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취임한 중미 코스타리카의 루이스 기예르모 솔리스 대통령(56)은 지난달 25일 이색 포고령에 서명했다. 자신의 이름을 교량이나 도로, 건물 등 모든 정부 시설에 새기지 못하게 하는 포고령이다.
한국도 마찬가지이지만, 코스타리카에서도 대통령이 바뀌면 새로 짓는 다리나 건물에 동판으로 대통령 이름을 새기고 관공서에 대통령 사진을 내거는 것이 ‘관행’이었다. 솔리스 대통령은 “공공 시설을 만든 것은 나라이지 정부나 특정 공무원이 아니다”라면서 이를 금지시켰다. 뿐만 아니라 관공서에 대통령의 사진을 거는 것도 하지 말라는 지시를 전국에 내려보냈다고 티코타임스 등 현지 언론들은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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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리스는 지난 3월 대선 결선에서 중도좌파 시민행동당(PAC) 대표로 출마해 당선됐다. 저술가이자 외교학자였던 솔리스는 출마 때만 해도 정치적으로는 무명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의 인기가 워낙 치솟자 결선투표를 앞두고 경쟁후보가 사퇴를 해버렸고, 솔리스는 ‘단일 후보 결선’이라는 이례적인 절차를 거쳐 대통령이 됐다. “대통령을 숭배하는 시대는 지나갔다”는 그의 일성은 그래서 더욱 신선하게 들렸다.
‘축구 돌풍’ 코스타리카의 저력
올해 브라질 월드컵에서 중미의 작은 나라 코스타리카는 역사상 첫 8강 진출에 성공하며 돌풍을 일으켰다. 다른 중남미 국가들과는 달리 유명 리그에서 뛰는 선수 한 명 없는 코스타리카 축구대표팀의 이런 성공은 전세계 축구팬들의 엄청난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잘 알려지지 않은 이 나라에 세계의 이목이 쏠렸다.
대표팀 코치 중의 한 명이 지난 1일 독일 dpa통신과 인터뷰를 했다. 국가대표팀 코치 루이스 가벨로 코네호는 이 인터뷰에서 승리의 비결은 “교육 덕분”이라고 말했다. 학문적인 기초가 갖춰진 사람이 어려움을 이겨내고 스트레스를 스스로 조절하며 책임있게 임무를 다 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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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코스타리카 대표팀 선수의 95%는 대학 재학 이상의 학력을 가졌다. 호르헤 루이스 핀토 감독은 대표팀 선수들을 아예 ‘학생들’이라 지칭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학생들’이 ‘시험’도 치르기 전에 해답을 제시하는 능력이 있다며 치하했다. 솔리스 대통령이 정권을 잡은 뒤 투명성 강화와 사회정의를 내세우면서 가장 먼저 한 일도 솔리스는 교사들 임금체계를 효율화하고, 평생교육을 목표로 한 ‘사회학습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었다.
코스타리카는 면적이 5만1100㎢로 한국의 절반만하고, 인구도 475만명에 불과한 작은 나라다. 북쪽으로는 니카라과, 남동쪽으로는 파나마, 남쪽으로는 에콰도르, 서쪽으로는 태평양에 면해 있다. 동쪽은 카리브해다. 스페인이나 미국 등의 지배를 받았지만 1820년대 이후로 계속 독립을 유지해왔다.
라틴아메리카에서 극히 드물게 이 나라에서는 쿠데타도, 군사독재정권도, 내전도, 잔혹한 학살이나 인권침해도 없었다. 이 나라에는 군대가 없기 때문이다. 코스타리카는 1949년 헌법에서 중립을 선포하고 군대를 해산했다. 중립국의 대명사처럼 돼 있는 스위스는 12만명의 병력을 갖고 있지만 코스타리카는 아예 병력을 보유하지 않고 있다.
