이 조인됐다. 흐루쇼프의 아들은 소련 지도자가 이 조약에 "굉장히 기뻐하고 심지어 행복해하기까지"했다고 회고한다.
-342~343쪽


[구정은의 세계, 이곳] 우크라이나의 핵 중심 자포리자

중국과의 관계.

얄타 회담 후 몇 달 동안 스탈리는 극동에서 전리품을 챙길 큰 기회를 맞이했다. 모스크바는 민족주의자들과 외몽골에 인접한 중국의 북부 영토를 통제하는 중국 공산당 사이의 유일한 중계자였다. 중국은 또한 소련은 또한 덜 알려진 다른 자산도 있었다. 그들은 소련과 국경을 맞댄 신장 지역에서 분리주의 위구르 운동에 비밀리에 자금을 대고 무기를 보냈다.
-109쪽

스탈린은 마오쩌둥과의 회담에서 얄타 체제를 끝내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예상치 않게 중국은 철도와 뤼순 기지를 비롯하여 소련이 만주에서 갖고 있는 소유물을 모두 되돌려 줄 것을 요구했다. 스탈린은 화가 났지만 중국과의 동맹이 만주에서의 소련의 이해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결정했다.
1950년 2월 14일에 체결된 중-소 조약은 오랫동안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소련 대외 정책이 되었다. 동시에 조약은 스탈린이 오만한 태도를 취하고 중국을 동등한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으려 한 데 대해 마우쩌둥이 치욕감을 느끼면서 앞으로 닥칠 중소 경쟁의 토대를 놓았다. 1920년대 이래 처음으로 스탈린은 외국 공산주의자들을 단지 소련 대외 정책의 도구로서가 아니라 독자적 세력이나 심지어 파트너로 대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209쪽

스탈린 사망 후 크렘린은 더는 중국 지도자들을 하위 파트너로 대할 수도 없었고 대하고 싶지도 않았다. 간부회 지도자들은 경쟁적으로 베이징에 접근하고자 했다. 흐루쇼프는 만주에 있는 소련의 모든 자산을 중국에 돌려주겠다는 스탈린의 약속을 지켰다. 역사가 오드 아르네 베스타드는 1954~59년에 있었던 소련의 중국 지원을 '소련의 마셜 플랜'이라고 불렀다. 이는 당시 소련 국민소득의 7%에 해당했다. 심지어 간부회는 중국이 독자적인 핵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도 도와주기로 결정했다. 그 후 소련의 핵실험실은 중국이 우라늄탄을 제작하는 것을 돕고 심지어 중국에 기능성 시제품도 제공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겉으로 보기에 중-소 관계는 매우 좋았다. 하지만 물밑 아래에서는 이미 영구적 분열의 씨앗을 내포했다. 중국 지도부가 보기에 크렘린은 여전히 상급 파트너의 역할을 했다. 중국은 평등한 관계를 원했다. 그것은 새 소련 지도부가 무엇을 하든 어떤 것도 중국인 동맹자들을 만족시킬 수 없었음을 의미했다.
-268~269쪽

1956년 10월 헝가리 전역이 공산주의 정권에 반대하여 들고 일어났다. 당시 간부회 토론에서 예기치 않게 드러난 요인은 류샤오치가 이끄는 중국 대표단으로부터의 압력이었다. 중국 대표단은 10월 23일 폴란드 문제를 토론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하지만 중국은 헝가리 혁명에 관해 훈수를 두게 됐다. 중국은 소련 지도부가 바르샤바 협정국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반둥 회담의 평화 공존 원리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우쩌둥은 소련과 동유럽 위성국들 간의 분쟁을 중재함으로써 공산주의 운동에서 중심적 역할을 재고할 적절한 때라고 느꼈다.
-277쪽

1957년 11월 세계 공산당 회의에서 마오쩌둥은 흐루쇼프에게 핵과 미사일 기술을 공유할 것을 요청했다. 마오쩌둥은 중국과 협의하지 않고 스탈린을 비난한 비밀 연설 때문에 후르쇼프를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소련 군부가 합동 기지를 태평양에 건설하자고 요청했을 때 마우쩌둥은 화를 내며 거부했다. 1958년 7월 31일 흐루쇼프는 중국 지도자를 달랠 목적으로 매우 은밀하게 베이징으로 날아갔다. 대신 그는 집주인으로부터 모욕 세례와 수치스러운 대접을 받았다.
중국은 소련을 계속 깜짝 놀라게 했다. 1958년 8월 23일 인민해방군은 모스크바와 워싱턴에 경고도 하지 않고 국민당이 소유한 진먼 섬을 폭격하기 시작했다.
-314~315쪽


