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수상한 GPS

[구정은의 '수상한 GPS']아프간 충격에 힘 실리는 '유럽군'

딸기21 2021. 9. 2.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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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 troops disembark in Kuwait on Tuesday as the last American soldiers leave Afghanistan.  Photograph: US Air Force/ZUMA Press Wire Service/REX/Shutterstock

 

미군은 예정대로 8월 31일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했다. 미국의 위상을 추락시킨 상징적인 사건이기도 하지만 철군 과정에서 빚어진 국제정치적 파장이 적지 않다. 무엇보다 유럽의 불만이 커 보인다. 


2001년 9.11 테러공격을 받은 미국이 아프간 전쟁을 일으켰을 때 영국, 독일 등 유럽국들도 미국의 요청에 따라 아프간에 군대를 보냈다. 2000년대 초중반 세계에서는 미국의 일방주의 탓에 반미 정서가 심했다. 한국도 그랬지만, 파병한 나라들은 자국 내 반발을 무릅쓰고 군대를 보낸 것이었다. 동시에 유럽에서는 두 차례 세계대전 이후 군사적으로 위축됐던 유럽이 다시 나선다는 인식도 있었다. 그런데 전쟁을 끝내고 군대를 빼내는 과정은 거의 미국의 일방 독주로 진행됐다. 유럽국들은 아직 자국민과 협력자들을 다 빼낼 준비도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미국 조 바이든 정부가 정한 일정에 끌려가야 했다.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등은 이 때문에 유럽 동맹국들의 미국에 대한 신뢰가 떨어졌다고 지적한다.


[뉴욕타임스] With Afghan Retreat, Biden Bucks Foreign Policy Elite

미군의 카불 공항 철수 일정이라도 좀 미뤄달라는 요청조차 바이든은 G7 회의에서 거절했다. 화상으로 진행됐지만 이 회의는 영국이 주재했다. 영국은 아프간전, 이라크전에 모두 미국과 함께 초반부터 가담한 맹방 중의 맹방인데도 바이든은 이 회의에서 보리스 존슨 총리의 체면을 살려주지 않았다. 미국 언론들의 보도를 보면 일정을 못박고 철수시키는 절차를 밟으면서 미국은 아프간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는 다른 나토 회원국들하고 거의 상의를 하지 않았다.

 

Tony Blair, then the British prime minister, visiting soldiers in Afghanistan in 2006, called Mr. Biden’s withdrawal policy “imbecilic.” Credit...Toby Melville/Reuters


도널드 트럼프 정부 4년 동안 미국은 유럽하고 관계가 나빴다. 올초 바이든 정부가 출범하면서, 기후변화와 코로나19 대응 등 여러 이슈에서 다시 미국이 주도권을 잡고 동맹들과 협력하는 관계로 갈 거라고들 기대했다. 바이든 스스로 '동맹의 복원'을 계속 강조했다. 그런데 정작 이 중요한 아프간전 철군 과정은 혼자 결정하고 혼자 진행해버린 셈이다.

올 2월 유럽 안보 논의기구인 뮌헨안보회의가 열렸을 때 바이든은 화상연설에서 "다자외교를 중시하겠다"고 선언했다. 또 중국, 러시아에 맞서서 ‘민주주의 국가’들의 연대가 중요하다고 했다. 주미 독일대사를 지낸 볼프강 이싱어 뮌헨안보회의 의장은 아프간 철군을 보며 “신뢰가 심각하게 손상됐다, 미국이 (신뢰를) 재확인시켜주는 상당한 조치를 해야 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트럼프 정부가 부과한 유럽 상품 수입관세들을 바이든 정부가 아직까지 철폐하지 않은 것, 코로나19를 이유로 유럽국들을 미국인 여행제한구역에 계속 포함시키고 있는 것도 유럽으로선 내심 불만이었다. 8월 30일 EU는 미국의 코로나19 상황이 다시 심각해졌다며 미국을 여행 안전국 리스트에서 제외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올초만 해도 허니문이던 미국과 유럽 사이에 여름이 지나면서 물밑 갈등들이 떠오르고 있다고 분석했다. 거기에 아프간 철군 과정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Barbed wire on the tarmac at Kabul airport on Tuesday.  Photograph: Marcus Yam/Los Angekes Times/Rex/Shutterstock


이번 사태가 유럽에 ‘경종(wake-up call)’이 됐다는 얘기가 많다. 6월에 바이든이 취임 뒤 첫 유럽 순방을 했을 때 샤를 미셸 유럽연합(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미국이 돌아왔다, 우리 동맹들과 전 세계에 좋은 뉴스다”라면서 환영했다. 그런데 9월 1일에는 “세계 경제와 민주주의의 주축으로서 유럽이 우리 시민들과 우리를 도와준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데에 도움도 못 받고 안전보장도 못 받는 상황에 만족하고 있어야 하겠느냐”고 했다. “정책결정에서의 자율성과 행동능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걸 알려주는 데에 이 이상의 지정학적인 사건은 필요없을 것 같다”는 말도 했다.


