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은 열사의 사막이 아니다. 걸프의 거대한 모래국가와 달리 이란은 기본적으로 사막이 아닌 ‘고원’으로 이뤄져 있다. 북쪽의 고원지대는 상당히 추워서 1년의 절반 동안 눈에 덮여 있는 곳들도 있다고 한다. 이란의 부자들은 이 고원지대에 스키를 타러 다닌다고 한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에 나오는 ‘추운 마을’들을 연상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이란, 아리안
이 이란고원에 인류가 둥지를 튼 것은 아주 오랜 일이다. 페르샤라는 이름을 대체 언제부터 들어왔던가. 이란인의 직접적인 조상은 인도-유럽어족의 한 갈래인 아리안들이다. 이들이 고원에 들어온 것은 기원전 2500년 쯤으로 추정된다. 중앙아시아 초원에 살던 아리안들은 기원전 3000년-4000년 무렵에 이동해서 일부는 유럽에 들어가 게르만, 슬라브, 라틴의 원조가 되었고 일부는 남쪽의 고원에 정착해 이란인이 됐다고 한다.
더 밑으로, 더 남쪽으로 내려간 사람들은 인도아대륙에 진출해 원주민이던 드라비다인들을 제치고 현재의 인도인들의 조상이 됐다. (여담이지만 인도 남쪽에는 아직도 드라비다인들이 남아서 스리랑카에 사는 혈족들의 분리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있다)
아리안은 이합집산을 거치는데 스키타이족(우리와도 연관이 있지요), 메디아족, 이란족(페르샤인들) 등이 모두 이 갈래다. 이란-이라크전은 1980년에 일어났지만 실은 이미 인류의 초창기에서부터 오늘날 이라크에 살던 사람들과 이란의 아리안들은 대립을 했었다.
초창기 이란의 아리안족들, 즉 이란족들은 당시 그 땅을 정복했던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나 바빌로니아에 맞서 싸우는 용병 노릇을 했다. 아리안들은 아주 용감했었는지, 곧 원주민들을 제치고 고원을 장악해 ‘이란’(아리안들의 땅)을 만들어버린다. 기원전 7세기 쯤, 이란인들의 일파인 메디아인들이 앗시리아에서 독립해 남부 이란과 소아시아에 걸쳐 메디아 왕국(B.C. 708 - B.C.550)을 세운다. 메디아는 이란인이 세운 최초의 왕조였지만 영토가 넓었던 대신 중앙집권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부족 연합체에 그쳤다고 한다.
이란 파사르가다에에 있는 키루스의 무덤
아리안이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한 것은 기원전 621년 메디아 왕국의 아스티아게스 왕 때다. 아스티아게스는 바빌론과 연합해 앗시리아를 무너뜨리고 메소포타미아 북부지역을 차지했다.
메디아는 티그리스-유프라테스 연안의 ‘비옥한 초승달’, 즉 오늘날의 이라크 땅을 차지하기 위해 바빌론에 맞섰으나 싸움은 패배로 끝났다. 바빌론의 나보니두스 왕은 이란 남부 아케메네스 Achaemenes 왕조 (B.C. 550-B.C. 330)와 동맹을 맺어 메디아를 정벌해버렸다.
아케메네스는 우습게도, 아스티아게스의 외손자인 키루스 Cyrus 가 열어제낀 왕조다. 메디아는 외손자에게 뒤집어진 꼴이다. 아스티아게스는 앗시리아를 무너뜨리기 위해 바빌론과 손잡았다가 훗날 바빌론에 망했고, 키루스는 바빌론과 연합해 메디아를 무너뜨리더니 급기야는 바빌론에 칼을 돌렸다. 키루스는 주변 부족국가들을 통합해 동으로는 소아시아와 아르메니아, 서로는 힌두쿠시까지 세력을 확장했고 B.C. 539년 바빌로니아를 정벌한다. 한때의 동맹이던 나보니두스는 폐위됐다.
키루스는 아주 관대한 정책을 펼쳐 피정복민의 관습과 신앙을 지켜줬다. 오히려 피압박 민족들에게 ‘해방자’로 추앙됐다고 하는데, 바로 성경에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 바빌로니아에 노예로 잡혀 있던 유태인들(‘바빌론 유수’)을 해방시켜준 것이 바로 이 왕이다. 구약 에스라서와 이사야서에는 ‘고레스 왕’으로 표기돼 있다. 키루스는 이란인들에게는 아주 위대한 왕, 너그럽고 지략 뛰어난 왕으로 각인돼 있다고 한다.
키루스 대왕은 이집트마저 정복하길 원했지만 당대에는 꿈을 이루지 못했다. 아버지의 소망을 이뤄준 것은 아들 캄뷰세스 2세. 캄뷰세스 2세는 이집트를 정복하고 스스로 이집트 27왕조의 파라오가 된다. 그러나 왕이 이집트에 가 있는 동안 정작 이란에서는 쿠데타 기도와 혼란이 벌어졌고, 캄뷰세스 2세는 에티오피아 원정이 실패한 뒤 자살했다.&
드디어 이 인물이 등장한다. 다리우스 1세.
캄뷰세스 사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즉위한 다리우스 1세는 인도 북부에서 오늘날의 불가리아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헬레네스(그리스인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이란(페르샤) 제국’의 시대가 온 것이다.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운하를 최초로 건설했다 하니, 수에즈 운하의 원형이 그 옛날에 만들어졌던 셈이다.
그리스인들은 이 거대제국을 페르샤라고 불렀는데, 파르시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란 얘기다. 이란어를 파르시라고 한다. 그러니 ‘이란 제국’이 맞는 말이지만 지금은 페르샤가 일반화된 용어로 자리를 잡았다. 메디아를 필두로 줄줄이 이어진 왕국들을 모두 ‘페르샤’라 하고, 메디아 왕조, 아케메나스 왕조 식으로 ‘왕조’를 붙여 구분하니 뿌리는 다 똑같다.
