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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개혁파 로하니 당선, 이란과 세계에는 어떤 의미일까

딸기21 2013. 6. 16.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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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9년 6월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이 대선에서 재선됐습니다. 개혁파 미르 호세인 무사비를 지지했던 시민들, 특히 여성들과 젊은이들은 좌절해 거리로 나왔습니다. 부정선거라 규탄하며 시위를 하던 이들에게 정부는 경찰과 민병대를 동원한 '공격'으로 대응했습니다. 수백명이 숨졌고, 테헤란 시내는 피로 물들었습니다.


그로부터 4년 후인 2013년 6월 15일, 테헤란 시내는 다시 사람들로 메워졌습니다. 이번에는 축제 분위기입니다. 8년간의 억압 통치를 끝낼 개혁파 대선후보 하산 로하니의 당선을 축하하며 수만명이 거리로 나왔다고 알자지라방송 등이 보도했습니다. 올해 65세의 로하니는 개혁파의 사실상 '단일 후보'로 나서, 전날 대선에서 50%가 넘는 득표율로 승리를 거뒀습니다.


혁명 이후 계속돼온 보-혁 자리바꿈


이란의 최근 역사는 1979년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혁명 뒤 세워진 '이란이슬람공화국'은 이슬람법에 따라 움직여진다는 점에서 다른 나라들과 구별되는 '신정(神政) 체제'라 불립니다. 성직자들 중심으로 이뤄지는 신정의 시스템과, 국민이나 의회 등의 투표에 따라 선출되는 세속 정치 시스템이 공존합니다.


최고지도자 아래 최고 권력기구인 혁명수호위원회, 최고지도자 사망 시 선출 권한을 갖는 전문가위원회, 최고지도자를 받쳐주는 행정조직 격인 권익위원회, 정예부대인 혁명수비대, 지방 민병대인 바시지 같은 조직들이 '신정' 부문을 대표합니다. 


대통령과 의회('마즐리스'라고 부르죠)는 국민들의 투표에 따라 선출됩니다. 최고지도자가 대통령을 능가하는 헌법 상의 제1 권력자이고, 사법부는 이슬람 성법(샤리아)에 따라 재판하는 성직자 겸 판관들이라는 점에서 신정이 세속 정치를 압도합니다. 하지만 두 부문은 복잡하게 얽혀 서로 견제하게 돼 있기 때문에, 최고지도자라 하더라도 독단으로 모든 걸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성법에 따라 움직인다는 점에서 서구식 입헌민주주의와 다르지만, 국민들의 투표와 지도자 선출이 보장된다는 점에서 중동의 다른 어떤 나라들보다 민주주의에 가깝습니다. 최고지도자조차도, 종신제이기는 하지만 지명이 아닌 전문가위원회의 투표로 결정됩니다. 1989년 호메이니를 승계한 현 최고지도자 아야툴라 알리 하메네이는 이란계가 아닌 소수민족 아제르바이잔계로, 신정의 수호자인 동시에 능수능란한 정치가입니다.



최고지도자는 호메이니에게서 1989년 아야툴라 알리 하메네이로 바뀌었지요. 대통령 자리는 어땠을까요? 


1980년부터 압둘하산 바니사드르와 모하마드-알리 라자이가 잠시 대통령 자리에 앉았지만 이슬람공화국 체제가 정비된 것은 1981년 하메네이 대통령 시절부터입니다. 하메네이 현 최고지도자가 8년간 대통령을 하면서 호메이니 최고지도자를 받쳐줬습니다.


혁명 이후 이란의 대통령들


1980.2~1981.6 압둘하산 바니사드르

1981.8~1981.8 모하마드-알라 라자이(선출 직후 암살)

1981.10~1989.8 세예드 알리 하메네이(현 최고지도자)----------보수파

1989.8~1997.8 악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2005년 재출마)-------개혁파

1997.8~2005.8 모하마드 하타미-------------------------------개혁파

2005.8~2013.8 마무드 아마디네자드---------------------------보수파

2013.8~ 하산 로하니------------------------------------------개혁파


이란의 대통령 자리는 이렇게 보수파와 개혁파 사이에서 오갔습니다. 


