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첫 책은 이반 일리치의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허택 옮김, 느린걸음)다. 휴가 길에 가지고 가서 후다닥 읽었다. 얇지만 깊은 이 책에 '후다닥'이라는 말을 붙이니 너무 경박하게 들리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책의 부제에 메시지가 다 녹아 있다. '시장 상품 인간을 거부하고 쓸모 있는 실업을 할 권리'. 책의 원제는 THE RIGHT TO USEFUL UNEMPLOYMENT이지만 '쓸모 있는 비고용상태'를 말하기 전에 여러 생각들을 산만하게 펼쳐놓는다. 온갖 문제의식을 짧은 에세이 안에 녹여놓았으니, 책장을 덮은 바로 그 순간부터 '생각'은 나의 몫이다.
성인 평균수명은 지난 몇 세대 동안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을 만큼의 변화가 전혀 없었으며, 가장 부유한 나라의 평균 수명은 전 세대보다도 낮아졌고 가난한 나라보다도 길지 않았다. 그림자 가격이나 갈수록 벌어지는 소비 격차도 현대의 가난에 포함된 중요한 특징이다. 하지만 나의 주된 관심사는 현대화가 일으키는 다른 결과들이다. 즉 자율은 무너지고, 기쁨은 사그라지고, 경험은 같아지고, 욕구는 좌절되는 과정에 있다. 허울뿐인 혜택이 불평등하게 분배되고 부정적 외부효과가 불평등하게 부과되는 것은 이 부정적인 속성에 뒤따르는 결과이다. 나의 관심사는 현대화된 가난이 인간에게 끼치는 직접적이며 구체적인 결과이며, 그것을 견뎌내는 인간의 인내이며, 이 새로운 비참함에서 벗어날 가능성이다. (12~13쪽)
최근 몇 년 동안 나는 도구의 본성과 그 도구를 사용하는 사회에 확립된 정의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꾸준히 조사해왔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권리를 전문가가 만들어내는 사회에서는 자유가 소멸할 수밖에 없다는 걸 지켜보게 되었다. 현대의 도구 중 상품 생산력을 향상하는 도구와 사용가치를 만드는 도구, 대량 생산상품을 구매할 권리와 개인이 만족을 얻고 창조적으로 표현할 자유, 급여를 받고 하는 일과 고용되지 않고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을 서로 비교해 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타율적 관리와 자율적 행동으로 나누어 비교했을 때 후자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많은 고통과 노력이 따르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의 독자들처럼 나 역시 상품과 권리, 일자리는 근본적으로 공정하게 분배되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정의를 위해 투쟁하자는 주장은 불필요한 듯하다. 오히려 그 정의를 보완하고 조화를 이루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것을 ‘공생의 정치’라 부르고자 한다. <공생을 위한 도구>에서 기술적 의미로 사용했던 이 용어는 사용가치를 만들 수 있는 자유를 공정하게 분배하기 위한 저항을 의미한다.
정치적 절차를 통해 한 사회가 생산할 부와 일자리에 한계를 결정해야만 부와 일자리 모두 공평하게 나누어져 누구나 자유롭게 누릴 수 있다. ‘공생의 정치’는 이러한 통찰에 근거한다. 과도한 부가 생산되거나 고용 기간이 너무 길어지면, 아무리 잘 분배하더라도 평등하고 생산적인 자유를 누리는 데 필요한 사회적, 문화적, 자연적 조건이 파괴되고 만다. 비트(bit)와 와트(watt)가 어느 한계를 넘어 대량 생산 상품에 과도하게 투입되면 필연적으로 인간을 ‘가난하게 만드는 부 impoverishing wealth’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14~15쪽)
일리치는 이 책에서 무엇보다 '가난의 현대화'에 대해 얘기한다. 과잉생산은 상품의 사용가치는 물론이고 인간의 (노동)가치마저도 잉여로 만들어버린다. 생산이 어느 한도를 넘어서면 그 때부터는 부(富)가 곧 가난을 생산한다. 지금껏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게 해준 노동은 가치를 잃고, 사람의 삶을 돕던 물건들은 사용가치를 상실한다. 그는 이를 현대화된 가난이라 부른다.
상품이 어느 한계점을 지나 기하급수적으로 생산되면 사람은 무력해진다. 자기 손으로 농사를 지을 수도, 노래를 부를 수도, 집을 지을 힘도 없게 되는 무기력이다. 땀을 흘려야 기쁨을 얻는 인간의 조건이 소수 부자만 누리는 사치스러운 특권이 된다.
