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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주 라투슈, '낭비 사회를 넘어서'

딸기21 2015. 1. 13. 18:52

낭비 사회를 넘어서 - 계획적 진부화라는 광기에 관한 보고서

세르주 라투슈. 정기헌 옮김. 민음사



학창 시절 나는 여느 경제학도들처럼 기술적 진부화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다. 그러나 고의로 기계 속에 결함을 삽입하는 ‘계획적’ 진부화라든지, 광고와 유행에 의해 너무 이른 시기에 제품이 구식이 되어 버리는 ‘상징적’ 진부화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미국의 경제학자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의 <풍요한 사회 (The Affluent Society)>(l958)가 성공을 거두면서 미국 지식인 사회에서 계획적 진부화 논쟁이 촉발되었고, 그 여파는 서서히 유럽 지식인 사회로 확산되었다. (12쪽)


20세기에 진입하면서 현대식 가전 기기들이 구식 아궁이와 굴뚝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진부화(obsolescence)’라는 말이 등장한 것은 바로 이때다. 소스타인 베블런은 <유한계급론(The Theory of the Leisure Class)>(l899)에서 이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

진부화는 크게 기술적 진부화, 심리적 진부화, 계획적 진부화로 구분할 수 있다. 기술적 진부화란 이런저런 개선을 가져오는 기술적 진보 때문에 기계와 설비가 구식으로 전락하는 것을 말한다. 산업혁명이 도래하기 전까지 이런 변화는 수천 년에 걸쳐 서서히 이루어졌다. 본래적 의미의 진부화 현상이 일상화된 것은 모더니티에 의해, 슘페터 식으로 말하면 “창조적 혁신의 열풍”에 의해서다.

심리적 진부화는 기술적 낙후, 실재적인 혁신의 도입 등에 의하지 않고 ‘은밀한 설득’, 즉 광고와 유행에 의해 제품을 구식으로 만들어 버리는 방식이다. 이 경우 예전 제품과 새 제품의 차이는 외양과 디자인의 차이, 심지어는 포장의 차이에 불과하다.

마지막으로 계획적 진부화는 인위적으로 수명을 단축하거나 결함을 삽입하는 방식을 말한다. 계획적 진부화는 미국에서 발명되어 처음에는 ‘미국식 생활 방식’과 함께, 나중에는 세계화를 통해 나머지 다른 지역 전체로 확산되었다. (34~35쪽) 


마음 놓고 제품의 수명을 체계적으로 단축할 수 있으려면 독점 상황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 혹은 담합을 통해 카르텔과 같은 독점적 형태를 만들어 내야 한다.

첫번째 예는 애플의 아이팟이다. 제조 단계에서부터 이미 수명이 18개월로 제한된 아이팟의 배터리는 수리가 불가능한 구조로 되어 있다. 두 번째 예는 푀부스 사건과 ‘1000시간 위원회’다. 1881년 에디슨이 만든 최초의 전구는 수명이 1500시간에 달했다. 1920년대 생산된 전구의 평균 수명은 2500시간이었다. 1924년 12월 제너럴 일렉트릭사를 포함한 전구 제조업체 관계자들은 제네바에 모여 전구 수명을 결정하는 회의를 열었다. 이른바 ‘푀부스 카르텔’이 탄생한 것이다. 회의 결과 전구의 수명을 1000시간 이하로 제한하자는 목표가 정해졌고, ‘1000시간 위원회’의 감시 덕분에 1940년대에 이르러 그 목표가 달성되었다. (42쪽)


진부화가 계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최초의 ‘일회용’ 제품이 둥장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제품 수명 단축의 논리가 산업 생산 전체를 지배하게 된 것도 이때부터다. 이 정복 과정은 다섯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개인 용품 분야에서 최초의 일회용 제품 등장, ‘디트로이트 모델’의 탄생, 본래적 의미의 계획적 진부화의 발전, 유통기한의 도래 혹은 ‘새로운 일회용 제품’의 성공, 음식의 진부화가 그것이다. (59쪽)


1923년 앨프리드 슬론은 포드사의 모델 T의 아성에 도전장을 내민다. 그는 자사의 기술력이 포드사를 능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대신 그에게는 뛰어난 마케팅 능력이 있었다. 제너럴모터스사는 매년 신모델을 출시하고 미국인들이 3년에 한 번씩 차를 바꾸도록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3년은 고객들이 타고 다니는 차의 할부 빚을 모두 갚는 데 걸리는 기간이었다. 전투는 치열했다. (운전하기 불편해도 튼튼하고 디자인도 단조로운 검은색 차만을 고집했던) 포드는 격렬히 저항했지만 몇 차례의 패배를 경험한 끝에 1932년 결국 경쟁사의 전략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63쪽)


음식의 진부화는 최근의 현상이다. 전체 식료품의 30퍼센트에서 50퍼센트는 유통기한이 지났다는 이유로 판매되기도 전에 폐기 처분되거나 소비자들에 의해 쓰레기통에 버려진다. 매년 과일과 야채 재고를 한꺼번에 폐기해 버리는 일이 반복해서 벌어지고 있다.

