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유명한 작가 밀란 쿤데라(90)가 체코 국적을 회복했다. 페트르 드룰라크 프랑스 주재 체코대사가 지난 3일 파리에 살고 있는 쿤데라의 자택을 찾아가 시민증을 전달했다. 드룰라크 대사는 체코 국영TV에 나와 “체코가 낳은 가장 위대한 작가의 상징적인 귀향”이라고 했다.
쿤데라는 1929년 체코 브르노에서 태어나 자랐으나 1975년 공산정권의 탄압을 피해 고국을 떠났다. 그 후 프랑스에서 줄곧 살아왔고 주요 작품들도 모두 파리에서 발표했다. 쿤데라의 고향인 체코(옛 체코슬로바키아)는 그의 작품들을 금지했고, 이 조치는 1989년 ‘벨벳혁명’으로 체코가 자유화된 뒤에야 풀렸다. 공산정권은 무너졌으나 쿤데라는 1981년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 이래 체코 국적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1967년 소설 <농담>을 발표하면서 세계 문단에 이름을 알린 쿤데라는 <삶은 다른 곳에>(1969년), <이별의 왈츠>(1972년), <웃음과 망각의 책>(1978년), <불멸>(1990년), <느림>(1995년), <향수>(2000년) 등 여러 작품들을 썼다.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쿤데라의 후기 작품들 중에는 프랑스어로 쓴 것들이 더 많다. 먼저 프랑스어로 쓰이고, 그 다음에 체코어로 번역돼 작가의 고국으로 ‘역수입’됐다. 작가에게 망명은, 모어(母語)가 아닌 언어로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쓴 헝가리 소설가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1956년 공산정권의 억압에 맞선 부다페스트의 봉기가 소련군 탱크에 짓밟히자 고향을 떠났다. 프랑스어권인 스위스 뇌샤텔에 정착했고, 201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곳에 살았다. 그는 평생 프랑스어로 말하고 글을 쓰면서도 프랑스어를 ‘적(敵)의 언어’라 불렀다고 한다. 자신에게서 ‘모국어를 죽이는’ 언어였기 때문이다.
2017년 공쿠르상 신인상을 받은 마리암 마지디는 이란에서 태어났다. 프랑스로 망명한 부모를 따라 6살에 파리로 이주했다. 작가가 모국어인 파르시(페르시아어)와 다시 조우하게 된 것은 어른이 된 이후다. 지난해 국내에 번역된 <나의 페르시아어 수업>에는 작가가 겪은 두 언어의 갈등과 화해가 담겨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마지디는 대학에서 프랑스 문학을 전공했고 이주민 아이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
“17세기와 18세기에 체코 민족은 존재하기를 멈추었다. 19세기에 사실상 체코 민족은 두 번째로 탄생한 셈이다. 이백 년의 세월 사이에 체코어는 도시에서 농촌으로 피난을 갔고 문맹들에게만 속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말은 계속 고유의 문화를 낳았다. 소박한 문화, 유럽의 눈에 뜨이지 않는 숨겨진 문화, 노래, 이야기, 속담, 격언 같은 것들.” 쿤데라는 소설 <농담>에서 한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지난해 프랑스를 방문한 안드레이 바비스 체코 총리가 쿤데라를 만나 설득을 했고, 마음을 돌려 ‘체코인’으로 돌아오게 하는 데 성공했다고 현지 언론들은 전했다. 정작 쿤데라는 언론이나 외부와의 접촉을 일절 하지 않기 때문에, 노작가가 어떤 마음으로 ‘국적 회복’을 받아들였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은둔자처럼 지내면서도 그는 틈틈이 고향을 찾곤 했다고 한다. 체코어를 ‘역사를 이어주는 구름다리’라 묘사했던 아흔의 작가에게 다시 취득한 국적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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