케네디 대통령이 ‘진보를 위한 동맹 the Alliance for Progress’을 출범하기 전까지 멕시코의 다른 작은 마을처럼 아카칭고 마을에도 네 개의 악단이 마을 잔치에서 악기를 연주하며 800여 명의 이웃을 즐겁게 했다. 요즘에는 레코드와 라디오가 확성기로 울려 퍼지면서 지역의 예인들이 사라지고 있다.
베네수엘라 정부가 마치 상품처럼 국민이 ‘주택’을 가질 권리를 법으로 선포한 날, 그동안 국민의 4분의 3이 자기 손으로 만들어온 집이 하루아침에 마구간 취급을 받게 되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자가 건축을 바라보는 사회적 편견이 생겨난 것이다. 자격증 있는 건축가가 그린 설계도를 제출하지 않으면 합법적으로 집을 지을 수 없게 되었다. 카라카스 시에서는 쓰레기가 최고의 건축재료로 재활용되었지만, 이때부터는 고형폐기물이 되어 처리하기 어려운 골칫거리가 되었다.
자기 손으로 집을 짓겠다는 사람은 유별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받게 되었다. 그런 사람은 대량 생산된 건축자재를 공급하는 지역의 이해 단체와 협력을 거부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또한, 수많은 법 조항이 생겨나 그의 독창성은 오히려 불법으로 규정되고 범죄행위라는 딱지가 붙는다.
이런 사례를 통해 우리는 새로운 상품이 생겨나 전통적인 자급 기술이 쓸모없어질 때 가장 먼저 고통받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직업도 없는 가난한 사람이 고용되지 않은 상태로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은 노동시장이 확장되면서 없어져버렸다.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풍요에 사람들이 중독되고 그것이 문화속으로 한번 배어들면 ‘가난의 현대화’가 생겨난다. 현대화된 가난은 상품이 확산하면서 어김없이 발생하는 부정가치의 형태이다. (33~34쪽)
학교라는 곳에 가본 적 없던 멕시코 오악사카(오아하카가 맞는 표기임) 주 인디언이 지금은 졸업장을 ‘따기’ 위해 학교에 끌려간다. 이들에게 졸업장이란 자신들이 도시인보다 얼마나 열등한지를 정확하게 측정해주는 증서이다. 그나마 이 종이 한 장이라도 없으면 도시에 나가 빌딩 청소부 일도 할 수 없다. 정말로 중요한 문제는 이런 것이다. ‘필요’가 현대화될 때마다 가난에는 새로운 차별이 하나씩 더 붙는다. (35쪽)
이런 '가난의 현대화'를 부추기는 필수적인 메커니즘은 '전문가'들의 존재다. 일리치는 20세기를 "인간을 불구로 만드는 전문가의 시대"라 칭한다.
한 시대를 날려 보내려면 그 시대를 관통하는 이름이 필요하다. 나는 이 20세기 중반을 ‘인간을 불구로 만든 전문가의 시대’로 부르자고 제안한다. 이 명칭은 교육자, 의사, 사회사업가, 과학자 등 서비스 제공자들이 그동안 아무런 지탄도 받지 않고 해온 반사회적 기능을 드러낸다. 전문가 권력이 인간을 무력하게 만든다고 말하면, 그들의 희생자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평생을 학생으로, 환자로, 소비자로 살도록 관리자와 공모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46쪽)
전통적 직업인이 권력을 휘두르는 전문가로 변신한 것은 교회의 제도화 과정과 맞먹는다. 의사가 생명 공학자로, 선생이 지식 기술자로, 장의사가 사망 기술자로 변신한 모습은 직종연합이라기보다는 국가의 지원을 받는 성직자 집단에 더 가깝다. 전문가가 생겨날 때마다 새로운 위계질서가 만들어지고, 고객이 될 사람과 쫓겨날 사람이 가려지며, 추가 예산이 책정된다.
