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유럽이라는 곳

러시아의 '최종병기' 가스프롬

딸기21 2007. 1. 10.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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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가 곧 안보인 시대. 최근 들어 러시아 주변이 천연가스 때문에 시끄럽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그루지야 등 주변국들과 가스값을 놓고 갈등을 벌이고 있고, 유럽은 이를 지켜보면서 러시아가 언제 파이프라인 밸브를 잠글지 몰라 전전긍긍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마찰과 갈등은 한 축으로만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지난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 가스값 분쟁을 벌이더니 올초엔 벨로루시와 한판 붙었다. 이란은 친서방 국가인 터키를 상대로 천연가스를 한 차례 잠갔다 다시 열었다. 그새 러시아가 터키와 가까워진 반면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로 가는 송유관을 잠갔다. 자원 가진 국가는 큰소리치고, 받아야 하는 국가들은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다.

유라시아 심장부의 에너지 역학관계는 그물망처럼 연결된 파이프라인마냥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 중심에 서있는 것은 러시아 최대 국영에너지회사이자 세계 최대 천연가스 회사인 가스프롬이다. 옛 소련 해체의 결과물로 탄생한 이 회사는 막대한 천연가스 자원을 손에 쥐고 주변국들을 쥐락펴락하고 있다. 러시아 집권자들의 돈지갑이자 무기가 되고 있는 가스프롬을 들여다본다.



모스크바의 가스프롬 본사



소련 해체와 함께 시작된 가스프롬
 

러시아는 세계 1위의 천연가스 매장량(47조㎥)을 자랑하는 자원 부국이다. 석유도 많이 갖고 있지만, 비중으로 보면 차세대 에너지원 중 하나인 천연가스가 더 중요한 자원이다. 러시아 최대기업인 가스프롬은 이 나라 천연가스 생산량의 90% 이상을 산출해내는 거대 기업이다. 세계 천연가스 생산량의 5분의 1이 이 회사에서 나오는데, 이 회사가 갖고 있는 가스관과 석유관 등 파이프라인만 15만㎞에 달한다.

천연가스가 주요 상품이지만 석유회사들도 여럿 갖고 있고, 업스트림(시추·채굴)에서부터 다운스트림(정제·유통)까지 모두 다 한다. 에너지 뿐 아니라 은행, 보험, 언론, 건설, 농업 등 다양한 분야의 사업체들도 소유하고 있다. 2005년 기준 매출 508억 달러(약 45조원), 시장 가치는 지난해 2700억 달러에 이른다.

러시아 시베리아, 볼가 강 유역, 우랄 산맥 등지에서 대규모 천연가스 매장 지역이 발견된 것은 옛소련 시절인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는 가스 탐사, 개발, 유통 모두를 정부가 독점했으나 1989년7월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석유-가스 부문 통합 조치로 민영화의 바탕이 마련됐다. 이때 만들어진 통합 회사에서 천연가스 분야가 분리해 나온 것이 가스프롬의 모태다. 회사 이름은 `가조바야 프로미슐레노스트(가스산업)'의 축약어에서 나왔다.

1991년 연방이 해체된 뒤 가스프롬은 러시아의 큰 재산이 됐다. 1993년 보리스 옐친 정부는 국영기업들의 민영화를 시작했고, 가스프롬도 이때 민영화됐다. 1998년부터 2000년 사이 옐친 정부는 가스프롬에서 막대한 돈을 뜯어냈다. 세금 담당 검찰이 멋대로 회사 자산을 동결시키면 돈을 내고 되찾아 와야 하는 어이없는 상황이 반복된 것이다. 이 사실은 뒤에 거대 스캔들로 비화했다. 옐친의 뒤를 이어 집권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경제개혁이라는 이름 하에 가스프롬에 대한 `정화 작업'을 진행했다.

푸틴 정부는 2000년대 초반 재무장관을 지낸 보리스 표도로프와 가스프롬의 지분 일부를 갖고 있던 에르미타주 펀드라는 주주 그룹을 이용해 가스프롬 옛 경영진을 숙청하고 자기 세력들을 심었다. 2001년 취임한 알렉세이 밀러 최고경영자(CEO)도 그중 하나다.

'옐친의 지갑'에서 '푸틴의 칼날'로

가스프롬의 경영진은 푸틴 대통령의 측근들로 구성돼 있다. 2006년 말 현재 이사회는 드미트리 메데베데프 제1부총리가 이끌고 있다. 이사진은 알렉세이 밀러 CEO, 알렉산더 아나넨코프 부회장, 계열사인 EON루르가스AG의 부르크하르트 베르크만 이사회장, 경제개발무역장관으로 있는 저먼 그레프, 정부 물가·경제분석위원회 부위원장 엘레나 카르펠, 빅토르 크리슈텐코 산업에너지장관, 외교관 출신 이고르 유수포프, 개인 대주주 미하일 세레다와 보리스 표도로프, 파리트 가지줄린 등 11명이다. 이들은 경영위원회 17명 위원들과 대부분 겹친다.

