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멘 반군이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한 공격을 일단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미국은 ‘산유시설 공습’ 배후로 이란을 지목하고 엄포를 놨지만, 군사행동과는 거리를 두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사우디 산유시설이 공격을 받으면서 가열된 중동의 위기는 유엔 외교전으로 옮겨가는 양상이다. 하지만 모든 사태의 근원인 예멘 공격을 사우디가 그만두지 않는 한 불안정은 가실 수 없다.
반군도 미국도 ‘잠시 멈춤’
‘안사랄라(알라의 지원군)’라고 스스로를 부르는 예멘의 친이란계 후티 반군은 지난 20일(현지시간) 사우디에 “군사행위를 중단하자”고 제안했다. 반군 지도조직의 마흐디 알마샤트 의장은 반군이 운영하는 알마시라 방송을 통해 “사우디에 대한 드론·미사일 공격 등 모든 종류의 공격을 중단하겠다”면서 “사우디도 호응하기를 기다린다”고 말했다. 예멘 내전과 사우디의 공격이 계속된 지난 4년여 동안 반군 지도부가 휴전을 먼저 제안한 것은 처음이다.
유엔은 “전쟁을 끝낼 수 있는 강력한 메시지”라는 성명을 내며 환영했다. 그러나 유럽 중재로 수차례 이어진 휴전협상이 무산된 상황에서, 반군의 제안을 사우디가 받아들일지는 불투명하다. 사우디 측은 “행동을 보고 판단할 것”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후티 반군은 지난 14일의 사우디 산유시설 드론 공격을 자신들이 감행했다고 주장했지만 미국은 “이란이 공격했다”고 주장한다. 사우디도 자국 남쪽이 아닌 북쪽에서 드론이 날아왔다며, 예멘 반군이 아닌 이란을 지목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도 이란을 상대로 군사행동에 나서지는 않을 것으로 보여, 호르무즈 일대의 군사적 긴장은 누그러진 상태다. 미 국방부는 20일 사우디와 아랍에미리트연합(UAE)에 미군 병력과 패트리엇 포대 등 군사장비를 추가배치할 것이라고 밝혔으나 ‘방어적 성격’임을 분명히 했다.
이란 군사공격에 대한 질문에 마크 에스퍼 미 국방장관은 “지금 우리는 그 지점에 서 있지 않다”고 분명히 말했다. 사우디와 UAE 병력 배치는 그 나라들의 요청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조지프 던포드 합참의장은 파병 규모가 수백명 수준에 그칠 것임을 시사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란을 겨냥해 “장전 완료” 같은 강경한 표현까지 썼지만 물리적 충돌은 피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고 뉴욕타임스 등은 보도했다. 일각에서 보복하자는 목소리가 나왔지만 내년 대선을 앞둔 트럼프 대통령이 군사행동을 피하고 싶어 한다는 것, 미국 관련 시설이나 미국인이 공격받지 않은 상황에서 이란을 공격할 명분이 없다는 점 등을 미국 언론들은 거론했다. 20일 백악관 회의에서는 군사행동 대신 이란 제재를 더 강화하는 기존 압박작전을 유지하는 쪽으로 논의가 이뤄졌고, 미국은 이란 중앙은행과 국부펀드 제재를 단행했다.
이란은 사우디 공격과 관련 없다고 계속 주장해왔다. 프레스TV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호세인 살라미 혁명수비대 사령관은 21일 ‘이란 내에서 발견된’ 미국과 영국제 드론들을 공개하고, “어떤 공격에도 맞설 준비가 돼 있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엄포에도 불구하고 이란 역시 몸을 낮추고 있다. 모하마드 자바드 자리프 이란 외교장관은 21일 미 CBS 방송에 나와 “(미국이 일으키는) 전쟁을 피할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우리가 먼저 시작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은 확신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사우디
당분간 미국과 사우디, 이란의 갈등은 뉴욕으로 무대를 옮길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23일 유엔 총회가 열리는 뉴욕으로 이동할 것으로 알려졌다. 잠시 기대를 모았던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의 ‘뉴욕 회동’은 성사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로하니 대통령은 호르무즈해협의 안전을 보장하는 구상을 유엔에 제안하겠다고 22일 말했다. 반면 트럼프 정부는 “유럽 동맹국들의 지원을 얻는 데에 유엔 총회를 활용”하려 할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은 사우디 산유시설을 공격한 드론이 이란에서 날아왔음을 보여주려고 애쓰겠지만 입증할 증거가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미국의 이란 고립작전이 먹히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사우디에 있다. 호르무즈 해협의 긴장, 산유시설 피격, 심지어 한국의 ‘제주도 난민 사태’까지, 아무리 이란의 책임으로 몰아가려 한들 결국 문제의 근본 원인은 결국 사우디가 예멘을 공격한 데에 있기 때문이다.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 주도 하에 예멘을 공격함으로써 중동을 ‘이란 대 아랍’의 구도로 끌고가려던 사우디의 계산은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예멘에서는 ‘아랍의 봄’ 혁명 분위기 속에 독재정권이 무너졌지만 새 정부마저 여러 진영의 권력투쟁속에 무너졌고 2014년 내전이 시작됐다. 이듬해 사우디는 예멘 새 정부를 축출한 후티 진영이 “이란의 지원을 받고 있다”며 공습을 시작했고, 예멘을 기아와 난민사태로 몰고 갔다. 예멘에서 이라크·시리아를 거쳐 레바논까지, 이란이 구축해온 이른바 ‘시아벨트’에 맞서 아랍국들을 규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카타르와 UAE 등 걸프의 이웃들조차 사우디와 다른 목소리를 냈다. 미국 트럼프 정부는 사우디 편에 서서 이란 압박에 나섰지만 유럽이 협력을 거부하고 있다.
예멘 공격은 사우디의 최대 자산인 석유회사 아람코에 대한 공격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세계의 산유기지인 사우디의 신뢰를 떨어뜨린 사건이었다. 아람코 측은 “이달 말이면 시설이 원상복구될 것”이라고 밝혔지만, 핵심 시설이 공격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이상 향후 기업공개 등에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사우디는 이란과 싸울 능력이 없다는 게 드러났다. 미국이 “사우디의 방어를 돕겠다”고 나섬으로써 지난 몇 년 동안 ‘자립’을 흉내내온 사우디의 제스처는 무의미해졌다. 사우디는 수십년 동안 미국 무기를 사는 데에 돈을 퍼부었으나 실제로 국방능력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은 아니었다. <탄소민주주의>를 쓴 미국 컬럼비아대 티머시 미첼 교수는 “쌓아둬도 썩지 않는 무기를 사줌으로써 석유를 팔아 벌어들인 달러를 미국에 우회적으로 돌려주기 위한 목적이 컸다”고 분석한다.
그 결과 사우디는 ‘조종사보다 전투기가 더 많은’ 상황이 됐다. 왕립군(SAAF)이 있지만 실제 군사력은 크게 떨어지고, 자국 내 반대여론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미군이 주둔하지도 못하는 형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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