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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 세예르스테드, <사회민주주의의 시대>

딸기21 2022. 12. 25.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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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민주주의의 시대

프랜시스 세예르스테드, 유창훈 옮김. 글항아리.

 

 

북유럽 사민주의에 대해 한번 들여다봐야지 하고 있었는데 마침 피케티의 책을 읽었고, 내친 김에 역시나 오랫동안 보유하고 있던... 이 책을 읽어줌. 북유럽에 대해 통 몰라서 생소한 내용들이 거의 대부분이었고, 그래서 더 많이 도움이 됐다. 

 

20세기 스칸디나비아 모델의 역사 또는 사회민주주의의 성쇠는 세 가지 국면으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국면은 1930년대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극단적 경향들이 사라진 이후 노동자 계급은 두 나라의 지배 정당인 노동당과 함께 국가에 통합됐다.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역사적 타협이 농민과 노동자 사이의 타협이 발생한 것과 같은 시기에 일어났다. 둘째 국면은 1930년대 말부터 1970년대까지 펼쳐졌다.
문제는 근원적으로 상충하는 이해 집단들이 서로 간에 형성된 합의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가 하는 점이다. 또 하나는 이 국면 동안 북유럽 국가들의 복지 사회가 얼마나 유사했는가 하는 점이다. 유사성은 공통된 역사에서 발전됐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특히 스웨덴과 노르웨이는 서로 영향이 컸다. 
마지막 국면은 1970년대부터 20세기 말까지 이어졌다. 이 기간의 특징은 분열이다. 1800년대부터 계속 확대돼 온 국가가 힘을 잃기 시작했다. 국가와 사회는 동일한 개념이 됐고 국가가 약화됨으로써 시민사회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16-17쪽

 

뒤이어 나오는 부분은, 지금 같은 시대에 더 필요한 게 아닌가 싶기도.

 

노르웨이에선 양허법이 근대화 계획의 핵심 논쟁이 됐다. 정부의 견해는 법이 외국인의 천연자원 매입을 늦춤으로써 노르웨이 국적의 자본가들을 조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1909년에 내각이 제정한 법은 외국 자본가뿐 아니라 일반 자본가에게도 적용됐다. 1917년의 법은 이 노선을 따르고 강화시켰다. 이 법의 분명한 의도는 지나치게 빠른 성장을 방지하는 것이었으므로 '제동법'으로 불렸다. 
"저돌적인 성장은 개인 생활에서와 마찬가지로 모든 사회에서 위험하다. 사회는 새로움을 점진적으로 받아들일 시간을 가져야만 한다. 새로운 공장의 중심지가 원만하게 자리 잡고 민간 운영과 지역사회 운영을 발전시키고 선도하는 것을 배우는데 시간을 가져야만 한다."
이 법에서 원칙적으로 새롭고 급진적인 점은 반자본주의적 성향과 사회제도상의 요구를 포함했다는 것이다. 
이 법은 노르웨이 노동자와 노르웨이산 원료를 이용해야 할 의무뿐만 아니라 값싼 전기를 지역사회에 제공해야 할 의무와 같은 조건 형성을 촉진시켰다. 
-39쪽

1917년의 법에서 한 가지 급진적인 요소는 이른바 반환권이다. 60~80년의 시간이 지난 뒤에 귀속권은 면허권을 쥔 자들에게 보상 없이 정부가 폭포와 전기 생산 공장을 인계받아야 한다고 단언한다. 대법원이 공식화한 이 결정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입법권이 소유권을 제한하는 데에 종합적인 정당성을 가지고 있고 또한 그래야 함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소유권은 다양한 사항을 고려해 행사돼야만 하며 사회 조건과 사회의 발전은 당시의 모든 관점에서 마땅히 고려되어야만 한다."
여기에 다음 두 가지를 명시해야 한다. 첫째 유사한 규제가 여러 유럽 국가에서 발견됐고 둘째 노르웨이와 스웨덴 양국은 산업화라는 주요한 목표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자유주의적 방식으로 이 근대 소유권을 실시했다는 점이다. 
-41쪽

 

사회주의자들이 얼마나 생산 문제에 몰두했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산업의 능률성에 주의를 기울였다. 이를 위한 전제조건은 합리화의 일부로 간주될 수 있는 독점과 집중이 고용을 비롯해 전반적인 산업 구조에 대한 사회적 책임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다. 정부는 상업세계와 비사회주의 세계에서 잘 알려진 특징들을 관리 유형과 결합시켰다. 그것은 국가를 위한 기업의 전문 리더십으로 여겨졌다. 리더십 기능의 전문화는 전반적으로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갈등을 완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58쪽

이 시기의 기술자는 특별한 의미에서 근대사회를 대표했다. 기술자들이 점차 근대 기업들의 책임자가 되고 자본가나 소유주의 영향력이 약화됐다는 뜻이다. 이를 관리 자본주의, 기술자 자본주의라 일컫는데 '공학의 시대'라는 명칭의 토대가 됐다. 이때가 바로 테크노크라시(기술주의)의 시발점이다. 테크노크라시 또는 '사회공학술'은 기술자 특유의 이상이 보편화됐음을 함축한다.
이 새로운 사회정치 이념을 가장 분명히 표명한 사람은 스웨덴의 경제학자 군나르 뮈르달이다. 1930년은 스톡홀름 박람회의 해였고 이것이 그의 생각에 영향을 미쳤다. 박람회는 기능주의의 획기적 발전과 북유럽 국가의 새로운 단순성과 사실성을 나타냈으며 스웨덴의 "미래에 대한 프로젝트가 탄생한 곳"이다. 
이는 분별성 합리성 계획성으로 특징 지어지는 새로운 사회를 의미했다. 물리적 환경은 기능적 미학에 따라 구성돼야 했다.새로운 미학과 기술, 객관적 상식, 이 모두는 대중과 사회통합 계획에 기여하는 의도로 설계됐다. 스웨덴은 전위적이었고 특히 물리적 환경 형성 면에서 최선두에 있었다. 
-61쪽
남성 보통 선거권은 자유 보수적인 계획의 시작점이 됐다. 정치적 민주주의는 국가 건설의 자연스러운 부분이었다. 
이는 진보적인 산업주의자들의 시각에서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들 중 다수가 정치적 민주주의로의 이행은 불가피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아르비드 린드만 내각은 몇몇 사회정책 계획을 시행하기도 했다. 국민연금 계획에 관한 백서도 발간했다.이후 칼 스타프와 자유당이 국가 통치력을 되찾았지만 국민연금은 의회에서 모든 정당의 승인을 받으며 통과됐다. "이렇게 하여 근대 스웨덴의 사회 입법을 위한 토대가 상정됐다."
-81쪽

