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카이로 시내 전철역에는 여성의 하이힐과 찰랑거리는 스커트가 차량 문에 낄수 있다고 경고하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하지만 포스터 속 여성과 같은 옷차림을 한 사람은 사실 아무도 없다. 10년 전만 해도 히자브(머리쓰개)를 두른 여성이 더 적었지만 요즘에는 히자브를 쓰지 않은 여성을 찾기 힘들다. 심지어 두 눈만 빼고 온몸을 검은 천으로 두른 ‘니카브’ 차림의 여성들도 적잖게 보인다. 전철의 ‘여성전용칸’을 뺀 나머지 칸에는 여성승객 자체가 거의 없다.
카이로 시내의 '얼굴 가린 여성들'
정치불안, 경제문제와 함께 시민혁명 후 이집트의 발목을 잡는 결정적 변수가 있다면 ‘이슬람주의’다. 카이로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슬람주의와 무슬림형제단에 반대한다고 말하고, 형제단이 내세운 정치인인 무함마드 무르시가 대통령 자리에서 쫓겨난 게 당연하다고 한다. 국외에서는 무르시 축출을 쿠데타라 부르지만 무르시를 싫어하는 이집트 국민들은 그렇게 보지 않는 것 같았다. 호스니 무바라크를 축출한 시민혁명에 이어, ‘제2의 혁명’을 일으켜 무르시도 쫓아낸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어떤 이들은 3년전의 ‘아랍의 봄’과 구분지어 지난해 6월의 무르시 반대시위를 ‘6월혁명’이라 불렀다.
쿠데타로 축출된 무함마드 무르시 전 이집트 대통령의 반대자가 지난 1일 무르시 재판이 열린 수도 카이로 국립경찰학교 임시법정 외곽 철조망 앞에서 무슬림형제단 반대 포스터가 그려진 현수막을 들고 서 있다. AP
이집트 최대 관영언론인 알아흐람신문을 찾아가 10일(현지시간) 국제정치저널 편집장 아부 바크르 알 데수키(42)를 만났다. 그는 “이집트에서 이슬람주의 집단은 실패했다”고 말했다. 형제단이 정권을 잡았을 때 기회를 얻었는데 이후 국민들과 소통하길 거부했고, 이집트 내의 다양한 종교적 스펙트럼을 무시한 채 ‘자신들만의 이상’을 강요하려다 실패한 것이라고 단정했다.
이집트 인구의 90%는 무슬림이지만 나머지 10%는 콥트교 등 기독교도다. 사실상 군부와 정권의 대변지인 아흐람 기자답게, 아부 바크르는 형제단 축출을 강력 옹호했다. “기독교도들에게는 종교와 생활양식의 자유를 주고, 모든 이들이 민법 아래에서 평등해야 한다. 형제단은 잘못을 했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쫓겨난 것이지 군에 의해 쫓겨난 게 아니다.”
"형제단은 잘못을 했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쫓겨난 것"
이슬람주의자들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지난해 7월 ‘라바아학살’이라 불리는 참사가 벌어졌지만 아부 바크르는 “사고로 죽든 시위에서 죽은 모든 죽음은 다 안타까운 것 아니냐”며 대수롭잖다는 반응을 보였다. 군부가 형제단을 불법화하고 잡아가뒀는데도 그는 “죄 지은 자들이 체포된 것이지 대부분의 형제단 멤버들은 일상으로 돌아가 잘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자유주의 성향의 학자들과 정치활동가들을 매개로 ‘형제단과 이집트 국민들을 화해시키는’ 정치적 절차가 진행중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대통령을 지낸 무르시를 법정에 세워 사형판결 가능성을 운운하고 대량살상까지 저지른 마당에, ‘정치적 화해’는 빈 소리로 들렸다.
이슬람주의를 억눌러야 한다는 명분으로 군부가 돌아오면서 시민혁명은 굴절되고 왜곡됐다. 군부는 대량살상을 불사하더라도 이집트에서 이슬람주의를 억누르는 것이 목적임을 분명히 보여줬고, 국민들도 그 필요성을 인정하는 듯했다. 문제는 군부 회귀로 이슬람주의를 없애는 게 가능하냐다.
독재정권 무너지자 이슬람주의 부흥
이슬람주의는 종교의 원리를 정치에서도 구현하고자 하는 정치운동이다. 종교로서의 이슬람과는 명백히 다르다. 이집트의 무바라크,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등 아랍권 독재자들은 모두 ‘세속주의’를 옹호하며 이슬람주의가 발흥하지 못하게 내리눌렀다. 그런데 이 독재정권들은 모두 무너졌거나, 무너지고 있다. 그 후 힘의 공백을 비집고 들어간 것이 조직력과 자금력을 갖춘 이슬람주의 조직들이었다. 특히 이집트의 무슬림형제단은 이슬람주의의 원조격이며 역사가 깊다. 1920년대에 창설돼 가말 압둘 나세르 시절부터 수십년간 탄압받았지만 살아남았다.
무바라크 시절 이들은 ‘마흐줌(금지된 집단)’이라 불렸다. 당시에도 형제단 이름으로 정치활동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나, 그 대신 다른 정당이나 정치조직의 이름을 빌려 활동하곤 했다. 2005년 형식적으로나마 의회선거가 실시되자 의석 4분의 1을 형제단과 이슬람주의자들이 차지했다. 무바라크는 ‘탄위르(계몽) 운동’이라는 걸 벌여 국민들을 이슬람주의에서 떼어놓으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원인은 종교 자체가 아니라, 정부의 정치적·경제적 실패에 있었다. 형제단은 가난한 시골주민들을 돕고 빈민구제활동을 하고 공동체를 되살리는 운동을 해 주민들을 파고들었다.
정권 잡은 형제단의 '무리수', 반발 불러
혁명 뒤 정권을 잡고 승리감에 도취한 형제단은 시대를 몇 세기 전으로 되돌리려는 무리수를 뒀다. 예언자 무함마드가 6살의 후처를 들인 걸 들며 “6세 여아도 결혼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치는 등, 국민들의 상식에 어긋나는 행태를 보였다고 한다. 민주주의를 외치며 거리로 나왔던 국민들은 혁명의 성과를 가로채고 정치권력을 가져가버린 형제단 정권에 등을 돌렸다. 그러나 대다수 국민들이 이슬람주의와 거리를 둔다고는 해도, 정치에 대한 환멸과 좌절이 반복되면서 종교로의 회귀와 사회 전반의 보수화가 심해진 것은 사실이다.
야권성향 언론인 알마스르 신문기자 무함마드(가명)는 “같은 무슬림끼리조차 상대의 신앙심이 불충분하다며 낙인찍어 단죄하는 ‘타크피르(낙인) 살인’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팔레스타인과 맟닿은 시나이반도에서는 지하드를 내세운 극단조직이 기승을 부린다. 형제단 축출 뒤 이집트의 여러 곳에서 테러가 일어나고 있다. 미국 등 서방은 이집트의 민주화가 후퇴하더라도 군부가 이슬람주의를 막아주길 기대하고 있다. 힘겹게 싹을 틔운 민주주의는 ‘이슬람주의와의 싸움’에 자리를 내줘야 할 처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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