다리우스 대왕의 부조
페르샤에 정복된 그리스 식민도시들은 밀레투스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킨다. 아테네가 여기 껴들어서 전쟁이 난다. 다리우스 1세가 쳐들어온다! 3차에 걸친 전쟁이 벌어진다. 다리우스의 1차 원정은 폭풍으로 실패했고, 2차 원정에서는 유명한 ‘마라톤 전투’로 퇴각한다. 그런데 헤로도투스는 마라톤 전투를 대서특필했지만 허풍이 심했던 모양이다. 페르샤에서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지도 않았던 전투였던 것으로 보인다. 역사학자들은 헤로도투스의 기록이 당시 병력규모로 미뤄 과장돼 있을 소지가 높다고 지적한다.
다리우스 1세는 3차 원정을 준비하던 중에 숨졌다. 뒤를 이은 인물은 전임자 만큼이나 명성을 떨쳤던 크세르크세스(<아르미안의 네 딸들>에서 둘째 스와르다의 남편이었던 인물, 결국 스와르다를 목 잘라버리는 것으로 나온다. '스와르다'는 가상인물이지만 크세르크세스가 말 안 듣는 후궁의 목을 잘랐다는 기록은 실제로 있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다. 그러나 크세르크세스의 원정대도 살라미스 해협에서 아테네 해군에게 궤멸됨으로써 10여년에 걸친 원정을 실패한다. 전쟁의 패배, 결말은 ‘국력 쇠퇴’다. 피정복민들이 크세르크세스 사후 줄지어 반란을 일으키고 지배층은 분열됐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메디아와 달리 중앙집권체제와 사회경제적 토대를 갖춘 명실상부한 제국을 만들었다. 당시의 행정과 치안, 세금제도 등을 담은 상세한 기록들이 전해온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촘촘한 도로망과 국가가 운영하는 역마제도. 전국 어느 곳에건 보름 이내에 중앙정부의 뜻이 전달될 수 있었다고 한다. 제국의 수도인 수사에서 지금의 터키 북쪽 리디아 속주까지 고속도로^^;;가 연결돼 있었다고. 이 네트워크는, 속주들의 반란을 막는 안보시스템이기도 했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멸망한다. 알렉산드로스가 바빌론 땅에서 후계자 없이 사망한 뒤 광대한 영토는 휘하 장군 4명이 나눠 가졌다. 그들 중 이란을 지배했던 것은 셀레우쿠스 Seleucus 장군이었다. 셀레우쿠스와 그 후손들이 이끈 왕조를 셀레우쿠스 seleucid 왕조(B.C. 312-B.C. 247)라고 부른다.
그러나 셀레우쿠스 왕조는 지배구조를 만들기도 전에 반란에 시달렸다. 현재의 타지키스탄 지역인 Fars 지방(Farsi, 즉 페르샤어의 어원이 됐던)에서는 半유목민인 파르티아족(이란족과 스키타이족의 혼혈)이 셀레우쿠스 왕조를 무너뜨리고 파르티아 왕조(B.C.247-A.D. 224)를 세웠다. 반란 지도자 아르사케스 Arsaces의 이름을 따서 아르사케스 Arsacid 왕조라고도 한다.
파르티아 왕조는 미트라다테스 Mithradates 2세(B.C.123-87) 때 세력을 확장해 인도와 아르메니아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장악, 로마제국과 상대했다. 실크로드를 따라 이란의 직물(페르샤 카펫)이 동서양을 오갔다. 지배층은 조로아스터교를 숭배했지만 대중들에게까지 퍼지지는 못했다고 한다.
파르티아는 주변국들에 비하면 신분 이동의 통로가 열려 있는 비교적 개방된 사회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파르티아족의 출신지인 파르타브 Parthav 지방의 언어인 파흘라비 Pahlavi가 공용어로 사용됐는데, 1979년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으로 붕괴된 파흘라비(팔레비) 왕조는 여기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파르티아가 500년 가까이 존속됐음에도 불구하고 뒤이은 사산 Sassan 왕조(224-652. 교과서에는 ‘사산조 페르시아’ 라고 나왔던)가 조직적으로 전대의 유산을 파괴했기 때문에 역사 복원이 잘 되고 있지 않다는 점.
사산은 이란의 전설적인 영웅이다. 파르티아를 무너뜨린 아르다쉬르는 스스로를 사산의 후계자라고 칭했기 때문에 그의 왕조에 ‘사산조’라는 이름이 붙었다. 아르다쉬르는 집권 뒤 파르티아 말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지방 귀족들을 통제, 전국을 12개 주로 나눈 중앙집권체제를 만든다. 조로아스터 신관의 아들이었던 그는 조로아스터를 국교로 지정했고 정교 일치의 강력한 집권체제를 추구했다. 아들 샤푸르 Shapur 1세는 그러나 종교에 지나치게 심취해 승려들에게 정치를 맡기는 우를 범한다.
폭군 아자르 나르시의 시대를 지나 사산조의 10대 왕인 샤푸르 2세 Shapur II 가 즉위한다. ‘샤푸르 대왕’이라고 불리는 이 왕은 어머니 뱃속에서 즉위, 상당기간 섭정을 거쳤다. 70년 재위하면서 주변국들을 복속시키고 승려들의 특권을 없애 왕권을 강화했다. 샤푸르 2세에서부터 바흐란 5세, 카바드 1세 등으로 이어지는 기간은 사산조의 전성기였다. 페르샤는 정치사회적, 경제적으로 크게 부흥해, 뒷날 아랍인들에게 멸망하기까지 ‘르네상스’를 맞는다.