터키, 이란에 대한 태도

스탈린은 완(Van) 호수, 아르드빈, 카르스 주변의 동부 터키 주들을 합병하기 위해 아르메니아 카드를 이용하기로 했다. 1920년 8월 오스만 제국을 분할한 세브르 조약에 따라 이 주들은 아르메니아 국가로 배당되었다. 하지만 아르메니아인들은 무스타파 케말이 이끄는 터키군에 맞선 전쟁에서 패배했다. 레닌과 스탈린을 비롯한 볼셰비키 정부는 케말주의 터키와 동맹관계에 들어갔고 1921년의 소련-터키 조약에서 아르메니아 주들을 포기했다. 1945년 봄에 세계의 아르메니아인들은 크렘린의 정책에 희망을 걸었다.
-132~133쪽

런던에서 몰로토프는 소련에게 전 이탈리아 식민지인 트리폴리타니아(리비아)에 대한 위임 통치 권한을 달라고 연합국에 제안했다. 이것은 단지 전술적 계략이 아니라 전후 소련의 팽창주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표현이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과 영국의 저항으로 지중해로의 진출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터키도 소련의 요구에 강력히 저항했다. 소련의 최후 통첩은 민족주의 역풍을 불러일으켰다. 터키 지도부는 소련을 제외한 모든 해군 강국에게 해협을 폐쇄하기를 거부했던 것이다.
1945년 말과 1946년 초에 크렘린은 그루지야와 아르메니아 관리들을 통해 터키에서 소련의 목표를 수행하는 쪽을 택했다. 스탈린은 이 소련령 공화국들의 민족주의 열망을 이용했다. 스탈린의 계획에서 아르메니아가 갑자기 부각된 것은 그루지야 관리들을 심란하게 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민족 프로젝트를 육성했고 이 프로젝트에 따르면 분쟁 대상인 터키의 주들은 이른바 그루지야의 조상 전래의 영토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134~135쪽

1941년 히틀러가 소련을 공격한 후 소련군과 영국군이 이란을 점령했고 이들은 20세기 초부터 영국 제국과 러시아 제국의 이해 사이에 그어진 오랜 구분선에 따라 점령지역을 분할했다. 소련 정치국은 이란 석유에 접근하기로 결심했고 아제르바이잔 남부 주민을 압력 수단으로 이용하고자 했다. 전쟁과 점령 기간 내내 소련은 북부 이란에서 석유를 채굴할 권리를 합법화하려고 노력했으나 반공산주의 이란 정부와 마즐리스 다수파는 영국의 지원을 받아 이 시도를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138쪽

마즐리스는 외국 군대가 영토에 남아있는 동안에는 어떤 석유 채굴권도 금지한다고 결의했다. 미국 외교관들의 격려를 받은 이란 정부와 마즐리스는 이 문제를 유엔에 가져가기로 결심했는데 이 현명한 조치는 이란에서 게임 전체를 바꿔버렸다.
소련-이란 갈등은 미국 대외정책 집단과 군부가 반소련 태도로 바뀌던 바로 그때 발생했다. 1946년 3월경 이 집단들은 크렘린의 움직임을 공격적인 공산주의 패턴의 일부로 보기 시작했다. 조지 케넌은 스탈린이 아흐마드 콰밤 이란 총리를 만난 지 하루 뒤 모스크바에서 장문의 전보를 보냈다. 케넌은 미국이 소련을 신뢰할 만한 국제적 파트너로 변신시킬 수 없다고 설명하면서 소련 팽창주의를 봉쇄할 것을 제안했다.
스탈린은 이란 위기의 광범한 충격을 예측하지 못했다. 그는 이란을 둘러싼 소동을 또 하나의 신경전 정도로 여겼다. 미국이 갑자기 개입을 강화하자 스탈린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144~145쪽


