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세계사

네팔의 역사

딸기21 2015. 8. 21. 09:20

네팔에서 지진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비극의 현장에서 연일 들려오던 이야기들이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 기슭에 자리 잡은 작은 나라 네팔의 역사를 들여다보지요.



‘네팔’이라는 이름은 그 곳에 살아온 네와르(
Newar)라는 민족 이름에서 나왔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인도 산스크리트어로 표기된 고대 문서들이 남아 있답니다. 전설에 따르면 수도 카트만두가 있는 카트만두계곡 지역에 오래 전 살았던 ‘네(Ne)’라는 힌두교 현자가 이 나라를 세웠다고 합니다. 네팔은 ‘네의 보호를 받는 곳’이라는 뜻이라는군요.

카트만두계곡에 사람들이 정착한 것은 신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적어도 1만1000년 전부터 이 지역에 사람들이 거주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네팔의 초기 정착민들은 기록에 의하면 고팔라라고 부르는 사람들이었고, 마히스팔라, 키라타 같은 정착민들이 뒤를 잇습니다. 2500년 전부터 티베트-버마 계통 사람들이 이 지역에 터를 잡습니다. 



기원전 500년 무렵 작은 왕국들이 오늘날의 네팔 남부에 생겨납니다. 그 중 한 왕자의 이름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지요. 바로 싯다르타 고타마, 석가모니입니다. 

싯다르타의 고향, 네팔

기원전 250년경이 되자 네팔 남부 지역은 인도 북부에 기반을 뒀던 마우리야(Maurya)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잠시 샛길로 가서 마우리야 제국을 들여다볼까요. 마우리야는 철기 문명에 기반을 둔 제국이었죠. 기원전 250년 무렵의 마우리야 영토는 아래 지도에서 보시듯 인도 아대륙과 그 북부를 아우르고 있었습니다. 제국을 세운 주인공은 찬드라굽타 마우리야라는 인물이었습니다.

찬드라굽타는 토착 왕조였던 난다(Nanda) 왕조를 무너뜨리고 제국을 세운 뒤 속속 영토를 늘려갔으나, 결국 거대한 적에게 맞부딪치게 됩니다. 이름 하여 알렉산드로스! 하지만 그리스(마케도니아) 군대는 끝내 마우리야를 무너뜨리지 못했으니, 마우리야는 기원전 316년 인도 북서부를 완전히 장악하게 됩니다. 

그 뒤에 찬드라굽타는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인 셀레우코스1세의 침공도 물리치고 인더스강 서쪽으로 영토를 늘려갑니다. 마우리야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 중의 하나였고, 전성기에는 영토가 히말라야 산지에서 아프가니스탄의 힌두쿠시산맥에 이르렀다고 하는군요. 

마우리야 이후로도 네팔의 역사는 인도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네팔은 4세기에는 인도 굽타 왕조 밑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3~5세기 인도 중·북부 드넓은 지역을 장악했던 굽타 왕조 시기는 인도 역사의 황금기로도 불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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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400~750년에는 리차비(Lichchhavis)라고 불리는 왕조가 카트만두계곡을 비롯한 현재의 네팔 중부지역을 지배합니다. 이 시기 네팔의 모습을 보여주는 아주 유명한 책이 있지요. <서유기>로 알려진 현장(삼장)법사의 순례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8세기에 이르자 리차비 왕조는 내리막길을 걷습니다. 이 때부터 네팔은 티베트인들의 거점이 되고, 네와리의 시대가 열립니다. 11세기 무렵에는 포카라를 비롯한 여러 지역이 네와리에 속하게 된 것으로 추정할 뿐. 그러나 네와리의 시대는 잠시에 그쳤고, 11세기 말이 되자 인도 찰루키야(
Chalukya) 제국의 물결이 남쪽으로부터 밀려옵니다.


14세기 네팔 중부를 통일하고 새 왕국을 세운 자야스티티의 초상화


하지만 네팔인들도 그대로 무릎을 꿇고 있지는 않았으니... ‘말라’라는 일군의 지도자들이 떠오릅니다. 말라 왕들은 약 200년 동안 네팔을 다스렸고, 그 동안 20여개의 크고 작은 왕국들이 명멸했습니다. 