샤푸르 대왕
사산조 하면, 로마와의 싸움을 빼놓을 수 없다. 로마와 갈등했던 이유는 아르메니아 지배권 문제였다고 하는데, 아르메니아는 지금도 이슬람권에 둘러쌓인 기독교국가로 남아 있다. 옛 소련에서 갈라져 나온 나라들 중에서 유일하게 제법 자본주의적인 변신을 했는가 하면, 유대인에 버금가는 ‘로비 능력’으로 미국 내에서도 말빨 센 이민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로버트 카플란은 밉살스런 저작 <타타르로 가는 길>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의 ‘이란 공포증’에 대해 說을 풀었는데, 양국의 역사가 오랜 만큼 적대심도 깊은가 보다. (아르메니아는 근대 들어와 터키(오스만 투르크)에서도 숱하게 학살됐으니 悲願의 민족이긴 하다.) 하지만 사산조는 파르티아에 대면 신분 이동이 제한돼 있었지만 그래도 기독교도가 특별히 박해받지는 않았다고 한다. 아르메니아를 둘러싼 사산과 로마의 싸움은 역시나 ‘양대 제국의 패권 싸움’으로 봐야 할 듯.
사산조의 수도는 바그다드 근처에 있는 크테시폰인데, 당시에 이미 200만명의 인구를 자랑하던 대도시였단다. 몇해 전에 크테시폰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들르지 못했던 것이 아쉽다. 크테시폰은 바그다드의 건립자 아부 자파르 알 만수르(압바스 왕조의 2대 칼리프)에 의해 파괴됐고 크테시폰의 건축물들은 바그다드의 건축자재로 이용됐다고 하니. 바그다드 시내에는 알 만수르의 거대한 頭像이 세워져 있는데 머리만 올려놓은 것이라 아주 강한 인상을 준다. 2002년 3월 미군이 바그다드를 공격하는 것을 보면서 바그다드 시내에 있던 만수르의 두상을 생각했었다. 부수고 짓고 또 부수는 것이 인류의 ‘문명’인가.
이제 고대 세계를 지나 중세 이란으로 넘아가보자.
아랍족은 이란의 아리안들에게 ‘눌려 살던’ 민족이었다(종족 구분이라기보다는 사실 언어에 따른 구분에 가깝지만). 그런 아랍족이 ‘大페르샤’를 제치고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예언자 무함마드의 등장 이후였다.
보통 이란을 아랍국으로들 알고 있지만 아랍과 이란은 뿌리도 언어도 다르다. 비슷한 점이라면 같은 이슬람을 믿는다는 점,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점 정도다. 이란은 이란이고 아랍은 아랍이다. 실제 아랍국들은 이란을 경외시 혹은 백안시한다. 19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 때 미국은 물론이고 사우디 같은 아랍국들도 모두 아랍 형제인 이라크를 지원했었다.
무함마드가 아라비아반도를 장악한 뒤 이슬람군대가 가장 먼저 전쟁을 건 대상도 바로 이란(페르샤)이었다. 무함마드 사후 초대 칼리프로 취임한 아부 바크르 Abu Bakr는 서쪽으로는 비잔틴, 동쪽으로는 사산조를 향해 정벌의 칼날을 돌린다. 650년 아랍군은 크테시폰을 점령하고, 이듬해에는 사산군을 대파하면서 이란 전역을 장악했다. 정통 칼리프朝(650-661)가 멸망한 뒤 이란에는 우마이야드 Umayyad 왕조(661-750)와 압바스 왕조(750-821)가 대를 이어받았다.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왼쪽)와 아부 바크르(오른쪽)
사산조의 후예인 다부예흐 Dabooyeh가 망국의 유민들을 모아서 작은 나라를 세우긴 했지만 페르샤의 후계자로 보기엔 미약하다(다만 이들은 이슬람 개종 후에도 독자적인 국가를 유지, 950년 간이나 지속됐다고 한다). 압바스 왕조 말기, 이란 땅에서는 반란이 줄을 잇는다. Saffarids, Samanids, Ghaznavids, Buyids 등 자잘한 왕조들이 명멸했던 시기(821-1055)를 Iranian Intermezzo라 부르기도 한다.
이슬람교 포교 과정에서 무슬림들이 보여준 관용은 잘 알려져 있다. 이란에서는 주로 도시거주민을 중심으로 개종이 급속히 진행됐다. 이란인의 개종이 빨랐던 것은, 지역적 역사적 종교적 속성 상 조로아스터교가 이슬람교와 유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유사했다기보다는 이슬람이 조로아스터의 여러 요인들을 흡수해 만들어졌다고 해야겠다)
몽골인들이 한족의 문화를 배운 것처럼, 이란을 정복한 아랍인들은 페르샤의 제도와 문화를 물려받았다. 특히 ‘제국’의 운영체제를 많이 배웠다. 버나드 루이스같은 서방 이슬람학자는 ‘이란은 처음부터 제국이었다’고 말하곤 한다. 고대 페르샤 시절부터 이란은 ‘제국’을 이끌어왔고, 전제군주에 익숙해 있다는 말이다. 루이스가 이런 얘기를 한 것은 호메이니 혁명 이후 이란을 헐뜯기 위해서였지만.
아무튼 이란의 군주인 샤 Shah 는 (루이스에 따르면) 이집트의 파라오, 중국의 황제와 비견되는 절대 군주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얼마전에 심심풀이로 읽다 만 페르도시 Ferdowsi(935- ?)의 유명한 서사시 ‘샤나메’ 영역본은 Shah 와 King을 구분하고 있다. 우리말로 옮기면 ‘황제’와 ‘군왕’ 쯤 될 터인데, 이란의 샤를 ‘왕중의 왕’이라 하는 것을 보면 당대 페르샤인들의 자부심이 중화사상 못지않았음을 볼 수 있다.
중세의 이스파한
아랍 지배 뒤에도 이란인들이 관료로 많이 등용됐고 교육, 철학, 문학, 법학, 의학 등 학문 발달에도 크게 기여했다. 아랍어가 공식언어가 됐지만 이란의 민중들은 페르샤어(파르시)를 지켰다. 특히 샤나메를 비롯한 페르샤의 서사시는 유명하다. 파르시에서 파생된 말들은 인도는 물론이고 아프간을 비롯해 ‘-스탄’으로 끝나는 대부분 나라들에서 오늘날에도 쓰이고 있다.
