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미국 시사주간 타임이 매년 선정하는 ‘올해의 인물’로 교황 프란치스코를 골랐다. 교황이 올해 해온 말과 행동들로 보아,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선정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가톨릭 교황과 대척점에 서있는 잡지에서 교황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동성애자 권익옹호잡지가 교황을 표지 인물로 올린 것이다.
미국 최대 성적 소수자 잡지인 ‘애드버케이트’는 17일 나온 최신호 표지에 “동성애자인 사람이 선한 의지로 하느님을 찾는다면, 내가 어떻게 그를 판단(단죄)할 수 있겠는가”라는 교황의 발언과 함께, 교황의 사진을 실었다.
이 잡지는 1967년 창간돼 격월간으로 발매되며, 동성애자·양성애자·트랜스젠더(LGTB) 등 성적 소수자들의 권익을 위한 글들을 싣고 있다. 당초 잡지 운영진은 미국 ‘결혼보호법’ 상의 동성애자 차별을 없애는 데 공을 세운 에디 윈저 등의 운동가를 올해의 인물 후보 1순위로 생각했으나, 사회적 영향력과 가톨릭의 변화 분위기 등을 고려해 교황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미국의 동성애자 잡지 ‘애드버케이트’ 최신호 표지에 등장한 교황 프란치스코. 잡지 측은 교황의 얼굴에 증오범죄 반대 캠페인을 상징하는 ‘NOH8(No Hate)’라는 글자를 합성했다. 사진/애드버케이트 홈페이지(www.advocate.com)
잡지 측은 웹사이트에 올린 글에서 “여전히 가톨릭은 동성애 문제나 여성의 역할, 피임 등의 문제에서 우리와 의견을 달리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지금까지의 어떤 교황보다도 현 교황이 성적소수자에 대해 열린 마음과 애정을 갖고 있다는 것 또한 틀림없다”고 설명했다. 잡지는 “좋든 나쁘든 교황의 말들은 세계 12억 가톨릭 신도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며 “성적소수자 인권에 대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생각이 미국의 정치학을 바꿨듯, 교황에게서 비롯된 생각의 변화가 가톨릭 전체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며 기대를 나타냈다.
지금까지 로마가톨릭은 동성애와 낙태는 물론이고 피임까지 반대하는 등 사회 이슈에서 극도로 보수적인 모습을 보여왔다. 이 때문에 유럽과 미주에서는 가톨릭이 성적소수자의 권리를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로 여겨지기도 했다.
프란치스코 역시 교리 상으로는 보수적인 쪽에 속한다는 평을 듣고 있으며 동성애에 반대하고 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대주교 시절에 미혼모가 낳은 아기들의 세례를 거부한 사제들을 맹렬히 질타한 것에서 보이듯, ‘어떤 정체성보다도 신앙이나 선한 의지가 중요하다’고 강조해온 인물이기도 하다. 지난 7월에는 한 기자가 동성애에 대한 입장을 묻자 애드버케이트 표지에 인용된 대답을 해, 가톨릭의 일대 변화가 일어나는 게 아니냐는 관측을 불러일으켰다.
가톨릭과 성적소수자들 사이엔 아직 깊은 간극이 있지만, 변화의 조짐은 보이고 있다. 교황은 16일 주교 선출을 위한 추기경단에서 낙태와 동성결혼에 공개적으로 반대해온 보수파 인사인 미국의 레이먼드 버크 추기경을 전격 교체했다고 뉴욕타임스가 보도했다. 추기경단은 전세계 가톨릭 국가의 주교를 선정하는 권한을 갖고 있다. 교황은 버크 대신 중도파로 분류되는 미국의 도널드 우웰 추기경을 새로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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