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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의 봄’ 3년, 이집트 카이로는 지금] 썰렁한 광장, 더 이상 ‘혁명’은 없었다

딸기21 2014. 2. 10.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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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복경찰, 탱크, 일상 속에 숨은 공포. 이집트의 군사독재 정권이 쫓겨난지 곧 3년이 된다. 하지만 ‘아랍의 봄’의 중심지였던 카이로의 타흐리르(해방) 광장에 더이상 ‘혁명’은 없었다. 시민혁명의 열기는 침잠하고, 오래된 군사정권이 더 무섭고 새로운 군사정권으로 대체되는 데 대한 두려움과 무력감이 모래먼지처럼 사람들을 덮고 있는 듯했다.


'혁명'을 빼앗아간 군부 쿠데타


독재자 호스니 무바라크 축출 3주년(11일)을 사흘 앞둔 8일(현지시간), 수십만명이 모여 ‘타도 무바라크’를 외쳤던 타흐리르는 조용했다. 최근 몇달 새 이곳은 카이로에서 ‘가장 조용한 곳’이 돼버렸다. 지난해 6월 이 곳에서는 이슬람 정치조직 ‘무슬림형제단’ 출신인 무함마드 무르시 대통령 퇴진 요구 시위가 일어났다. 


곧이어 군부가 나서서 무르시를 축출하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시민의 목소리가 군부의 재등장으로 바꿔치기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군부는 쿠데타에 반발한 무르시 지지자들의 시위를 무력진압했다. 1300명 가량이 목숨을 잃은, 현대 이집트 정치사의 최악 참사였다. 아랍의 봄은 그렇게 겨울로 바뀌었다.


정치 일정만 있으면 광장 막아


이후 군부는 타흐리르에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을 막고 있다. 시민혁명의 도화선이 된 시위가 일어난지 3년째 되는 날이던 지난달 25일에는 광장으로 이어지는 도로들을 모두 막고 장갑차로 에워쌌다. 살인 등의 혐의로 기소된 무르시의 재판이 있는 날에는 어김없이 광장이 봉쇄된다. 광장 한쪽에 있는 지하철역은 지난해 형제단 시위로 부서진 뒤 아예 복구를 하지 않은 채 철문을 닫아거렸다. 혁명이 가져다 준 것은 ‘무바라크역’이었던 어느 전철역 이름이 시위 희생자를 기리는 ‘쇼하다역’으로 바뀐 것말고는 없는 듯했다.

 


3년 전 ‘아랍의 봄’ 시위 당시 시민들과 진압군이 대치했던 이집트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 옆 무함마드 마흐무드 골목 벽에 8일 벽화가 그려져 있다. 아랍의 봄 시위 당시엔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을 풍자한 벽화가 그려졌지만 지금은 군부를 비꼬는 그림이 덧칠돼 있다. 카이로 _ 구정은 기자


시내에서 만난 이들은 하나같이 혁명이나 군부에 대한 이야기를 꺼렸다. 21세 청년 가말(가명)은 “무바라크 시절엔 내 나이가 어리기도 했지만, 무바라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별로 없다. 그런데 지금은 다들 무바라크 이야기를 한다. 난 형제단도 싫고 정치도 싫고, 혁명이 왜 일어났는지, 독재자가 뭘 말하는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혁명 이후로 “무질서만 늘었다”고 했다. 온갖 일로 거리에서 싸우는 사람들이 늘고 불안해졌다는 것이다. 


엘시시, '이집트의 구원자'?


3년전 시민들과 구체제 진압병력의 대치전선이 그어졌던 타흐리르 광장 옆 무함마드 마흐무드 골목은 벽화로 가득했다. 시민혁명 때는 무바라크를 풍자한 그림이, 지난해 여름에는 무르시와 형제단을 비판하는 그림이, 최근에는 군부를 비꼬는 그림이 덧칠되곤 한다. 하지만 이런 ‘소심한 저항’ 외에, 소리를 내어 군부를 비판하는 것은 목숨까지도 걸어야 하는 위험한 일이 돼버렸다. 


압델 파타 엘시시 국방장관이 이끄는 새로운 군사정권이 권력을 장악한 뒤 공포정치는 극에 달했다. 우상숭배와 같은 조짐마저 보인다. 거리에서는 새 군부지도자 엘시시의 얼굴을 담은 주민카드 모양의 기념품이 1파운드에 팔리고 있다. 기념품 속 그의 사진 옆에는 ‘이집트의 구원자’라는 아랍어가 쓰여 있다.