압바스 왕조는 9세기 무렵부터 투르크 전사들을 용병으로 불러모았다. 왕조가 쇠하자 칼리프는 상징적인 종교지도자로 전락하고, 투르크 전사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중 돋보이는 것은 셀주크 투르크(1037-1220)다. 이들은 오늘날의 아프간 지역, 즉 이란의 동쪽에서 출발해 서쪽으로 이란을 장악했다. 이스파한을 중심으로 밑으로는 인도, 서쪽으로는 이라크와 시리아에 이르는 땅이 아랍족에 이어 다시 투르크족의 지배를 받게 됐다.
당시 셀주크에 저항했던 이들이, 테란 근교 알무트에 근거지를 뒀던 ‘이스마일 암살단’이다. 이들은 알무트 일대를 장악하고 셀주크 왕조의 주요 인사들을 암살했는데, 이들이 해시시를 흡입했다는 데에서 영어 단어 ‘암살 assassin’이란 말이 나왔다고 한다. 훗날 이들의 존재는 시아파 무슬림, 즉 이란인들의 폭력성을 강조하는 사례로 악용되기도 하니 씁쓸할 뿐이다.
셀주크 투르크는 1219년 몽골족에게 무너진다. 칸의 후예들은 페르샤 전역을 황폐화했다. 후세 입장에서 보자면 대규모 학살보다 더 안타까운 것이 문화유산의 파괴다. 칭기즈의 손자 훌라구 칸은 이란 땅에 일한국을 세웠는데, 가잔 Ghazan 칸 치세(1295-1304) 에 다시 역내 부흥이 이뤄진다. 그러나 1335년 아부 사이드 Abu Said 왕이 숨진 뒤 한국은 결국 사분오열한다.
이란 북동부에서 칭기즈의 후예들 중 강성했던 티무르가 제국 건설에 나선다. 티무르는 1381년 이란을 침공하고 북인도, 서역, 소아시아에 이르는 제국을 세웠다. 페르샤 천년 고도 시라즈와 이스파한은 다시 초토화됐다. 티무르 제국은 1405년 티무르 사후 급속히 쇠퇴했고, 1501년까지 간신히 명맥을 유지했다.
티무르 치하의 이란 북서부에는 사피 알 딘이라는 이슬람 셰이크(이슬람에는 원래 성직자 혹은 사제 개념이 없기 때문에 정확히 옮기기 힘들다)가 추종집단을 거느리고 살고 있었다. 당시 이단으로 배척받던 쉬아파들인 이들은 순니파의 탄압을 피해 은둔생활을 해왔다. 1499년 이 집단의 지배권을 장악한 이스마일이 정복전쟁을 일으킨다. 이스마일은 곧 이란 전역을 통일하고, 1501년 타브리즈 Tabriz 를 수도로 사파비 왕조 Safavid(1501-1736)를 수립한다.
이로써 이란은 652년 아랍족 침입 이후 1,000년 만에 이민족의 지배를 벗어난다. 오랜 이민족 통치로 이란인들은 반외세 심리와 이방인에 대한 환대라는 상반되는 의식구조를 갖게 됐다는 분석도 있고, 또 오랜 전제군주정과 외세 통치로 인해 절대권력에 굴종하는 공포심리가 체질화됐다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적어도 이란은 지리적인 틀에서 이란고원이라는 땅 안에 언제나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슬람학자들은 이란이 외세의 지배를 받기는 했지만 ‘결코 땅과 나라 이름을 잃은 적은 없었다’고 말한다.
티무르
이스마일은 쉬아 이슬람을 국교로 정하고 순니파들을 강제 개종시켰다. 쉬아 이슬람이 국교가 된 것은 이민족의 천년 지배를 끝낸 것보다도 현대 이란의 역사에 더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 됐다. 사파비 왕조는 초기 신정체제를 구축했다. 이스마일이 모든 권력을 갖고, 성직자와 관료, 군이 3대 권력집단으로 샤를 에워싸는 체제였다.
어쨌건 쉬아는 이단(이것도 역시나 이슬람에는 없는 개념인데, 일단 ‘소수파’라는 의미로 해석하자)이었다. 오스만 투르크(영어로는 오토만 제국, 오늘날의 터키)가 이단을 처벌한다며 1524년 이란을 침공해 타브리즈를 함락시킨다. 아마도 투르크는 유럽의 십자군 전쟁에서 이단 전쟁의 논리를 배운 듯 -_- 이란군이 반격에 나서긴 했지만 사파비 왕조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오스만은 1533년 이라크를 점령해버리고, 아제르바이잔과 코카서스 지배권을 놓고 사파비 왕조를 두고두고 위협한다.
사파비 왕조의 전성기는 샤 압바스 Shah Abbas(1587-1629) 때였다.
이란 역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존경받는 인물인 압바스는 이스마일의 증손자다. 선대 왕인 이스마일 2세는 자기 아버지한테 10년간 유배됐다가 탈출해서 정권을 장악했는데, 왕이 된 뒤에 형인 무하마드 호다반데 Mohammad Khodabande만 남기고 친족은 물론 아비의 신하들까지 모두 도륙해버린다. 공포정치에 질린 근위대가 호다반데를 옹립하는 쿠데타를 일으키려다 발각됐고, 압바스의 형 헤이다르마저 반란군을 이끌다 전사한다.
압바스는 10살 어린 나이에 반란군 지도자로 추대된다. 작은아버지에 맞서 왕위를 차지하기까지 압바스의 드라마는 ‘용의 눈물’ 같은 영웅신화 겸 전쟁이야기다. ‘타고난 군사전략가’인 압바스는 일단 ‘적의 적’인 오스만과 강화를 맺어 국경분쟁을 일단락 지은뒤 동쪽 우즈벡을 격퇴시킨다.
그리고는- 오스만과의 전쟁이다. 이라크, 그루지야, 코카서스를 탈환해 버린다. 정치적으로는 개혁가였다. 사제들과 귀족들의 사병(私兵)을 혁파하고 관료제를 강화하여 중앙집권제를 공고히 했다- 마치 왕건의 행로처럼, 그는 왕조의 창시자처럼 개혁을 강행한다. 그 덕에 정교 분리가 이뤄지기 시작했고, 종교에 독립적인 위계질서가 만들어졌다.