중동 정책

새 대외 정책의 입안자들은 코민테른 시절에 인기 있었고 스탈린 통치 동안 쇠퇴한 '노동인민의 단결'과 '형제적 연대'라는 국제주의적 주제들을 다시 강조하기 시작했다. 흐루쇼프의 신념과 그의 기질은 러시아 중심주의적 쇼비니즘이 약화되고 이데올로기적 낭만주의가 소련 대외 정책에 다시 도입된 것과 큰 관련이 있었다.
흐루쇼프는 몰로토프처럼 이데올로기적으로 교조적일 만큼 충분히 교육받지 못했다. 그가 제국주의에 관한 레닌의 저작들을 과연 읽었는지는 의심스럽다. 흐루쇼프가 대외 정책 토론에서 제시한 주장들은 구조와 논리가 결여됐다. 동시에 그는 공산주의의 전 지구적 승리를 진정으로 열렬히 믿는 사람이었다.
그는 소련이 나치즘에 맞선 투쟁 과정에서 획득한 도덕적 이데올로기적 자산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흐루쇼프는 1945년 이래 특히 터키와 이란, 중국에 대한 스탈린의 노골적인 제국주의 정책들에 실망했다.
-256~257쪽

일부 소련 전문가와 외교관들은 중동에서 반소련 블록을 창출하려는 미국에 대한 아랍인들의 저항을 지지하고 싶어 했지만 감히 공식 노선과 다른 목소리를 내지는 못했다. 간부회의 외교 문서와 비밀 메모는 나세르가 냉전에서 비동맹 입장을 표명했음에도 '적' 심지어 '파시스트'라고까지 불렀다. 비슷한 견해는 모스크바로 하여금 1952~53년에 이란 총리 모하마드 모사데크의 접근을 거부하도록 했고 이 때문에 아마도 소련은 이란과의 관계를 개선할 기회를 잃었을 것이다.
흐루쇼프와 그 지지자들은 중동에서 아랍 민족주의의 잠재력을 재발견했다. 중앙위원회 서기 드미트리 셰필로프는 중동을 방문해 나세르를 만나 모스크바에 초청했다. 유럽과 극동에서 전략적 교착 상태가 지속되는 와중에 중동은 크렘린의 재개된 낙관주의와 이데올로기적 낭만주의의 새로운 출구를 제공했다. 소련이 설계한 체코슬로바키아 무기가 이집트와 시리아로 쏟아져 들어갔다. 아랍 중동을 확보하기 위한 모스크바와 서방 간의 투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다음 20년 동안 이 투쟁은 이 지역에서 유례없는 군비 경쟁을 야기할 것이며 세 번의 전쟁을 불러일으킬 터였다. 중동에서의 모험은 지정학적 도박으로 시작했으나 결국 1970년대 소련 제국 확장의 한 요인이 되었다.
-265~266쪽


흐루쇼프, 하면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일화... 신발에서 유황불까지, 유엔총회의 소동들

2권은 브레즈네프 시기의 데탕트와 고르바초프 시대의 극적인 변화에 대한 내용이다.

나는 해빙과 흐루쇼프의 탈스탈린화 프로젝트가 소련 대외 정책에 즉각적인 가시적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 프로젝트는 소련 사회의 교육받은 계층 내에서 광범위한 분열을 낳았고 서방으로부터 소련 사회의 총체적 고립이 종결됐음을 뜻했다. 스탈린 숭배의 파괴는 소련의 이데올로기적 합의에 손상을 가했다. 여기서 초점은 1950년대 말에 등장해 30년 뒤 냉전 드라마의 마지막 단계 동안 정치계와 문화계의 중심부로 진입한 엘리트 그룹과 네트워크이다.
이 엘리트들은 스스로를 셰스티데샤트니키, 즉 '60년대 사람들'이라 불렀다 그들의 집단적 노력은 고르바초프 치하에서 일어난 극적인 변화의 중요한 배경을 제공할 것이었다.
-134쪽

1956년 봄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소설 <닥터 지바고>를 완성해 원고를 <노비 미르>에 제출했다. 동시에 파스테르나크는 소련의 금기를 깨고 이탈리아의 공산주의 무소속 출판업자인 잔자코모 펠트리넬리에게도 원고를 보냈다. <노비 미르>는 원고를 거부했고 1957년 11월 <닥터 지바고>는 서방에서 출간돼 세계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문학적 대사건이 됐다.
1958년 10월 파스테르나크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흐루쇼프는 파스테르나크를 비난하는 거대한 운동을 개시했고 이 운동은 소련 문화계 전체의 충성심을 시험하는 자리가 되었다. 파스테르나크는 노벨상을 단념하지 않으면 안 됐고 건강은 중압감에 악화됐다. 파스테르나크는 1960년 5월 30일 암으로 사망했다.
-26쪽

