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사진부터 보시죠.
딱 보면 그냥 천막집이죠. 이런 집 같지도 않은 집을 지은 공로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상을 받은 건축가가 있다면?
세상에서 집이 가장 필요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집이 없는 사람이겠지요. 부동산 등기부의 내 집이 없는 사람들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당장 몸 누일 곳 없는 사람, 거대한 힘에 밀려 터전을 잃은 사람들을 말하는 겁니다. 르완다의 난민들, 지진으로 판잣집마저 다 무너져버린 아이티의 이재민들, 터키와 인도와 일본에서 지진으로 집을 잃은 사람들.
‘건축가’는 좋은 집, 비싼 빌딩을 설계하는 사람으로 생각되기 쉽지만 집이 가장 필요한 사람들, 재난을 당한 사람들에게 다가가 집을 지어주는 건축가도 있습니다. 일본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건축가 반 시게루(坂茂·56)가 그런 사람입니다.
도쿄 태생인 반은 미국 쿠퍼유니언건축대학 등에서 공부하며 미국의 유명 건축가 존 헤이덕에게 사사했다고 합니다. ‘집짓기’의 기본요소를 중시하는 헤이덕의 건축론을 물려받은 반은 자재를 그대로 노출시키거나 기존 공법에서 무시돼온 새로운 소재들로 기하학적인 디자인을 강조한 건물들을 지었다...고 위키피디아에 소개돼 있네요. 무엇보다 그를 특징짓는 것은 집짓기에 쓰일 수 없다 생각돼온 재료들로 부수고 다시 지을수 있는 건축물을 제작한 것입니다.
반 시게루
대표적인 예가 종이입니다. 그는 종이로 만든 자재가 생각보다 단단하며, 또한 세계 어디에서건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라는 점에 착안해 종이집 만들기를 시작했습니다. 이 종이집짓기가 각별한 의미를 띄는 것은 건축자재조차 구하기 힘든 곳에서 집을 짓기 위해 고르고 고른 것이었기 때문이겠지요.
2001년 인도 아흐메다바드의 이재민들을 위해 만든 종이튜브 임시주택은 얼핏 보면 통나무를 이어붙여 만든 집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집의 벽과 지붕을 이루는 것은 나무가 아니라 종이를 말아 만든 기둥들입니다. 일본계 미국인인 하버드대 토시코 모리 교수가 2002년 저서에서 썼듯, 반은 ‘비물질적인 초물질(Immaterial Ultrameterial)’을 통해 집이 가장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집을 만들어줬습니다.
과감한 소재 선택과 그의 인도주의적 관심사가 만난 것은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94년 르완다에서 내전이 일어나 수백만명이 목숨을 잃고 난민이 됐습니다. 반은 그 때 유엔난민기구(UNHCR)와 협력해 흔히 구할 수 있는 상자의 판지를 말아 만든 종이튜브로 임시 보호소를 만들었습니다.
1994년 르완다 내전 난민들이 반 시게루가 디자인한 종이튜브로 임시주택을 짓고 있습니다. /미국 하얏트재단 제공
무엇보다 재활용 종이로 집을 지으면 돈이 적게 드는데다, 가뜩이나 남벌이 심각한 지역에서 나무를 자르지 않아도 돼 친환경적이었습니다. 유엔난민기구는 반과 협력하기 전에는 주민들에게 집을 지을 알미늄 기둥과 플라스틱 판을 지급했습니다. 하지만 알미늄은 현지 시장에서 비싸게 유통됐기 때문에, 배고픈 난민들은 집을 짓는 대신 자재를 내다팔곤 했다고 합니다.
이듬해 일본 고베 대지진이 일어났습니다. 반은 종이튜브를 코팅해 방수기능을 더한 구호시설을 만들었습니다. 스펀지를 종이판지 사이에 끼운 패널을 만들고 맥주캔 운반용 플라스틱 판과 모래주머니로 건물을 지었습니다. 한 채에 20만엔도 들지 않았고 또 언제라도 필요없어지면 뜯어서 재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1995년 고베 대지진 때 반 시게루가 설계한 종이튜브 임시주택. /미국 하얏트재단 제공
반 시게루가 1995년 일본 고베에 만든 종이로 된 가톨릭교회 /미국 하얏트재단 제공
반은 다카토리 가톨릭교회라는 임시 성당도 지었는데 이 건물은 2005년 대만에 기증됐습니다. 1999년 터키, 2001년 인도 서부 구자라트 지진 때에도 그의 종이집이 활용됐습니다.