이란은 다시 동서양 교역중심지로 발달하기 시작한다. 전국 도시를 잇는 도로망과 숙박시설을 만들어 안전을 보장하고 비단 무역을 독점, 국가재정을 확충한다. 압바스는 바레인과 호르무즈 해협 섬들을 점령하고 인도양의 포르투갈 세력을 격퇴한다.
‘전성기’를 얘기하려면 문화가 빠질 수는 없다. 압바스는 심지어 ‘계몽군주’였다고 한다. 예술을 장려해 건축과 회화 등 페르시아 예술과 문화를 부흥시켰다. 이스파한을 새 수도로 정하고 사원과 궁전, 학교, 다리 등을 지어 세상의 절반(Nesf-e Jahan)이라 불릴 정도였다.
이란인들은 이스파한을 ‘이란의 심장’이라 하고, 수도인 테헤란은 ‘이란의 영혼’ 즉 머리라고 한다. 2003년에 지진으로 폐허가 된 밤 Bam을 가리켜서 외신들이 페르샤의 보석이니 에메랄드이니 했는데 사실 이란에서 밤은 대표적인 유적지는 아니다. 이란에서 가장 유명한 곳들(그러니까 관광지들)이라고 한다면 테헤란, 이스파한, 쉬라즈, 파브리즈라고.
샤 압바스의 프레스코화
압바스 2세(1642-1666) 통치기 뒤로 사파비 왕조는 내리막을 걷는다. 어떤 이는 압바스 2세를 영조에 비유한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굶겨죽인 것처럼, 압바스 2세는 아들이 역모를 꾀했다고 의심해서 처형해버린다. 손자 사피 1세가 뒤를 잇지만, 아비의 죽음으로 비뚤어진 이 왕은 공포정치로 살육전을 일삼는다(이건 정조와 다르다).
나라가 부실해진 틈을 타서 아프간이 쳐들어온다. 1722년 아프간의 부족장 마흐무드 Mahmud가 이스파한을 함락하고 마흐무드 1세로 즉위한다. 폐위된 술탄 후세인 왕의 아들이 신흥군벌 나데르의 힘을 빌어 왕위를 되찾긴 했지만, 이번에는 나데르가 반역을 일으켜 스스로 왕이 되어버린다. 사파비 왕조의 종말이다. 나데르는 초반 피치를 올리다 1747년 암살됐다. 이후 아프샤르, 잔드, 카자르 등 여러 왕조가 부침하는 혼란기가 이어진다.
근대 이란은 카자르 Qajars 왕조 (1795-1925) 시기부터라고 볼 수 있다. 아그하 모하마드 칸 Agha Mohammad Khan은 케르만 지방에서 잔드 Zand 왕조를 끝내고 카자르 왕조를 연 뒤 테헤란으로 천도했다. 하지만 성격이 극악무도해서 시종에게 살해되고 말았다고. 아들도 애비 못지 않았는지, 사치에 탐닉해 국고를 탕진하고 아제르바이잔을 러시아에게 빼앗기는 바보짓을 했다. 아제르바이잔은 이란 문화권인데 옛 소련 시절을 거치면서 나라가 완전히 비틀어졌고, 독립한 뒤에는 아수라장 꼴이 났다.
19세기 중엽부터 러시아와 영국이 이란을 침략하기 시작. 문제의 저 아들내미는 러시아와 두 번 싸워서 지고 끝내 코카서스를 빼앗겼고, 또 그 아들놈은 1857년 파리조약으로 헤라트와 아프간땅을 영국에 내줬다. 이른바 '그레이트게임'이라 부르는 혈전이었다.
헤라트는 아프간 서쪽, 즉 현재의 이란에 가까운 쪽인데 ‘페르샤 양탄자’의 본고장이다. 뒤에 영국은 아프간을 장악하려다 엄청 데이고 학을 뗐는데, 그 짓을 소련이 80년대 반복하고 지금 미국이 또 하고 있으니. 아무튼 아제르-이란-아프간 지역의 오늘날 국경선 윤곽이 저 바부팅이 왕 시절에 만들어진 셈이다.
낫세르 앗딘 샤 Naser ad Din Shah (1848-1896) 시절에 미르자 타키 칸 아미르 Mirza Taqi Khan Amir(위 사진)라는 재상이 있었다. 어느 제국이나 그렇지만 이슬람권은 관료제가 발달해 얘기 속에 ‘재상’이 자주 등장한다. 현명한 재상은 쓰러져가는 국가를 살리기 위해 과감한 개혁정책을 시도하였으나 관료들의 저항과 국왕의 견제로 결국 내쳐진 뒤 죽임을 당한다... 망조 든 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스토리다. 보통 아미르 카비르 Amir Kabir 라 불리는 이 재상은 이란에서 크게 존경받는 인물인데, 지금도 많은 이란인들이 그의 개혁이 중단됐던 것을 아쉬워한다고.
1871년 또 다른 재상이 다시 개혁을 추진했다가 역시 실패. 이란의 근대화는 결국 일그러질대로 일그러졌고, 자발적인 근대화가 이뤄지지 못했다. 영국의 경제침탈이 본격화되면서 민중의 반외세 운동도 거세졌다. 1890년에는 영국이 담배독점권을 가져가자 이슬람 지도자가 금연령을 포고, 결국 독점권을 되찾은 일도 있었다.
왕실은 썩어서 국가재산을 서구에 팔아치웠다. 상인과 학생, 지식인을 중심으로 왕권 제한 움직임이 분출되기 시작했다. 1906년 8월 무자파르 알딘 샤 Muzaffar al Din Shah는 제헌을 약속했고 12월에 근대적 헌법이 제정됐다. 되는 일이 없으려니, 이 왕이 닷새만에 죽었다. 뒤를 이은 모하마드 알리 샤 Mohammad Ali Shah는 입을 씻고 헌법을 파기한다. 그리고는 러시아 장교가 지휘하는 군대(코사크 병단)를 시켜 의회를 폭파해버린다.