요제프 보렐 EU 외교안보고위대표는 뉴욕타임스 기고에서 “유럽은 아프간 전쟁에 군사적으로 협력했을 뿐 아니라 아프간에 대한 경제개발 원조로 172억유로를 썼다. 그런데 결국 철군의 시점과 성격은 워싱턴이 정했다. 우리 유럽인들은 카불 공항에서 이제는 탈출해야 한다는 현실과 함께, 우리가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는 현실을 깨달았다”고 적었다. 테리사 메이 전 영국 총리는 8월 말 의회 연설에서 “우리의 정보력이 이렇게 형편없는 것이냐, 아니면 우리는 미국을 따르면서 그 날개 위에서 기도만 하고 있으면 밤새 안녕할 거라고 믿었던 것이냐”라는 발언을 했다. 유럽 지도자들에게서 노골적인 불만들이 터져나온 것이다.  

‘나토 위기론’도 거론된다. 아프간 전쟁은 나토 조약 5조 ‘집단방위’ 조항이 처음 발동된 전쟁이었다. 미국이 초유의 테러공격을 받았으니 동맹인 나토도 함께 참전해야 한다며 회원국들이 군대를 보낸 것이었다. 그런데 전쟁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는 '미군이 카불 공항에 좀 더 남아서 우리가 다 나올 때까지 지켜주면 안 되겠느냐'고 사정하다가 거절당한 꼴이 됐으니, 유럽이 격앙된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

 

President George W. Bush gives an address on Afghanistan and the war on terror, saying the US “will not fail” at Travis Air Force Base on October 17, 2001.   Jim Verchio/WireImage via Getty Images


무엇보다 이달 말에는 독일 총선이 있다. 16년 간 유럽을 이끌어온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후임이 새로 정해지면 유럽의 정치적 풍향이나 미국과 유럽의 관계에 변화가 올 수밖에 없다. 지금이 독일뿐 아니라 유럽 전체에 중요한 시기인 것이다. 그런데 아프간에서 난민들이 대거 들어오면 유럽 정치, 특히 독일 정치도 그 영향에 휘둘릴 가능성이 높다. 메르켈의 후임을 노리는 독일 집권 기독민주연합의 아민 라셰트는 8월 초 아프간 철군에 대해서 “나토 창설 이래 최대의 실패”라고 표현했다. 그 후 TV 토론에서는 “미국인들에게 모든 것을 맡겨두지 않을 수 있도록 유럽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워싱턴포스트] As U.S. leaves Afghanistan, Europe sours on Biden

미국 의존에서 벗어나기 위해 EU 차원의 상비군이나 신속대응군을 둬야 한다는 얘기는 오래 전부터 나왔다. 메르켈 독일 총리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이전부터 유럽군을 만드는 것을 찬성해왔다. 그러나 비용이나 정치적인 문제 때문에 실현되지는 못했다. 그런데 아프간 철군을 계기로 유럽군을 만드는 방안에 다시 힘이 실리고 있다. 일례로 테오도로 로페스 칼데론 스페인군 참모총장은, 현지 신문 엘문도 인터뷰에서 1일 EU가 미국에 안보를 “전적으로” 의존하는 상황이라면서 유럽군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럽외교관계위원회(ECFR)] The fall of the Afghan government and what it means for Europe

동유럽 옛 유고연방 내전 때 나토가 파병을 했지만 유럽국 소속 나토군은 병정 인형이나 다름없었고 결국 미국이 나서서 폭격을 했다. 그 사태를 겪은 EU는  1999년 ‘60일 안에 6만명을 소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로 합의했지만 빈말로 끝났다. 그 뒤 EU가 1500명 정도의 신속대응군을 다시 제시했으나 이 또한 실제로 이뤄진 적은 없다. 파병을 하려면 EU 회원국들뿐 아니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승인까지 받아야 하는 복잡한 절차 탓이다. 리비아와 아프리카 차드에 파병하려던 EU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병합했을 때에 또 한 차례 유럽의 자체적인 방어능력을 키우자는 목소리가 커졌고 미국 트럼프 정부가 ‘아메리카 퍼스트’를 외치자 다시 유럽군 창설이 거론됐다. 그러나 언제나 말뿐이었다.

 

Afghans queue up as they wait for the banks to open and operate at a commercial area of Kabul.  Photograph: Hoshang Hashimi/AFP/Getty Images

 

이번엔 다를까. 지금 거론되고 있는 것은 5000명 정도의 상비군(stand-by force)이다. 지난달 카불 공항에서 마지막까지 치안을 맡았던 미군은 5800명 정도였다. 아프리카연합(AU)은 에티오피아를 기지 삼아 5000여명 규모의 상비군을 두고 있다. 5000명 정도라면 EU 회원국들에 재정적으로 큰 부담이 되지 않으면서도, 이번처럼 급박할 때에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미국의 안보 우산 밑에 들어가 있는 것이 사실 70여년 동안 유럽국들에는 국방 부담을 줄일 수 있는 편한 방어막이었다. 미국은 유럽이 나토 분담금을 제대로 내지 않으면서 미국에만 의존한다고 불만을 표해왔다. 유럽군이 만들어져서 위기 시에 투입된다면 미국도 반대할 리가 없다.