자유당은 1908년 군나르 크누드센의 지도 아래 강화됐다. 크누드센은 자본가이자 부유한 사업가였다. 일생 동안 기술에 대해 관심이 지대했으며 1885년 노르웨이에 최초의 수력발전소를 설립하는 데 적극 가담했다.
대규모 자본가이면서 정치에 관해선 사회 급진 세력에 속하는 크누드센 같은 사람을 이해하긴 어렵다. 그의 시각에서는 사회 보장을 갖춘 민주화와 산업화는 자연스럽게 통일성을 이루는 것이었다. 크누드센을 자본가 또는 자본가와 노동가의 이분법적인 관점을 가진 사람으로 보고 그의 사고 체계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엔지니어의 사고 방식을 지녔고 바로 그 이유로 그 시기에 반향을 일으켰다.
국가 사회주의자라는 비난에 대한 크누드센의 반응은 독특하다. "만일 그 자체로 국가와 공공의 이익과 일치하는 정부 대책을 약속한다면, 그리하면 된다. 그 대책이 합당하고 현명하다면 사회주의나 국가사회주의라는 개념 때문에 겁먹지는 말아야 한다."
-87~88쪽

 

어째서 파시즘은 스칸디나비아에 정착하지 못한 걸까. 가장 중요한 점은 사회경제상의 깊은 갈등이 없었다는 것이다. 종교적인 마찰도 없었고 사회제도도 온전했다. 위협이 발생했을 때 정치계는 양극화되지 않았다.
전간기에 두드러진 보수당 지도자였던 스웨덴의 아르비드 린드만과 노르웨이의 C.J.함브로는 공산주의자와 파시스트 독재 정권에 동시에 등을 돌렸다. 그들에게 파시즘에 대항하는 가장 강력하고 중대한 논거는 권력 제한과 다수의 공권력으로부터 소수자와 개개인의 권리를 보호한다는 점에 역점을 둔 자유주의 입헌 정치 전통이었다. 즉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보수당들은 자유보수적이고 반 전체주의적이었다. 
그들 스스로 창설한 민주적 의회주의를 옹호한 것은 부르주아 정당이었다. 위기를 벗어나 의회 제도가 존속하고 강화된 것은 뿌리 깊은 자유주의적 유산 덕분이었다. 비사회주의 정당은 비교적 개방적이고 융통성 있는 모습을 보이며 도발적인 계획들에 결코 흥분하거나 반응하지 않았다. 
사회당은 그들의 정부가 능력이 있음을 증명해내야 했고 사회주의화 운동에서 인정받았다. 게다가 위기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는 경기 상승기였다. 모두의 삶이 나아졌고 농부와 노동자가 정치 수뇌부로 진출했다. 
-95~96쪽

이 모든 과정을 이해하기 위한 실마리는 19세기 말의 거대한 민중운동에 있다. 이 운동에는 본질적으로 저항적이고 폭넓은 계층의 시민이 동원됐다. 전간기 위기로 말미암아 급진적인 조치들이 강행됐는데 이는 소작농을 근대사회로 편입시키는 데 어느 정도 기여했다. 
통합의 다음 단계는 1930년대에 두 나라에서 정부 권력을 장악한 농민과 노동자라는 오래된 대항 세력의 연합에서 비롯됐다. 이것이 나오게 된 전제조건은 극우주의는 부르주아 진영으로부터, 극좌주의는 사회민주주의 진영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사실이다. 
-121쪽

농업보조금이 상당히 증액되는 등 양국의 농민들은 3인당과의 협약에서 얻은 것이 많았다. 두 지배 정당은 과거의 부르주아 정당보다 예산 증액에서 거리낌이 없었다. 이는 그 시대의 새로운 동향이기도 했다. 
협동조합주의는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농민들이 도출해냈고 위기 상황에 시행된 이 제도는 사회민주주의 질서의 큰 특징이 된 조합주의적 다원주의로 나아가는 데 있어 중요한 과정이었다. 
-105~106쪽

1906년에 '12월 협약'이 스웨덴에서 실시됐다. 최초로 사용자 단체가 노동조합 총연맹과 직접적인 교섭을 하게 됐다. 이 협약은 단결권을 인정하는 동시에 작업 관리의 경영권을 확언했다. 다음 해 노르웨이에서 최초로 전국적인 임금 협상 논의가 진행됐다. '철강 협약'과 함께 단결권이 명확하게 비준됐고 고용주의 경영권과 최저임금 원칙도 채택됐다 
-183쪽

근대화가 공통 프로젝트라는 개념에서 출발한다면 전간기의 혼란스러운 상태를 이해할 수 있다. 노동운동은 단순히 자본주의와 평화롭게 공존하려 한 것이 아니라 효과적인 자본주의의 형태를 열망했다.
이것이 일종의 '연대 게임'의 확립으로 이어졌다. 자본가와 노동가라는 두 정당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두 정당의 관심은 올바로 기능하는 자본주의를 갖추는 것이고, 이를 위해선 양당이 이 게임 안에서 각자의 역할에 충실해야만 한다. 만일 자본가 측이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않는다면 체제는 작동하지 않을 것이고, 반대파는 좀 더 혁명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게 된다.
이 연대 게임은 1906년 스웨덴의 12월 협약과 1907년 노르웨이의 철강 협약으로 시작됐고 1935년 노르웨이의 주요 협약과 1938년 스웨덴의 살쇠바드 협약으로 이어졌다.
-190쪽