흐루쇼프는 소련이 과학기술 소비재 분야와 전반적인 생활 수준에서 미국을 따라잡고 능가할 수 있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1957년에 그는 '미국을 따라잡고 능가하자'라는 구호를 들고 나왔다. 1959년 7월에 모스크바의 소콜리키 공원에서 미국 국립 박람회가 처음 개최되자 수백만 명의 모스크바 시민들이 미국 물건들을 구경하고 펩시콜라를 맛보려고 쏟아져 들어왔다. 흐루쇼프의 새로운 구호는 평범한 소련인들의 세계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버렸다. 그 후 오랜 세월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미국인들의 생활 수준과 비교하는 데 익숙해졌고 일종의 열등감을 발전시켰다.
-36쪽

흐루쇼프 치하에서 좀 더 젊은 간부들이 대두했는데 이들은 전쟁 경험을 양질의 교육과 결합한 사람들이었다. 당 지도자들 사이에서는 지식인들을 고문으로 고용하는 것이 유행이 됐다. 이는 '계몽된' 기관원들이라는 현상을 낳았다.
그들 중에는 앞으로 고르바초프 시대의 "새로운 사상가"가 될 사람들이 있었다. 고르바초프 자신이 이 추세의 수혜자였다.
-41쪽

글라스노스트의 설계자가 될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는 첫 교환 프로그램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컬럼비아 대학에서 1년 동안 수학했다. 당 지식인들 중 일부는 프라하에서 살면서 <평화와 사회주의 문제들>의 기자와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프라하는 국제 선전을 책임진 소련 관리들과 국제 문제와 세계 경제에 관한 전문가들이 서구 좌파들과 어깨를 맞대고 자유롭게 살던 독특한 장소였다. 프라하 그룹은 고르바초프가 권좌에 오른 후 페레스트로이카 두뇌 집단의 핵심을 형성할 것이었다.
-45쪽

과학계는 소련에서 낙관주의적 좌파의 토론 광장이었다. 군산복합체의 성장과 미국과의 경쟁에 고무된 과학자들은 소련에서 가장 유력한 엘리트 그룹의 하나였다. 군산복합체는 과학자들에게 수만 개의 새로운 일자리를 제공했다.
1962년에 이 복합체는 966개의 공장, 실험실, 설계실, 연구소로 이루어졌고 피고용자는 370만 명에 이르렀다. 시베리아와 극동 그리고 수십 개의 비밀 도시와 특별 학술 도시에 설치된 연구센터들, 원자력 부서가 건설한 모델 도시들, 학술원 기타 군산학 연계망과 관련된 기관들에서 젊은 과학자들이 일자리를 얻었다. 그곳에 거주한 사람들은 안정된 고용과 상대적으로 높은 급료 무료 유치원에서 무료 주택에 이르는 멋진 사회적 편익을 누렸다.
폐쇄된 비밀 도시들은 소련 내에서 초현실적으로 자유로운 공간이었다. 과학자들은 스탈린주의적 공산주의와 서방 자본주의 사이에서 제3의 길이 될 과학자와 지식인들의 '민주주의'를 도입하는 문제에 대해 토론했다. 그들 중 일부는 소련 체제가 과학자와 '계몽된' 기관원들의 동맹에 의해 '과학적으로' 바뀔 수 있다고 믿었다.
-45~46쪽

하지만 흐루쇼프 통치가 끝날 무렵, 소련 애국주의를 조장했던 유토피아 에너지는 고갈됐다. 브레즈네프 치아에서 소련 지도부는 개혁주의 프로젝트를 포기했다. 그들은 화석화된 이데올로기와 함께 사는 데 만족했다. 국내 개혁을 실행할 의지도 능력도 없던 브레즈네프는 대신 서방 열강과 데탕트를 개시했다. 데탕트 과정에 소련이 가담함으로써 외국인 혐오증이라는 스탈린주의 유산은 더욱 침식됐고 소련은 좀 더 넓은 세계로 다시 통합됐다.
-67쪽


