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의 빅토르 야누코비치(63) 대통령(사진)은 50대가 되어서야 우크라이나어를 배웠다고 합니다. 우크라이나의 동쪽 절반은 1000년 넘게 러시아 땅이었고 러시아계가 살아왔고 지금도 러시아어가 쓰이지만 서쪽 절반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과 폴란드의 영토였고 현대에 들어와 ‘우크라이나’라는 민족적, 언어적 정체성을 굳혔습니다. 야누코비치는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하는, 동쪽 가난한 산업지대 출신입니다.
요즘 시끄러운 우크라이나... 이 사달이 난 이유를 제공한 장본인이 야누코비치라는 인물이니, 과연 어떤 사람인지 한번 알아볼까요.
구체제의 붕괴와 독립, 한 차례의 혁명(2004년의 오렌지혁명)을 거치면서 살아남은 야누코비치는 옛소련권 ‘앙시엥 레짐(구체제)’을 상징하는 정치인으로 꼽힙니다. 그와 같은 인물은 우크라이나는 물론이고 옛소련권 여러 독립국들에도 이제는 별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유럽연합과의 무역협정을 맺을 것이냐 철회할 것이냐를 놓고 시위가 벌어져 수도 키예프 거리에 수십만명이 쏟아져나오고 정부청사들이 시위대에 에워싸여 마비된 상황에서, 지금 야누코비치는 대중들 앞에 통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열쇠를 쥔 것은 야누코비치이며, 그의 선택에 우크라이나 정국의 향방이 달려있습니다.
지난달 30일의 시위 무력진압으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자 야누코비치는 지난 1일 “유럽연합과 다시 무역협상을 하겠다”는 긴급성명을 냈습니다. 2일에는 호세 마누엘 바호주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재협상을 요청했다고 AP통신이 보도했습니다. 하지만 시위대는 이제는 협정이 중요한 게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최대 야당인 ‘아버지조국당’은 정권 퇴진이 시위의 목표라고 선언했습니다. 반면 집권 ‘지역당’은 의회 내에서 야권과 협상해 사태를 무마하려 하고 있고요.
러시아 카네기연구소의 릴리아 셰브초바는 가디언에 “야누코비치가 어떻게 하느냐가 사태를 결정지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야누코비치는 2015년 대선에서 재집권을 노리고 있었고, 그의 정치적 야심과 성향과 행동양식이 현재의 국면에서 핵심적인 요소라는 것이죠.
지금까지의 경력을 보면 야누코비치는 전형적인 ‘권위주의형 통치자’입니다. 권력욕이 강하고, 대중 설득이나 소통에는 취약하며, 정치보복을 서슴지 않습니다.
야누코비치는 1950년 소련 내 우크라이나공화국 동부 도네츠크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폴란드·벨라루스계였고 어머니는 러시아인이었습니다. 지금은 독립된 우크라이나인이지만 그는 사실상 러시아인인 셈입니다. 10대 시절에는 강도죄로 유죄판결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나중에 도네츠크 공과대학 등에서 학위를 받았다고 했으나 이 학위가 진짜인지도 늘 논란거리였다고 합니다.
소련 공산당 간부를 지냈고, 우크라이나가 독립한 뒤 1997년부터 2002년까지 도네츠크 주지사를 지냈습니다. 이후로는 늘 권력의 핵심 곁에 있었습니다. 2002년부터 2004년까지는 권위주의 독재자 레오니드 쿠치마 대통령 밑에서 한 차례 총리를 지냈습니다. 2004년 쿠치마의 뒤를 이을 대선후보로 나와 승리했지만 부정선거 논란과 함께 오렌지혁명이 일어났고 선거결과는 무효화됐습니다.
하지만 오렌지혁명 주역인 빅토르 유셴코와 율리아 티모셴코 사이에 분란이 일어난 덕에 야누코비치는 회생했습니다. 유셴코 대통령이 2006년 티모셴코를 총리 자리에서 내치자 그 자리를 물려받은 것이죠. 하지만 총리직은 극심한 권력투쟁의 결과 2007년 다시 티모셴코에게 넘어갔습니다.
티모셴코와의 악연에는 끝이 없습니다. 2010년 대선에서 야누코비치는 결선투표까지 간 끝에 티모셴코를 3%포인트 차이로 누르고 대통령이 됐습니다. 야누코비치의 인기보다는 오렌지혁명 진영 간의 내분과 경제난이 당선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티모셴코는 그의 취임식에 불참했습니다. 야누코비치는 취임 이듬해에 기어이 티모셴코를 감옥에 넣었습니다. 직권남용 혐의였지만, 누가 봐도 정치보복이었습니다.
야누코비치는 친러시아계 측근들을 주변에 세우고 ‘패밀리’라 불리는 이너서클을 만들어 이권을 몰아줬습니다. 키예프 교외에 있는 야누코비치의 저택에는 특이하게도 타조 농장이 있다고 합니다. 그를 싫어하는 국민들에게 이 타조농장은 거칠고 오만하고 비밀스런 통치스타일을 드러내주는 상징처럼 여겨진다고 AP통신은 전했습니다.
권력욕 강한 야누코비치가 유럽 대신 러시아와의 경제동맹을 택했던 가장 큰 이유는, 내후년 대선에서 유럽이라는 불확실한 친구보다는 크렘린이라는 현존하는 권력이 더 도움이 될 거라고 봤기 때문으로 풀이됩니다. 가디언은 그가 대규모 시위 뒤 대중들 앞에 나타나지 않은 것 또한 예측가능한 일이었다고 보도했습니다. 그는 구시대적인 권력자이지, 대중 연설에 능했던 적은 없었다는 것이죠. 2004년처럼 그가 순순히 권력을 넘겨주지는 않을 것이라고 외신들은 내다봅니다.
다만 현 내각이 의회에서 불신임당하고 정치적 고립에 빠질 경우 야누코비치가 계속 티모셴코를 가둬둘 수 있을지는 알수없지요. 지금은 야당의 조직력이 약하고 구심점도 약하지만 야누코비치 역시 궁지에 몰린 처지라 시위와 정치공방이 장기화될 가능성도 적지 않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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