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북쪽 스발바르. 북극에서 1300km 떨어진 작은 섬이다. 북위 74~81도에 위치하며 면적의 60%가 빙하인 ‘지구상에서 가장 메마르고 척박한 곳’이다.
이 섬의 옛 탄광에 스발바르국제종자저장소(Svalbard Global Seed Vault)가 있다. 소행성 충돌에도 견딜 수 있는 강력한 내진 설계에 영하 18도로 늘 유지되는 땅굴 창고를 만들어, 세계 각국 정부와 연구기관·유전자은행들이 보내온 종자를 보관한다. 1984년 북유럽유전자은행이 영구동토를 파고 들어간 폐탄광에 씨앗을 보관하기 시작한 것이 첫걸음이었다. 7년간의 협상 끝에 2004년 유엔 식량농업기구(FAO) 주도로 유엔 ‘식량과 농업을 위한 식물유전자원에 관한 국제협약(스발바르 협약)’이 만들어졌다.
세계은행의 지원을 받아 국제농업연구자문그룹(CGIAR)과 노르웨이가 2008년 공식 개장해 운영하고 있는 이 창고는 기독교 성경 속 ‘노아의 방주’에 빗댄 인류의 방주로 불린다. 쌀과 밀, 옥수수 같은 인류의 주곡 작물을 비롯해 체로키 인디언의 곡물까지 7000여종의 종자가 여기 간직돼 있다. 국제무대에서 극도로 고립된 북한도 이곳에는 종자를 보낸다. 특히 기후변화 때문에 작물 분포가 변하고 식물종 ‘멸종’ 위험이 커지면서 종자보관소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
25일(현지시간) 인도, 말리, 페루 등의 30여개 종자은행들이 종자 6만여개를 보내오면서 이곳에 보관된 씨앗이 100만개를 돌파했다고 로이터통신 등이 보도했다. 가나에서는 나나 아쿠포-아도 대통령 등이 직접 스발바르를 방문해 씨앗 상자를 맡겼다. 영국 찰스 왕세자 소유의 하이그로브 농장에서도 씨앗을 보내왔다. 종자보관소 운영에 참여하고 있는 독일 크롭트러스트의 슈테판 슈미츠 사무국장은 “생물다양성, 곡물다양성, 건강한 식단과 영양가 있는 음식을 보전해야 한다”며 “종자보관소는 지구의 식량 안전을 지키기 위해 글로벌 시스템을 ‘백업’해두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슈미츠 국장은 특히 소농들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시간을 줘서 계속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세계의 일부 사람들은 고칼로리에 고지방 음식을 즐겨 질병을 앓기도 하지만,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에 따르면 여전히 지구상 9명 중 1명은 굶주리고 있다. 과학자들은 기후변화로 농경 패턴이 달라지고 특정 지역의 곡물 생산량이 줄어들 수 있으며, 이것이 지구적인 불안 요인이 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그런 조짐은 이미 나타나고 있다. 시리아 내전이나 수단 내전은 강수량이 줄어들고 식량이 모자라게 되면서 분쟁이 심화된 측면이 있었다. 2011년 ‘아랍의 봄’도 지구적인 곡물값 상승에 영향을 받았다.
종자보관소는 평소엔 닫혀 있다가 씨앗이 들어갈 때에만 개방한다. 반입이 아닌 방출을 위해 문을 연 것은 딱 한 번이다. 2015년 이곳의 씨앗을 빼내 시리아에 제공했다. 시리아 알레포의 국제건조지역농업연구센터(ICARDA)는 128개국에서 온 종자 15만종을 보관하고 있었는데, 내전이 일어나자 반군이 유전자은행을 장악했다. ICARDA는 인력을 철수시킨 뒤 스발바르에 도움을 요청했고, 그동안 맡겨둔 종자 일부를 돌려받아 레바논과 모로코에 유전자은행을 다시 만들었다. 상황이 안정되자 ICARDA는 지난해 8월 스발바르에 종자들을 반납했다.
인류의 미래가 담긴 씨앗들…북극 스발바르 ‘노아의 방주’에 가다
지구에 위기가 와도 씨앗은 지켜야 한다는 뜻에서, 종자보관소를 ‘운명의 날 창고(doomsday vault)’라 부르는 이들도 있다. 북극권에 창고를 둔 것은 설혹 전기가 끊겨도 저온이 유지되게 하기 위해서였다. 지난해 10월 노르웨이 정부는 1100만달러를 들여 시설을 고쳤다. 하지만 이곳조차 기후변화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종자들에는 영향이 없었으나, 영구동토층이 녹으면서 입구 쪽에 물이 새어들어온 적이 있다고 로이터는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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