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세계사

보팔에서 톈진까지, 환경재앙의 역사

딸기21 2015. 9. 18.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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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2일 중국의 석유화학 산업단지이자 수출기지인 톈진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기업의 무책임, 고속성장으로 달려가면서 안전은 등한시해 온 정부의 무사안일주의와 부패가 모두 도마에 올랐습니다. 톈진 사고는 중국 압축성장의 민낯을 보여준 참사였다는 지적도 나왔습니다.


150여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집계됐습니다만, 인명피해만큼이나 환경에 미칠 장기적인 영향도 걱정됩니다. 폭발사고 현장 부근의 강에서 떼죽음을 당한 물고기 사진들이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에 올라왔고,
 국영 CCTV는 현장에서 신경성 독가스가 검출됐다고 보도했습니다. 더 큰 재난이 물 밑에 숨어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됩니다.

생명보다 이익을 앞세우는 기업들이 사람과 자연에 엄청난 피해를 미친 사건들은 많았습니다. 그 중 피해규모가 컸던 것들, 세계적인 파장을 일으켰던 사건들의 역사를 정리해봅니다.

여전히 고통 받는 보팔의 피해자들

두 차례 연쇄 폭발이 일어난 톈진의 물류창고에 얼마나 많은 유독물질과 화학물질이 있었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동안 알려진 것으로는 독극물인 시안화나트륨 700톤이 보관돼 있다가 일부 유출됐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그 외에 톨루엔, 카바이드와 같은 화학물질도 있었다고 합니다.

‘카바이드’라는 단어를 보면서 보팔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31년 전 인도 중부 마드야프라데시 주의 주도인 보팔에서 수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고, 지금까지도 후유증이 가시지 않은 가스 누출사고가 일어났는데 그 사건의 주범인 기업 이름이 ‘유니온카바이드’였기 때문입니다.


보팔 참사 피해자들이 2006년 9월 유니온카바이드(현 다우케미컬)의 전 경영자 워런 앤더슨을 처벌하라며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출처: (ccobbino at flickr.com>

지난 8월 말 ‘First to Know’라는 웹사이트에 참사 당시 피해자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올라왔습니다. 몹시 충격적인 장면들이 들어 있으니 슬라이드쇼를 보기 전 주의하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더군요. 30년 넘게 지난 일이지만, 여전히 사진들은 충격적이어서. 넘겨보기가 힘들었습니다.보팔 참사는 기업이 일으킨 환경 참사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1984년 12월2일 밤, 미국 석유화학기업인 유니온카바이드가 보팔에 세운 살충제 공장에서 유독성인 메틸이소시안염 가스 40톤이 누출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즉사한 사람만 2259명에 달하고, 사고 후유증으로 지금까지 2만여 명이 더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보팔 주민들의 고통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안타깝지만 주민들이 구체적으로 건강에 어떤 위험을 안고 살아왔고,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조차 10년 동안 제대로 조사·공개되지 않았답니다. 인도의학연구위원회(
ICMR)가 조사를 했지만 그 내용을 공개하지 못하도록 1994년까지 인도 정부가 막았기 때문입니다.

보팔 참사를 조사한 스웨덴 의료전문가 잉그리드 에커만에 따르면 52만명이 유독가스의 영향을 받았고, 그 중 20만 명이 15세 이하 어린이들이었으며 3000명은 임신부였습니다. 정부는 공식적으로 2259명이 사건 직후 숨졌고 1991년까지 총 3928명이 사망했다고 밝혔습니다만, 에커먼은 가스누출 뒤 2주 안에 8000명 이상이 숨진 것으로 추정합니다.