봉기는 전국으로 확산됐다. ‘제헌 혁명’이라 부르는 이 봉기를 이끈 제헌파들은 1909년 7월에 테헤란에 입성해 샤를 몰아내고 헌정을 세운다.
1907년부터 러시아와 영국은 이란을 양분해 수탈을 하고 있었다. 1차 대전 중 이란은 영국, 러시아, 터키군의 전쟁터가 되어 짓밟혔다. 러시아가 1917 볼셰비키 혁명을 거치면서 내정에 정신 팔린 사이, 영국은 1919년 사실상 이란을 보호령으로 만드는 조약을 강요해 식민화한다. 이란인의 反英 감정은 극도로 고조됐다. 이를 기반으로 떠오른 인물이 코사크 부대 사령관인레자 칸 Reza Khan 이었다.
레자 칸은 1926년 '레자 샤 파흘라비'로 등극, 팔레비(파흘라비) 왕조(1926-1979)를 열어젖힌다. 레자 샤는 과감하고 체계적인 서구화에 들어간다. 부족 중심의 형태로 운영되던 군대를 혁신, 상비군으로 만들어 왕정의 권력을 강화했고, 관료제를 뜯어고쳤다. 전국을 포괄하는 교육제도를 도입하고 근대적인 대학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세속국가’를 지향했던 레자 샤의 원대한 야심을 알려준다.
옛날 우리나라에서 유학자들이 서당에 앉아 아이들을 가르친 것처럼 이슬람권에서는 이슬람학자들이 교육을 맡았었다. (이슬람권에는 오래전, 10세기부터 대학이 발달했는데 아프간에서 테러리스트 온상이 되고 있다고 (미국이) 지탄했던 ‘마드라사’가 이런 교육기관들을 가리킨다. 이집트 카이로의 알 아즈하르 성원(聖院)에 있는 대학은 세계에서 가장 오랜 대학 중 하나로 꼽힌다.)
레자 샤(위 사진)는 이슬람 학자들에게서 교육권을 빼앗아 종교적, 전근대적 사고방식 대신 세속적, 서구적, 합리적, 근대적 국민의식을 고양시키려 했다고 보면 되겠다. 그의 개혁으로 근대적 교육을 받은 관리들이 생겨나고 경제가 회복되고 중산층이 형성됐다.
교육 뿐만 아니라 사법권도 이슬람학자들에게서 근대적 사법기구로 넘어오게 됐다. 역시 이슬람의 독특한 측면인데, 이슬람은 종교라기보다는 종교-문화-사상-사회-정치체계의 통일체다. 꾸란의 말씀은 경전인 동시에 법전에 해당되고, 신과 인간 사이를 매개하는 ‘성직자’ 개념이 없는 대신 이슬람 학자 겸 율법학자들이 무슬림을 지도한다. 권위있는 율법학자들(다른 종교권에서는 ‘성직자’로 부르는)이 법률적 판단을 해서 발표하는 것을 파트와 fatwa 라고 하는데, 무슬림들에게는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서구 법체계의 ‘판례’에 해당된다고 보면 될 것 같다. 레자 샤는 근대적 사법체계를 도입해서 성직자들의 자의적인 판결 관행을 중지시키고, 1936년에는 여성들의 차도르를 없앴다.
하지만 개혁을 밀어붙이기 위해 반대세력과 언론을 강도 높게 탄압했다. 봉건적 특권을 박탈당한 이슬람 세력은 결국 왕조의 적이 되고만다. 왕가와 성직자(편의상 이렇게 부른다면)의 대립은 1979년 이슬람 혁명을 이해하는 주요한 열쇠다. 근본적으로 레자 샤의 근대화 정책은 봉건적 토지소유제도를 혁파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토대 없는 윗줄만의 개혁으로 그쳤고, 더욱이 개혁에 드는 비용도 농민 세금에 의존했기 때문에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레자 샤는 소련과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독일과의 경제관계를 강화했다. 열받은 소련과 영국은 1941년 이란을 침공해 레자 샤를 압박하기 시작했고, 위기감을 느낀 그는 결국 아들 무하마드 파흘라비에게 왕위를 넘겨준다. 레자 샤는 영국군에 체포돼서 영국과 모리셔스 등지를 전전하다 1944년 남아공의 요하네스버그에서 외롭게 죽어갔다.
파흘라비 왕조는 친미 부패왕조의 이미지가 워낙 강하긴 하지만, 적어도 레자 샤는 카자르 왕조 말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개혁을 추진, 이란인에 의한 근대화를 추진하고 제국주의에 맞서려 했던 정치가로 평가해야 한다...고 오늘날의 사가(史家)들은 말하고 있다 -_-
잘 모르긴 하지만, 그의 개혁이 성공했었다면 터키의 케말 아타튀르크(터키의 아버지)처럼 ‘이란의 아버지’가 되었을 지도 모르겠다. (역사에서 ‘만약’을 가정해보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가능성들을 점검해보고 점쳐보고 실패의 원인을 찾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고, 또 재미삼아 ‘만약에~’ 해보는 것만 해도 아주 좋다. 왜 그걸 나쁘다 하는지 모르겠다)
레자 샤의 개혁이 케말 파샤의 개혁과 다른 점이 있었다면? 케말은 공화정을 택했는데 왜 레자 샤는 왕정을 택했을까? 더 재미난 것은, 터키와 이란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점일 것이다. 터키는 서방에서 ‘서구화해서 성공한 케이스’라고 떠들어대고 있고 (실제로는 터키를 미워하면서) 이란은 서방에서 ‘악마의 나라’로 몰아붙이고 있는데, 과연 그럴까.