마침내 네팔 중부가 다시 통일된 것은 14세기 말 자야스티티(
Jayasthiti) 왕조가 들어서면서였습니다. 자야스티티는 말라 왕들 중의 한 명입니다. 당시 카트만두와 파탄, 바드가온 등의 도시들이 라이벌이 되어 싸우고 있었는데, 자야스티티는 바드가온을 다스린 데발라데비라는 여왕의 손녀와 결혼을 합니다. 

네팔 통일의 영웅, 자야스티티 

자야스티티는 주변 작은 왕국들을 복속시킨 데 이어 1370년에는 파탄을 손에 넣었고, 1374년에는 바네파, 파르핑 같은 지역들을 정복합니다. 1395년에는 드디어 네팔 중부를 모두 장악합니다. 지금도 자야스티티는 네팔인들의 역사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왕조 또한 오래 가지는 못했습니다. 1482년이 되자 네팔은 카트만두, 파탄, 박타푸르의 세 왕국으로 분열됩니다. 갈라져 있던 나라가 오늘날과 같은 형태를 띠게 된 것은 18세기 중반입니다. 

고르카 왕 프리트비 나라얀 샤의 초상화

영국 식민주의 군대의 ‘구르카 용병’으로 유명한 고르카(Gorkha)족의 왕 프리트비 나라얀 샤(Prithvi Narayan Shah)가 인도로부터 무기를 들여와 정복전에 나섭니다. 1769년의 칸티푸르(Kirtipur) 전투와 같은 몇 차례의 전쟁을 거치며 카트만두계곡을 손에 넣습니다.

고르카 왕국은 히말라야 북쪽까지 넓은 땅을 차지했습니다만, 이 때문에 중국 청 왕조와 분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결국 청에 밀려 네팔의 영토는 히말라야 남쪽 기슭으로 다시 줄어들었고... 이 무렵 이미 인도에서는 영국이 식민지화를 진행하고 있었지요. 네팔 왕국과 영국 사이에 전쟁(1815-1816)이 일어납니다. 고르카가 패배했지만, 이 때 고르카의 용맹함에 깊은 인상을 받은 영국이 이들을 용병으로 삼기 시작했고 그것이 ‘구르카 용병부대’의 전설로 오늘까지 남게 되었습니다.

(또 샛길로 가자면, 구르카 용병들은 20세기의 수많은 전쟁들에 영국의 용병으로 동원됐습니다. 영국 정부가 이들에게 영국 군인들에게 내주는 것과 같은 연금을 주지 않자 용병들이 소송을 벌여 이기기도 했고요. 그러나 용병은 용병, 영국 제국주의 군대에 들어가 돈을 받고 다른 피지배 민족들을 학살하는 일에 동원된 사람들을 아름답게 포장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연금 형평성’ 문제와는 별개로요.)

폭순도 호수. _위키피디아


고르카와 라나 왕조

아무튼 고르카 왕국과 영국의 전쟁 뒤 네팔은 왕정 내 분열로 불안정한 상태가 됩니다. 1846년에는 승승장구하고 있던 군벌 지도자를 몰아내려던 음모가 드러났고 ‘코트(Kot) 학살’이 일어납니다. 군벌들이 부딪치고 처형과 숙청이 잇따르면서 왕실은 초토화됩니다.

쫓겨날 뻔했던 바로 그 군벌, 중 바하두르 쿤와르(JungBahadur Kunwar)는 마침내 승자가 되어 라나(Rana) 왕조를 열었습니다. 라나 왕조는 친영파였고 인도 세포이 항쟁 때에도 영국을 지원했습니다. 1차, 2차 세계대전 때에도 역시 네팔은 굳건히 영국을 지원합니다. 인도가 영국 식민통치에 신음하며 반영 독립운동을 벌인 것과 달리 네팔은 1923년 영국과 공식적으로 우호협정을 체결했습니다. 