군대 없는 중립국, 행복지수는 세계 최고
이 나라에 대한 이런저런 평가들은 눈부시다. 영국의 민간단체인 신경제재단(NEF)이 선정하는 ‘행복한 행성 지수(HPI)’에서 코스타리카는 2012년 1위를 차지했다. 앞서 2009년에는 같은 재단이 선정한 ‘가장 푸르른 나라’ 순위에서 역시 선두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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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코스타리카는 경제적으로는 중간수준에 불과하다. 지난해 구매력 기준 실질 국내총생산(GDP)은 1인당 1만2900달러로 세계 102위에 그쳤다. 하지만 세계 금융위기 이후에도 2010~12년 연평균 4.5%씩 성장했다. 카리브해 나라들 대부분이 미국 등에 이주한 노동자들로부터 송금받는 ‘송금경제’ 국가들인 것과 달리 코스타리카는 송금액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낮다. 정치적으로 안정돼 있기 때문에 니카라과나 콜롬비아의 난민과 이주노동자들이 많이 몰려가는 나라이기도 하다. 40만~60만명에 이르는 니카라과 노동자들이 코스타리카에 들어가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마이크로칩 산업 등을 최근 키우고는 있지만, 이 나라의 성장전략을 특징짓는 것은 ‘지속가능성’이다. 지속가능성은 이 나라에 대한 소개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단어이기도 하다. 코스타리카는 바나나, 커피, 사탕수수 등을 수출하는 전형적인 열대 농업국가였다. 하지만 일찌감치 생물다양성을 최대 자산 삼아 친환경 관광과 지속가능한 성장전략에 올인하면서 코스타리카의 도전이 시작됐다. 코스타리카의 면적은 지구 전체 땅의 0.25%에 불과하지만 세계 생물종의 5% 가량이 여기 살고 있다.
국토의 25%가 국립공원이나 보호구역으로 묶여 있다는 점에서도 이 나라는 특별하다. 자연보호구역의 비중으로 보면 세계 1위다. 코르도바도 국립공원에는 맥(tapir)과 흰머리카푸친(꼬리감는원숭이), 다람쥐원숭이 등 희귀종들이 서식하고 있다. 토르투게로 국립공원은 이름 자체가 ‘거북이가 가득한 곳’이라는 뜻이다. 몬테베르데 클라우드 삼림보호구역은 풀과 나무와 새들의 낙원으로 유명하다.
민간 토지도 환경보호에서는 예외가 될 수 없다. 땅 주인이 숲을 보호하고 강물을 깨끗이 관리하면 정부가 보상을 해준다. 아마존이나 보르네오를 휩쓰는 삼림파괴의 위험을 완전히 비껴갈 수는 없었지만, 벌목 광풍에는 제동을 걸 수 있었다. 2005년 이 나라는 ‘더 이상 숲을 잃지 않는 나라’가 됐다.
지속가능성에 국운을 걸다
미국 뉴욕타임스의 유명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2009년에 경제활동이 생태계에 미치는 비용을 꼼꼼히 따져 개발과 환경의 공존을 추구하고 있는 코스타리카를 21세기형 경제성장의 모델로 꼽은 바 있다.
코스타리카는 이미 1990년대부터 산업활동에 환경파괴의 비용을 매기는 경제시스템을 갖추려는 노력을 해왔다. 환경을 희생시키면서 GDP를 끌어올리는 게 아니라, 환경파괴가 불러올 사회적 비용까지 계산해서 경제를 평가하는 것이다. 지구 남반구의 뉴스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IPS통신은 지난 2일 보호구역들을 돌며 ‘악당들’을 잡아내는 환경행정법원(TAA) 단속관들의 활동을 소개했다. 1995년 신설된 TAA의 전문가들은 국토 전역을 돌아다니며 환경파괴 범죄를 단속한다. 1997년에는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모든 경제활동에 3.5%의 탄소세를 매기기 시작했다. 거둬들인 돈은 환경파괴의 희생양이 될 우려가 큰 빈민들을 위해 쓴다.
환경 담당부서가 경제·산업 부서에 밀리는 다른 나라들과 달리, 코스타리카에서는 환경부의 힘이 가장 세다. 환경부가 에너지·광업·수자원 등과 관련된 행정을 총괄하기 때문이다. 2004년 동부 해안에서 유전을 발견해놓고도 정부는 석유채굴을 금지시켰다. 그 대신 재생가능에너지 개발에 투자, 전체 에너지 소비량의 95%를 재생가능에너지에서 얻는 나라가 됐다. 재생가능에너지 사용 비율 또한 세계 1위다.
2007년 코스타리카 정부는 “2021년까지 세계 최초의 탄소중립국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탄소배출량을 최소화하고, 탄소를 내보내는 양만큼 흡수하도록 삼림을 늘려 기후변화에 미치는 영향을 모두 상쇄시키겠다는 것이다. 월드컵 돌풍보다 훨씬 중요한 코스타리카의 이런 도전에 세계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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