1932년에 스웨덴의 페르 알빈 한손은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내각을 구성했다. 다음 해에 농민들과의 위기 타개책과 더불어 사회민주주의의 패권 시대가 시작됐다
한손이 혁명가였는지 아니면 민주주의자였는지 묻는 것은 생산적이지 않다. 한손은 당수가 되던 해에 궁극적으로 스웨덴 사회민주주의의 대통합을 상징하게 될 '국민의식'이란 개념을 사용한 매우 유명한 연설을 했다. 새로운 사상은 아니었지만 한손은 이를 보수적인 전통 혹은 스웨덴 사회에 대한 보편적인 사고와 연관시켰다.
'조국'이란 말은 보수주의자들의 수사법인데 1921년에 한손은 이 말을 사용함으로써 사민당의 불문율을 깼다. 한손은 민족 유대감에 지지를 보내면서 보내면서 계급 투쟁에 관한 수사학은 한쪽으로 미뤄둔 채 사회통합 계획을 부르주아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데 기여했다. 국가 건설의 마지막 단계에서 통합의 기조를 다지고 이를 명확히 규정하려 한 것은 다름 아닌 사회민주주의였다. 
한손이 이 변화를 추진하면서도 깜짝 놀란 당 동료들을 잘 끌어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지닌 혁명적인 프롤레타리아로서의 정당성 때문이었다. 어느 누구도 그를 부르주아 계급의 심부름꾼으로 여길 수 없었다. 그 결과 그는 계급투쟁 정당에서 인민들이 정당으로 변화를 시도하며 정당을 재정립하는 중심 인물이 됐다. 
-193~194쪽

한손과 노르웨이의 요한 뉘고르스볼을 비교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장황하게 이론을 제시하는 데 회의적인 태도를 지닌 정치적인 실천가였다. 그들은 각자의 나라에서 패권적인 사회민주주의 체제를 도입했다.
한손과 마찬가지로 뉘고르스볼도 노동당을 계급투쟁 정당에서 대중의 인민당으로 바꾸는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그는 노르웨이다운 것들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었고 조국과 관련된 발언은 그의 생각을 바탕으로 했다. 
-195쪽

 

여성해방은 개인을 주요한 사회 개체로 인식하는 보편적 자유권 논의에서 필수적이었다. 권리란 개념은 결국 중요하고도 폭발적인 힘을 지닌 것으로 드러났다.
중요한 점은 개인의 권리와 사회의 기본 단위인 가족의 개념이 겨뤄야 했다는 것이다. 가정 영역은 여성이 공공권의 영역에서 배제됐다는 사실만으로 특징지어질 수 없다. 남성이 집안의 수장을 이어가는 한 가정은 가부장적이다.
시민권과 정치 권리를 위한 해방적인 활동은 두 가지 노선으로 전개됐다. 공공 영역에서 여성의 위치를 확보하려는 한편, 경제 영역, 친권 그리고 결혼과 이혼 문제에서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 둠으로써 가족 영역에서 가부장 제도를 붕괴시키려 했다.
덴마크와 스웨덴 여성들에겐 이 같은 일이 투표권을 얻기 이전에 일어났다. 결혼과 이혼을 규제하는 새로운 혼인법과 양자 간에 동등하다고 보는 재정 상황과 관련한 법률로 이어졌다. 적어도 형식적인 관점에서 가부장 제도는 이러한 법규들에 직면해 몰락했다. 이 노르딕 모델은 "국제적인 맥락에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1960년대에 맞벌이 가정이 표준화되고 사회가 아이들에 대해 광범위한 책임을 지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평등 계약'이 선호되면서 관습적인 '주부 계약'은 점차 사라졌다.
한편으로는 주부라는 일을 직업화하고 격상시키는 노력이 있었다. 이 주부 이념과 성별에 근거한 분업을 주장한 인물은 스웨덴에서 사회민주주의 정치인들을 정치인들을 이끈 올리비아 노르드그렌이었다.
-108~109쪽

스웨덴에서 여성들은 보통 선거권이 도입되기 이전인 1917~1918년 특히 기근이 지속되던 동안에 집결했다. 노르웨이는 스웨덴보다 훨씬 전에 여성 참정권을 부여했고 이미 1909년에 모성 휴가 제도를 도입했다. 그러나 가정에서의 가부장 제도를 해체시키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노르웨이는 스웨덴보다 가족 이념이 좀 더 오래 지속됐다 
-111쪽
유목민인 사미족과 정주족 간의 갈등은 오랫동안 지속됐다. 19세기 말 양국에서는 사회진화론과 목축문화는 소멸할 수 밖에 없을 거라는 견해가 팽배했다. 예전에는 사미족을 기술과 진취적 기상이 뛰어나다고 여긴 경향이 있었으나 이제는 사회진화론의 영향으로 인해 부도덕하고 게으르고 지저분하며 술을 밝히는 민족이라 간주했다. 
이것은 엄격한 '문명화 과정'이 양국에서 도입된 원인이 됐다. 노르웨이의 경우 마을 학교는 폐쇄됐으며 사미족 아이들을 위해 통합기숙학교를 세웠다. 목적은 그들을 문명화시키는 것이었으나 바꿔 말하면 통합을 통해 사미족 문화를 말살시키려는 것이었다.19세기 후반에 사미족은 국가 문화에 통합됐고 사미족 언어는 거의 소실됐다.
-113쪽

스웨덴은 사미족을 그들 민족에게 맡기는 것이 가장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 번 라플란드인은 영원한 라플란드인'이라는 스웨덴의 정책은 사미족의 유목 문화를 보호하면서 그들이 살 수 있는 특정 산간 지역 확보를 필수적으로 포함했다. 이 정책의 또 다른 특징은 사미족이 토지를 경작하고 집을 짓는 것에 반대했다는 점이다. 양국에서 사미족에 대한 모든 정책은 땅을 경작코자 하는 사미족에게는 장애가 됐다. 
-114~115쪽

