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수상한 GPS

[구정은의 '수상한 GPS'] 러시아 가스프롬이 중앙아시아에 학교를 지은 까닭은

딸기21 2019. 9. 11. 10:52

키르기스스탄 수도 비슈케크에 9월 2일 중학교가 문을 열었다. 잘 꾸며진 교실 33개에 컴퓨터실, 멀티미디어 도서관과 실험실과 강당, 350명이 앉을 수 있는 카페테리아, 체육관 2개와 실내수영장 2개를 갖췄다. 학교 부지가 3.5㏊에 이르고, 아스팔트 진입로가 깔렸다. 중앙아시아의 최빈국인 키르기스에서 보기 힘든 호화로운 학교다. 개교식에는 수론바이 진베코프 대통령과 아지즈 수라크마토프 시장도 참석했다.

 

키르기스스탄의 비슈케크에 9월 2일 가스프롬 중학교가 문을 열었다. 학교를 지어준 러시아 국영석유회사 가스프롬 측은 당초 무료로 운영하겠다고 했다가 유료로 바꿨다. 사진 유라시아넷(eurasianet.org)

 

하지만 이 학교가 눈길을 끄는 것은 현대식 시설이어서가 아니다. 학교를 지어준 것이 러시아 국영석유회사 가스프롬이기 때문이다. 학교 이름도 ‘가스프롬 학교’다. 2017년 8월 착공식 때에는 알렉세이 밀러 가스프롬 최고경영자가 직접 참석했다. 그 때 밀러는 “세계적인 수준의 학교를 지어 키르기스 젊은 세대들의 발전을 위한 동력이 되게 하겠다”고 했다. 착공식에는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 당시 대통령도 와서 밀러와 함께 타임캡슐을 묻었다.
 

마침내 학교는 완공됐지만 적잖은 갈등이 있었다. 학교 운영비는 연간 1억700만 솜, 약 30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가스프롬은 자신들이 돈을 댄 ‘가스프롬 재단’에 학교를 넘겨 운영하자고 했고, 시 당국은 자신들이 건네받길 원했다. 막판까지 밀고당기다가 양도식인 열린 7월 31일 당일에야 재단에 학교를 기증한다는 협정문을 마무리했다고 현지 언론 24.kg은 보도했다.

수론바이 진베코프 키르기스스탄 대통령이 지난 2일 비슈케크의 가스프롬 학교 수영장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 키르기스스탄 대통령실

 

학교가 지어진 과정을 알려면 2013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 해 가스프롬은 키르기스 최대 천연가스 회사인 키르기스가스를 매입했다. 지분 100%를 사들이는 데에 가스프롬이 들인 돈은 단돈 1달러였다. 가스프롬은 ‘상징적인 액수’만 내고 사실상 공짜로 키르기스가스를 갖는 대신에 5년 동안 이 나라의 천연가스 인프라를 구축하고 현대화하는 일을 맡기로 했다. 또 체육시설과 학교 등 사회적 기여가 될 수 있는 시설도 지어주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지어진 게 비슈케크의 가스프롬 학교다. 논란이 불거진 것은 완공 이후다. 24.kg 등에 따르면 모든 아이들이 ‘무료로 공부할 수 있게’ 해주겠다던 가스프롬의 약속은 사라지고, 연간 학비로 학생 1인당 2만2000솜이 책정됐다는 것이다. 중국과 카자흐스탄 사이에 있는 키르기스스탄은 사방이 육지로 에워싸인 내륙국가다. 면적은 약 20만㎢로 한반도보다 조금 작지만 인구는 585만명에 불과하다. 1년 등록금 2만2000솜은 한국 돈으로 38만원에 불과하지만, 구매력 기준 연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3700달러 수준인 키르기스에서 아이 하나를 가르치기 위해 이 돈을 낼 수 있는 가정은 많지 않다. 지난해 이 나라 사람들의 월 평균 소득은 1만6400솜에 그쳤다.

