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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1차 대전 이후의 루마니아

딸기21 2015. 2. 12.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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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1차 대전 이후의 루마니아


루마니아. 동유럽에서 크고 인구가 많은 나라이죠. 요즘엔 서유럽으로 향하는 이주자들이 많다는 이유로 유럽 부자나라들의 눈총을 받는 나라이기도 하고요. 헝가리, 폴란드 등의 '민족국가' 성립에 대해 알아봤으니 이번엔 루마니아로 가봅니다.

 

오늘날 루마니아는 동유럽에서도 가장 '전근대적인' 잔재가 많이 남아 있는 나라라는 평을 듣습니다. 근대로 접어드는 시기의 루마니아에는 어떤 장애물들이 있었는지 알려면 그 이전의 이 지역을 살펴봐야겠지요. 오스만 투르크 제국으로 잠시 거슬러올라가면, 그리스계인 파나리오테스 세력을 만나게 됩니다. 이들은 부패한 오스만 궁정을 매수해서 18세기 내내 왈라키아와 몰다비아 공국의 왕위를 장악했습니다. 


현재의 루마니아. romaniatourism.com



그리스계와 러시아계의 지배, 계속되는 봉건주의의 잔재


오스만의 그리스계는 초초단순화해서 말하자면 '비잔틴의 후예들'입니다. 그리스계는 옛 비잔틴 관료들처럼 의식에 치중했고, 지주계급을 편들었고, 술탄의 눈치를 보면서 자신들의 지배권을 지키기에 바빴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지배를 받는 지역에 동유럽에서도 가장 억압적이고 불공평한 사회제도가 굳어졌습니다. 


소수의 특권 엘리트 지배층이 다수의 빈민, 농민, 도시 거주민들을 다스렸습니다. 그러다가 19세기 내내 러시아 세력이 다뉴브 북쪽에 힘을 미치면서 러시아 보호령들이 여러 개 생겨났고 1829년에는 아예 그리스 세력을 대체했습니다. 러시아의 봉건주의까지 이 지역에 그늘을 드리우게 된 것이죠.



루마니아 민족주의가 처음 시작된 곳은 합스부르크 제국 하에 있던 트란실바니아였습니다.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루마니아인들은 경제적, 종교·문화적 정체성을 내세워 카르파티아인들을 몰아내려 했습니다. 1848년 혁명도 이런 맥락에서 일어난 운동이었습니다. 


An image of the Phanariotes in Wallachia. Caption reads: "Flight of Prince Mavrogenes in Bucharest while k.u.k. troops approach; XXX 9th 1789". /위키피디아


반면 루마니아 공국에서 나타난 민족주의는 대단히 관료적이고 봉건적인 형태를 띠게 됐습니다. 루마니아 민족주의자들은 오스만 제국과 파나리오테스 지배의 흔적을 지우고 ‘대 루마니아’를 실현하기를 꿈꿨습니다. 사회 개혁에 바탕을 두고 있고 평등주의적이었던, 그리고 합스부르크 제국 안에서 다른 민족들과의 형평에 맞는 지위를 인정받는 것이 목표였던 트란실바니아 루마니아인들의 운동과는 큰 차이가 있지요. 


카를1세, 마침내 트란실바니아를 차지하다


1848년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1857년까지 번갈아 루마니아 공국을 지배했습니다. 유럽 열강들은 1858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왈라키아와 몰다비아 연합공국을 세우기로 결정했습니다. 알렉산데르 쿠차 Alexander Cuza(1859-66년 재위)가 선거에서 이겨 두 공국을 합한 연합공국의 대공이 되었습니다. 1862년까지 연합공국은 하나의 국가로 대접받았습니다. 쿠차는 내부 반발을 억누르고 대공의 권한을 강화하다가 1866년 반대 세력에 납치, 강제퇴위를 당했습니다.


그의 자리는 독일 호엔촐레른-지그마링겐 왕가의 카를1세 대공 Karl I Hohenzollern-Sigmaringen (1866-1914년 재위)이 넘겨받았습니다. 그는 러시아와 투르크 간 전쟁(1877-78년)에 참전해주는 대가로 1878년 러시아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인정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대신 베사라비아는 러시아에 넘겨줘야 했습니다. 1881년 카를은 스스로 국왕 자리에 올랐습니다. 