지난달 말 이집트 내무부의 고위 간부가 수도 카이로 시내에서 무장 괴한에 암살당했다. 치안을 맡고 있는 내무부는 이집트 현 군부정권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지만, 특수부장이던 무함마드 사이드는 암살 공격을 피하지 못해 카이로 서부의 자택 앞에서 총격을 받고 숨졌다. 무함마드 이브라힘 내무장관도 지난해 9월 카이로 시내에서 폭탄공격을 받은 바 있다. 이후 내무부 건물 앞은 장갑차와 군인들이 포진해 ‘전시 구역’을 방불케 한다. 예전 같았으면 주말을 맞아 삼삼오오 모여든 이들이 차를 마시고 있을 나일강변의 식당가 주변에도 지금은 수시로 장갑차가 나타나 공포분위기를 자아낸다.


시내 곳곳 공포 분위기, 장갑차와 군인들 포진


유학생 한새롬씨(29)는 3년전 아랍의 봄 때 이집트 친구들과 함께 타흐리르 시위에 참여했다. “그 때만 해도 희망이 넘쳤고, 축제같았다. 지금은 비관적이다. 적은 수라도 사람들이 모이면 바로 진압병력이 나타나 최루탄을 쏜다. 다시 군부가 등장했지만 3년 전 같은 시위는 다시 일어나기 힘들 것 같다.” 얼마전에는 신흥주택가인 마아디에서 소규모 시위가 벌어졌는데, 곧바로 사복경찰이 달려들고 복면에 총을 든 괴한들이 나타나 시위대를 에워쌌다. 한씨는 “카이로대학이 있는 기자 지역이나 노동운동의 중심지인 외곽의 헬완 같은 곳에서는 계속 충돌이 일어나고 있다”고 전했다.


‘엘시시는 이집트의 구원자’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에서 1파운드에 팔리고 있는 압델 파타 엘시시의 얼굴을 담은 기념품.


3년 전 혁명 뒤 치러진 대선에 무바라크 잔당 격인 구체제 정치인과 형제단 후보인 무르시가 출마하자 국민들은 어쩔수 없이 무르시에 표를 던졌다. 전적인 지지라기보다는 “한번 기회를 줘보자”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수십년 군부독재로 야당세력은 씨가 말랐고, 형제단 외에는 사실상 조직화된 정당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배반당한 혁명에 “무바라크 시절이 차라리 나았다”는 이들도


그러나 무르시는 집권 뒤 국민의 기대를 배반했다. 이슬람주의를 강화하고 형제단에 권력을 쥐어주는 데 급급했다. 국민들 사이에서 “무바라크 시절이 차라리 나았다”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잔존하는 무바라크 지지자들의 지원과 대다수 국민들의 침묵 속에 군부가 다시 등장했다. 지난해 7월초 무르시를 쫓아낸 뒤 군부는 착착 권력을 장악했다. 무르시정부 인사들을 잡아가두고, 구체제 때부터 적대적이었던 형제단을 강제해산하고, 지도부를 체포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지난달에는 이슬람주의 색채를 없앤 군부 주도의 새 헌법안을 만들어 국민투표로 통과시켰다. 이 투표에서는 비밀투표의 원칙조차 지켜지지 않았다고 했다. 한씨는 “투표소 위에 아파치 헬기가 떠다니는데 누가 자유롭게 투표했겠느냐”고 말했다. 

 

두 아이의 엄마인 아니스(가명)는 “무바라크 시절이 나았다는 사람들도 많기는 하지만 나는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무바라크에 뒤이어 쫓겨난 무르시에 대해서는 더 공감하지 못하는 듯했다. 선거로 당선됐다고는 하지만, 무르시는 자기네 지지자들만 규합해 대통령이 됐으니 이집트 국민을 이끌 대통령이라 할만한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니스는 “무르시는 어쨌든 대통령이 됐고 그 때 기회가 주어졌지만 자기 마음대로 이집트를 바꾸려 했다”고 비난했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은 무조건 피하라”


새 군부 지도자 엘시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는 지난해 무르시 축출을 전후해 다시 혼란이 벌어지자 “이집트에 엘시시같은 인물이 있다는 게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엘시시는 선거로 뽑힌 정권을 축출하고 그 과정에서 ‘학살’을 저질렀다. 아니스는 “이집트인의 손으로 이집트인들을 죽였으니, 그가 ‘좋은 사람’인지는 지금은 솔직히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아니스는 한국을 여행한 적이 있다. 그는 “내가 바라는 것은, 우리도 빨리 발전해서 한국처럼 잘 사는 나라가 되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주민들은 군부에 비판적인 이야기는 서로 입밖에 내놓기 힘든 듯했다. 시내에서 만난 한 일본계 이집트인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은 무조건 피하라”면서 “거리에서 카메라를 꺼내드는 것은 절대 안 된다”고 경고했다. 행여 군인이 찍힐 경우 폭행을 당하거나 체포·추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부에 반대하는 사람은 타흐리르 광장에 설 수 없지만, ‘어용 시위대’에게는 집회가 허용되곤 한다. 지난달 말 일군의 시위대가 무바라크와 엘시시의 사진들을 나란히 들고 타흐리르에 모여들었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무바라크 시절이 나았다고 믿는 이들, 무바라크 잔존 지지세력이 엘시시의 지지기반임을 보여주는 시위였다. 