 

비슈케크의 가스프롬 학교 개교기념식에 참석한 아이들이 키르기스스탄 국기와 러시아 국기를 손에 들고 있다. 사진 키르기스스탄 대통령실

 

학교 운영비를 가스프롬 재단이 낸다고 해놓고는 비싼 학비를 걷는 것도 모자라, 회사 측은 비슈케크 시 당국에도 분담을 요구했다. 하지만 시 측이 얼마를 낼 지는 알려진 게 없다. 학교가 지어진다는 소식에 환호했던 주변 주민들은 “결국 부유층과 특권층 학교가 될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가난한 시 당국이 운영비를 내기는 힘들 것이므로 결국 학비로 운영될 게 뻔하다는 것이다. 인권단체 활동가인 아나라 다우탈리예바는 중앙아시아뉴스닷컴에 “애당초 가스프롬이 영리 목적으로 학교를 지은 게 아닌가 싶다”며 “지역사회에 대한 사기극”이라고 비난했다. 가스프롬은 학생 정원 950명 중 25%를 장애아들과 빈곤층 아이들로 채워 무료로 다니게 하겠다고 밝혔지만 주민들의 배신감은 가시지 않는다.
 

똑같은 일이 아르메니아에서도 일어났다. 가스프롬은 2016년 이 나라 수도 예레반에 학교와 체육시설을 지어주겠다고 약속했다. 학비와 이용료는 무료라고 했다. 학교는 지난 1일 문을 열었지만 약속과 달리 연간 학비가 150만 드람(약 380만원)이나 됐다. 성난 예레반 주민들은 밀러 사장에게 “사회공헌 프로그램으로 학교를 지은 게 맞느냐”는 항의서한을 보냈으나 가스프롬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비슈케크에 지어진 가스프롬 학교. 사진 키르기스스탄 대통령실

 

가스프롬이 두 나라에서 한 일을 놓고 더 큰 ‘음모론’을 제기하는 시각도 있다. 가스프롬은 러시아 최대 에너지기업이자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돈지갑’이다. 빅토르 주브코프 이사회장은 푸틴 밑에서 제1부총리를 지낸 측근이고, 2001년부터 이사회 부회장 겸 최고경영자를 맡고 있는 밀러 역시 푸틴의 이너서클 멤버다. 미국 투자가 조지 소로스가 낸 돈으로 운영되는 중앙아시아 전문매체 유라시아넷은 3일 “크렘린이 가스프롬을 통해 교육을 무기로 이용하고 있다”는 기사를 실었다. 가난한 동맹국들을 윽박질러 에너지 개발권을 얻어내면서 학교를 지어주고, 러시아의 소프트파워를 확대하는 수단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최종병기' 가스프롬

 

옛소련에서 독립한 지 30년 가까이 지나면서, 아르메니아와 키르기스는 러시아와의 역사적·언어적 공통기반이 많이 사라졌다. 러시아는 이 나라들에 가스를 팔고 기술자들을 훈련시켜주는 한편, 공동 군사훈련을 하고 이주노동자들을 받아주면서 영향력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한때 러시아 대학들을 채우던 카프카스와 중앙아시아의 유학생들은 갈수록 줄고 있다. 자체 교육기반이 늘어난 까닭도 있지만, 영어를 가르치는 미국식 사립대학들의 인기가 커진 탓도 크다. 

 

가스프롬이 아르메니아 수도 예레반에 지은 학교. 사진 컨스트럭션아르메니아(construction.am)

 

터키와 미국 사이에서 외교 쟁점이 되기도 했던 터키 출신 미국 망명자 펫훌라흐 귈렌도 영향을 미쳤다. 아제르바이잔과 타지키스탄의 중산층 사이에서는 터키 무슬림 자선단체들이 귈렌의 교육방식을 채택해 세운 교육기관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러시아가 극도로 경계하는 이슬람 교육이 퍼지고 있는 것이다.

 

푸틴의 다목적 포석 '에너지 정치학'
 

가스프롬의 학교들은 이런 배경 속에서 문을 열었다. 유라시아넷이 제기한 ‘의혹’에는 근거가 없지 않다. 푸틴은 올 3월 키르기스를 방문했을 때 7개 대학들과 러시아 대학들의 ‘전략적 제휴’ 협정을 주선했다. 러시아 정부는 2017년부터 타지키스탄에 교사들을 파견하고 있다. 이들의 월급은 90%를 러시아가 지급한다. 그러나 공짜는 없다. 자체적으로 석유와 가스를 채굴하려던 타지키스탄의 의욕은 러시아의 압박에 좌절됐다. 크렘린은 가스프롬이라는 무기를 다방면으로 활용해, 중앙아시아를 속국으로 남겨두고 싶어한다. 비슈케크와 예레반의 값비싼 학교를 둘러싼 소동은 그 과정에서 불거진 잡음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