인도 정부는 보상금으로 33억달러(약 3조5800억원)를 요구했지만, 유니온카바이드는 기나긴 협상 끝에 1989년 4억7000만 달러(약 5100억 원)를 지불하는 데에 그쳤습니다. 사고 당시 유니온카바이드의 경영자였던 워런 앤더슨과 회사 측이 보팔 법원에 기소됐습니다만, 처벌은 미약하기만 했습니다. 2010년 6월 앤더슨을 포함한 경영진 7명은 직무태만 혐의가 인정돼 사망자 1인당 2000달러씩 계산해서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수많은 이들을 숨지게 한 앤더슨은 지난해 9월 미국 플로리다 주 베로비치의 요양소에서 92세로 편안한 죽음을 맞았답니다.


보팔 사고 당시의 참상 <출처: truthinmedia.com>


경영진 처벌 문제와는 별개로, 피해자들이 겪어야 하는 후유증이 계속되면서 추가 보상을 위한 싸움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인도 정부는 12억 달러의 추가 보상을, ‘보팔의 정의를 위한 국제 캠페인’이라는 피해자 권익옹호 단체는 81억 달러 규모의 추가보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니온카바이드는 2001년 미국 최대의 화학기업 다우케미컬에 인수됐고, 추가보상 논의는 지지부진합니다. 현장 정화작업조차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고 현장에는 8000톤이 넘는 독성물질이 남아 있고, 주민들은 20년 넘게 독성물질에 오염된 물을 마셔왔습니다.

8월 31일 보팔의 수도시설에서 염소가스가 누출됐다고 
NDTV가 보도했습니다. 보팔 사건과 관련은 없지만, 그리고 인명피해는 없었다지만, 주민들은 오래 전 사건을 떠올리며 공포에 떨었던 모양입니다. 당국은 여전히 보팔 참사의 교훈을 뼈에 새기지 못한 것 같습니다.

켄 사로-위와, 세계에 외치다

몇 해 전 나이지리아의 경제 중심지인 라고스를 방문한 적 있습니다. 화려한 쇼핑몰의 서점에 들어가 보니 켄 사로-위와의 전기가 매장 맨 앞에 있더군요. 같은 이름을 가진 사로-위와의 아들이 쓴 것이었습니다.

사로-위와가 누구인지 알려면, 세계에 경각심을 불러온 셸의 니제르델타 석유 누출 사건을 먼저 설명해야겠지요. 니제르델타는 나이지리아 남부의 유전지대입니다. 니제르 강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형성된 삼각주여서 그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셸은 1970년대부터 20여 년간 니제르델타의 오고니족 원주민 거주 지역에서 원유를 캐내면서 나무를 베어내고 환경을 파괴했고, 1993년에는 파이프라인을 만든다며 40일 동안 원유가 새어나가는 데에도 방치했습니다. 원주민 운동가이자 시인, 저술가인 사로-위와는 셸에 항의하며 오고니 지역 내 채굴 중단을 요구하는 캠페인을 벌였습니다. 오고니 투쟁이 세계에 알려지면서 셸에는 국제적인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그러자 사니 아바차 장군이 이끄는 군사독재정권은 기업의 횡포에 맞서 자국민을 보호하는 대신, 오히려 오고니족 탄압에 나섰습니다. 사로-위와는 5명의 동료들과 함께 군인들에 체포됐고 처형됐습니다. 그의 가족은 미국으로 도망쳤다가 1999년 아바차 정권이 무너진 뒤에야 귀국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켄 사로-위와의 법정 최후진술을 한 구절 인용해봅니다. 미국 콜로라도대학 인터넷 아카이브에 올라와 있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역사 앞에 서 있습니다. 
나는 평화의 사람, 생각을 가진 사람입니다. 풍요로운 땅에 살아가는 내 민족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가난에 충격 받고, 내 민족이 정치적으로 주변화되고 경제적으로 목이 졸리는 현실에 고민하고, 땅과 유산이 파괴되는 것에 분노하고, 부끄럽지 않은 삶을 영위할 권리를 지킬 수 있기를 바라고, 이 나라가 모든 민족 집단의 모든 사람들을 보호하며 인류 문명에 이바지하는 공정하고 민주적인 체제를 갖추게 만들고자 하는 결심에서 나는 나섰습니다. 내 지성과 물질적 자원과 인생 그 자체를, 아무도 훼손하거나 겁박할 수 없는 신념을 위해 모두 바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나와 나를 믿는 사람들이 가는 길에 어떤 시험과 고난이 있을지라도 결국에는 성공하리라는 것을 나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감금도, 죽음도 우리의 궁극적인 승리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는 이 진술을 마친 뒤 처형됐습니다. 이 사건은 환경파괴와 함께, 독재정권과 결탁해 현지 주민들을 억압하고 원주민들에게 모든 피해를 떠넘기는 대기업의 횡포를 부각시켰습니다. 파키스탄 등 남아시아에서 어린 아이들의 피땀으로 만들어진 ‘스웻샵(노동착취형 공장)’ 축구공이 한참 논란이 되던 때였습니다. 니제르델타 문제는 나이키·아디다스 등의 아동 노동 착취와 함께, 거대 다국적기업이 저지르는 나쁜 짓을 상징하는 사건이 됐습니다.