양국은 정치적으로 폭넓은 지지를 얻어 1934년에 불임법을 제정했다. 스웨덴에선 1975년, 노르웨이에선 1977년에 폐지되기까지 두 나라에서는 각각 6만 3천 건, 4만 4천 건 이상의 불임 시술이 행해졌다.
인종 차별이 스칸디나비아의 인구 정책에 방향성을 제시할 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한 가지 예외가 있었다. 바로 유목민이다. 노르웨이에서 (강제) 불임을 한 유목민 비율은 불임한 전체 인구 비율의 약 두 배였다. 노르웨이건 스웨덴이건 인종청소 같은 일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유목민들은 자녀를 빼앗겨 강제 이송되는 일과 같은 침해를 당했다. 
-143~144쪽
일단 시민으로 규정되면 모든 사람이 평등해야 했다. 이 혜택은 자선 행위 같은 것이 아니라 모든 시민이 가진 권리와 같았다. 이를 새로운 사회적 시민권이라 칭할 수 있다. 
19세기 말부터 1930년대까지 새로운 사회정책의 주요 기조가 된 것은 자립 자조를 위한 지원이었다. 이 '사회부조 국가'란 19세기의 자기 책임과 나중에 나타날 복지국가 사이의 과도기적 형태에 해당했다. 보편성 원리가 권리의 새로운 개념에 덧붙여졌고 이는 스칸디나비아 복지 국가들은 구별하는 특징이 됐다. 
-123쪽

새로운 사회정책의 역설은 한편으로는 자율성 원칙에서 비롯되는데 개인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 스스로 계획하고 자기 고유의 노동력을 시장에 팔 수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성실한 노동자의 형성에 개입하면서 국가는 개인의 삶의 질 향상에 이바지할 뿐 아니라 시장에서 그들의 교환 가치를 유지 향상시키는 것에도 기여하며 생산 체제가 충분히 작동할 수 있게끔 한다.
초기 사회 정책의 또 다른 부분을 구성한 시장 조절 계획은 개인 노동자의 지위와 가치를 관리하는 일과 관련됐다. 노동환경, 아동복지, 최저임금, 노동시간 제한, 그리고 이와 유사한 상황을 관리하는 법규를 통해 계획이 시행됐다. 1846년에 스웨덴이 아이들의 노동력 사용을 통제하는 규제를 먼저 시행했고 노르웨이에서는 1892년이 돼서야 실시됐다. 노동자 보호법이 스웨덴에선 1889년에, 노르웨이에서 1892년에 시행됐다. 양국 모두 산업재해보상보험도 갖췄고 1918년에는 1일 8시간 근무 법규를 제정했다.
전반기 사회 정책의 가장 영향력이 큰 책은 군나르 뮈르달과 알바 뮈르달 부부의 <인구 문제의 위기>다. 그들은 근본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예방 차원의 사회 정책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정책 개념은 총괄적인 사회질서의 재건에 버금가게 됐고 이로부터 '국민의 집'이라 일컫는 확대된 가정으로서의 사회민주주의 국가상을 어렴풋이 인지할 수 있다. 
-125~126쪽
노동운동이 부르주아의 관리에서 사회통합 계획을 해방시킬 수 있었던 한 가지 이유는 1930년대 위기의 해결책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재무부 장관이던 에른스트 비그포르스는 1932년에 '우리가 일을 할 수 있을까?'라는 선거용 팸플릿을 만들었는데 24장짜리의 얇고 작은 책자로 성동에 관한 걸작품이 됐다. 그는 혁신적인 경제학자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스토클름 학파 또는 북유럽 학파라고 불리는 군나르 뮈르달, 에릭 빈달, 베르틸 올린 같은 진보적인 젊은 경제학자들의 도움을 받았다. 이 인물들은 존 메이너드 케인스 이론과 유사한 확장적인 경기 조정설의 발전에 기여했는데 기여했다.
문제는 자금을 어떻게 낼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그 방법으로 경기 침체 상태에서 지출을 확대하기 위해 경제 주기가 상승세에 있을 때 절약하는 경기순환 안정화설이라는 전통적인 대응책을 사용했다. 이 전통적인 사고 방식은 페이비언 정신을 이어받은 1909년의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의해 특히 영국에서 발달했다. 이 리포트는 스칸디나비아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구매력 이론은 위기 정책의 또 다른 기초였다. 노동 농민들과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된 임금을 지불하는 부담을 지지 않고선 생산을 고무시킬 수 없었다. 구매력 이론은 3인당이 공개시장 임금에 대한 대규모 긴급 수정 계획을 세우면서 실업 문제 타결을 주창했을 때 위기 해결 방안의 기제를 이루었다.
구매력설은 새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다시금 체계화하여 긴급 정책으로 합법화하는 데 이용할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하고 획기적인 점은 단기적인 관점이었다. 구시대적 통설대로 행해선 안 되고 먼 장래에 대해서도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지 말아야 했다. 현재와 내일의 문제들을 해결해야 했다.
-201~202쪽

마지막으로 사회민주주의의 성공의 기본 근본적인 전제조건은 근대 산업국가 형성이란 공동 계획에서 나타난 연대감에 따른 전통이다. 1911년 브란팅이 말했듯이 "국가의 미래가 위기에 처하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정치적 갈등은 우리 편을 위해 양보하고 만다."
-206쪽

 

올해 프랑스 대선에서 마린 르펜의 국민전선이 구매력 문제를 집중적으로 제기했는데, 사민주의의 논리와 어떤 점에서 이어지고 어떤 점에서 다른지 궁금해진다.

