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아메리카vs아메리카

보스턴 사건, '실패한 아메리칸 드림'의 비극

딸기21 2013. 4. 28.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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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낡은 차를 사들여 모양 좋게 고친 뒤 파는 일을 했습니다. 어머니는 이주여성들이 흔히 하듯 미용실에서 일하며 돈을 벌었습니다. 두 아들은 운동에 재능이 있었고, 살림살이도 피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몇년 전부터 모든 게 잘못되기 시작했습니다. 불경기탓에 아버지의 사업은 흔들렸습니다. 

아들들은 마리화나와 술에 빠져 공부를 게을리했습니다. 기대를 걸었던 큰아들의 방황에 실망한 어머니는 가족의 오랜 ‘뿌리’로 돌아가야 한다며 이슬람에 귀의했고, 큰아들이 곧 어머니를 따랐습니다.

 

미국 보스턴 마라톤대회 폭탄공격을 저지른 타멜란·조하르 차르나예프 형제의 가족 이야기입니다. 10년도 더 전에 미국으로 이주해 적응하며 살아오던 젊은 형제는 어째서 제2의 고향인 보스턴에, 몇년간 얼굴 맞대고 지내오던 이웃을 향해 폭탄을 날렸을까요. 

미국 사회가 이들 형제의 범행 동기를 놓고 고민에 빠진 가운데, 워싱턴포스트가 27일 이 가족의 과거를 재구성한 기사를 실었습니다. 차르나예프 일가의 행로는 러시아(옛소련)와 중앙아시아, 미국을 오가며 20여년간 펼쳐진 한 가족의 슬픈 유랑기이자 ‘실패한 아메리칸 드림’의 기록이었습니다.

아메리칸 드림. '실패한' 아메리칸 드림. 이들 가족의 이야기를 읽다보니 문득 버지니아텍 총기난사 사건을 일으킨 조승희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그 때도 미국 사회는 충격에 빠졌고(사망자 수는 보스턴 사건보다 그 때가 훨씬 많았지요) 한 한국인 이민자 가정의 '실패한 아메리칸 드림'을 들여다본 보도들이 잇따랐습니다. (심지어 한국에선 "조승희의 고국인 한국이 미국인들의 용서를 빌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와 아연케 했던 기억도 나는군요. ;;)



지난 19일 사살된 큰아들 타멜란은 1986년 러시아 남부 다게스탄의 체첸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안조르와 어머니 주베이다트는 옛소련이 무너진 뒤 1991년 잠시 체첸으로 옮겨가 살다가, 이듬해 친척들이 모여 사는 키르기스스탄의 톡목으로 이주했습니다. 왜 갑자기 키르기스스탄이냐고요? 1940년대 스탈린의 강제이주 조치로 등떼밀려 간 체첸인들이 그곳에 마을을 이뤄 살고 있었거든요. 아메리칸 드림을 향한 일가의 꿈은 이렇게 멀지 않은 과거의 어두운 역사와 이어집니다.

1993년 톡목에서 둘째 아들 조하르가 태어났습니다. 두 아들 사이에는 벨라와 아일리나라는 두 딸도 있었습니다. 나이로 미뤄보면 대략 타멜란(살아있었다면 26살)-벨라(25~23살 사이)-아일리나(22살)-조하르(19살)의 순서이겠군요. 

친척들에 둘러싸여 살던 가족은 1999년 다게스탄의 수도 마하치칼라로 다시 거주지를 옮겼습니다. 하지만 이미 여러번 옮겨다닌 가족에게 이 곳도 그리 살가운 고향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소련이 무너진 뒤의 러시아, 그 중에서도 저 아래 변경의 다게스탄 자치공화국, 그나마도 거기 이주해온 체첸계 주민이라니. 먹고 살기 힘든 것은 여기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미국으로 이민간 친척이 이 가족에게는 빛이자 희망이었습니다. 안조르의 형인 루슬란 차르나예프는 1995년 미국으로 가 법학 공부를 했으며 거기서 자리 잡고 취직을 했습니다. 이름도 '차르나예프'가 아닌 ‘차르니’로 바꿨습니다. 보스턴 공격 범인들의 윤곽이 드러난 뒤 미국 언론들이 달라붙어 일제히 인터뷰했던 사람이 바로 이 루슬란 삼촌이랍니다.

20만달러 이상의 연봉을 받으며 메릴랜드주 몽고메리 카운티에 제법 큰 집을 장만한 루슬란은 피붙이들을 줄줄이 미국으로 불러들였습니다. ‘아메리칸 드림’을 현실로 일궈낸 형의 뒤를 따라 안조르도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2002년 미국에 이주했습니다. 다게스탄에 남겨뒀던 큰아들은 이듬해 누이를 시켜 데려오게 했습니다.