아들 파흘라비(보통 ‘팔레비 국왕’으로 불리는) 즉위 뒤인 1941년 소련과 영국은 이란을 침공한다. 이란은 연합국의 병참기지가 되었고, 영국과 소련의 경제적 침탈도 심해졌다. 소련군은 2차대전 종전후에도 가장 늦게까지 이란에 주둔했으며 이를 배경으로 이란 공산당인 투데당 Tudeh party이 세력을 불렸다.
반외세 민족주의를 내세운 모하마드 모사데그 Mohammad Mossadegh (위 그림)가 이끄는 국민전선이 약진을 보이자 1951년 국왕은 등 떼밀려 그를 총리에 임명한다. 모사데그 총리는 취임과 동시에 유전 국유화를 단행했다. 이란 유전을 꿰차고 있던 영국은 이란의 돈줄을 차단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모사데그가 투데당과 협력할 움직임을 보이자, 미국의 아이젠하워 정부까지 나서 군부 쿠데타를 사주한다. 모사데그는 반역 혐의로 체포된뒤 3년간 복역하고 고향에 가택연금됐으며 1967년 사망했다.&
모사데그를 쫓아낸 샤는 친미, 친영 노선을 노골화하고 비밀경찰(SAVAK)을 동원해 반대파를 탄압했다. BP, 더치 셸 같은 서방 석유회사들이 이란의 유전을 장악했다. 1955년에는 바그다드조약이 성립된다. 바그다드조약기구(중동조약기구 METO)는 터키·이라크·이란·파키스탄·영국으로 구성된 상호방위동맹으로, ‘가맹국의 안전을 위한 협력’을 목적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소련의 중동진출을 막기 위해 결성된 것이었다. 회원국이 아닌 옵서버 자격으로 참가한 미국이 이 기구를 좌지우지했다. 1958년 이라크가 바트당 혁명 뒤 탈퇴하면서 이 기구는 해체되고 소련에 맞선 군사조약기구인 중앙조약기구(CENTO)가 만들어진다.
METO에 반강제적으로 가입한데 이어 국왕은 1959년 미국과 방위조약을 체결, 미군 주둔을 허용한다. 1963년 파흘라비는 6개항의 개혁조치를 국민투표에 부쳐 이른바 ‘백색혁명’을 시작했다. 주내용은 토지개혁, 근로자에 회사 이윤 분배, 삼림과 목초지 국유화, 국영사업장 매각, 노동자 농민에 유리하게 선거법 개정, 문맹퇴치 지원 등이었으며 여성에게도 투표권을 부여했다. 특히 역점을 두어 추진하였던 토지개혁은 아버지 레자 샤 시절 무산됐던 것으로, 파흘라비 국왕이 솔선해서 왕실 토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하기도 했다.
하지만 토지소유자와 겹치는 이슬람 성직자층은 이 조치에 크게 반발한다. 이들은 호메이니의 지도 아래 반(反)백색혁명 운동을 벌였다. 호메이니는 가택연금 됐다가 이듬해 터키(뒤에는 이라크)로 망명했다.
성직자들의 반대 속에서도 토지개혁은 진행됐고, 경제도 나아졌다. 국정에 자신감이 생긴 파흘라비는 1967년 10월 오랫동안 미루어 왔던 대관식을 치르고 1971년에는 페르샤 제국 창건 2,500주년 기념식을 페르세폴리스에서 성대히 거행하기도 했다. 내정이 안정되자 그는 중동의 경찰 역을 자임하고 군비 강화에 나섰다. 내용은 실상 미제 무기 수입이었다. 국민들은 이런 친미노선에 굴욕감을 느꼈고, 이슬람 전통을 무시한 서구화 정책에 반감을 가졌다.&
1979년 이슬람혁명 이전에 노엄 촘스키가 쓴 글을 보면, 이란이 당시 중동에서 지금의 이스라엘과 같은 역할, 즉 ‘미국의 경비견 노릇’(이건 내 말이 아니라 이스라엘 어느 총리의 표현이다)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모사데그 국민전선의 한 분파인 이란자유운동, 아야툴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이끄는 이슬람세력, 페다인과 무자헤딘 등 무장단체들이 모두 반 파흘라비 전선에 나서기 시작했다. 반왕정 운동은 점차 조직화되어갔다.
과시성 사업과 군비 강화에 예산을 낭비한 결과, 이란 경제는 1976년 후반부터 눈에 띄게 악화되기 시작했다. 왕정의 무능과 부패 속에 빈부격차는 오히려 커졌다. 전반적으로 파흘라비의 '백색테러' 통치는 너무나도 잔혹했고, 온 국민을 공포로 몰아갔고, 재정을 엄청나게 탕진했고, 이란을 빈사상태로 몰아갔다.
1977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지미 카터는 그간 묵인해왔던 왕정의 인권탄압에 우려를 표하고 개선을 요구한다. 그러던 차에 78년 왕정은 호메이니를 음해하는 기사를 친정부 신문에 게재, 국민을 자극하고 쿰 시에서 열린 신학생 데모를 유혈진압한다. 이스파한의 바자르가 항의표시로 철시하고 시위에 나서자 다시 무자비하게 해산하는 등 78년 벽두부터 시위와 유혈진압의 악순환이 시작됐다.
8월 아바단에서 시위군중이 경찰을 피해 들어간 렉스 시네마에 불이 나서 400여명이 숨지는데, 훗날 조사에서는 광신도의 방화로 밝혀졌지만 당시에는 누구나 비밀경찰의 소행으로 믿었다. 9월 성난 군중이 테헤란 시내 잘레흐 광장에 운집하자 경찰이 무차별 발포, 유혈극이 벌어졌다.
이라크는 이란의 압력에 따라 호메이니(위 사진)를 추방했으며 호메이니는 프랑스 파리로 망명해간다. 그의 프랑스 망명은 오히려 이란 반정부운동이 국제적 주목을 받게 하는 계기가 됐다. 12월 파흘라비 국왕은 온건파인 국민전선 지도자 바크티아르 Bakhtiar와 협상, 바크티아르에게 총리직을 맡기고 출국하기로 결정한다. 이듬해 1월 파흘라비는 이란을 떠났다.