[로이터] Afghanistan pullout spurs EU to revive rapid reaction force

논의는 어느 정도 구체화되고 있다. 일단 11월에 위기 때 곧바로 보낼 수 있는 신속대응군과 관련된 계획을 EU가 공개할 예정이다. 프랑스가 주도해서 올들어 초안을 다듬어왔다. 아프간전의 경우 프랑스는 나토 회원국으로서 국제치안유지군(ISAF)에 참여했으나 이 전쟁에 적극적이지 않았으며 독일이 주된 유럽측 참전국이었다. 그러나 유럽에서 군사 행동의 중심은 프랑스다. 2011년 리비아 공습 때 나토군 주력으로 가담했고, 이슬람 극단세력을 막는다며 요 몇 년 새 아프리카 내륙 사헬 지대에 군대를 보내기도 했다. 내년 1월부터 6개월간 프랑스가 EU 순회의장국을 맡는데 아마 이 때 논의를 적극 진전시키려 할 공산이 크다. 유럽 언론들은 내년 3월까지 유럽군의 큰 틀을 잡는 것으로 얘기가 되고 있다고 전한다. 2일과 3일 EU 회원국 외교·국방장관들이 슬로베니아에서 아프간 관련 긴급회의를 여는데 여기서는 당장 시급한 대응을 주로 얘기하겠지만 앞으로의 논의를 계속 주목해볼만 하다.

 

President Biden after speaking about the bombings at the Kabul airport on Thursday. AP


동맹인 유럽은 당황했겠지만 어쨌든 바이든은 전임자들이 하지 못한 '종전'을 했다. 바이든은 미국의 보기 드문 '외교 전문가 대통령'으로 꼽힌다. 지난 30여년 동안 군사행동에 대한 그의 견해는 ‘사안마다 달라요’였다. 1991년 걸프전에는 반대했으나 1990년대 보스니아 내전에는 군사개입을 주장했다. 아프간 전쟁도 찬성했다. 그러나 2년 뒤 이라크 침공에는 반대했다.

 

군사행동이 필요하면 해야 한다는 바이든의 시각은 '적극적 개입주의'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2009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시절 8년간 부통령을 지내면서 바이든의 견해는 군사적인 모험주의를 경계하는 쪽으로 바뀌었다고 미국 언론들은 전한다. 일례로 2009년 오바마 당시 대통령이 아프간에 미군을 대대적으로 증파할 때 바이든은 강하게 반대하며 백악관에서 홀로 외로운 싸움을 벌였다. 2011년 나토의 리비아 폭격에도 반대했다. 심지어 그 해 미군 특수부대가 파키스탄에서 오사마 빈라덴 제거작전을 하려 할 때에도 바이든은 처음에 연기하자는 주장을 했다고 한다.

 

Women cross a street in Kabul.  Photograph: Aamir Qureshi/AFP/Getty Images

 

오바마는 물론이고 트럼프조차도 아프간에서 당장 철수해선 안 된다는 군 장성들의 의견을 받아들였는데, 바이든은 취임하자마자 전쟁 종료를 택하고 철군을 강행했다. 이번 세기에 들어와 미국은 아프간, 이라크 두 곳에서 전쟁을 벌였고, 의원마다 시각이 다르긴 했지만 공격적인 대외정책에는 공화당과 민주당의 초당적인 공감대가 있었다. 미국의 관료들과 전문가들은 바이든의 결정이 미국민들의 여론에는 부합하지만, 결과와 과정 모두 외교안보의 기존 틀을 벗어난 것이었다고 평가한다.

이를 ‘미국의 퇴각’으로 봐도 될까. 중국과 러시아가 웃고 있을 것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그러나 미국만큼의 경제력과 군사력이 없는 두 나라가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역할을 대체하기는 힘들다. 당장 아프간의 혼란이 심해져서 난민이 쏟아져나오고 마약거래가 판치고 테러가 일어나면 미국보다 더 곤란해질 수 있는 게 중국과 러시아다. 두 나라는 오히려 미군이 아프간에 있던 시절보다 훨씬 더 큰 부담을 안게 될 수 있다.

 

Russian servicemen took part in a joint military exercise by Russia, Tajikistan and Uzbekistan near the border of Afghanistan on Aug. 10.  TASS/ZUMA PRESS


바이든 정부 외교정책의 초점이 중동 대테러전에서 아시아 등으로 이동할 것이라 보는 이들이 많다. 쉽고도 당연한 전망이지만, 구체적으로 '어디로 옮겨갈 것인가'를 말하기는 일러 보인다. 인권을 잣대 삼아 중국과 러시아를 계속 압박할 것이고, 유럽이 실망했다지만 동맹관계라는 큰 틀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전문가들의 말을 인용해 "대만이나 우크라이나, 이스라엘 등 우방에 대한 정책도 달라진 게 없으며 이런 이슈들에는 ‘만료일’이라는 게 없다"고 지적했다. 바이든은 아프간 철군 결정을 계속 옹호하면서 “미국 외교정책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이라고 강조했지만, 국제질서에 어떤 방향으로 어느 정도나 변화를 가져올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