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킹, 거리의 이야기

딸기21 2017. 7. 3.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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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의 <킹>(김현우 옮김. 열화당)을 읽었다. 분명, 재미있었다. 글도 너무나 좋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은 느낌을 '재미있다'라고 말해버리기는 쉽지 않다. 서글프고 비참하니까. 거리의 풍경, 사람들의 스케치, 인생에 대한 통찰은 어찌나 씁쓸한지.



옥탄 냄새가 나는 곳, 다이아몬드 냄새와도 약간 비슷하다. 여러분은 다이아몬드 냄새를 맡아 보신 적이 없겠지만. 

-10쪽


개들은 모두 숲을 꿈꾼다. 거기 가 보았든, 가 보지 않았든 상관없이. 심지어 이집트의 개들도 숲을 꿈꾼다. 

-11쪽


요아킴이 오렌지색 페인트를 한 통 구해주었다. 자기 집에 칠하기는 너무 밝다고 했다. 가족을 위한 색이라고, 그는 말했다. 

-37쪽


내가 말하는 방식은 이상하다. 왜냐하면 나도 내가 누군지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많은 것들이 공모해서 이름을 앗아가 버린다. 이름이 죽고, 심지어 그동안 겪었던 고통도 더 이상 그 이름에 속하지 않는 것 같다. 

-68쪽


어릴 때는 뭐가 부자인지 아니? 비코가 언젠가 기분이 좋을 때 내게 물었다. 어릴 때는 한쪽 주머니에 칼 한 자루, 그리고 다른 주머니에 손전등 하나만 있으면 부자란다. 아니지. 비카가 말한다. 어릴 때는 표지가 빨간 가죽으로 된, 전화번호 수첩만 있으면 부자야.

숲에 비치는 햇빛을 보면, 세상이 아름답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어요. 내가 비카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세상은 잘 만들어졌어요. 잎사귀 하나까지. 단지 인간들이 사악할 뿐이죠. 

-75쪽


알폰소가 부르는 패자의 노래 중에 목련에 관한 곡이 있다. 이건 겨울 노래야, 라고 알폰소는 설명한다. 지하철 안이 따뜻해지고 승객들의 신발은 축축해지는 계절, 일주일 밤낮을 지하철에서 지내고 나면 절대로 자기 발로는 나올 수가 없는 계절, 누군가 강제로 몰아내야만 하는 계절. 

-85쪽


그 자리에 다음 시간이 오겠지. 다음 시간 말이다, 킹. 그게 과거의 자리를 차지하겠지. 아무 무게도 없고,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은 시간. 아무 기록도, 이름이나 주소, 전화번호도 없는 시간, 그저 기다리기만 하겠지. 그리고 나는, 내가 그 다음 시간에 되어 있어야만 할 어떤 일을 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아. 그 시간에도 끝을 내야만 하겠지. 그 시간을 끝냄으로써 마침내 내 이름으로 실패에 매듭을 짓는 거야.

-103쪽


시간은 흐르게 마련이지. 비코가 말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열에 아홉은 더 나빠지는 거야! 시간이 뭔가를 치유해 줄 때는 고통을 더 늘리기 위해, 더 길게 느껴지도록 만들기 위해 그러는 거야. 되돌릴 방법은 없어. 그리고 하루하루 시간이 흐르면서, 되돌아가는 길은 그만큼 더 길어지는 거지.

-104쪽


사무실은 문을 닫고 사람들은 셔터를 내린다. 신발 옆면이 아침보다는 복숭아뼈에 조금 더 가까워졌다. 웨이퍼 한 개만큼, 사람들은 모두 출근할 때보다 퇴근할 때 키가 조금 작아진다. 

-130쪽


네가 처음 봤을 때는 내가 만났던 그 사람이 아니었어, 킹.

목소리는 똑같잖아요.

그게 목소리의 끔찍한 점이지. 그녀가 말한다.

저이가 이야기 안 한 게 뭐니

잊어버린 건 이야기하지 않았겠죠.

너무 많이 알고 있구나, 킹. 너무 많이 아는 게 저한테 좋지는 않아. 그러니까 항상 겁을 먹고 있지.

-139쪽


벨벳은 꿈이고, 벨벳은 밤이고, 벨벳은 환영인사지. 벨벳은 창녀고, 벨벳은 사랑이야, 킹. 벨벳 위에 여자들은 반짝반짝 광을 낸 보물들을 늘어놓아.

레이스는 사치고, 레이스는 외로움이고, 레이스는 기다림이야. 레이스는 손가락 꼽기이고, 레이스는 섬세함이야. 레이스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것이고, 레이스는, 집중이고, 레이스는 유혹이야. 모두 말은 안 하지만 어떤 레이스가 최고인지 알고 있어. 어쩌면 젊었을 때는 몰랐겠지. 쓴 경험을 하고 나면 모두 레이스를 볼 줄 알게 되는 거야.

-151쪽


리본은 활이고, 리본은 닿은 머리고, 리본은 손목이지. 리본은 당겨 푸는 거야. 아버지들은 잘 다린 셔츠를 입고, 광을 낸 구두를 신고, 곱게 솔질한 모자를 쓰고 있어. 어제 서로의 머리를 땋아주었던 할머니들도 있고, 무언가를 세는 할아버지들도 있지. 할아버지들은 죽은 사람을 세고, 세월을 세고, 마돈나의 수와 손주와 돈을 세고, 아직 남은 술병과 다음 복권 추첨일까지 남은 날을 세지.

-153쪽


인생에서는 의지할 것이라곤 꾸며낸 거짓말밖에 없는 그런 순간들이 있다. 가난한 연금생활자들이 기르는 개에게 사 주는 가짜 뼈 같은.

-177쪽


실수는, 킹, 적보다 더 미움을 받는 거야. 실수는 적처럼 굴복하지 않으니까. 실수를 물리치는 일 같은 건 없는 거야. 실수는 있거나 없거나 둘 중 하나인데, 만약에 있다면 덮어야만 하지. 우리는 저들의 실수야, 킹. 그걸 잊으면 안 돼. 

-191쪽


독은 게으르다. 독은 자신이 공격하는 대상이 스스로를 파괴하게끔 밀어붙인다. 그 작동방식은 절망과 비슷하다. 절망 역시 하나의 독이다. 미칠 듯한 에너지가 희생양에게서 나온다.

-198쪽


순간, 갑작스런 정적이 지나고 확성기에서 다시 고함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이런 걸 원하는 거지? 그렇지 고문이나 강간, 살인에 앞서 나오는 전형적인 말이었다. 그 정도는 나도 안다. 

-200쪽


'우리 여기 있어!'라는 그 말이 거의 죽어 있던 기억을 깨우고, 그 기억이 밤 바람에 다시 불꽃을 피우는 재처럼 살아나고, 함께 있었던 기억, 두려움, 숲, 음식에 대한 기억도 되살아난다. 

-2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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