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해군의 스위스 아미 나이프.’
미군 구축함 로스(USS Ross)호가 6월 말 우크라이나 남서부 항구 오데사에서 출항해 흑해에서 군사훈련을 벌였다. 이지스 방공시스템을 탑재한 알레이버크급 순항미사일 구축함 로스호는 1997년 취역해 지중해와 아드리아해, 발트해 등에서 활동해온 전함이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미국 독립기념일인 7월 4일 로스호를 방문해 미국과 우크라이나의 우호관계를 치하했다.
존 D 존 함장은 CBS방송 인터뷰에서 로스호를 소개하면서 적들의 군함과 전투기와 잠수함들까지 막아낼 수 있는 ‘스위스 아미 나이프’라고 표현했다. 흑해에서 러시아를 찌르는 맥가이버칼이라는 얘기다.
이 배는 흑해에서 진행 중인 합동군사훈련 ‘시브리즈(SeaBreeze) 2021’의 기함 역할을 맡았다. 시브리즈는 1997년부터 유럽 작전을 담당하는 미 해군 6함대와 우크라이나 해군이 공동 주최해온 해상군사훈련으로, 지난달 28일 시작해 7월 10일까지 이어졌다. 수륙양용작전, 육상 기동전, 잠수전, 해상방어, 방공전, 대잠수함전, 수색구조작전 등 전방위로 이뤄진 이 훈련에 올해에는 역대 최다국가가 참가했다. 6대륙 32개국 함정 32척과 항공기 40여대, 18개 특수작전팀과 총 병력 5000여명이 투입됐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뿐 아니라 한국, 호주, 브라질, 이집트, 이스라엘, 세네갈 등도 끼었다. ‘미국의 동맹들’의 세력과시용 훈련이었던 셈이다.
러시아는 2014년 우크라이나 땅이던 크림반도를 병합했으며, 이로써 러시아가 자랑하는 흑해함대의 모기지인 크림반도 남단의 세바스토폴이 다시 러시아에 귀속됐다. 그후 러시아는 크림반도 주변 영해를 외국 선박이 아예 지나지 못하게 했으며 러시아,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불가리아, 터키, 조지아 6개국에 둘러싸인 흑해의 군사지정학적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지난달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스위스에서 이뤄진 첫 정상회담에서 서로 예의를 한껏 차리면서도 견제의 팽팽한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미국은 민감한 바다 흑해에서 대규모 군사훈련을 했다. 미국은 남중국해에서 ‘항행의 자유’를 주장하며 중국과 대치해온지 오래다. 공해는 어느 한 나라의 것이 아니며 모두가 지나다닐 권리가 있다는 논리를 이번에는 흑해에서 러시아를 상대로 들이밀었다.
러시아가 가만히 있었을 리 없다. 시브리즈 훈련 시작 닷새 전인 6월 23일, 오데사를 출발한 영국 구축함 디펜더호 위를 러시아 전투기들이 날아다니는 장면이 방송 카메라에 잡혔다. 러시아 국방부는 디펜더호가 러시아 영해에 3km 진입해 세바스토폴 근처까지 접근하자 경비함정이 경고사격을 했고 수호이(Su)-24 폭격기가 디펜더 앞에 폭탄 4개를 투하, 해역을 떠나게 했다고 발표했다.
영국 측은 러시아 영해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크림반도는 우크라이나 땅이기 때문에 디펜더가 지나간 바다는 우크라이나 영해이며 러시아군의 폭격은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카메라에 포착된 영상에는 러시아 전투기 조종사가 영어로 “경로를 바꾸지 않으면 발사하겠다”고 경고방송하는 목소리가 녹음됐고 BBC도 러시아 전투기들에서 폭격음이 들렸다고 보도했다. 경고성이라 하더라도 러시아가 폭탄을 투하한 것이 사실이라면 냉전이 끝난 이래 러시아 정부가 나토측 군함을 막기 위해 ‘실탄’을 사용한 첫 사건이다. 러시아와 서방의 긴장 속에 군사적 충돌 위협이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실례다.