그러나 79년 출범한 바크티아르 정부에 대해 호메이니는 ‘불법’임을 선언하고 타도령을 내린다. 2월1일 호메이니 귀국. 군부마저 호메이니 지지로 돌아서자 바크티아르마저 망명해버리고 2월12일 왕정은 완전히 종식됐다. 이것이 이란 이슬람혁명이다.
1979. 2. 5. 호메이니는 메흐디 바르자간 Mehdi Bazargan을 임시정부 수반으로 지명한다. 하지만 이슬람최고혁명위원회가 사실상의 정부였고, 정규군과 별도로 이슬람혁명수비대가 만들어져 무력으로 뒷받침했다. 12월에는 이슬람공화국을 표방한 새로운 헌법이 채택됐다.
테헤란 주재 미대사관 인질사건(11. 4.)이 없었더라도 미국은 이란을 그냥 두지 않았을 것이다. 왈러스틴과 헌팅턴의 책을 읽으면서, 생각했던 것보다 미국이 느낀 ‘체제 충격’이 어마어마하게 컸다는 사실에 좀 놀랐었다. 아무튼 인질사건으로 바자르간은 사임했다.
1980년 1월 바니 사드르 Bani Sadr가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됐지만 혁명세력을 누르지 못했다. 사드르는 1년만에 실각해하고, 무자헤딘(MKO) 지도자 마수드 라자비 Masoud Rajabi와 함께 81년 7월 파리로 망명했다. 사드르는 파리에서 호메이니 축출 운동을 전개했지만 이란의 권력투쟁은 승패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성직자 계급의 승리 이후 이란은 교조주의로 치닫는 동시에, 정정불안과 암살이 횡행한다. 사드르 실각 뒤 취임한 알리 라자이 대통령과 자베드 바호나르 총리가 나란히 암살됐다. 혁명위원회는 분쟁을 잠재우기 위해 저항조직을 해체하고 3000여명을 처형했다. 81년말 혁명은 초기의 불안단계를 극복하고 제도적으로 완성되었다.
여기서 사담 후세인이 등장한다. 이라크는 인구의 65%가 시아파이고, 시아파의 종주국은 이란이다. 이슬람국가들 중에서 시아파 인구가 많은 나라는 이 둘 뿐이다. 후세인은 이란 혁명의 파고가 넘어올까 두려워 선제공격을 해버린다. 주변 아랍국가들의 명시적, 암묵적인 지지 속에 80년 7월 이란-이라크 전쟁이 시작됐다. 표면적인 이유는 Shatt al-Arab 수로의 영유권 다툼이었다.
개전 후부터 1982년 여름까지는 이라크가 공격의 주도권을 잡았으나 1982년말부터 이란이 초기의 열세를 극복하고 반격에 나서면서 지리한 소모전에 돌입한다. 미국 무기로 무장하고서도 미국의 이라크 지원사격으로 고립지경에 빠진 이란은 국민들의 ‘혁명 수호 의지’로 패전을 면할 수 있었지만 인명피해는 이란 쪽이 훨씬 컸다. 그러나 외적의 침입으로 오히려 이란 내에서는 혁명 분위기가 공고해지는 효과가 있었다.
전쟁이 89년 9월 유엔 중재끝에 종료되고 호메이니도 사망(1989년 6월)했다. 지금은 호메이니의 뒤를 이은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위 사진)가 최고지도자로 군림하고 있다. 핵 개발 의혹을 둘러싼 서방의 공세와 경제제재, 개혁파-보수파 정권이 교대로 집권하면서 벌어지는 내부의 정치적 갈등 등이 반복됐다.
2013년 중도 온건파 하산 로하니 대통령의 당선은 미국과의 오랜 앙숙관계를 해빙 무드로 전환하는 계기가 됐다. 로하니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역사적인 통화', 핵 협상 잠정 합의, 그리고 2015년 7월의 핵 합의. 2016년 1월 16일, 미국과 유럽연합(EU)은 마침내 이란에 대한 경제제재를 풀었다. 오랜 세월의 고립에서 풀려난 이란은 중동에, 세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
■ 왕조사 연표
고대 페르시아 왕조(B.C. 559-330)
사산 왕조(A.D. 226-651)
아랍의 지배(651-1258)
몽고의 지배(1256-1349)
티무르 왕조(1369-1500)
사파비 왕조(1501-1736)
아프샤르 왕조(1736-1749)
카자르 왕조(1796-1925)
파흘라비 왕조(1925-1979)
이란 이슬람공화국(1979-)
■ 근대정치사 연표
1906년 입헌군주국 수립, 샤 통치 종식
1919년 페르시아조약 -영국 보호령이 됨
1921년 레자 칸의 쿠데타
1925년 카자르 왕조 멸망, 파흘라비 왕조 건국
1935년 이란(Iran)으로 국호 변경
1941년 모하마드 레자 즉위(9월)
1951년 모사데그 정권 수립
1953년 모사데그 실각
1962년 백색혁명 시작(1월)
1963년 호메이니 망명(6월)
1977년 재미 유학생 반정부시위(11월)
1978년 반정부 시위 전국 확산(3월)
1979년 파흘라비 망명, 호메이니 귀국(2/1), 이슬람공화국 선포(4월), 미대사관 인질사건(11월)
1980년 바니 사드르 대통령 당선(1/25), 이란-이라크전쟁 발발(9/21)
1986년 미국 관리 비밀 방문(이란-콘트라 스캔들)
1988년 이라크와 휴전협정 체결(8/20)
1989년 호메이니 사망(6/3)
1993년 라프산자니 제6대 대통령 취임(8/4)
1997년 하타미 대통령 당선(5월)
2001년 하타미 대통령 재선(6월)
2005년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 취임(8월)
2009년 아마디네자드 재선, 반정부 시위와 유혈사태(6월)
2013년 중도온건파 하산 로하니 대통령 당선
2015년 P5+1(유엔 안전보장이사회 5개 상임이사국과 독일)과 핵 협상 타결
2016년 1월 제재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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