라나 왕조를 연 중 바하두르 쿤와르

1924년 노예제가 공식적으로 철폐됐지만 네팔 왕국에는 여전히 인신매매와 노예제가 흔했습니다. 라나 왕조의 억압적인 통치가 도전에 부딪친 것은 1940년대에 이르러서였습니다. 그러다가 1950년에 중국이 티베트를 점령합니다. 인도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네팔 쪽으로 영향력을 확대합니다.

고래 사이에 낀 새우가 된 네팔은 1951년 정치적 혼란 속에서 네팔의회당 주도의 새 정부를 구성합니다. 그러나 왕실과 정부 간의 권력다툼은 끝나지 않았고 마헨드라(
Mahendra) 국왕(1955-1972년 재위) 시절인 1959년 이래로 1989년까지 ‘정당 없는 의회’인 판차야트(Panchayat) 체제가 자리를 잡습니다. 

왕실 살인극과 공화국으로의 이행 

뒤이은 비렌드라 국왕은 ‘잔 안돌란(민중운동)’이라 불리는 국민적 요구에 밀려 개헌을 하고 1991년 5월 다당제 선거를 실시하게 되지요. 이미 왕조는 구시대적인 존재로 국민들의 지지를 잃고 미움만 잔뜩 받고 있었습니다.  

1990년대 중반, 낙후된 농촌을 중심으로 마오주의 공산당과 반군이 세를 불리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왕조를 없애고 공화국으로 가기 위한 투쟁을 벌입니다. 당시 마오주의 반군과 정부군 간 내전으로 1만20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산됩니다. 그러다가 왕실의 신망을 아주 땅바닥에 떨어뜨린 사건이 일어납니다. 2001년 6월 1일 키렌드라 국왕과 아이스와리야 왕비를 비롯한 왕실 일가족이 몰살당한 겁니다. 

살인극을 벌인 인물은 다름아닌 디펜드라 왕세자였습니다. 왕세자는 부모를 비롯한 가족들을 사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디펜드라가 원하는 여성과 결혼하지 못하게 부모가 막은 것이 살인극의 이유가 됐다고 하지만 자세한 내막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네팔 국회(싱가두르바르) 의사당


아무튼 이 사건 뒤 비렌드라 국왕의 동생인 갸넨드라가 왕위를 이어받았습니다. 하지만 갸넨드라는 국민들 앞에서 ‘웃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고, 인기가 통 없었다고 합니다. 민주화 요구에 직면해 갸넨드라는 국왕의 권력을 대폭 축소하는 데에 동의했고, 명목상의 왕실로 남았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오래 가지는 못했고, 2007년 12월 의회는 왕조를 없애고 공화국으로 가기 위한 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킵니다. 

2008년 4월 치러진 제헌의회 선거에서 마오주의 네팔공산당이 승리를 거뒀습니다. 5월 28일 실시된 의회 투표에서 564명 중 560명의 찬성으로 네팔은 공화국이 됐습니다. 240년 역사의 라나 왕조는 종말을 맞았습니다. 갸넨드라는 15일 뒤 나라얀히티 왕궁에서 퇴거했고, 왕궁은 박물관으로 변모했습니다.

네팔 공산당 지도자 프라찬다가 2007년 포카라에서 연설하는 모습 <출처:(cc) Nhorning at en.wikipedia.org>


그 해 8월 15일, 마오주의 지도자 프라찬다(본명은 푸시파 카말 다할)가 총리로 선출되면서 왕정에서 공화정으로의 이행이 완료됩니다. 하지만 공산당 주도 연립정부는 이듬해 무너졌고, 새로 출범한 정부도 2011년 또 무너졌고, 헌법을 놓고 아직도 싸움이 지속되는 판국입니다. 2014년 2월에 의회 내 주요 정당들이 제헌의회를 다시 소집하는 데에 합의하면서 수실 코이랄라 현 총리가 취임했습니다만, 지진으로 모든 정치일정은 중단된 상황이죠. 네팔의 미래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밝지 않아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