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2005 소설읽기 5/ 농담, 치고는 지독한.

딸기21 2005. 3. 8. 09:34
농담 Zert  
밀란 쿤데라 (지은이) | 방미경 (옮긴이) | 민음사


"이 운동에서 무엇보다 나를 매혹시키고 심지어 홀리기까지 했던 것은 내 시대의 (또는 그렇다고 믿었던) 역사의 수레바퀴였다. 그 당시 우리는 정말로 사람이나 사물의 운명을 실제로 결정했다. (중략) 우리가 맛보았던 그 도취는 보통 권력의 도취라고 불리는 것인데, 나는 그러나 (약간의 선의를 가지고) 그보다 좀 덜 가혹한 말을 고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우리는 역사에 매혹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역사라는 말 위에 올라탔다는데 취했고, 우리 엉덩이 밑에 말의 몸을 느꼈다는 데 취해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결국 추악한 권력에의 탐욕으로 변해버리고 마는 것이었지만, 그러면서도 (인간의 모든 일에 여러 가지 면이 있듯) 거기에는 동시에 아름다운 환상이 있었다. 사람이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이제 역사의 바깥에 머물러 있거나 역사의 발굽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를 이끌어나가고 만들어나가는 그런 시대를 우리, 바로 우리가 여는 것이라는 그런 환상이 있었다." 

"어찌 됐거나 젊은이들이 연기를 하는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삶은, 아직 미완인 그들을, 그들이 다 만들어진 사람으로 행동하길 요구하는 완성된 세상 속에 턱 세워놓는다. 그러니 그들은 허겁지겁 이런저런 형식과 모델들, 당시 유행하는 것, 자신들에게 맞는 것, 마음에 드는 것, 등을 자기 것으로 삼는다- 그리고 연기를 한다."

"17세기와 18세기에 체코 민족은 말하자면 존재하기를 멈추었다. 19세기에 사실상 체코 민족은 두 번째로 탄생한 셈이다. 오래된 여러 유럽 민족 속에 낀 조그만 어린아이였다. 체코 민족도 물론 위대한 과거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이백 년의 세월이 가운데 가로놓인 채 과거와 단절되어 있었다. 그 사이에 체코어는 도시에서 농촌으로 피난을 갔고 이제는 그저 문맹들에게만 속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서만이라고는 해도 그 말은 계속 자기 고유의 문화를 낳았다. 소박한 문화, 유럽의 눈에 뜨이지 않는 숨겨진 문화, 노래, 이야기, 전통 의식, 속담, 격언 같은 것들. 이백 년의 간극을 이어주는 유일한 구름다리이다. (중략) 블라디미르, 얘야, 네가 이런 것을 이해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빠는 그저 민속에 미쳐버린 사람인 것만은 아니란다." 


이렇게 지독한 ‘농담’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체코 출신 작가 밀란 쿤데라는, 체코라는 나라를 휩쓸고 지나갔던 사회주의 열풍이 ‘농담’이었다고 말한다. 체코와 사회주의만을 농담으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수레바퀴를 밀고 있다고 믿는 수많은 순진한 젊음들과, 시대를 휩쓸고 폐허를 남긴 채 사라져버리는 격정과 폭풍, 그 모든 것들이 모두 ‘농담’이었다고 말한다. 그냥 ‘후일담 문학’ 정도로 치부해버리기엔, 그러나 이 농담은 너무 농도가 짙다. 작가의 생각이 가벼운 것도 아니고 냉소적인 것도 아니다. 그래서 농담의 뒷맛이 너무 쓸쓸하다.  

386 작가들의 후일담 소설이 싫었다. ‘우리는 치열했네’ 하는 식의, ‘칭찬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 듯한, 그래서 엄살처럼 보이는 소설들. 후일담이라면 되돌아보는 만큼의 통찰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은 없고 얄팍하기 만한 소설들. 고민에 비해 너무 쉽게 결론을 내려버린 듯한, 그런 기분. 시대의 소용돌이에 뛰어들었다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시대’를 너무 간단하게 얘기해버리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그들의 진심을 의심하곤 했었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다룬 책들을 읽으면서도 난 불만 투성이였다. 인간 개개인에게 더없이 잔혹한 짓을 저지르는 ‘군중’들, ‘시대’라는 이름의 광기. 몽땅 미친 놈들이었다, 그 시대는 미친 시대였다... 후일담 문학이 됐든 시대비난 문학이 됐든, 단선적으로 뭔가를 재단해버리는 것이 싫어서 ‘소설이 싫다’고까지 생각했었다.


