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탄핵 격랑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민주당 소속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이 24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스캔들’을 탄핵 절차에 따라 공식 조사하겠다고 선언하면서다. 트럼프 대통령은 내년 대선을 앞두고 최대 위기를 맞았고, 내년 11월 대선을 13개월여 남겨둔 미 정국은 혼돈에 빠져들게 됐다.
당초 민주당 지도부는 탄핵 부작용 등을 감안해 신중론을 펴왔다. 하지만 트럼프가 젤렌스키와 통화하기 며칠 전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원조를 중단하도록 지시한 사실을 인정하는 등 파문이 확산되자 대통령의 ‘권한 남용’이 도를 넘었다고 보고 전격 선회했다. 탄핵 추진은 진영 내 의견 수렴을 거쳐 이뤄졌으며, 민주당 지지층 사이에서 탄핵 여론이 급등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고 워싱턴포스트는 보도했다.
민주당 대선후보들 “탄핵해야”
최근 ‘대선 풍향계’ 아이오와주의 최근 여론조사에서 1위로 부상한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은 펠로시 의장의 연설 뒤 곧바로 트위터에 “탄핵 조사가 효율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글을 올렸다. 워런은 “하원은 탄핵안을 표결에 부쳐야 한다. 상원으로 (탄핵안이) 올라온다면 나는 헌법에 따라 움직일 것”이라고 적었다.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도 워런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트럼프가 “미국의 안보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자산을, 반대파를 정치적으로 더럽히는 수단으로 썼다”며 “즉시 탄핵 절차를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하원이 조사 뒤 표결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면 탄핵안을 표결에 부친다. 하원에서는 435명의 의원 중 과반이 찬성하면 가결된다. 가결된 탄핵안은 상원으로 올라간다. 상원에서는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통과된다.
코리 부커 상원의원은 “정부의 균형을 존중하지 않는 대통령에 맞서 하원이 행동해야 한다”고 했다. 일각에선 탄핵 조사에 들어가는 것이 트럼프 동정론을 일으켜 민주당에 역풍을 부를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그런 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라고 했다. 부커는 2016년 대선 때에도 트럼프의 러시아 스캔들이 불거졌던 것을 언급하며 “우리 앞에 놓인 것은 정치적 이슈가 아닌 도덕적 이슈”라는 성명을 냈다.
바이든에겐 양날의 칼
민주당 유력후보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정치적 공격은 시간이 지나면 잊히겠지만 대통령이 헌법을 망가뜨리면 이는 영원히 간다”며 “트럼프가 하원 조사에 협력하지 않으면 탄핵 청문회를 시작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바이든은 트럼프 못잖게 정치적 부담이 큰 처지다. 트럼프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바이든이 우크라이나에서 사업하는 아들을 위해 압력을 넣었던 정황을 조사해달라”고 요구했다는 것이 스캔들의 골자다. 트럼프는 통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바이든이 더 문제라며 역공하고 있다.
탄핵 얘기가 나오자 다급해진 트럼프는 젤렌스키와의 통화 내용을 공개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걸로 상황이 종료될 것 같지는 않다. 스캔들의 시작은 ‘정보기관의 내부고발자’가 트럼프-젤렌스키 통화와 관련해 감찰당국에 제보를 한 것이었다. 민주당은 트럼프가 임명한 조지프 매과이어 국가정보국장(DNI)이 이 사건을 비공개로 돌려 묻어버리려 했다고 비판한다. 매과이어 국장은 26일 하원에 나와 증언할 예정인데, ‘압력’이 사실로 드러나면 그 자체로 또 다른 중대한 이슈가 될 수 있다.
공화당에서 트럼프에게 도전하고 나선 빌 웰드 전 매서추세츠 주지사는 민주당 후보들과 마찬가지로 트럼프 비판에 가세했다. 그는 MSNBC 방송에 나와 트럼프의 행위가 미국을 배신한 것이라면서 “배신 행위의 형벌은 미국 법에 따르면 사형”이라고까지 말했다. 하원이 탄핵을 가결하고 상원에서도 탄핵안이 통과된다면 대통령직에서 떠나 양형 협상에 들어가는 것이 트럼프에게 유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탄핵 가능성은 여전히 낮아
내년 대선에서 재선을 노리는 트럼프는 지울 수 없는 흠집을 안게 됐다. 그러나 탄핵 싸움이 반드시 민주당에 유리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무엇보다 탄핵 가능성이 낮다. 하원에선 민주당이 다수당이지만 상원은 공화당 의원이 더 많기 때문에 ‘3분의 2 찬성’을 얻어내기 힘들다.
여론이 강력하게 트럼프 탄핵을 요구한다면 공화당 상원의원들의 마음이 흔들릴 수도 있지만, 국민들 여론은 탄핵과 거리를 두고 있다. 로이터통신과 여론조사기관 입소스가 24일 발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트럼프를 탄핵해야 한다는 사람은 응답자의 37%에 그쳤다. 이달 초 41%에서 오히려 4%포인트 떨어졌다. 지난 5월 로버트 뮬러 특검의 ‘러시아 대선개입 의혹’ 수사보고서가 일부 공개된 뒤에 탄핵 찬성 응답이 44%로까지 올라갔으나, 트럼프의 극렬 반대층 못잖게 철통 지지층도 많기 때문에 탄핵론이 더 커지기는 쉽지 않다.
이번 여론조사는 하원이 조사 개시를 발표하기 전에 한 것이기 때문에, 향후 의회 움직임과 조사 과정에서 여론이 변할 수는 있다. 그러나 정치권의 치열한 공방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 스캔들에 일반 시민들은 관심이 적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번 조사에서 트럼프와 바이든 관련 뉴스를 잘 알고 있다는 사람은 17%에 불과했고, 절반이 넘는 52%는 “거의 모른다”고 했다. 오히려 바이든의 정치적 부담만 더 커질 수도 있다. 트럼프 지지층은 확고하지만, 민주당 성향 유권자들의 바이든에 대한 감정은 ‘무조건 지지’와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계속 바이든을 물고늘어질 경우, 바이든이 타격을 받을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민주당이 대선을 앞두고 냉철한 손익계산으로 탄핵 공세를 시작했다기보다는, 트럼프에 대한 정서적 거부감에 따라 움직였다는 얘기도 나온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민주당과 대부분의 언론들은 트럼프를 합법적인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러시아 커넥션을 2년간 붙들고 있었지만 성과가 없자 연방수사국(FBI) 국장 해임을 물고늘어졌으나 국민들을 설득하지 못했다”고 썼다. 민주당이 과거 빌 클린턴 탄핵에 몰두했던 공화당과 비슷한 경로로 가고 있다고 했다. 결과가 어찌 되든 최대 피해자는 미국 시민들이다. 워싱턴포스트는 탄핵 갈등으로 미국의 정치적 양극화가 더 심해질 것이라고 봤다.
역대 사례를 보면 1868년 앤드루 존슨과 1998년 빌 클린턴은 하원에서 탄핵안이 가결됐으나 상원에서 부결되면서 가까스로 대통령직을 유지했다. 리처드 닉슨은 1973년 민주당 대선캠프 도청사건인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탄핵안이 상·하원을 통과할 것이 확실시되자, 이듬해 스스로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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