옐친은 가스프롬을 자기 금고처럼 썼지만 푸틴 대통령은 더 교묘하고 위협적으로 이 회사를 이용하고 있다. 2001년 4월 푸틴 정권에 밉보여 사기죄로 구속됐던 미디어 재벌 블라디미르 구신스키가 석방돼 국외로 망명했다. 가스프롬은 즉시 구신스키가 운영하던 러시아 유일의 전국 민영 방송 NTV를 사들였다. 

가스프롬은 이후 계열사인 가스프롬메디아를 이용해 야금야금 러시아의 미디어 분야를 장악해갔다. 2005년 유서 깊은 이즈베스티야지(紙)를 매입, 엔터테인먼트 신문으로 바꿔버렸으며 같은 해에는 다른 계열사를 통해 일간지 코메르산트를 매입했다. 지난해에는 80년 전통의 신문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도 가져가버렸다. 서방 언론들은 푸틴 대통령이 2008년 대선을 앞두고 언론 통제를 강화하려는 도구로 가스프롬과 그 산하기업들을 이용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2005년 11월 밀러 CEO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네바 강변의 유서 깊은 스몰니 성당 옆에 '가스프롬 시티'라는 이름으로 300m 높이의 빌딩을 짓겠다고 발표했다. 이 지역은 42m 층고 제한이 있는 지역이다. 이 계획은 "푸틴 왕국은 곧 가스프롬 왕국"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종종 언급되고 있다.


Achimgaz - 눈밭을 가로지르는 천연가스관


석유가 집결했다 나가는 러시아 남부 사마라


주변국 길들이기

가스프롬의 영향력은 국내에서 뿐 아니라 국외에서도 막강하다. 가스프롬은 2005년 석유회사 시브네프트의 지분 72%를 매입, `가스프롬네프트'라는 계열사로 만들어버렸다. 석유회사 겸업을 통해 가스프롬은 세계 유수의 에너지 기업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지난해 포춘지가 뽑은 세계 기업순위에서 가스프롬은 매출액 기준 세계 102위를 차지, 수위권에는 들지 못했다. 그러나 `가스프롬 정치학'이 통하는 것은 기업 규모 때문이 아니다. 러시아가 가스프롬을 내세워 큰소리 칠 수 있는 까닭은, 주변국들의 러시아 의존도가 그만큼 높기 때문이다.

천연가스 부문에서 각국의 러시아 의존도 즉 천연가스 소비량 중 러시아산이 차지하는 비율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보스니아, 에스토니아, 핀란드,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몰도바, 슬로바키아는 100%를 러시아에서 들여온다. 불가리아 97%, 헝가리 89%, 폴란드 86%, 체코 75%, 터키 67%, 오스트리아 65%, 루마니아 40%, 독일 36%, 이탈리아 27%, 프랑스 25% 등 유럽 전역이 러시아산 가스에 매여 있다. 유럽연합 전체로 보면 25% 가량이 러시아로부터 온다(이상 2004년 기준). 천연가스는 석유보다도 매장지의 지역 편중이 더욱 심해서, 러시아 이란 카타르가 대부분을 갖고 있다. 유럽국들이 수입선을 다변화하려 해도 현실적으로 쉽지가 않다.

가스프롬의 문어발도 각국에 뻗어 있다. 이 회사가 지분 100%를 소유한 기업만 세어도 대규모 유전 개발권을 가진 러시아 에너지기업 세베르네프트와 세베르가스프롬, 항공회사 가스프롬아비아, 교육시설 마브니이즈, 불가리아 에너지회사 토페네르고, 독일 아그로가스 등 62개다. 그 밖에 스위스 발틱 LNG 80%, 터키 보스포러스 가스 40%, 벨로루시 벨가스프롬방크 은행 50% 등등 103개 회사의 지분을 갖고 있다.

유라시아의 파이프라인들

기업들만 경쟁하는 것이 아니다. 파이프라인들도 태어나 자라고 경쟁을 벌인다. 시베리아에서 유럽까지 이어지는 유라시아 중심부는 파이프라인의 경합이 펼쳐지는 21세기 에너지 전쟁의 치열한 전장이다. 석유와 가스를 실어 나르는 송유관과 가스관들은 특히 1990년대 후반 이후 엄청난 기세로 뻗어나가고 있다.


유라시아 에너지 파이프라인


드루쥐바 송유관

'우정'이라는 뜻의 드루쥐바 파이프라인은 최근 러시아-벨로루시 에너지 분쟁의 핵심으로 떠오르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이 라인은 옛소련 시절인 1964년 만들어진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긴 총연장 4000㎞의 송유관이다. 시베리아와 우랄산맥 일대, 카스피해 유전에서 나오는 석유는 남부 사마라라는 곳에 모인 뒤 거기서 시작되는 드루쥐바 라인을 통해 서쪽으로 흘러간다.