지금까지 의사란 질병이 무엇 때문에 생겨나는지를 찾아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의료 전문가는 사회가 어떤 질병을 용납해서는 안 되는지를 결정한다. 의사는 줄곧 아픈 사람을 진단하는 사람이었지만, 현대에 막강해진 의사는 치료해서는 안 될 사람을 골라서 낙인을 찍는 사람이다. 옛날의 의사는 환자를 치료했지만 지금의 의사는 대중을 교정한다. 즉 환자를 어떻게 할지 또는 환자에게 무엇을 줄지를 결정한다. (66~67쪽)
20년 전만 해도 병원에 가지 않는 게 건강하다는 증거였고 바람직하게 여겨졌다. 지금은 반대가 되었다. 환자가 아닌 사람은 돈이 없는 사람이거나 이상한 사람이다. (75쪽)
전문가 시스템을 통한 '배제'와 '차별'이 어떻게 언어의 변화로도 이어지는지에 대한 분석도 재미있다.
내가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 ‘문제’란 말은 수학 교과서나 체스에만 존재했다. ‘해결’(solution)은 화학이나 법률 용어였다. 내게 뭔가 ‘필요’하면 대개 동사로 표현했다. 그래서 누군가 ‘내게 문제가 있어요’ 라고 하거나 ‘나는 필요를 가지고 있어요’라고 말하면 우스꽝스럽게 들렸다. 내가 십대가 되고, 히틀러가 해결을 찾고 있을 무렵, '사회 문제’라는 말이 퍼져갔다. 사회사업가들이 사냥감에 이름을 붙이고 ‘필요’를 표준화하는 법을 배우자, 전에 없던 그늘에 가려진 ‘문제아'들이 가난한사람들 속에서 발견되었다. 명사로 쓰는 ‘필요’는 전문가의 살을 찌워주고 힘을 길러주는 사료가 되었다. 가난은 현대화되었다. 관리를 위해 가난은 경험하는 것에서 측정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가난한 사람은 무언가가 필요한사람이 되었다. (70쪽)
미래의 아이들이 쓰는 말에는 현대의 언어를 오염시킨 획일적 유행어와 19세기 후반 미국의 악덕 자본가나 카우보이로부터 물려받은 고어가 뒤섞일 것이다. 다만 아이들은 서로를 추장이나 영주라 부르지 않고, 회장님과 비서라 호칭할 것이다. 아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정책 생산’이니 ‘사회 계획’이니 ‘솔루션’이니 하는 경영 용어들을 듣고 어른들은 낯이 뜨거워질 것이다. (55쪽)
경제에서 사용가치를 무시할 수 있다는 환상은 지금껏 자동사로 지칭되던 행위를 명사로 거론되는 상품으로 제도적으로 정의하여 무한정 대체할 수 있다는 가정에서 생겨난다. '배우다'가 ‘교육으로, ‘낫는다’가 ‘건강 관리’로, ‘움직이다’가 ‘교통’으로 ‘놀다’가 텔레비전’ 등으로끝없이 바뀌어 간다. (83쪽)
전문가들의 시대가 몹시도 위험한 이유는, 이것이 우리에게서 판단력과 정치적 행동의 힘마저도 빼앗아가버리기 때문이다.
미래의 역사가는 전문가의 시대를 정치 소멸의 시대라 부를 것이다. 유권자들이 대학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자신의 필요를 법률로 제정할 권력과 누가 무엇이 필요한지를 결정할 권한, 그리고 그 필요를 충족하는 수단에 대한 독점권을 기술관료에게 위임한 시대라고 말할 것이다. 이 시대는 학교의 시대로 기억될 것이다. 인생의 3분의 1은 무엇을 처방받아야 할지 배우고, 나머지 3분의 2는 자신의 습관을 관리하는 저명한 전문가의 고객으로 살았던 시대로 기억될 것이다. (55쪽)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산업사회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환상은 본질적으로 성장에 대한 환상, 발전(개발)에 대한 환상이다. 소비주의와 상품 의존에서 정체성을 찾는 환상이다.