개혁파의 희망과 좌절


하지만 개혁파라 분류되더라도 라프산자니와 하타미와 로하니 사이에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라프산자니는 신정과 세속 정치 모두에 엄청난 지분을 갖고 있으며, 이란 현대정치사의 산 증인입니다. 2005년 대선에 출마했다가 결선에까지 올랐는데 예상을 뒤엎고 치고올라온 아마디네자드에게 패했지요. 이번에도 개혁파의 마땅한 후보가 안 보이는 상황에서 출마를 신청했지만, 후보자들을 걸러내는(이것이 여성후보 출마금지와 함께 이란의 '민주적 대선'의 결정적 한계입니다) 혁명수호위 심사에서 자격을 박탈당했습니다. 


재미난 것은, 하메네이를 최고지도자로 올린 것이 라프산자니였다는 점입니다. 혁명의 원로인 이들 인사들은 이리저리 복잡하게도 얽혀 있답니다. 그래서 라프산자니는, 이란 정치에서 시도때도 없이 대면해야 하는 이름이랍니다.


모하마드 하타미는 이란 내에서나 국제무대에서나 엄청난 '스타'였습니다.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에 반대하며 유엔에서 '문명의 공존'을 역설한 것은 유명합니다. 나중에 유엔에 '문명의 공존 위원회'가 만들어졌고, 그의 연설이 책으로도 나왔지요. 집권 기간 인기는 높았지만, 신정체제와 보수파들의 공격에 번번이 발목을 잡혀 스스로 지친 모습을 많이 보였습니다. 이번 대선에서 하타미는 개혁파 후보였던 모하마드-레자 아레프에게 사퇴를 권유함으로써 로하니로의 단일화를 물밑에서 이뤄냈습니다.


이번 당선자 로하니는 하타미 정권에서 핵 협상 대표를 지낸 인물입니다만, '개혁파'라기보다는 '중도온건파'로 분류됩니다. 뉴욕타임스도 로하니 당선뒤 기사에서 'reformist'가 아닌 'moderate'라는 수식어를 썼더군요. 개혁파의 지지로 당선됐지만 보수세력도 용납해줄 수 있는 선의 중도온건파 정도로 보는 편이 맞을 듯 싶습니다. 



개인 생활에 대한 종교의 개입과 압력을 줄이고 사적인 자유를 늘리며 서방과의 갈등보다는 대화와 타협을 선호, 경제 제재를 완화시키자는 것이 개혁파의 주장이라고 뭉뚱그려 말할 수 있지만 그 이면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은 것 같습니다.


세속 독재에서 '신정' 강화 쪽으로 갈까


개혁파 정권 시절 경제제재가 줄어들면서 생긴 에너지산업 이익을 일부 세력이 독점하면서 서민층의 반발을 산 것이 사실입니다. 이 틈을 비집고 '서민정치'를 내세우며 당선된 것이 아마디네자드였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대권을 쥐었던 보수파도 단일한 집단이라 보기는 힘듭니다.


하메네이는 명실상부 신정의 수호자입니다만, 아마디네자드는 철저한 '세속 정치인'입니다. 테헤란 시장을 지냈고, 2005년 대통령이 된 뒤 반미 투사 노릇을 하며 핵 갈등을 오히려 스스로 부추기고 개혁파 야권을 몹시 억압했습니다. 하타미 시절 되살아났던 언론들을 탄압하고 지식인들에게 재갈을 물렸습니다.


하지만 신정을 지키고자 하는 성직자들에게도 아마디네자드는 적이나 다름없는 존재였습니다. 아마디네자드는 이슬람혁명 이후 첫 '성직자가 아닌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는 하메네이를 비롯해 이슬람 성지 쿰(Qom)을 중심으로 권력을 휘두르는 성직자 집단을 밀어내고 세속 권력을 강화하려 했습니다. 혁명수비대를 세속권력의 발판으로 삼으면서, 이전에 성직자 집단이 차지해왔던 에너지와 건설 등 기간산업의 여러 이권을 혁명수비대에 넘겨 자신의 친위권력으로 만들었습니다.