어용 시위와 공안몰이


이런 관제 시위와 함께, 당국은 공안몰이로 반대세력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있다. 3년전 거리 시위를 이끌었던 대학생들 운동가들도 대거 체포됐다. 힘없는 군소 야당들 외에 이렇다할 정치세력은 애초부터 별로 없었거니와, 그나마도 군부의 통제로 거의 사라져버렸다. 해외에서 더 유명했던 야권 지도자 모하마드 엘바라데이 전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은 지난해 7월 군부의 형제단 시위대 학살 뒤 오스트리아로 출국했으며 “다시는 이집트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군부 언론탄압, 무바라크 때보다 더 혹독”


이집트 최대 민영 신문인 알마스르의 정치부기자 무함마드(가명)를 만났다. 그가 전해주는 공포정치의 실상은 예상보다 훨씬 심했다. 그는 “형제단의 정치적 실패로 군이 다시 정치에 들어올 기회가 생겼고, 군은 그 틈을 타 옛 시스템을 모두 복원시켰다”고 말했다. 반년 새 도지사, 장관, 군수까지 모든 행정기구는 군부 인사들로 다시 바뀌었다. 군부에 대한 비판은 신문과 방송에서 사라졌다. 비판적 언론인 야르무크TV 채널은 전파방해 때문에 거의 화면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주민들은 당국의 전파방해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믿는다.

 

신문을 찍는 윤전기 옆에는 날마다 군사검열관이 서있다가 현 정부나 군에 비판적인 기사를 걸러낸다. “검열관이 기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다시 쓰라’고 한다. 그러면 다시 쓰는 수밖에 없다. 다시 쓰지 않으면….” 기자들이 거부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냐고 묻자, 그는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지금까지 외국인과 이집트인 기자 50명 이상이 체포됐다. 당국은 알자지라 기자 8명을 포함해 20여명이 테러단체로 규정된 형제단과 음모를 꾸몄다고 기소했다. 이 문제로 알자자리와 이집트 측이 마찰을 빚고 있고, 유엔 인권담당 관리들도 누차 이집트의 언론탄압에 대해 비판한 바 있다.

 

‘다시 쓰라’ 검열, 여기자 성폭행 협박도


무함마드 기자는 “군부에 우호적이지 않은 기사를 쓴 여기자들에게 경찰이 ‘가둬놓고 성폭행하겠다’는 협박을 한 일도 있었다”고 전했다. 군인들이 시위현장을 찍으려는 기자들의 카메라를 빼앗아 부수는 일은 다반사다. 그는 “지금 무바라크 시절보다도 더 혹독한 감시가 펼쳐지고 있다”면서 “아마도 1950년대 (가말 압둘) 나세르 집권 초기의 계엄치하와 비슷할 것”이라고 말했다. ‘군사검열관’의 경우도 나세르 시절 만들어졌다가 뒤에 사라진 제도인데, 지금 부활했다는 것이다.

 

언론만이 아니라 시민의 일상도 통제된다. 유학생 한씨가 외국인 친구들과 함께 사는 아파트에 얼마전 경찰이 들이닥쳐 ‘수상한 점’이 없는지 조사하고 갔다. 한씨는 “아마 이웃에서 ‘수상한 외국인들이 산다’고 신고한 것 같다”고 말했다. 무함마드 기자는 실제로 당국이 이웃간에도 ‘반 군부 동향’을 밀고하도록 독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무바라크 시절에는 정부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경찰이나 정보요원 등 내무부에서 와서 잡아갔는데, 지금은 군인들이 와서 잡아간다”며 “이것이 주민들에게 얼마나 공포스럽게 다가오는지 아느냐”고 했다. 


무함마드는 “군대가 돌아왔다는 것은 민주주의가 죽었다는 뜻”이라며 “언론의 자유도, 집회의 자유도, 그 어떤 정치적인 자유도 없다. 오직 한 목소리, 한 사람(엘시시), 한 체제만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시민들의 피로 일궈낸 혁명은 3년만에 이렇게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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