브레즈네프 시절의 대외관계

대결의 가장 열렬한 옹호자들조차 소련이 베트남에서의 워싱턴과 하노이의 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단이 없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됐다. 게다가 베를린 위기와 쿠바 미사일 위기의 기억들은 여전히 너무 생생했다.
1967년에 새로운 충격적 사태가 발생했다. 동남아시아의 공산주의 진영은 폐허가 됐다. 인도네시아에서 수카르노 대통령이 물러나고 30만 명으로 추산되는 공산주의자와 동조자들이 수하르토의 군부에 학살된 후 소련은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리고 1967년 6월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군대를 격파했다. 아랍 국가들의 패전은 소련 지도부와 엘리트들을 경악시켰다. 정치국은 수카르노를 도와주고 싶었으나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었지만 중동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84~85쪽

극동에서 새롭고 위험한 군사적 대결이 나타났다. 중국과의 화해 희망은 '중국의 비합리적 공격성'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브레즈네프는 중국에 대해 인종주의 색채를 띤 공포를 공유했다. 그는 마오쩌둥 지도부도 신뢰하지 않았고 그들과 협상하기도 원하지 않아서 이 불쾌한 업무를 코시긴에게 맡겼다.
그러나 중국의 핵 능력이 그를 괴롭혔다. 훗날 키신저에 따르면 브레즈네프는 중국에 대한 선제 공격을 고려했다.
-104쪽

1971년 11월 파키스탄과 인도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겨우 석 달 전에 소련은 인도와 평화우호 협력 조약에 조인한 상태였다. 소련 지도부는 열심히 많은 군비 물자를 공급했다. 이는 1차적으로 닉슨이 중국과 화해하는 것을 상세하기 위한 조치였다. 조약과 무기 공급에 용기를 얻은 인디라 간디는 방글라데시(동파키스탄) 침공을 승인했다.
닉슨과 키신저는 인도-파키스탄 전쟁에 거의 광란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미국 3각 외교의 전체 구조, 특히 중국과 그 동맹국 파키스탄을 소련을 평형추로 키우려는 미국의 시도를 훼손하고자 하는 소련의 음모라고 보았다.
-117쪽

모스크바 정상회담과 키신저와의 비밀 채널 협상 이후 소련 지도부는 이스라엘 영구 거주를 신청할 수 있는 할당 인원을 늘리는 데 동의했다. 1969년부터 1972년까지 유대인 이주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브레즈네프는 모국을 배신하는 것과 같은 이주를 허용하는 데 상당한 정치적 자산을 소모해야 했다.
1972년 8월 소련 당국은 유대인 이주자들이 떠날 허가를 받는 조건으로 자신들이 받은 교육 비용을 국가에게 보상할 것을 요구한 특별법령을 공표했다. "현금으로 유대인을 산" 이 계획은 곧 데탕트 목표의 대재앙을 가져온 정치적 후유증을 일으켰다. 미국 미디어도 유대계 소련인들의 '출국세'에 반대하는 맹렬한 캠페인을 개시했고 소련과의 무역 재정협정에 대한 강력한 유대 자유주의 보수주의 반대파가 미국 의회에 등장했다.
-144쪽

상당한 투자를 했지만 1960년대 소련은 콩고를 둘러싼 전투에서 졌고 가나와 기니에서 쫓겨났다. 기니를 '사회주의의 창'으로 변모시키려는 실험의 종결은 특히 고통스러웠다. 아프리카에서 보인 소련의 관대함은 많은 경우 "개탄할 만한 결과를 가져왔다. 그 나라의 지도자들은 우리가 준 것을 받아 먹었고 그런 다음 우리에게 등을 돌렸다." 1964년 폴리안스키 보고서는 아프리카 '진보 정권들'을 지지한 흐루쇼프의 노선을 비판했다.
-174쪽

1970년대 전 세계 '진보 세력'과 민족해방운동들을 둘러싼 모스크바와 베이징의 경쟁이 소련이 아프리카 주의로 복귀하는 것을 촉진했다고 의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970년에 KGB와 중앙위원회 국제부는 아프리카에서 중국의 '공세'를 물리쳤다고 정치국에 자신만만하게 보고했다.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와 아프리카의 뿔은 소련 군부가 세력을 과시할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1974년에 그들은 소말리아의 기지를 확보했다. 곧 드러나듯이 이 획득은 분란을 일으킬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175~176쪽


아프간.
군 수뇌부가 안 된다고 하는데 묵살한 것은 미국과 정말 똑같네.