셸은 사로-위와가 처형되는 과정에 자신들은 개입하지 않았으며 순전히 나이지리아 당국이 한 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2001년 그린피스가 “셸이 군정에 돈을 댔다”는 현지 관리들의 증언을 폭로하면서 거짓이 탄로 났습니다. 이어 나이지리아군이 사로-위와 등을 체포할 때 셸의 헬기를 타고 밀림에 들어간 사실이 드러났고, 셸이 소송에서 이기기 위해 증인들을 매수하려 했던 것까지 폭로됐습니다.

2003년 셸 나이지리아 법인은 “고의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의 행동이 현지 분쟁에 영향을 줬을 수 있다”고 일부 책임을 시인했습니다. 2009년 6월 셸은 미국에서 제기된 사로-위와 처형에 관한 소송에서 일부 책임을 인정하고 1550만 달러(약 200억원)를 내기로 합의했습니다. “소송을 끝내기 위한 것이지 모든 책임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하긴 했지만요.

사로-위와 사건은 일단락됐지만, 니제르델타 환경파괴는 여전합니다. 셸이나 셰브론 같은 기업들은 나이지리아에서 막대한 이득을 챙겨가지만 주민들은 가난합니다. 2000년대 중반에는 ‘니제르델타해방운동(
MEND)’ 같은 현지 원주민 조직들이 정부군과 에너지기업들에 맞서 무장투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사로-위와 사건 이후로도 셸의 파이프라인 유출은 오랫동안 계속됐습니다. 셸은 오고니 땅을 깨끗이 치우겠다고 했습니다만, 현지 정부와의 마찰을 이유로 약속한 기금을 만드는 걸 계속 미뤘고요. 결국 10억 달러 규모의 환경기금을 만드는 데 완전히 합의가 된 것은 지난달에 이르러서였습니다.

엑손발데스와 딥워터호라이즌 사건

미국 최악의 환경재앙으로 꼽혀온 것은 1989년 알래스카 주에서 일어난 유조선 엑손발데스 호 침몰 사건입니다. 엑손모빌이 보유하고 있는 엑손발데스는 그 해 3월 24일 프로드호만 유전에서 퍼낸 원유를 싣고 캘리포니아 주 롱비치를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프린스윌리엄사운드의 산호초에 부딪쳤고, 최소 26만 배럴의 원유가 그 후 이삼일 새에 바다로 흘러나갔습니다. 미국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사례가 드문 대규모 석유 유출 사고였습니다.

