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향수 L'ignorance
밀란 쿤데라 (지은이) | 박성창 (옮긴이) | 민음사
아무리 영어단어 실력이 줄어들었다지만 내가 정말 까마귀 고기를 먹었나 하고 잠시 고개를 갸우뚱 했습니다. Ignorance. 곱씹어봐도 ‘무지’ ‘모른다’는 뜻이 분명한데 왜 이 책의 제목이 ‘향수(鄕愁)’로 번역됐을까 해서 말이죠.
밀란 쿤데라의 친절한 설명에 따르면 향수는 단지 고향을 그리는 것 뿐만이 아니라 시간과 장소와 그 속의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것들에 대한 그리움인데, 그 그리움은 ‘기억’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끊어져 있으면서도, 그리움의 대상이 대체 어떤 형상으로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몹시 궁금해하고 괴로와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왜 괴로운가 하면, 내가 어떤 사람을 몹시 그리워하는데 그 사람을 10년이고 20년이고 만나볼 수가 없는 겁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떤 얼굴과 어떤 마음으로 지내고 있는지 알지 못해서 너무나 괴로운 상태. 그런데, 나는 너무나 그리워 하고 괴로워하다가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그리운 곳으로 찾아갔는데 기다리던 이들은 자신들의 ‘기억’을 지키는데 급급해서 내가 보낸 시간에는 관심도 없고 모든 것이 엇갈리기만 한다면.
밀란 쿤데라의 작품을 읽어보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참 재미있었습니다. 전형적인 ‘소설’이라는 생각도 들구요. 특이하다든가, 새롭다든가 하는 것은 아니지만 비교적 재미가 있고, 반전(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마는)도 있습니다. 체코에서 프랑스로 망명한 이레네라는 여자와 그 애인 구스타프, 체코에서 덴마크로 망명한 조제프라는 남자와 그의 옛추억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망명이라는 것은 쿤데라의 삶의 궤적에서 나온 소재이겠지마는, 그저 ‘도구’일 뿐이지 체제의 문제를 주로 다루는 것은 아닙니다. 이 소설에서 뒤를 밟아가는 대상은 바로 ‘엇갈림’입니다. 시간과 기억의 엇갈림, 애정과 관심의 엇갈림, 그리고 사람과 사람의 엇갈림을 아주 짙게 농축해놓은 소설입니다. 그 농도가 꽤 짙어서, 어제 저녁 한번 구경해보지도 못한 프라하라는 도시의 사람들을 생각했습니다.
728x90
'딸기네 책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울에 비친 유럽 (0) | 2001.08.25 |
---|---|
천 년 동안에 (0) | 2001.07.18 |
제롬 무슈로의 모험 (0) | 2001.06.09 |
키리냐가 (0) | 2001.06.08 |
[스크랩] 버나드 루이스, '중동의 역사' (0) | 2001.06.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