송유관은 모스크바 남동쪽 클린을 거쳐 벨로루시를 지나면서 두 갈래로 갈라진다. 남드루쥐바 라인은 헝가리, 크로아티아, 슬로바키아, 체코로 향하고 북드루쥐바 라인은 폴란드를 지나 독일로 간다. 이 송유관은 과거 소련이 동유럽 공산권국가들에 에너지를 대주는 생명줄이었으며, 지금도 하루에 원유 120만∼140만 배럴이 이 송유관을 통해 이동하고 있다. 벨로루시 천연가스 가격 싸움 불똥이 튀자 러시아는 북쪽 라인의 밸브를 잠가버렸다.

BTC 라인

세계에서 가장 첨예한 관심과 경쟁 속에 만들어진 카스피해 파이프라인. 아제르바이잔의 바쿠, 그루지아의 트빌리시, 터키의 제이한을 연결한다. 길이 1770㎞로 단일 파이프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길다. 연 5000만t, 하루 100만 배럴을 수송할 수 있다. 2003년 4월 건설을 시작해 약 29억 달러를 들여 완공했다. 송유관 건설 컨소시엄에는 영국 BP와 아제르바이잔 국영 석유회사를 비롯, 미국·프랑스·노르웨이 등의 에너지 회사들이 참가했다.

카스피해 석유를 러시아 세력권에서 빼내기 위해 미국이 이 송유관에 많은 공을 들였다. 러시아는 이 라인과 경쟁하기 위해 카자흐스탄 텡기스와 러시아 노보로시스크를 잇는 1510㎞ 짜리 CPC 라인을 만들었고, 중국도 중국-카자흐스탄 송유관을 건설했다.

AMBO 송유관

흑해에 있는 불가리아 부르가스 항구에서 시작, 마케도니아 지나 알바니아의 아드리아해 블로레 항구까지 이어지는 917km 송유관이다. 발칸반도를 가로지른다고 해서 트랜스발칸(trans-Balcan) 라인이라고도 부른다. 현재 건설 단계에 있는데 하루 75만 배럴의 원유를 수송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알바니아-마케도니아-불가리아 석유코퍼레이션(AMBO)이 건설을 맡았다. 카스피해 석유를 이동할 발칸 석유망을 놓고 그리스 알렉산드로폴리-루마니아 콘스탄타-이탈리아 트리스테 잇는 라인과 BTC 라인, AMBO 라인 3개가 경합을 벌이고 있다.

시베리아-태평양 송유관(SPPP)

시베리아 석유를 한·중·일본 등 동북아에 공급하기 위해 계획되고 있는 송유관. 완공되면 4130km에 이르러 드루쥐바를 제칠 것으로 예상되나, 아직 노선이 확정되지는 않았다. 러시아 타이셰트-카자친스코-스코보로디노 등지를 지나 나홋카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바이칼호 주변 생태계 파괴에 대한 비판도 많지만 중국의 에너지 수요가 워낙 크기 때문에 러시아가 사활을 걸고 추진 중이다. 러시아는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저울질을 하다가 중국 공급을 우선시하는 쪽으로 최근 가닥을 잡았다.

야말-유럽 천연가스관

러시아 야말반도에서 시작, 벨로루시-폴란드-독일을 연결하는 총연장 4200㎞의 가스관. 1992년 만들어졌다. 러시아 내에서는 가스프롬이, 독일에서는 바스프 계열의 윈터셸과 가스프롬이 윙가스라는 별도 법인을 만들어 관리하고 있다. 폴란드 쪽도 가스프롬과 폴란드 합작회사가 관할, 사실상 가스프롬이 전체를 장악하고 있다.

중앙아시아 천연가스관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을 지나 러시아로 이어진다. 1974년 개통됐으며 카스피해 지역으로 확장 공사가 진행중이다. 2010년 공사가 끝나면 연간 수송량 900억㎥를 자랑하는 중앙아시아의 에너지 힘줄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남코카서스 천연가스관(PTE라인)

카스피해에 있는 아제르바이잔의 샤드니즈 가스전에서 그루지야의 트빌리시를 지나 터키 에르주룸으로 향하는 가스관. 지난 연말 개통됐다. BTC 송유관과 같은 길을 지난다.

블루 스트림(Blue Stream)

흑해 주변을 지나는 가스관. 가스프롬 계열사와 이탈리아 ENI사가 주축이 되어 건설했다. 파이프라인은 러시아에서 터키로 간다. 러시아와 터키가 `전략적 파트너십'을 약속하고 공동으로 건설, 2005년 수송을 시작했다. 풀가동은 2010년이 되어야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총연장 1213km로, 투르크메니스탄-터키-아제르바이잔-그루지야를 잇는 트란스-카스피안 라인과 경쟁관계에 있다.

남아시아 파이프라인

이란에서 파키스탄, 인도를 거쳐 잇는 가스관으로 현재 논의가 진행중이나, 이란을 제재하려는 미국의 압력 때문에 진전이 늦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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