소련은 이미 수백 조 루블을 이집트에 퍼주었고 사다트의 배신에 치를 떨었다. '이집트의 상실'은 아프리카 위기들에 대한 이후의 정치국 정책 결정에 지속적인 심리적 충격을 가했다. 그리고 1979년에 이 기억들은 하피줄라 아민이 아프간에서 그들에게 다시 "사다트처럼 할" 수 있다는 소련의 의심을 조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었다.
-160쪽

1979년 괴로운 모닝콜이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헤라트와 주변 지역이 할크 정권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고 폭도들은 잔혹하게 카불의 관리, 소련 고문들과 그 가족들을 살해했다. 할크 지도자인 누르 무함마드 타라키 총리와 그의 부관 하피줄라 아민은 모스크바에게 소련이 군사 개입을 필사적으로 요청했다. 그것은 또 하나의 세력, 즉 전투적인 아프간 민족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가 무대에 등장한 최초의 강력한 징후였다.
-197쪽

1979년 이란 혁명이 일어나고 아프간 서남부에서 근본주의 반란자들에 대한 이란의 지지가 급속 확대됐는데 이런 사실들이 아마도 불개입 결정을 재검토하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 크렘린 지도자들은 이란 혁명이 냉전과 소련보다 더 오래 생존할 급진적 이슬람의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될 것임을 알 도리가 없었다.
그들은 아프간에서 확대돼 가는 근본주의 운동에 미국이 개입됐다고 의심했다. 1979년 11월 미 대사관 점거 후 미군이 페르시아만으로 진출하자 소련 참모본부는 깜짝 놀랐다. 발렌틴 바레니코프 장군은 "우리는 미국이 이란에서 쫓겨나면 파키스탄으로 기지를 옮기고 아프간을 장악할까 봐 우려했다"고 회상했다.
-201쪽

최고위 소련군 인사들은 개입에 반대한 마지막 그룹이었다. 참모본부 수장인 니콜라이 오가르코프 원수는 12월 10일 비공식 대화에서 소련군이 생소하고 어려운 상황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우스티노프는 그에게 입닥치고 지도부에 복종하라고 말했다. 몇 분 뒤 정치국 회의에서 오가르코프는 다시 경고했다. "우리는 이슬람 동방 전체를 우리에 맞서 연합하게 만들고 세계 전역에서 정치적 손상을 입을 것입니다." 안드로포프가 그의 말을 잘랐다.
-203~204쪽


고르바초프 시대.

1986년 가을 전에 일반 정치국원들은 군사비, 해외 원조 및 다른 비밀 예산의 정확한 수치에 대해 어떤 정보도 받지 못했다. 수치는 충격적이었다. 예산의 40%를 차지할 만큼 비대해진 국방비에 더해 소련은 중부 유럽 동맹국들과 해외의 다른 수많은 피보호국들을 후원했다. 정치국원들은 베트남의 연간 '비용'이 400억 루블이라는 사실을 알고 놀라 자빠졌다. 쿠바는 250억 루블, 시리아는 60억 루블 등등이었다. 1950년대 이래 소련은 이라크, 리비아, 시리아로 최신예 탱크, 항공기, 미사일을 비롯해 많은 군 장비들을 보냈지만 어떤 대금도 받지 못했다.
-269쪽

구 관료 엘리트들을 끌어들이는 대신에 고르바초프는 노멘클라투라를 제쳐놓고 소련 사회를 '민주주의'로 이끄는 정책을 선택했다. 고르바초프는 사상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사상은 그의 행동에서 지나친 역할을 수행했다.
그것은 협상 과정의 즉각적인 요구뿐만 아니라 국가 이익의 보호보다도 우선했다. 거대한 병든 국가를 책임진 상태에서 도덕적인 전지구적 프로젝트를 위해 강대국의 지정학적 지위와 자신의 정치 권력의 토대 자체를 기꺼이 위험에 맡긴 지도자는 역사상 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289~291쪽