그런데 쿤데라의 회고는 뜻밖이었다. 문혁을 겪어낸 중국의 지식인들이 그 시절을 미친 시대로 비난하는 것과 달리(그 지식인들이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는 자신이 겪은 광풍의 시기를 ‘역사에 매혹되었던 시대’라고 말한다. 이건 너무 아름다운 표현이다. 소설에 묘사된 한 청년의 젊음이 탄광에 처박혀야 했던 것을 생각하면, 역사를 바라보는 쿤데라의 시각은 너무 따뜻한 것 아닌가!  

작가 스스로가 힘겹게 살아낸 시대를 냉소 혹은 비난 대신 연민과 통찰력을 갖고 바라보는 것. 쿤데라 소설의 힘은 어쩌면 이런 것에 있지 않을까, 체제의 문제 혹은 경계에 선 망명자의 시각 같은 것들, 쿤데라라는 작가에게서는 이렇게 녹아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공연히 기분이 좋아졌다. 한 작가의 명성을 확인한 독자로서의 기쁨 뿐만은 아니었다. 뭐랄까, 지나온 시대의 '광기'를 비난하는 '후일담 군중심리'(공산주의 욕하기)가 오히려 원초적 군중심리(홍위병 심리)보다 더 환멸스럽게 느껴지던 차였기 때문일까. 쿤데라식 '돌아보기'에 어쩐지 안심이 되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은 기분. 


옴니버스 비슷한 묘한 형식으로 쓰인 이 소설은 주인공이 여러 명이다. 연애편지에 써갈긴 몇마디로 탄광에 처박혔다가 결국 냉소주의자가 되어버린 청년, 전통만이 체코의 과거와 미래를 이어주는 다리라 믿는 한 아버지, 끝내 '신(神)'을 버리지 못하고 기독교 사회주의자의 길을 걷는 수도승 같은 남자. 그들 하나하나가 자기만의 이야기, 자기만의 회한을 안고 있다.  

공산주의는 사회를 동심원으로 만들어서 중심부터 테두리까지 겹겹이 원을 만들려 했지만 인간 세상은 그들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저마다 중심을 갖고 있고, 저마다의 원을 만든다. 각각의 원은 때로는 사회주의의 이상에서, 때로는 전통과 문화에서, 때로는 사랑에서 서로 교차하며 접점을 만든다. 쿤데라의 주인공들도 그렇게 때로는 접점을 만들고 때로는 멀어져가는 동그라미들이다. 동그라미들이 사그러지고 서로 멀어져갈 때 나는 서글펐고, 예상치 못했던 지점에서 서로 만날 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 숱한 동그라미들의 교차점이 어디가 될지, 작가는 그것까지는 말하지 않는다. 역사의 방향성을 논하는 것이 더이상 의미가 없어진 시대, 혹은 글로벌 자본주의로 일로매진하는 것만이 역사의 남은 방향인 듯 느껴지는 시대. 이 소설은 오래전에 쓰여진 것이지만, 역사를 쉽게 재단하지 않는 것을 보면 쿤데라라는 작가는 어쩌면 '사회주의 그 이후'가 찬란하지만은 않을 것임을 예감하고 있었던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주인공들, 하나같이 서글픈 인생들이다. 인생도 역사도 유동적이지만 어디로 어떻게 흘러갈지는 아무도 쉽게 얘기할 수 없다. '농담'의 주인공들은 흐르지도 머물지도 못한 채 그저 흔들린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고독뿐이다. 그런데 쿤데라의 시선은 냉혹하지 않다. 그들의 서글픈 인생도, 고독마저도 결국 스스로 껴안아야 할 것들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