사고가 난 해역은 접근하기 힘든 알래스카의 오지에 있어서, 헬기와 비행기와 배가 진입하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연어와 해달, 물개와 바닷새들이 사는 청정 해역의 해안선 2100
km 정도가 기름에 덮였습니다. 면적으로 따지면 기름 장막이 바다 위 28,000㎢를 덮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을 넘어서는 규모의 환경파괴를 일으키며 ‘미국 최악의 환경 참사’ 기록을 갈아치운 것은 딥워터호라이즌 사건입니다. 2010년 2월 15일, 영국 에너지회사 
BP가 운영하던 멕시코 만의 해저 유정에서 기름이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유출량이 갈수록 늘어나자 두 달 뒤인 4월 19일 보비 진달 루이지애나 주지사는 유출 해역에 비상사태를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이튿날 시추선 ‘딥워터호라이즌’이 폭발해버렸고, 현장에서 작업하던 노동자 11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폭발 뒤 불타오르는 딥워터호라이즌


이 사고로 멕시코만 해역의 생태계가 파괴되고 어업이 중단됐습니다. 기름을 걷어내고 시추공을 막는 데에만 반년 가까이 걸렸습니다. BP는 사고 뒤 245만 배럴의 원유가 새나왔다고 발표했지만 미국 정부 전문가들은 490만배럴 가까이 유출된 것으로 봤습니다. 환경을 내세워온 버락 오바마 정부는 곤혹스런 처지가 됐습니다. 전임 조지 W 부시 행정부를 궁지에 몰아간 허리케인 카트리나 사태에 빗대 ‘오일 카트리나’라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그 해 6월부터 민·형사 재판절차가 시작됐는데, 법적 절차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2012년 11월 
BP는 형사재판에서 45억 달러를 지불하기로 합의했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9월 뉴올리언스 지방법원이 BP의 “포괄적 부주의”를 인정한 판결을 했습니다. 법원은 BP가 “작업의 위험성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무시하는 등 총체적 태만(grossly negligent)을 저질렀다”고 판결했습니다. 칼 바비어 판사는 153쪽에 이르는 판결문에서 사고가 “유정의 안전보다는 시간과 돈을 절약하겠다는 욕심을 우선시한 결과”였다고 지적했습니다.

사상 최악의 기름유출 사고를 일으킨 기업에 사상 최대의 징벌적 벌금을 부과하는 판결이 나오자 미국 언론들은 “환경법의 역사에 이정표가 되는 재판”이라고 환영했습니다. 하지만 이걸로 끝은 아닙니다. 정확한 기름 유출량과 최종적인 벌금 액수를 놓고 재판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 청정수질법에 따르면 단순 태만이 아닌 ‘총체적 태만’일 경우 벌금이 4배로 뛰어오릅니다. 그러면 
BP는 180억 달러의 추가 벌금을 내야 할 수도 있거든요. 영국 BBC에 따르면 BP가 루이지애나 판결 이전까지 사고수습과 피해보상 등에 썼거나 지불하기로 합의한 금액은 430억 달러에 이릅니다. 여기에 최대 180억 달러의 추가 벌금을 합치면 BP는 총 610억 달러(약 62조5000억원)를 쓰는 셈이 됩니다. 이 사고와 관련해 지금까지 제기된 소송만 해도 36개국에서 94만7000건이 넘습니다. 지난 8월 27일에도 사고현장에서 기름 제거작업을 했던 노동자가 BP를 상대로 건강상의 피해를 입었다며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2010년 5월 6일 딥워터호라이즌 폭발로 새어나온 기름이 바다 위를 덮고 있는 모습


옆으로 자라는 후쿠시마의 전나무들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납니다. 쓰나미로 센다이 등지에서 엄청난 피해가 났습니다만, 두고두고 지속될 재앙이 벌어진 곳은 도쿄 동북쪽의 후쿠시마였습니다. 도쿄전력이 운영하고 있던 후쿠시마 제1원전에서 방사성 물질이 유출된 것이죠. 원자로 노심 ‘폭발’은 간신히 피했지만 이 일대는 사람이 머물 수 없는 지역이 됐습니다. 주변에서 자란 채소와 쌀, 수돗물, 근처 축산농가에서 키운 쇠고기, 주변 해안의 해산물 방사능 오염이 잇달아 보고됐습니다.