전 세계 모든 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이 쿠바의 평균 수준이 되면 그때부터 의학, 교육, 교통이 오히려 생산성을 갉아먹는 한계점에 도달한다. 이 반생산성은 생산 과정에 자본 투입이 결정적 입계점을 지날 때 시작된다. 이 반생산성은 체계적으로 시민 전체를 무력하게 만든다. 애초부터 자동차를 중심으로 건설된 도시는 보행에 부적합하므로, 자동차를 마냥 늘린다고 해서 사람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 조건을 극복할 수 없다. 인간의 자율적인 행동은 상품이 늘고 치료가과다해지면서 마비되었다. (81쪽)
왜 저항은 일어나지 않는가? 그 이유는 이 체제가 환상을 만들어내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첫 번째 환상은 인간은 소비자로 태어났고, 어떤 목표를 세우든 상품과 재화를 구매해야 원하는 걸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82쪽)
일리치는 근본주의자다. 그의 글에는 '근원적'이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내가 처음 매료됐던 일리치의 짧은 글의 제목도 '평화의 근원적 의미를 생각한다'였다). 그는 '가난의 현대화'를 불러오는 근원인 과잉생산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이 자본주의를 개혁하겠다는 어떤 주장도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상품에 더 의존한다는 것은 자급 활동을 이끄는 규범을 결정해온 문화가 급속히 파괴되다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상품에 덜 의존하는 것은 인간의 행동을 장려하여 다양한 사용가치를 꽃 피우는 현대의 문화가 생겨나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학은 대량상품 생산자들이 사회의 지배권을 갖도록 옹호하는 선동으로 발전되었다. 사회주의는 제대로 기능을 못하는 분배구조에 반대하는 투쟁으로 변질했다. 복지경제학은 공공의 이로움과 물질의 풍요를 구별하지 못한다. 이들이 말하는 풍요는 미국과 유럽의 학교와 보건소, 감옥과 구호소를 떠도는 가난한사람에게 굴욕감을 주는풍요이다. 주류 환경운동은 이런 추세를 더 부추겼다. 그들은 산업 기술에 있는 결함이나 기껏해야 기업이 생산 과정에서 저지른 착취에 주목했다. 그들이 문제 삼은 것은 자연 자원의 고갈이나 환경오염으로 인한 생활 불편, 그리고 최종적 권력이양이었다. (26~27쪽)
현대 사회에서 반생산성이 생겨나는 원인을 본질적으로 경제 성장에 뒤따른 부정적 외부효과나 자원 고갈, 공해 문제로 돌리는 것은 큰 실수이다. 시장 의존이 반생산성으로 이어지는 근본적인 이유는 상품의 근원적 독점과 인간의 필요 사이에 형성된 관계에서 찾아야 한다. 근원적 독점은 일반적으로 쓰는 독점의 의미를 넘어선다.
근원적 독점이란 사람들이 참여하거나, 참여하고 싶어하는 의미 있는 활동을 기업의 상품과 전문가의 서비스가 대체해버린 것이다. 이 독점은 전문가가 만드는 것에 유리하도록 인간의 자율적 행동을 마비시킨다. 자동차가 사람들을 땅에서 뿌리 뽑을수록 교통관리자는 더 많이 필요하게 되지만, 사람들은 무력해진 채 집으로 걸어갈 것이다. 근원적 독점에서는 태양에너지로 자동차 엔진을 돌리고, 풍력으로 바퀴를 굴려도 초고속 교통은 유지된다. 교육받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스스로 답을 찾고 탐구하려는 시간과 능력은 줄어든다. 서로 보완하며 상승효과를 내던 사용가치와 상품은 이때부터 역효과를 만들어낸다.
이는 역설적이면서도 매우 구체적인 반생산성이다. ‘반생산성’이라는 용어는 상품이 사용가치를 대체하면서, 상품이 원래 사람에게 제공하기로 했던 만족 대신 그 반대인 부정 가치를 만들어 인간을 무력하게 하는 모든 상황을 지칭한다. (87~88쪽)
그래서 그는 현대의 성직자들인 전문가들에 의해 뒷받침되는 반생산성의 시대를 넘어서기 위해 사람들 스스로 쓸모를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쓸모 있는 노동을 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쓸모 있는 실업자가 되어 '고용'을 거부해야 하며, 이를 통해 교환가치가 아닌 사용가치가 있는 생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전문적으로 보증되어 필요가 생겨나는 대로 이내 권리로 전환된다. 매번 권리를 법으로 제정하기 위해 전문가들이 정치적 압력을 행사할 때마다 새로운 상품과 직업이 생겨난다. 새로운 상품이 나오면 그전까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던 행위는 하찮은 것이 되어 버린다. 새로운 직업이 생겨나면 그동안 어딘가에 고용되지 않고도 해오던 일은 불법이 된다. (99쪽)