러시아는 시브리즈에 앞서 S-400과 판치르(Pantsir)-S 미사일 시스템, Su-27 등 전투기와 헬기 20여대를 배치해 맞불 군사훈련을 시작했다. 이어 장거리 순항미사일을 탑재한 전함 두 척을 크림반도로 귀환시킬 것이라고 발표했다. 인테르팍스 보도에 나온 두 척의 배는 칼리버 크루즈미사일 시스템이 장착된 아드미랄 에센 구축함과 모스크바 미사일 순양함이다. 이 배들은 시리아 내전 때 시리아정부군을 지원하기 위해 지중해 동부에 머물고 있었다.
아드미랄 에센은 러시아 흑해함대의 기함이다. ‘전함 포템킨’으로 훗날 더 유명해진 그리고리 포템킨 대공이 1783년 창설한 흑해함대는 흑해와 지중해를 넘나들며 19세기 러시아제국과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싸움에서 주력부대 역할을 했다. 20세기에는 서방과 대치하는 소련 해군의 기둥이었다. 이 함대는 창설 이래로 세바스토폴에 사령부를 두고 있기 때문에 1991년 우크라이나가 독립한 뒤에는 본의 아니게 외국에 사령부를 남겨놓고 기지를 빌려 쓰는 처지가 됐다. 2014년의 크림반도 병합은 러시아에는 흑해함대의 모항을 다시 장악했다는 것만으로도 군사적 성과였다.
[구정은의 '수상한 GPS'] 미·러·중 '군구 체계'는?
푸틴 대통령은 지난 2일 44쪽 분량의 새 국가안보전략에 서명하고 웹사이트에 공개했다. 크림반도 병합으로 긴장이 고조된 2015년 개정 이후 6년만의 개정판이다. 2015년 버전만 해도 서방과의 관계를 ‘회복 가능한 것’으로 간주했고, 1990년대부터 쓰였던 온건한 표현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카네기 모스크바센터] Russia’s National Security Strategy: A Manifesto for a New Era
반면 이번 개정판은 톤이 확연히 달라졌다. 국가안보를 비롯해 경제문제, 기후변화와 환경, 수호해야할 가치 등 모든 분야에서 미국 및 그 동맹국들과 러시아의 대립이 격화되는 ‘새로운 시대’로 가고 있다는 선언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외교정책에서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기는 했지만 미국과 주요 나토 동맹국들에게 '비우호국'이라는 낙인을 찍었고, 서방과의 관계개선은 우선순위에서 뒷전으로 밀어냈다.
미국이 주도한 흑해 훈련과 러시아의 반발은 그 대립이 실제 군사적 충돌로도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위험한 신호다. 싱크탱크 카네기모스크바센터의 드미트리 트레닌 소장은 웹사이트에 실은 논평에서 “러시아가 물러설 수 없는 억지력의 ‘레드 라인’을 미국이 육해공 어디에서든 무력화하려고 시도한다면 모스크바 측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강력한 방어로 나설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충돌이 발생하고 사상자가 나올 것이며, 그것이 다시 긴장을 고조시키면서 러시아와 나토의 대립이 문자 그대로 ‘벼랑끝’으로 치닫게 될 것”이라는 암울한 시나리오를 거론했다.
바이든 정부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망가뜨린 미국의 ‘지도적 위치’를 ‘도덕적 리더십’으로 다시 일으켜세우겠다고 공언해왔다. 하지만 아시아에서는 동맹국들에게 ‘중국에 맞서 내편에 줄을 서라’라고 강요하고 있고, 유럽에서는 러시아를 포위하기 위해 똑같은 전략을 취하고 있다. 미-러 정상회담을 앞두고 독일의 국제정치 분석가 콘스탄틴 에게르트는 도이체벨레 기고에서 “미국이 냉전적 사고를 탈피해야 한다”면서 러시아가 중시하는 국제적 위상을 인정해주고, 모욕감을 주지 않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번 군사훈련을 바라보는 트레닌 소장의 우려와도 상통한다.
[구정은의 '수상한 GPS']바이든과 푸틴, 노련한 두 사람의 만남
바이든 정부의 출범을 국제질서의 ‘정상화’로 여겼던 사람들은 이제 의문이 들기 시작할 것 같다. 트럼프식 막말 난장판과 바이든식 근육 자랑 가운데 어떤 것이 더 세계에 위험할까.
<한겨레21> 1371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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