 

북유럽 국가들의 협력이 벼랑간 '인디언 썸머'에서 '노르딕 윈터'로 바뀌었다. 1905년에 스웨덴과 노르웨이는 서로 전쟁 준비를 했다. 그러나 연합 해체 이후 여러 일이 있었는데도 시민사회의 네트워크는 놀라울 정도로 안정적이었다. 
두 나라 간의 관계는 1912년 초부터 현격히 향상됐다. 국제 정세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을 결속하게 했다. 발칸 전쟁 속에서 스웨덴과 노르웨이 덴마크는 1912년 공동의 중립 정책을 채택했고노르웨이와 스웨덴은 사미족의 순록 방목에 대한 교섭을 했다. 
-210쪽

관세동맹과 북유럽 방위동맹 계획이 지속적으로 제기됐지만 결코 긴밀한 관계를 이루지 못했다. 핀란드와 덴마크 양국은 서로 다른 열강에 위협받았다. 반면에 스웨덴은 자국의 영향력과 위치로 인해, 노르웨이는 영국의 비호 아래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위협을 의식하진 않았다. 방위동맹을 조직하는 데 실패한 결정적인 이유는 결과적으로 공통된 위협이 없었기 때문이다. 스웨덴의 이익을 대행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동맹국들은 북유럽 방위동맹에 가입하는 것을 반대했다.
-115쪽

1939년 11월 소련이 핀란드를 공격하자 스웨덴의 위기가 촉발됐다. 스웨덴은 무엇보다 중립을 지켜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핀란드를 대표하는 행동주의가 활발했다. 많은 스웨덴 군인이 핀란드를 방어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전쟁에 지원했다. 하지만 방위동맹에 관한 생각은 실현과는 거리가 멀었다. "핀란드는 전쟁에 비통해 했고 노르웨이는 이 계획에 무관심했으며 덴마크는 단념했고 스웨덴은 신중을 기했다."
어째서 핀란드를 위한 스웨덴의 행동주의는 적극적이었으면서 노르웨이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이유를 말하면 전자의 경우는 대상이 스웨덴이 본래 주적이던 소련이었고 후자는 스웨덴과 항상 긴밀하게 제휴를 맺은 독일이었기 때문이다. 
-216쪽

1940년 4월 9일 노르웨이가 독일에게 침공당했지만 사흘 뒤 스웨덴의 한손 총리는 중립 정책을 표명했다. 스웨덴 정부는 노르웨이 하콘 왕의 망명 요청도 거부했다. 스웨덴은 독일 군사와 군수물자의 이동을 허용했다. 3년 동안 약 200만 명의 독일 군사가 스웨덴 철도망을 통해 이동했다. 스웨덴인들조차 이것이 중립국의 규율을 넘어섰음을 알았다.
스웨덴 사회에선 나치가 아니라면 독일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확고한 세력이 있었다. 스웨덴인들은 노르웨이인들이 연합 체제에서 벗어난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이었는지 알게 될 것이라고 했고 이에 대해 노르웨이인들은 강하게 비판했다. 노르웨이에게 이 전쟁은 민주주의와 독재의 싸움이었다. 그들은 참전하지 않기로 했을지라도 스스로를 순고한 투쟁의 전사로 여겼다.
스웨덴과 핀란드의 강한 유대관계는 상황을 갈수록 더 어렵게 했다. 스웨덴은 동쪽의 강대한 이웃인 소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불안해했다. 독일과 소련 중 어느 곳이 큰 위협인지에 대해 스웨덴 여론은 의견이 분분했다.소련이 연합국 편에 서서 참전한 이후에 스웨덴의 상황은 더 난해해졌다.
-221~222쪽

전쟁 직후 두 나라는 전쟁 기간의 정책들을 분명히 밝히고 문서화하기 시작했다. 독일이 노르웨이를 침공했을 때 정부는 유약함을 드러냈고 군사 방어도 훌륭하지 않았다. 노르웨이는 상당히 광범위한 국가정책심판위원회의 조사도 받아야 했는데 총 9만2803건의 기소가 발생했다. 몇몇의 사형 선고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형벌은 가벼웠다. 
참전하지 않았던 스웨덴에선 해결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전쟁에 뒤이어 자연스럽게 비판이 불거졌다. 독일 군대와 전쟁 물자의 수송을 가능케 한 결정과 신문 검열이 지나쳤던 일이 함께 비난받았다. 그렇지만 대체적으로는 독일과 협력한 정부의 심리 정책이 합리적이고 필연적이었다는 국민 여론이 형성됐다.
결론은 각국 사람들이 저마다 옳은 일을 했다고 생각하면서 각자의 과거사를 감수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스웨덴인들은 과거 상황에 심리적으로 대응했고 노르웨이인들은 도덕적인 요구에 따라 행동했다고 생각했다. 두 나라는 사회민주주의 사회를 한층 더 발전시키기 위해 전쟁 경험을 과거사로 돌리고 싶어 했다. 
-223~224쪽

양국이 서방 연합체에 가입하지 않고 자국만의 길을 선택한 까닭은 1905년 연합 해체의 후유증 때문이다. 노르웨이는 연합과 유사한 어떤 것에도 동의할 수 없었고 스웨덴은 자국과 노르웨이를 동등하게 대할 마음이 없었다. 
역사학자 올라브 리스테는 스웨덴이 진정으로 노르웨이의 독립을 인정한 것은 1949년이었다고 주장한다. 그 해 봄에 노르웨이는 덴마크와 함께 나토에 가입했고 스웨덴은 그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웨덴과 노르웨이는 비공식적이지만 안보 정책에서 건설적으로 협력했다. 노르웨이인들은 강한 스웨덴을 소련의 위협에 대응하는 보호막으로 여겼다. 스웨덴이 정치적 군사적으로 고립되는 것을 막기 위해 체계적으로 노력했고 스웨덴이 영국 미국과 군사 통신을 하는데 채널 역할을 했다. 분명한 건 스웨덴이 노르웨이와 긴밀한 관계였고 나토로부터 원조를 받았으며 결국은 나토와 방위에서 협력할 준비가 돼 있었다는 점이다. 
228 229쪽

노르웨이는 나토 가입을 놓고 정치권이 분열됐다. 격렬한 다툼은 핵 재무장 문제를 놓고 1950년대 중반의 정점에 다달았다. 이는 노르웨이 영토에 전술 핵무기를 두려는 나토의 계획과 연관이 있었다. 스웨덴은 노르웨이 영토의 나토 기지가 주둔하는 사안과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핵무기를 배치하는 사안을 반대했다. 
한편으로 스웨덴의 중립 정책은 강한 방위에 기반을 두고 있어서 자체 핵무기 개발을 신중히 검토했다. 하지만 두 나라 모두에서 비무장 쪽 핵 비무장 쪽 견해가 승리했고 양국 간의 협력을 통해 어느 국가도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았다.
-230쪽

 

결국 나토에 가입한 스웨덴. 2차 대전 당시의 상황만 보면 소련을 걱정하느라 독일을 도운 스웨덴의 선택이 우스워 보이지만,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라는 사건까지 이어보면 그림이 달라진다. 흥미롭다.