 

미국에서 살게 된 타멜란은 권투에 재능을 보였습니다. 센 상대를 만나도 방어보다 잽에 치중하는 공격적인 선수였다고 합니다. 싸구려 옷으로라도 멋을 부리려 애썼고, 임대해 살던 집 마당에서 저녁마다 복싱 연습을 했습니다. 

'조하르(Djokhar)' 대신 미국식으로 ‘자하르(Jahar)’라 불렸던 둘째아들은 미국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과 똑같았습니다. 금발의 여자애에게 푹 빠져 연애를 했고, 고등학교 레슬링팀의 주장을 했습니다. 다트머스에 있는 매사추세츠 주립대학에 진학한 뒤로는 의사의 길을 꿈꿨습니다.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2006년 무렵이었습니다. 타멜란은 벙커힐 커뮤니티컬리지에 진학했지만 공부를 작파한 채 술과 담배에 빠져 겉돌았습니다. 걱정이 된 어머니는 아들에게 이슬람의 가르침을 전하려 애썼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마음을 잡으려 했겠지요. 

'왜 이슬람이었느냐'라 묻는다면 우문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추방과 망명과 이주를 오간 체첸의 후손들에게 ‘고향’은 없었습니다. 이들이 돌아갈 뿌리가 있다면 이슬람뿐이었습니다. 2007년부터 이슬람 근본주의자인 아르메니아계 무슬림 친구 미샤가 형제의 집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습니다. 돈 벌어 먹고사는 게 중요했던 아버지는 아내와 아들이 이슬람에 갈수록 헌신하는 것이 싫었지만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2009년 이후로는 살림이 완전히 기울었습니다. 이주 초반만 해도 시간당 10달러 이상 벌었던 아버지는 더이상 수입이 없었습니다. 타멜란은 2010년 결혼해 딸 하나를 두었지만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았고, 아내가 버는 돈으로 먹고 살았습니다. 모스크에 가서도 무슬림들과 싸웠습니다. 이맘(이슬람 지도자)이 마틴 루서 킹 목사를 언급하며 종교간 화합을 설교하자 소리지르며 싸웠고, 이웃의 무슬림 상인이 추수감사절 음식을 판매하자 가게에 뛰어들어가 난동을 부렸습니다. 


2011년 아버지 안조르는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안조르와 주베이다트는 돈 문제와 아들들 문제 등으로 싸우다 이혼했습니다. 안조르는 지난해 초 “고향에 돌아가 죽겠다”면서 다게스탄으로 가버렸고, 주베이다트는 백화점에서 물건을 훔쳐 체포됐다 풀려난 뒤 같은 해 말 역시 다게스탄으로 돌아갔습니다. 

(안조르는 보스턴 사건 뒤 미국에 가서 큰아들의 주검이라도 거둬오겠다고 했다는데, 사건의 충격 때문에 병세가 악화돼 미국행을 포기하고 모스크바의 병원에 입원했다는군요)


미국에 남은 자식들은 엇나갔습니다. 큰딸 벨라는 지난해말 뉴저지에서 마리화나 소지죄로 체포됐다 풀려난 뒤 연락이 끊겼다고 합니다. 뉴욕으로 간 둘째딸 아일리나는 워싱턴포스트 기자가 아파트로 찾아가자 "가족과는 연락을 하지 않고 있다"는 말만 했다고 합니다. 

아일리나는 오빠와 남동생의 어마어마한 범행 소식을 듣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어머니는 방황하던 큰아들을 끝내 포기하지 못했나봅니다. 타멜란은 주거보조금이 끊기면서 집을 비우라는 집주인의 독촉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주베이다트는 다게스탄에 가서도 큰아들에게 돈을 부쳤습니다. 하지만 큰아들은 경찰에 쫓기며 마지막 통화를 한 뒤 결국 사살됐습니다. 

아마도 형의 영향으로 보스턴 공격을 저질렀을 둘째아들은 체포돼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일가족의 비극을 지켜본 삼촌 러슬란은 워싱턴포스트에 “보스턴에 가서 조하르를 면회하고 ‘아직은 널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네게서 악을 떠나보낼 시간이 남아있다’고 얘기해줄 생각”이라고 말했습니다. 보스턴 시내 병원에서 치료받던 조하르는 26일 의료시설이 있는 구금소로 옮겨졌습니다.

 

어머니는 지금도 아들들이 무죄라 주장합니다. 주베이다트는 친척 명의의 은행 계좌를 열고 조하르 구명운동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수사당국은 주베이다트가 아들들과 이슬람 극단주의 집단의 연결고리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습니다. 

주베이다트는 2011년 타멜란과 전화로 지하드(이슬람 성전)를 모호하게나마 논의했으며, 미 당국이 주시하던 또다른 위험인물과도 통화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러시아 연방보안국은 도청을 통해 이를 파악했지만 미국에 타멜란에 관한 정보를 주면서 정작 이 내용은 빠뜨렸습니다. AP통신 등은 러시아가 보스턴 사건 후에야 뒤늦게 미 연방수사국에 이런 정보를 전달했다고 27일 보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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