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이 도와주면 좋지. 아예 유엔이 딱 못박아 버리면. ‘야츠’가 경제분야 경험이 있으니 좋다고 봐.”
“이 참에 확실하게 해야 해. 러시아가 뒤에서 움직이고 있어.”
우크라이나 시위 뒤에 ‘미국의 공작’이 있었던 것일까. 미국 국무부 관리와 우크라이나 주재 미국 대사 간의 적나라한 대화 내용이 유출됐다. 우크라이나를 서방쪽으로 끌어당기고 야당지도자를 내각에 앉혀야 한다는 등, 내정 간섭과 노골적인 개입 의도를 보여주는 대화였다. 러시아는 격앙됐으며 미국은 당혹스런 처지가 됐다.
문제의 녹음파일은 빅토리아 뉼런드 미 국무부 유럽담당 차관보와 제프리 파야트 우크라이나 주재 미국대사의 대화가 담긴 것으로, 지난 4일 유튜브에 올라왔다. 4분10초 분량의 파일에는 ‘마이단(우크라이나어로 ‘광장’이라는 뜻)의 꼭두각시들’이라는 러시아어 제목과 함께 러시아어 자막이 붙어 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지난해 11월부터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친유럽파들의 시위라는 뜻에서 ‘유로마이단’이라 이름붙여진 이 시위로 우크라이나는 사실상 마비 상태다.
녹음파일에서 뉼런드 차관보는 유엔이 우크라이나에 특사를 보낼 수도 있으며, 그렇게 되면 훌륭한 해법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유럽연합(EU)에 대해서는 “망할 EU”라고 욕설을 써가며 비난했다. 미국과 유럽 간 공조가 잘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뉼런드는 또 우크라이나 야당 정치인들을 실명 거론해가며 품평했다. 권투선수 출신인 비탈리 클리치코는 ‘클리치’라는 약칭으로 부르면서 “클리치가 내각에 들어가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반면 재무장관을 지낸 젊은 정치인 아르세니 야체뉵에 대해서는 호평하면서 “야츠(야체뉵의 약칭)가 알맞은 인물”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25일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총리를 해임한 뒤 야체뉵에게 총리직을 제안했다. 뉼런드와 파야트 대사의 대화가 이뤄진 것은 바로 그 날이었다. 파야트 대사는 뉼런드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러시아가 ‘어뢰처럼’ 우크라이나 문제에 끼어들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정작 우크라이나 내정에 개입해온 것은 미국이었음이 드러난 셈이다.
미 국무부는 뉼런드와 파야트의 대화내용이 맞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뉼런드는 녹음된 내용에 대해 사과했다”고 밝혔다. 누가 이 대화를 녹음해서 공개했는지는 아직 알수 없다. 미국은 러시아를 의심하지만, 미국 관리들이 ‘유출 주범’으로 거론한 러시아측 인사들은 강력 부인하고 있다. 크렘린 보좌관 세르게이 글라즈예프는 미국이 우크라이나 야당에 2000만달러 이상을 썼다며 미국의 개입을 비난했다. 가뜩이나 악화된 미·러 관계는 이 사건으로 더 나빠지게 됐다. 뉴욕타임스는 “양측 간 냉전시대의 수사들이 오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야체뉵은 앞서 총리직 제안을 거부했으나, “야당 중심으로 내각이 짜인다면 들어갈 수도 있다”는 견해를 내비쳤다고 키예프포스트 등이 7일 보도했다. 하지만 야체뉵이 총리가 된들 시위대가 만족하고 물러설 지는 알수 없다. 신문은 “이미 시위대의 관심은 정치 문제에서 경제난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로 돌아섰다”고 보도했다.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7일 러시아 소치 동계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만나 정국 해법 등을 논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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