 

덴마크는 북유럽 관세동맹을 유럽 경제 협력으로 나가는 길의 초석이라 여겼다. 반대로 스웨덴과 노르웨이는 북유럽의 해결 방안을 유럽 경제 협력의 대안으로 여겼다. 스웨덴은 세 스웨덴과 덴마크는 관세 동맹을 원했으나 노르웨이는 자유무역을 꺼려 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덴마크의 농업과 스웨덴의 산업 부문과 경쟁하길 꺼려했다.
-237쪽

스칸디나비아 세 국가의 사회민주주의 정부가 실행한 구체적인 계획의 성공 사례로는 1951년의 스칸디나비아 항공회사 설립을 들 수 있다. 부분적으로 이는 미래에 대한 투자였고 사회 기반 시설에 관한 구상이었기 때문에 국가 개입에 대한 찬성이 있었다.
이 기획은 사회민주적이었다. 세 나라 정부는 유사한 방식으로 생각했다. 동시에 이는 민간 자본가들과의 긴밀한 협력에 기반을 두었다. SAS는 결과물을 산출한 하나의 정치적인 계획이었다. 
-240쪽

1945~1972년은 북유럽 국가의 협력이 가장 빠르게 확장된 때다. 유럽 북유럽 국가들은 1961년 유럽 경제공동체 가입을 놓고 분열했지만 그 대신 헬싱키 협약을 체결했다. 모호했으나 경제 협력을 위한 지역을 마련한 꽤 포괄적인 협약이었다. 이 시기 가장 중요한 제도의 혁신은 1952년 북유럽 이사회를 설립한 것이다.
-241쪽
사회와 정치의 과학화 속에서 정치를 폐지하고 정치 사안들을 전문가들이 풀어야 할 문제로 재정립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이를 통해 이 시대를 특징 짓는 높은 수준의 협정뿐 아니라 사회민주주의의 패권을 이루었다. 특히 케인스 전통의 경제학자들이 다방면에서 뛰어난 지식인과 개혁적인 테크노크라트가 됐다. 
결과적으로 사회민주주의 체제는 교양 인문주의에서 사회의 지배적인 관점과 같은 경제학으로 완만히 변화했다. 
가부장적 특색을 지닌 새로운 정부는 새로운 체제의 특징이기도 했다. 개혁적인 테크노크라시는 민주의 민주주의와 긴장관계에 돌입할 수밖에 없었다. 
-252쪽

<풍요한 사회>와 <새로운 산업 국가>에서 근대사회에 대한 생각을 명시한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1930년대 말 갤브레이스는 군나르 뮈르달의 막역한 친구가 됐고 친구가 됐다.
자본주의 담론은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 저항이 사라져버린 산업화주의 담론으로 대체됐다. 갤브레이스는 새로운 통합 구조에 옛 소련 계획 경제를 미국 자본주의와 융합시키는 비전을 제시했다.
노르웨이와 스웨덴에서 연구원들은 개혁적 기술 관료들이 핵심 집단이 됐고 미래 동력의 무한한 자원인 원자력이 의제에서 최우선시됐다. 2차 대전 직후 막대한 재원이 두 나라의 원자력 연구소에 투입됐다. 노르웨이는 1951년 원자로를 작동시킨 세계 최초의 국민 국가였다.
-
255쪽

 

전간기 상황에서 파시즘으로 향하지 않고 사회적 합의로 나아간 것, 그리고 이후 사민주의의 전성기에 놀랄만한 번영과 함께 재분배에서도 성과를 거둔 것은 정말 대단하다. 왜 저들은 그렇게 잘 해나갈 수 있었을까, 혹시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갖는 것도 당연하고. 그래서 한국 사회의 어느 쪽에서는 계속 노르딕 모델을 칭찬하고, 또 궁금해한다.

책을 읽다 보니, 켜켜이 쌓인 역사에 결국 주목하게 된다. 뒤늦게 발전한 한국 같은 나라에서 사는 사람의 눈으로 보자니 좀 무력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대형 산업회사들의 소유 구조가 소수 집단에 집중된 점이 스웨덴의 특징 중 하나인데 이 소수 집단을 일컬어 '15개 가문'이라고 한다. 이 집단들은 대개 스웨덴의 대형 은행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엔스킬다 은행을 소유한 발렌베리는 여러 기업의 지배 지분을 가지면서 스웨덴의 주도적인 기업이 됐다. 발렌베리 그룹은 미시적 차원의 민간 기업과 거시적 차원의 국가 사이의 '중간 정도의 수준'에서 활동했다. 개별 회사를 초월한 이 수준의 사업은 조직화된 관리와 자유로운 기업가 활동 모두를 특징으로 삼으며 삼는다.
발렌베리 가문의 성공 이면에는 단순히 구조적인 요인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굉장히 유능했다. 마르쿠스 발렌베리 주니어는 전쟁 이전에는 스웨덴의 테니스 챔피언이었고 전쟁 기간에는 영국과의 무역 협상에서 정부와 긴밀하게 공조했다.
사회민주주의와 재계의 상호작용은 역할을 충실히 했다. 이 시기에 스웨덴은 자유 자본주의보다 산업주의의 논리에 따라 사회민주주의 가치 기능을 더 발휘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262쪽

또 다른 특징은 효과적인 노동정책 발달을 위한 기제가 공공부문에 의해 빠르게 수립됐다는 점이다. 렌-메이드네르 모델이 추구하는 바는 완전고용, 안정적인 물가와 임금 수준, 사내에서 협의 가능한 노동자의 자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통상 무역에서 구조적인 합리화의 필요성을 고려해 경제 성장에 대비하는 체제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한 수단으로 긴축 재정 정책, 폭넓은 권한을 지닌 노동 조정권, 그리고 연대 임금 정책이 필요했다 거시경제적 관점에서 가장 놀라운 일은 노동시장위원회가 옹호한 능동적이고 효과적인 노동 조정이었다. 재분배의 중요 특징은 조직된 계급 이익과 관련해 중립적이었다는 점이다.
무엇이 이 기구를 그렇게 효과적으로 만들었을까. 대체로 이 조직의 인사과 사람들은 처음부터 노동시장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이나 기존의 관료제에 반대하던 일종의 하위 관료들을 노동조합으로부터 채용했다.
-264쪽