사고 자체도 컸지만, 그 뒤처리 즉 일본 정부의 대응 태도가 더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사고 뒤 벌어진 일련의 일들을 살펴볼까요. 일본 정부는 2011년 12월에 “사고가 수습됐다고 판단할 수 있다”고 밝혔고, 이후에도 안심시키기에 급급했습니다. 물밑으로 가라앉는 듯했던 후쿠시마 원전 방사능 누출이 수습불능 상태로 가고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된 건 2013년에 이르러서였습니다. 먼저 방사능 누출에 의한 건강 위협이 현실로 나타납니다. 후쿠시마 청소년 22만6000명 가운데 26명이 갑상샘암에 걸린 것으로 확진됐고, 33명이 암 의심 상태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10만 명당 11.5명이 암에 걸린 것으로, 옛 소련 체르노빌 원전사고를 넘어서는 수치였습니다. 물론 당국은 원전 사고와 청소년 갑상샘암을 직접 연결할 근거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비정상적으로 자라는 후쿠시마현 부근의 전나무. A가 정상적으로 자라는 나무. B와 C의 화살표 표시가 된 부분은 이상 성장을 보여줍니다. <출처: 일본 방사선의학종합연구소, ‘放射線量が特に高い地域でモミの形態変化を調査’>


그 해 여름이 되자, 원전에서는 방사성물질에 오염된 냉각수가 계속 새나가 땅으로 스며들면서 말 그대로 통제 불능으로 치닫습니다. 도쿄전력은 사고 20일 뒤 지하갱도와 터빈 건물 사이의 틈새를 차단하겠다며 오염수 유출 예방대책을 발표했는데, 바다 쪽에 콘크리트와 자갈로 임시공사만 했을 뿐 2년 이상 본 공사에 착수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원전이 폭발할까봐 바닷물을 끌어들여 식혔는데, 그 오염된 냉각수를 저장해둔 철제탱크가 새면서 수백 톤이 땅속으로 스며들었지요. 국제원자력기구(
IAEA)가 “심각한 사태”로 규정하면서 국제적인 환경재앙으로 비화했습니다만, 이 사고 뒤처리조차 제대로 하지 않은 일본은 지금 원전을 재가동하고 있습니다. 

참사가 일어난 지 어느 새 3년 반. 얼마 전, 후쿠시마 원전 부근 전나무들이 비정상적으로 자라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일본 방사선의학종합연구소가 원전 주변에서 80종류의 야생 동식물을 조사했는데, 전나무 줄기가 위로 뻗지 않고 옆으로 자라는 이상 현상이 높은 비율로 나타났다는 겁니다. 이 지역은 ‘귀환곤란지역’으로 지정돼 사람이 살지 않는 곳입니다. 이상이 발생한 전나무의 비율은 원전에서 3.5㎞ 떨어진 곳은 무려 98%에 이르렀습니다. 8.5㎞ 떨어진 곳의 경우는 44%로, 15㎞ 떨어진 곳은 27%로 각각 집계됐습니다. 

당국이 정밀조사를 하고 있다는데, 과연 이 사고로 인한 환경피해가 언제까지 여파를 미칠 지 걱정스럽습니다. 체르노빌의 경우 사고가 난 지 30년이 돼갑니다만 여전히 사람이 살 수 없는 버려진 땅으로 남아 있으니까요. 

앞서 살펴봤듯이 대형 환경참사의 원인은 여러 가지입니다. 기름 유출도 있고, 지진도 있고, 폭발도 있습니다. 공통점은, 영리를 위해 움직이는 기업을 정부가 제대로 감시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결탁했다는 것입니다. 피해는 온전히 주민들 몫이, 특히나 정치적으로 힘없고 약한 이들의 짐이 되었다는 것도 똑같습니다. 책임을 묻는 작업은 지지부진하다는 것도 비슷합니다. 재앙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국가의 규제와 함께, 국가를 움직일 시민사회의 감시와 목소리가 필요하다는 것이 결국 가장 큰 교훈인 듯합니다. 

문득 궁금해지네요. 태안 기름유출 사건은 어떻게 처리됐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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