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칼럼

[공감] 역사에 대한 부채의식

딸기21 2013. 12. 11.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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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슨 만델라의 타계 소식에 남아프리카공화국 사람들의 슬픔은 어떨까 생각해보다가, 만델라 이후에 태어난 세대들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나만 궁금했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세계 여러 언론에 남아공 ‘포스트 아파르트헤이트 세대’의 감정을 전하는 기사가 나왔다.

 

영국 가디언에는 시포 흘롱과네라는 1988년생 남아공 젊은이의 기고가 실렸다. “모두가 만델라를 이야기하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 진실이 있다. 만델라는 1999년 퇴임 뒤 남아공 정치를 떠났고, 뒤이은 정권들은 만델라의 화해정책이나 정신을 지워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에겐 우리 앞에 놓인 새로운 과제들이 있다”고 말한다. 정치적 자유를 당연시해온 자신들 세대에는 실업, 범죄, 에이즈 같은 새로운 도전들이 있으니 “다른 종류의 영웅이 필요하다”고, 신념 때문에 감옥에 갇히는 건 ‘로맨틱한 혁명가들의 이야기’로 보인다고.


NY Times, August 21, 2005, photograph of sand painting by Jim Deveran


미국 뉴욕타임스에 소개된 18세 소녀 노쿠툴라 마구바네는 한술 더뜬다. 요하네스버그 근교에 사는 그는 분리통치를 자행한 네덜란드계 백인들의 토착언어인 ‘아프리칸스’ 공부에 열중하고 있단다. 1976년 흑인 분리거주구역인 소웨토에서 시위와 학살이 벌어졌는데, 그 시위의 원인중 하나가 흑인 언어를 말살하는 아프리칸스 강제교육이었다. 그 봉기일인 6월16일은 ‘청년의 날’로 지정돼 있다. 그런데 마구바네는 “아프리칸스는 이젠 그냥 하나의 언어일 뿐이잖아요”라고 말한다.

 

이들은 과거가 아닌 ‘오늘의 현실’을 말한다. 이들에게 옛 체제의 폭력은 BBC나 CNN 같은 외국 방송의 자료화면에나 보일 뿐이다. 실제로도 케이프타운 앞바다의 로벤섬 교도소는 관광지가 돼 있고, 만델라의 마지막 수감지였던 빅토르 페르스테르 교도소 내 농가는 ‘문화유적지’로 변모했다. 소웨토에는 월드컵 경기장이 들어섰다. 


‘역사’는 남았지만 사람들의 기억은 빛이 바랬다. 그 순간을 살아온 사람들이 느꼈던 공기와 숨결, 체험 같은 개인의 감정과 경험은 전달되지 않았다. 제도로서의 역사교육, 과거를 국가라는 틀에 집어넣어 화석으로 만드는 근대식 역사관의 필연적인 결과다. 더군다나 남아공의 경우 1990년대 이후 태어난 세대가 인구의 40%다. ‘만델라 세대’라 불리는 이들 민주주의 이후의 세대가 만델라의 역사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는 건 아이러니다.

 

민주주의가 농단을 당해도 그러려니 하는, 혹은 민주주의 따위야 우습게 아는 젊은이들에게 사람들은 “너희가 그런 소리를 내뱉을 수 있는 것도 누군가는 민주주의를 위해 피흘리며 싸워왔기 때문이야”라고 말한다. “우리를 과거의 포로로 만들려 하지 말라”는 세대에게 ‘역사에 대한 부채의식’을 가지라고 말하는 게 타당할까? 멀리 남아공까지 갈 것도 없다. 광주학살을 부정하는 걸 넘어 모욕하는 이들에게 그런 부채의식을 요구할 수 있을까?

 

버락 오바마가 처음으로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 연단에 올랐을 때 어떤 이들은 “흑인 콤플렉스가 없는 흑인의 등장”이라며 놀라워했다. 일본의 과거사 부정은 ‘전쟁의 죄의식이 없는 전후세대의 도발’로 읽힌다. ‘부채 없는 세대’의 등장은 늘 이전 세대를 당혹하게 한다. 부채의식은 최소한의 공동체적 감성이며,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런 공동체적 감성을 키우는 것이 역사를 가르치는 목적이며 과거사를 밝혀야 하는 이유다. 그런데 이런 감성은 ‘국가’와 꼭 겹쳐지지는 않으며 국가와 동일시돼서도 안된다. 

 

부채의식 없는 사람들을 질타하긴 쉽다. 어떤 이들은 요즘 사람들이 민주화 투쟁 세대에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하고, 어떤 이들은 우리가 누리는 것이 박정희에게 빚진 것이니 그를 숭배하라고 강요한다. 과거를 ‘기적’으로 포장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그래야 영웅의 존재가 합리화되니까. 하지만 현재의 물음에 제도화된 ‘역사’가 해답을 줄 수없듯, 과거의 영웅은 오늘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다. 만델라와 함께 한 시대를 떠나보내며,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부채의식을 스스로 되물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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