당대인들과 목격자들을 당황하게 만든 고르바초프 인격의 또 한 가지 모습은 무력 사용에 대한 강한 혐오였다. 그의 동료들과 보좌관들은 "유혈 사태의 회피는 고르바초프의 끊임없는 관심사"였고 "고르바초프에게 살육에 대한 주저는 그가 정치에 개입할 때의 척도일 뿐만 아니라 조건"이기도 했다고 확인한다. 그들은 고르바초프가 "성격상 독재적 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행정적 강경 수단에 호소할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이데올로기적 수준에서 소련 지도자는 냉전을 종결시키는 일과 소련을 성공적으로 변화시키는 일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결코 분리하지 않았다. 이 두 가지를 이어준 요소 중에 하나는 무력 사용에 대한 고르바초프의 개인적 혐오의 산물인 비폭력 사상이었다.
1989년 4월 그루지야 공산당 지도부의 요청으로 러시아 군대가 민족주의 집회에 맞서 21명의 민간인들을 살해한 트빌리시에서의 비극 이후 고르바초프는 민족주의 세력이 나라를 쪼개기 시작하더라도 무력 사용을 금지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하여 그는 국가 주권의 초석이자 국가지도자의 책무인 질서유지 권한을 단념했다. 약간의 예외를 제외하고 고르바초프는 집권 마지막 날까지 이 특이한 원리를 끈질기게 고수했다.
-306~307쪽

서방 정치인들, 특히 부시와 베이커는 고르바초프의 정치 방식을 성공적으로 이용했다. 고르바초프는 미-소 동반자 관계의 후퇴를 막으려고 이들의 제안에 흔쾌히 동의했다. 그 결과 미국인들이 발트 국가들의 독립 운동을 도와주려는 어떤 시도도 삼가고 그 대가로 고르바초프는 발트 문제에서 무력 사용을 삼간다는 양해가 이루어졌다.
1988년 2월 아제르바이잔 공업 도시 숨가이트에서의 아르메니아인 학살,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의 인종 충돌, 1989년 4월 트빌리시 유혈 사태, 1990년 1월 바쿠에서의 더 큰 유혈 사태, 1991년 1월 빌뉴스와 리가에서의 강력한 탄압 등등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고르바초프는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피로 세례를 주려는 많은 시도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시도들은 실패했다."
-308쪽


요즘 말 많은 나토 관련 '구두약속'에 대해서는, '협정'이 없었음을 분명히 하면서 그 이유 또한 고르바초프의 엇나간 낙관론에서 찾고 있다.

고르바초프는 여전히 낙관적이었다. 그는 발트 위성국들이 경제적 유인 동기를 통해 소련 영향권 내에 남아 있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자신의 공산주의 개혁관이 중부 유럽과 동독에서 좌절되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다른 한편 그는 동유럽으로의 나토 팽창을 막는 일 등에서 소련 이익을 보존하기 위해 문서로 서방과 협정을 맺지 않았고 또 맺으려 애쓰지도 않았다.
-320~321쪽


'로마노프 가의 비극' 그리고 보리스 옐친

그럼에도 저자는 고르바초프를 높이 평가한다. 그가 그런 결정을 내린 이유를, 정확히 말하면 '그런 결정을 내린 인물'이 된 이유를 저자 자신이 공감하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최소한 소련이 찢어지는 과정에서 대규모 유혈사태가 벌어지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고르바초프는 칭찬할 만하다고 보는 듯하다.

마지막 부분은 기록해둘 만.

결국 문제가 된 것은 소련 제국 내부와 엘리트들 사이에서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쇠퇴하고 서방의 민주주의 및 근대화 모델의 매력이 커져간 사실이었다.
소련의 근대화 길이 고속도로가 아니라 막다른 골목인 것으로 밝혀졌다면 왜 길을 바꾸지 않았는가. 사회주의 제국이 점점 부담스러워지고 중부 유럽과 동유럽에서 소련 보조금으로 뒷받침돼야 하는 '아프간들', 파산한 정권들을 발생시켰다면 왜 이 제국을 포기하지 않았는가. 고르바초프는 자신의 '신사고'로 이 순환을 마감하는, 소용없지만 역사적으로 이해할 만한 행동을 보여주었다. 고르바초프와 그를 지지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지 않는 대의를 위해 그리고 자신들이 이익을 보지 못하는 제국을 위해 피를 흘릴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348쪽


책은 이런 문장으로 끝난다. "아마도 근대 역사에서 가장 이상했을 제국인 소련 사회주의 제국은 맞서 싸우는 대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주보크가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트위터를 열어보니.


여러 글들로 봤을 때,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무모하고 잘못된 일로 평가하고 있음. 하지만 유럽/서방의 '러시아 혐오증'에 대해서도 여전히 경계하는 시각을 갖고 있고, 징집령 이후 러시아의 혼란에 대해서도 '러시아가 곧 무너질 것'이라 섣불리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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