하지만 똑같은 종이집을 전 세계 어디에서나 활용하기엔 난점도 많았다고 합니다. 터키의 경우 종이튜브 집으로는 추위를 견뎌내기 힘들었으며 반대로 인도는 너무 덥고 습했습니다. 반은 여러 재질의 종이를 섞어 만든 튜브로 터키 임시주택의 보온성을 높이고, 인도에서는 쉽게 구할 수 있는 대나무로 바꿔 기후에 대응했습니다.
터키 지진 때 만든 종이튜브 집의 내부. /미국 하얏트재단 제공
인도 서부 구자라트주 부지에서 2001년 지진이 났을 때 반 시게루가 만든 종이튜브 임시주택. /미국 하얏트재단 제
22만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2010년 아이티 지진이 일어나자, 반은 곧바로 카리브해로 날아갔습니다. 건축가로서뿐만 아니라 구호활동가로서 그의 능력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먼저 이웃한 도미니카공화국을 방문해 건축학 전공자들과 학생들을 조직한 뒤 아이티의 포르토프랭스에서 이재민들과 함께 방수처리된 이동식 가옥을 지었습니다. 미국 하버드대 건축학대학원 등 반과 연결된 네트워크가 총동원돼 아이티 이재민 보호소 짓기에 나섰습니다. 바로 맨 위에 올려놓은 천막집 사진입니다.
이탈리아 라퀼라의 종이로 만든 음악당. 2009년 지진을 겪은 라퀼라에 2011년 만든 건물. /미국 하얏트재단 제공
반은 도쿄 근교의 타마미술대학, 요코하마국립대학 등에서 건축학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자원건축가네트워크(VAN)라는 비영리단체를 만들어 건축과 사회를 연결하는 작업을 해왔습니다. 물론 그가 이재민용 임시주택만 만든 것은 아닙니다. 2010년에는 프랑스 메츠에 퐁피두-메츠 센터라 이름붙여진 현대미술관을 지었고, 카리브해의 턱스앤케이코스 섬에 있는 고급 리조트의 빌라를 설계하기도 했습니다.
나가노의 '벽 없는 집'. 근사하네요. /미국 하얏트재단 제공
미국 뉴욕의 메탈 셔터하우스. /미국 하얏트재단 제공
프랑스 메츠의 현대미술관, 퐁피두-메츠 센터. /미국 하얏트재단 제공
2000년 독일 하노버 국제박람회 때에는 이동식 컨테이너로 만든 일본관을 선보였습니다. 한국에도 그가 디자인한 골프클럽하우스가 있습니다. 이런 작업들로 그는 일본의 젊은 건축가상(1997년), 프랑스 건축아카데미상(2004년), 마이니치디자인상(2012년) 등을 휩쓸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큰 상은 아무래도 24일 발표된 프리츠커상이겠지요.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의 올해 수상자로 반이 선정됐습니다. 이 상을 주관하는 미국 시카고의 하얏트 재단은 홈페이지를 통해 “개인 고객을 위한 우아하고 혁신적인 디자인을 인도주의적 노력으로 확대해온 인물”이라며 “그는 세계의 재난지역에서 현지 주민들, 자원활동가들, 학생들과 함께 저렴하고 재활용 가능한 집과 공동시설을 만들어 피해자들을 도왔다”고 선정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이 재단은 지난해에는 일본 건축가 이토 도요오에게 상을 줬습니다. 이토 역시 동일본 대지진 때 피해를 입은 일본 센다이 주민들을 위한 공동주택 등을 만들어 공공건축의 의미를 살린 사람이었지요. 프리츠커상을 2년 연속 받은 일본 건축계의 저력도 대단하지만(사실 '2연패' 따위의 말을 붙이기도 뭣한 게, 이번이 일본 건축가로선 7번째 상입니다), 재난 현장에서 ‘집’의 의미를 되살린 ‘사회적 건축가’들에게 상이 돌아갔다는 점이 눈길을 끕니다.
프랑스 파리에 체류중인 반은 선정 소식을 들은 뒤 “영광스런 상을 받는 만큼 더욱 주의깊게 내가 집을 지어주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재난구호작업을 하려 한다”며 “지금까지 해온 일을 계속하면서 또한 커나가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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