노동력을 무자비하게 관리하는 성향은 특히 스웨덴 사회민주주의의 특징이었다. 이는 사회 규범으로 규정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고 따라서 상대적인 합의가 일어났다. 사회민주주의 전성기에 노동력을 재배치하던 스웨덴의 정책은 산업의 강화와 재개편에 중요한 초석이 됐다. 이 부문에서 냉엄한 스웨덴과 온화한 노르웨이 간의 차이가 분명하다.
-264~265쪽

노동 조정과 더불어 렌-메이드네르 모델의 또 다른 주요한 기제는 연대임금 정책이었다. 개별 회사들의 수용력에 관계없이 동등한 일에는 동등한 임금을 지불하는 정책이다. 저임금에 대한 임금 인상이 요구되는 한 고임금에 대한 요구를 지연시킬 수 있었다. 
전제조건이 있는데 직장을 잃은 노동자가 다른 지역의 다른 회사로 빠르게 귀속돼야 한다는 점이다. 이 계획이 성공한 이유 중 하나는 노사 간의 상호 이해가 바탕이 됐기 때문이다. 노동력 경쟁을 하지 않기 위해 조심하는 고용주 단체인 경영자협회가 연대 임금 정책을 발전시킴으로써 이 모델의 목적에 도움이 됐다. 마찬가지로 노동조합총연맹 측의 연대 정책은 조직의 높은 수준으로 중앙집권화된 통제력을 전제로 했다.
-265~266쪽
양국에는 사회민주주의 체제의 전형이자 국가의 아버지상이 된 중요 인물들이 있었다. 스웨덴의 타게 에를란데르와 노르웨이의 에이나르 게르하르드센이다. 에를란데르는 1946~1969년에 총리를 지냈고 게르하르드센은1945~1965년에 총리를 지냈다.
두 사람은 테크노크라트가 아니지만 테크노크라트를 위한 자리를 만들었고 그들의 전문 지식을 최대한 활용했다.책무를 가능한 한 전문가에게 많이 맡기는 행위는 정치 반대를 약화시키는 방법이기도 했다.
-347~348

처음에는 계획경제와 관련해 민주적인 어떤 것도 없었다. 그러나 민주주의적 요인은 끝까지 논의의 일부가 됐다. 조합주의 정책은 새로운 게 아니었으나 사회민주주의의 전성기 동안 돌파구를 마련하면서 강성한 이익 집단의 성장과 더불어 중요성을 뛰게 됐다.
여기서 조합주의의 두 유형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협의조합주의는 중재자로서 국가가 있든 없든 간에 노동시장에서 조직적인 이익 단체들 간의 체계적인 협의와 협력을 수반한다. 이 유형의 가장 가장 중요한 특징은 노르웨이의 주요 협약과 스웨덴의 살쇠바드 협약에 명시돼 있다. 행정조합주의는 조직화된 특별 이해집단이 공청회나 공공위원회의 대표자들을 통해 공적인 의사결정 과정에 포함되는 것을 의미한다.
-362쪽

행정부의 여러 부분에 특수 이익집단이 맞물린 조합적 다원주의가 발달했다. 행정부는 조합주의 형태의 협력을 수립하는데 이익 집단들의 전문 역량을 필요로 했다. 이익 집단들은 행정 관리자들과 협력 파트너가 되려 했다.
-367쪽

 

서현수 박사가 말한 '모든 것의 비례대표제' '비례대표의 생활화'와 이렇게 이어지는구나.

 

1962년에 21명의 죽음을 불러온 스발바르제도 킹스만 광산 사고가 노르웨이에서 일어났다. 스웨덴에서는 1969년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 북부 키루나에서 대규모 파업이 일어났다. 중산층의 의식은 최초로 육체 노동과 관련된 노동 환경을 직시하게 됐다.
노르웨이에서 1977년 제정된 노동환경법의 12째 조항에는 "기술, 노동단체, 근무시간에 대한 합의, 그리고 임금 제도가 향상돼야 하므로 노동자들이 신체적 심리적 압박을 받지 않고 안전 문제에 주의를 기울일 기회도 악화돼선 안 된다. 그런 환경이 돼야만 노동자들이 이를 통해 전문적인 자기 개발이나 개인적인 성장을 할 수 있는 합리적인 기회가 주어진다"고 기술됐다. "단조롭고 반복적인 업무"와 "근로자 스스로 작업 속도를 달리하는 것"을 못하게 하는 상황은 방치돼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노동자는 작업 수행 체제를 보완하는 데 참여해야만 하고 성과급 정책은 "안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범위에선 시행되지 말아야 했다.
-440~442쪽
핵에너지 논쟁이 치열했을 때 노르웨이는 천연자원 대안을 둘러싼 논의를 강화했다. 온실가스에 관한 우려는 1987년 브룬틀란의 보고서 우리 공동의 미래가 발행된 이후 가속화됐다. 
1990년대의 가장 큰 정치 쟁점 중 하나는 천연 자원이었고 가스 논쟁이 노르웨이 기후논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게 됐다. 핵 에너지의 대체 에너지로서 노르웨이의 천연가스를 스웨덴으로 수출하는 문제가 1988년 이후 논의 대상이 됐다. 1996년 국경 관세를 없애고 스웨덴과 노르웨이 공통 에너지 시장이 설립됐으며 이것은 북유럽 시장으로 확대됐다.
-410쪽

