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_ 장준희 (다큐멘터리 사진가)
미얀마 남부 카렌 주 일대를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는 카렌이라는 소수민족이 있습니다. 미얀마에 있는 카렌족이 약 400만명이고, 태국에도 100만명이 있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이밖에 이들이 흩어져 있는 주요 국가는 미국, 호주, 캐나다 등입니다. 미국에 2015년 7월 기준으로 6만5000명 가량의 카렌족이 살고 있습니다. 2000년대 중반에 난민으로 이주해간 사람들입니다. 호주의 1만1000명, 캐나다의 5000명, 스웨덴의 1500명 등도 대개 난민으로 들어간 이들이지요.
사진 | 장준희 (다큐멘터리 사진가)
사진 | 장준희 (다큐멘터리 사진가)
중국어-티베트어 계통의 언어를 쓰는 카렌족은 미얀마 전체 인구의 7% 정도인데, 다수 민족인 버마족과는 언어와 문화와 전통이 다릅니다. 카렌민족동맹(KNU)을 중심으로 한 무장조직은 미얀마 정부를 상대로 1949년부터 분리독립전쟁을 벌였으나 1976년부터는 분리독립을 포기하고 카렌주의 자치권을 보장하는 연방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진 | 장준희 (다큐멘터리 사진가)
사진 | 장준희 (다큐멘터리 사진가)
카렌족은 오랜 세월 버마족이 주축인 중앙정부의 핍박을 받았으며, 군부독재정권 시절에는 탄압이 더욱 심했습니다. 미얀마의 과거 군부정권들은 카렌족을 비롯한 소수민족의 터전에서 삼림을 밀어내고 광산을 채취하거나 댐을 지었으며, 때로는 소수민족을 끌어다 노예 상태에 가까운 강제노동을 시켰습니다. 억압과 가난 속에서 카렌족들 상당수는 국경 넘어 태국으로 가거나 난민이 돼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사진 | 장준희 (다큐멘터리 사진가)
사진 | 장준희 (다큐멘터리 사진가)
사진은 태국 북부 멜라의 난민캠프 근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일하는 카렌족 난민 노동자들입니다. 세계를 돌며 분쟁, 난민, 이주노동, 빈곤 문제에 천착해온 다큐멘터리 사진가 장준희 작가가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6월까지 찍은 사진들입니다.
사진 | 장준희 (다큐멘터리 사진가)
사진 | 장준희 (다큐멘터리 사진가)
카렌족의 수난사 속에는 식민주의, 전쟁, 군부독재라는 역사의 그늘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19세기 말 영국은 ‘앵글로-버마 전쟁’이라 알려진 전쟁을 세 차례 일으켜 잇달아 승리를 거뒀고, 1886년에는 버마 즉 오늘날의 미얀마를 영국령 인디아에 병합시켰습니다. 영국 선교사들이 카렌족 거주지역에 들어가 선교를 했습니다. 영국 식민통치당국은 불교도가 대부분인 버마족을 억누르며 기독교도가 된 카렌족을 선호하는 분할통치 전술을 폈습니다. 카렌족 민족주의 조직을 이끈 사람들 중에도 기독교도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카렌족 내부에도 물론 불교도로 남은 이들이 많았습니다만, 이들이 조직화된 것은 버마 독립 직전인 1930년대에 이르러서였습니다.
사진 | 장준희 (다큐멘터리 사진가)
사진 | 장준희 (다큐멘터리 사진가)
2차 세계대전이 벌어졌고, 영국 대신 일본이 잠시 버마를 점령했습니다. 카렌족은 ‘영국에 충성했다’는 것 때문에 버마족과 일본 양쪽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반영 독립투쟁을 했던 버마독립군(BIA)과 일본군 모두가 카렌족 마을에서 학살을 저질렀습니다.
사진 | 장준희 (다큐멘터리 사진가)
사진 | 장준희 (다큐멘터리 사진가)
카렌족은 영국을 설득해 독립국가를 구성하고 싶어했지만 영국은 전후 식민지를 그대로 버리고 떠났습니다. 버마 독립의 아버지인 아웅산 장군이 1947년 1월 영국 런던을 방문해 영국 측과 독립협상을 벌이게 됩니다. 이 때 아웅산 장군은 ‘아웅산-애틀리 조약’을 통해 독립을 보장받습니다만, 버마 내의 소수민족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도 확실한 미래를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버마로 돌아온 아웅산은 ‘팡룽 회의(Panglong Conference)’를 열어 소수민족 대표들을 불러모으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힘을 합치자고 제안합니다. 샨, 카친, 친족은 아웅산이 이끄는 새 과도정부에 동참하기로 하고 팡룽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그러나 이 때 카렌족은 ‘옵서버’로만 참석했고, 몽족이나 아라칸(로힝자)족은 아예 배제됐습니다. 영국은 형식상 ‘카렌족 문제’를 논의하겠다고 했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1947년 버마의 새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도 카렌족은 배제됐습니다. 카렌족에게는 버마 독립과 함께 힘겨운 싸움이 다시 시작된 겁니다.
사진 | 장준희 (다큐멘터리 사진가)
사진 | 장준희 (다큐멘터리 사진가)
1948년 버마에서 독립국가 수립을 공식 선포합니다. 하지만 소수민족들을 규합하려 애썼던 아웅산은 이미 그 전해 7월에 암살을 당했지요. 독립한 버마에서, 훗날의 군부 독재자가 된 느윈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소수민족 지역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느윈의 군대는 1949년 카렌 지역을 공격해 공동체들을 파괴했고, KNU의 무장조직인 카렌민족해방군(KNLA) 게릴라들의 독립투쟁이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카렌의 봉기와 무장투쟁은 무자비하게 진압됐습니다. 군부정권은 소수민족뿐 아니라 다수 버마족을 비롯한 모든 국민을 탄압했고 1988년 ‘8888봉기’라 알려진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아웅산의 딸 수지 여사의 민주화운동이 시작된 것도 이 시기부터입니다.
사진 | 장준희 (다큐멘터리 사진가)
사진 | 장준희 (다큐멘터리 사진가)
‘미얀마’로 이름을 바꾼 군부정권의 힘은 약해지기 시작했고, 민주화 과정이 진전됐습니다만 카렌족의 사정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2000년대 중반이 되자 1980년대에 2만명에 이르던 카렌민족해방군 수는 4000명 정도로 줄어들었습니다.
미얀마와 태국 간 국경지대에는 정부군과 분리주의 조직의 유혈분쟁, 정부군의 탄압 등으로 피란길에 오른 카렌족 40만명이 살고 있습니다. 그 중 12만명 이상이 난민촌에 살고 있습니다. 사진 속 노동자들이 일하는 멜라의 난민촌에만 5만명가량이 거주한다고 합니다.
2000년부터 캐나다 등이 카렌족 난민을 받아들였고 미국도 2011년~2012년 네브라스카 등지에 카렌 난민을 일부 정착시켰습니다. 하지만 성공적으로 정착한 사람은 적고, 여전히 카렌족 다수는 미얀마에서 힘들게 살아갑니다.
사진 | 장준희 (다큐멘터리 사진가)
사진 | 장준희 (다큐멘터리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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