2009년 아마디네자드가 대선 부정선거 시비에 말려 거센 시위에 직면했을 때 하메네이는 쉽사리 그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아마디네자드가 시위를 유혈진압한 뒤 안팎으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으며 정치적 궁지에 몰리는 것을 지켜보고 나서야 마지못한 듯 편을 들어줬습니다. 


그 때 크게 데었던 아마디네자드는 세속 권력 강화로 맞섰고, 하메네이는 지난 4년 동안 끊임없이 아마디네자드를 압박하고 견제했습니다. 이번 대선 후보심사에서 혁명수호뒤는 아마디네자드가 사실상 후계자로 삼고 밀었던 인물을 떨어뜨리는 초강수를 뒀습니다. 그래서 이번 선거에서는 '하메네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인물들'만 출마했던 것이고, 그 결과 로하니가 당선된 셈입니다. 


신정을 수호하려는 세력 입장에서 보면 로하니같은 온건개혁파가 아마디네자드 같은 강경보수세력 내 분파들보다 오히려 낫다는 판단을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로하니가 하메네이 권력에 정면 도전할 것 같지는 않으니까요.


Iran Moderate Wins Presidency by a Large Margin /뉴욕타임스

But if the election was a victory for reformers and the middle class, it also served the conservative goals of the supreme leader, restoring at least a patina of legitimacy to the theocratic state, providing a safety valve for a public distressed by years of economic malaise and isolation, and returning a cleric to the presidency. Mr. Ahmadinejad was the first noncleric to hold the presidency, and often clashed with the religious order and its traditionalist allies.


그렇기 때문에, 중도-개혁파의 뜻을 모은 로하니가 당선됐음에도 오히려 신정이 강화될 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옵니다. 아마디네자드가 공고히 했던 친위권력이 무너지고 그 영향력과 이권이 다시 신정 집단에게로 돌아갈 가능성이 적지 않으니까요. 


이슬람의 사회적 압력(특히 여성에 대한 억압)은 좀 줄어들 것으로 기대됩니다. 하타미 시절에도 신정을 수호하는 사법부는 개혁파들이 중심이 된 입법부(마즐리스)와 언론을 수시로 압박하고 공격했습니다. 지금은 의회도 보수파 일색입니다. 로하니 정부가 어느 정도나 개혁조치를 실행해나갈 수 있을지, 아직은 안갯속입니다.


특히 미국의 관심거리인 핵 정책에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들이 벌써 나옵니다. 이란 국회의원 샤리프 후세이니가 뉴욕타임스에 한 말입니다. 이란의 개혁파들은 내부 정치사회적 개혁을 주장하는 것일 뿐, 핵 정책에서는 보수파들과 대놓고 '다른 목소리'를 낸 적이 없습니다. 다만 아마디네자드처럼 미국과 말싸움을 하고, 반미 세력을 규합한다며 불필요한 마찰을 일으키는 일은 줄어들겠지요. 


아직 미국의 공식 입장은 나오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영국의 잭 스트로 전 외무장관은 과거 핵 협상에서 로하니와 대면했던 일을 들며 "아주 경험많은 외교관이자 정치인"이라 치켜세웠습니다.



인구 8000만명, 유라시아의 복판 넓은 땅을 차지하며 사우디아라비아와 마주보고 이라크, 아프가니스탄과 접경한 이란. 카스피해 연안을 차지하고 페르시아만을 앞바다로 갖고 있는 나라. 석유매장량 세계 4위에 천연가스 매장량 세계 2위. 이라크와 시리아, 레바논으로 이어지는 '시아파 벨트'를 형성하며 미국의 대테러전 뒤 오히려 중동에서 영향력을 키워 '정치적 승자'가 된 이란. 


미국이 키워놓은 친미 아랍 독재정권들이 줄줄이 '민주화의 봄'을 맞아 무너지는 사이, 미국이 독재국가라 욕해온 이란은 스스로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나라가 어디로 갈지 참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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