노르웨이는 석유 산업을 노르웨이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1972년 국가 소유의 스타오일을 설립했다. 국가는 지대를 거둬들이고 스타 오일로 하여금 석유자원을 개발하고 경쟁하게 함으로써 경제적으로 이익을 얻었다. 
노르웨이는 국제 석유 분야에서 독립적인 참여와 중대한 기술 발전을 통해 신생산업 보호라는 가장 필수적인 부분에서 성공을 거뒀다. 석유산업 복합체를 세우고 석유 수입의 상당 부분을 미래의 연금 기금을 위해 안전하게 투자함으로써 '네덜란드 병'을 피할 수 있었다. 이는 사회민주주의의 특징을 지닌 기획 경제의 쾌거이며 차별을 기발하게 사용함으로써 새로운 산업을 개발한 대표적인 예다.
-414쪽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사회민주주의 정책으로부터 벗어나 정치구조 밖에 산업이 존재하는 정책으로 이동했다. 스타오일은 더 이상 관리 기관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민용화되고 다국적 기업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315쪽
1991~1993년은 어두운 '위기의 시간'이라고 알려졌는데 스웨덴 크로네의 경제적 압력이 가해지면서 위기가 시작됐다. 이 때문에 1994년 스웨덴은 유럽연합에 가입했다.
스웨덴의 새로운 경제 정책은 단기적으로는 거의 성공적이지 못했다. 에릭슨 같은 전기통신 회사가 1970년대 구조조정 위기를 넘기고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성장하여 거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됐으나 2000년에 정보 기술의 거품이 꺼졌다. 에릭슨은 규모를 현격하게 축소시켜야만 했다.
제약업도 어려움에 직면했고 외국인 소유주들은 대형 파마시아와 아스트라 기업의 주요 지분을 취득하고 본거지를 스웨덴 밖으로 이동시켰다. 철강업과 조선업의 붕괴 이후에 발생한 일이다. 자동차 산업도 위협받았다. 1999년 볼보 승용차 부문이 포드에 매각됐고 다음 해에 사브도 제너럴모터스에 매각됐다. 스웨덴의 근대 산업 국가 중에서 선두에 서게끔 만든 모든 대형 산업회사가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됐다.
1998~2003년 다른 어떤 유럽 국가들보다 스웨덴의 임금이 적게 인상됐다. 중요한 점은 이 시기에 스웨덴의 산업생산성 증가가 유럽에서 가장 높았다는 것이다.
-427쪽

연금제도는 첫째, 지불 기반의 제도로 바뀌었다. 연금 규모는 미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제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에 달려있다. 둘째, 생애소득 원칙이 시작됐다. 더 이상 사람들의 연금은 가장 많은 수입을 번 시기의 소득에 근거해 산출되지 않기 때문에 국가 차원에선 비용이 낮아졌다. 셋째 지불된 연금의 일부는 연금 수령자가 투자 결정에 관여하게 될 적립 연금기금에 할당됐다.
1994년 5월 스웨덴 의회는 새로운 연금제도에 대한 결정을 내렸고 이 결정으로 스웨덴에서 가장 중요한 정책이 붕괴되고 말았다. 스웨덴은 늦지 않게 이 제도를 개혁했고 이는 조선업의 폐쇄 때와 마찬가지로 순조롭고 효율적으로 시행됐다.
-474~475쪽

사회민주주의는 국가와 사회가 대체 가능한 개념이 될 정도까지의 단계에 도달해 있었다. 하지만 이 생각은 1980년대에 급격하게 바뀌었다. 사민당은 갑자기 자유주의 법치주의자가 됐다. 경제 자유주의는 국가 권력을 제재하는 데 관심이 있었고 법치주의는 국가 권력을 제한해 독단적인 역할을 반대하는 데 찬성했다.
토니 주트는 "개인 권리의 법적 수사들이 1970년대 중반 정치 현실로 나아간 것은 정치 현실의 영역으로 나아간 것은 마르크스주의가 후퇴하고 수용소 군도가 파리에서 출판된 시기 힐싱키에서 유럽안보협력 국제회의가 열린 시기와 일치했다"고 주장한다.
-550~551쪽

복지사회, 지식사회, 정보사회라는 개념들이 빠르게 퍼지는 동안 산업사회 개념은 더 이상 회자되지 않았다. 이 사회들은 산업사회 때와는 다른 제도적 유형들을 필요로 했다. 새로운 기술적인 환경은 금융 분야와 주식시장의 국제적 활성화에 부합했다. 안정적이고 관료적이던 대규모 기업에서 두드러졌던 사민주의상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590쪽

 

뒷부분은 사민주의가 힘을 잃는 과정, 거기에 소비주의가 미친 영향, 사민주의의 위상이 몰락한 것이 사회에 미친 영향 등등의 물고 물리는 변화에 대한 설명들로 돼 있다. 하지만 저자는 '그렇다고 민주주의가 위기를 맞은 것은 아니다'라면서, 국가와 굵직굵직한 제도적 장치들이 기본틀이었던 20세기 사민주의 시절과는 다른 정치적인 틀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생각해봐야 할 논점 한 가지.

 

사민주의 이전의 자본주의에서 그랬듯이 권력은 자본 소유주들에게 있다. 그렇다면 이 소유주들은 누구인가 오슬로 주식시장에서 노르웨이 정부는 소유주 자본의 약 40%를 쥐고 있다. 스웨덴 정부도 마찬가지로 주식시장에 관여하고 있다. 새로운 국제 금융자본주의 아래에서 국가자본주의가 다시 대도하는 것은 실로 모순이다. 국가 자본주의는 새로운 기관 자본주의와 결합돼 있다. 이 기금들이 좀 더 민주적인 자본주의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만 정치적 통제에 대한 가능성은 있다.

중간 단계로 내려가면 슘페터와 갤브레이스가 말한 안정적이고 관료화된 대규모의 과거 회사들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복지국가의 보장 체제를 훼손하는 경향이 있다. 노동과 임금 그리고 복지 혜택 간의 관계를 완화할 때가 된 것 같다. 개신교의 강력한 노동관을 버리고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온 오래된 이상을 실현시킬 공간이 필요하다.
부유한 우리 사회에서 개인들이 조직된 임금 노동 밖에 머무는 것을 선택할 기회를 선택의 자유에 포함시킬 수 없는 것일까. 임금 노동을 하지 않는 사람을 충분히 자격 있는 시민으로 포함시키기 위해선 적극적인 시민사회와 성숙한 시민의식이 필요하다. (602~6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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