생산성 우선주의에 따라 농산물이 체계적으로 과잉 생산되는 것에서부터 문제가 시작된다. 한편에는 농업 비즈니스(agrobusiness, 종자 회사, 농화학 단지, 농산물 가공 산업)와 대형 유통망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관료주의적 위생 법규들이 있다. 식품 안전을 담당하는 관청들은 농산업 분야 로비스트들과 손을 잡고 필요 이상으로 엄격한 법규와 지나치게 짧은 유통 기한을 부과함으로써(하지만 이것만으로 식품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생산과 판매를 촉진한다. (72쪽)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는 모두 계획적 진부화 현상을 경험하고 있다. 성장에 중독된 우리의 생산 시스템이 계획적 진부화의 출발점이다.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끊임없이 더 많이 생산하고 소비하도록 강요받는다. 성장이 느려지거나 멈추면 곧바로 위기가 찾아오고 모두들 패닉 상태에 빠진다. 이 필연성 때문에, 막스 베버의 유명한 표현을 빌리면, 성장은 ‘철 코르셋’이 되어 버린다.

소비 사회는 성장 사회의 종착점이다. 성장 사회는 성장 경제가 지배하는 사회, 성장이 모든 것을 흡수해 버리는 사회로 정의할 수 있다. 즉 성장을 위한 성장이 경제와 삶의 우선적인 목표, 심지어는 유일한 목표가 되어 버린다. 분명한 필요를 위해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하기 위해 성장하는 것이다. (16쪽)


광고, 소비 금융, 계획적 진부화. 이 세 가지는 소비 사회가 악순환을 지속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인이다. 광고는 소비하고자 하는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소비 금융은 그 수단을 제공해 주며, 계획적 진부화는 소비자의 필요를 갱신한다. 이런 성장 사회의 작동 원리는 갈수록 빠른 속도로 생태계를 파괴하는 치명적인 위협 요소가 된다. (23쪽)

계획적 진부화야말로 성장 사회를 이끌어 가는 소비주의의 절대적 무기다. 우리는 광고를 거부하고 대출을 거절할 수는 있지만 제품의 기술적 결함 앞에서는 대부분 속수무책이 된다. (31쪽)


계획적 진부화가 진행되면서 윤리 자체도 진부화하고 있다. 모든 것은 판매 가능한 것이 되는 동시에 가치 하락을 겪는다. 시간은 붕괴되고 한시성(限時性)이 승리를 거두었다. 주택들은 감가상각 기간에 맞춰 지어진다. 우리는 더 이상 미학적 세계 속에서 성당을 짓지 않는다.

‘일회용’ 제품이 갈수록 빠른 속도로 확산되면서 상품은 쓰레기로 버려지고, 인간은 소외되거나 사용 후 해고된다. 실업자, 노숙자, 부랑자 그 외 각종 ‘인간쓰레기’에서부터 최고 경영자와 관리자들까지 예외는 없다. 윌리엄 모리스는 이런 현상을 예견했다. “모조품의 사회는 계속해서 당신을 기계처럼 사용하고, 기계처럼 연료를 공급하고, 기계처럼 감시하고, 기계처럼 일만 하도록 만들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되면 고장난 기계처럼 내다 버릴 것이다." (86쪽)


덴마크의 칼룬보르 산업 단지는 ‘모범적인 산업 생태계’로 손꼽힌다. 이곳에서는 분해자(곰팡이나 세균 둥)가 다른 동식물의 노폐물이나 시체에서 영양분을 흡수하는 자연 생태계에서처럼, 한 기업이 내보내는 부산물이나 폐기물이 다른 기업에게 원료 구실을 한다. 예를 들면 정제 공장은 화력 발전소에서 유실된 열을 사용하고, 석유에서 추출한 황을 화학 회사에 되판다. 화학 회사는 칼슐 황산염을 벽 패널 제조업체에 공급하고, 발전소에서 추가적으로 발생하는 증기는 수경 재배 회사와 주택 온실의 물을 가열하는데 사용된다.

그러나 설사 이런 전략들이 기업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채택된다 하더라도 이 ‘성공 스토리’가 일반화되는 것이 가능할까? 기술 혁신이나 단순한 투자 전환을 통해 별 노력도 고통도 지불하지 않고, 더욱이 부를 늘려 가면서 생산주의적 산업시스템과 자연적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신화에 불과하다. 성장 반대론자들은 이런 신화를 믿지 않는다. (104쪽)


인류에게 미래가 존재하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탈성장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탈성장의 실험을 위해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는 장비의 사용을 줄여야 하는 건 사실이지만, 우리를 비판하는 이들이 흔히 말하듯 촛불을 사용하던 시대로 되돌아가거나 금욕주의적 고행을 실천하자는 말은 아니다.

오스트리아 철학자 이반 일리히, 그리고 그 전에 마하트마 간디가 제안했듯이, 환경을 파괴하는 상품을 보이콧하고 ‘기술적 금욕’을 실천하는 것은 모든 종류의 편리함을 거부하고 기술을 혐오하는 태도와 다르다. 겸약과 자기 통제(autolimitation)의 선택은 마조히즘이나 희생정신이 아니라 소비주의적 양식, 기술 과학과 시장이 결합된 독재 체제를 거부하면서 최소한의 자율성을 확보하려는 의지다. 우리가 지나친 물질적 안락을 포기할 수 있다면 이는 창조성의 해방, 공생의 재발견, 존엄적 삶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10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