급여를 주는 직장에서 벗어나 일을 하는 사람은 무시당하거나 조롱거리가 된다. 인간의 자율적 행위는 고용수준을 위협하고, 사회적 일탈을 일으키며, 국민총생산을 떨어뜨린다. 따라서 그런 행위는 부적절하게 불리는 ‘노동’일 뿐이다. 노동은 더 이상 인간의 수고나 노력이 아니라, 공장에서 생산적 투자와 어울리지 않게 결합된 기괴한 요소를 의미한다. 무직은 자신과 이웃에게 의미 있는 일을 하기 위한 자유라기보다는 슬픈 게으름이 되었다.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키우고 동네일에 관여하는 활동적인 여성은 ‘노동’ 하는 여성과 차별된다. 이 ‘노동’하는 여성이 하는 일이 사회에 쓸모가 없거나 해를 끼치는지는 고려되지 않는다. (101쪽)
정반대의 길도 가능하다. 절망하던 노동자들이 대중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조직되어, 상품 생산으로 이어지는 활동을 벗어나 쓸모를 발휘하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강조하면, 우리 사회의 대안은 평범한 사람들이 전문가가 끼워 넣는 필요에 부딪힐 때마다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부정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104쪽)
[이반 일리치 연보]
1926년 9월 24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 아리아인 아버지와 유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951년(25세) 로마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같은 해,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밟기 위해 뉴욕으로 향했다. 뉴욕에 도착한 첫날, 할아버지의 친구들로부터 뉴욕에 급증하는 푸에르토리코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프랜시스 스펠먼 추기경에게 푸에르토리코인 정착지의 교회로 배치해주기를 청했다. 젊은 신부 일리치는 뉴욕 175번가 푸에르토리코 교구의 보좌신부로 임명되었다.
1960년(34세) 존 케네디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기 한 달 전, 보수적 정치 성향의 푸에르토리코 주교와 정치적 갈등에 휘말렸던 일리치는 ‘외교상 기피 인물'로 지목돼 뉴욕으로 송환되었다. 뉴욕으로 돌아온 후, 칠레에서 베네수엘라까지 5천 킬로미터를 걷고 말을 타며 여행했다.
미국 대통령이 된 케네디는 ‘진보를 위한 동맹Alliance for Progress'을 발표했고, 교황 요한 23세는 이를 지원하기 위해 북미 성직자의 10퍼센트를 라틴아메리카로 보낼 것을 명했다. 이 과정에서 평화봉사단Peace Corps이 창설되었다. 일리치는 개발의 시대를 전복하려는 목적으로 멕시코 쿠에르나바카에 국제문화자료센터(Center of Intercultural Formation)를 설립했다. 그는 ‘개발’이 미국 중산층 생활문화를 제3세계에 강요하는 일이며 모두를 가난한 생존에 빠뜨릴 것이라고 예견했다.
1966년(40세) ClF를 발전시켜 쿠에르나바카에 문화교류문헌자료센터(Center for Intercultural Documentation)를 설립했다. 브라질 페트로폴리스에는 <페다고지>로 유명한 교육사상가 파울로 프레이리와 함께 이 센터를 설립했다. 1970년대 중반 CIDOC는 명실상부하게 ‘대안대학’, ‘자유대학’의 위상을 갖게 되었다.
1971년(45세) <학교 없는사회 Deschooling Society>를 출간했다.
1973년(47세) 도구가 인간을 지배하는 시대를 비판하며, 인간성의 회복을 위해 도구의 성장에 한계를 부여해야 한다는 <공생을 위한 도구 Tools for Conviviality>를 출간했다.
1974년(48세) <에너지와 형평성 Energy and Equity>을 출간했다.
1975년(49세) <의학의 응보 Medical Nemesis>를 출간했다.
1977년(51세) <인간을 불구로 만드는 전문가들 Disabling Professions>을 출간했다.
1978년(52세)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와 <필요의 역사를 향하여 Toward a History of Needs>를 출간했다.
1981년(55세) 칼 폴라니의 경제사 연구에 영향을 받아 ‘희소성’ 개념의 역사 탐구를 시작했고, 그 초안이 되는 다섯 편의 글을 묶어 <그림자 노동 Shadow Work>을 출간했다.
1992년(66세) 1978년부터 1990년까지 연설문을 묶어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In the Mirror of the Past>를 출간했다. 이 책은 그의 사상 전체를 엿볼 수 있는 저서로 평가되고 있다.
2002년(76세) 12월 2일, 독일 브레멘에서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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