뜬금없이 등장하는 Bicaz 호수... 루마니아 최대의 인공호수라네요


오옷 이거슨 루마니아의 카펫들...여기도 한 카펫 하나봅니다!


카를1세의 재위 기간은 부유한 지주 계급과 가난한 농민 계급 간의 갈등과 소요, 그리고 오랜 군법통치에 따른 억압으로 특징지을 수 있습니다. 


카를1세는 트란실바니아의 루마니아 민족주의자들을 설득, 1차 대전을 앞두고 루마니아 왕국과의 연계를 강화하게 만들었습니다. 1883년 연합국 진영에 합류한 그는 트란실바니아를 차지하고 싶어 했고, 그래서 트란실바니아의 헝가리 마자르계와 루마니아계의 갈등을 유도하고 루마니아 민족주의자들의 반 마자르 감정을 부추겼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 헝가리 쪽 정부를 이끌던 마자르인들은 자국 내 루마니아인들을 부추기는 카를의 선동을 막으려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합스부르크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는 마자르인들을 불신하고 있던 차... 그래서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루마니아에 트란실바니아를 넘겨주기로 카를과 밀약을 맺었습니다. 그 대신 루마니아는 합스부르크 제국에 결합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마침내 트란실바니아가 카를1세의 뜻대로 루마니아 땅이 된 것은 후임자인 페르디난드1세 때였습니다. 모두 1차 대전 덕분이었지요 1차 대전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되면서 마자르족과 독일계 인구가 살던 지역을 포함해 트란실바니아는 결국 루마니아에 귀속됐습니다. 



트리아농 이후의 헝가리... 이러니 헝가리가 화가 나, 안 나?
 www.best-things-in-hungary.com


1918년 말 볼셰비키 혁명 이후 어수선했던 러시아 상황을 이용, 루마니아는 루마니아인, 투르크인, 불가리아인, 우크라이나인, 러시아인들이 섞여 살고 있던 베사라비아까지 병합했습니다. 트리아농 조약은 이들 영토까지 루마니아 것으로 인정해줬습니다. 


루마니아는 새로 병합한 땅의 소수민족들을 억압하기 위한 조치들을 실시했습니다. 각 지역 정부에서 루마니아계가 아닌 소수민족 관리들을 조직적으로 제거했고, 공립학교들을 이용해 소수민족의 ‘루마니아화’를 진행시켰습니다. 소수민족 기독교회들과 사립학교들은 정부가 몰수하거나 문을 닫았습니다. 소수민족에 대한 고문과 감금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땅 차지한 뒤에는 곧바로 소수민족 억누르기


겉으로는 자유주의와 법치를 내세웠지만 당시 루마니아의 소수민족 탄압은 가히 광적이었다고 합니다. 1923년 제정된 루마니아 헌법은 자유민주주의의 이상을 담고 있었습니다. 법률 자체는 훌륭했는데, 늘 그렇듯 문제는 집행.... 루마니아의 농지개혁은 결국 소수민족들의 땅을 빼앗고, 종교·교육활동을 탄압하는 방향으로 진행됐습니다. 


루마니아계가 아닌 민족들의 교육·문화는 정부의 직접 통제 아래로 들어갔습니다. 농촌에 반유대주의 바람이 불면서 소수민족들의 형편은 더 나빠졌습니다. 이유가 있었지요. 억압적인 지주들에 대한 분노는 폴란드 등지에서 넘어온 유대인 마름들에 대한 적대감정으로 표출됐고, 거기에 가톨릭 중심주의까지 겹쳐졌습니다.


King Ferdinand of Romania. 사진 위키피디아


카를1세의 뒤를 이은 루마니아 왕국의 두번째 군주는 페르디난드1세(Ferdinand I, 1865-1927, 재위 1914-1927)였습니다. 카를1세에게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형의 둘째 아들인 페르디난드가 삼촌의 뒤를 이어 왕이 된 것이었지요. 


왕비가 영국 출신('에든버러의 마리아'라고 불리던 여인)이었던 것도 있고 해서 1차 대전 때 연합국 편에 섰고, 그 덕에 트란실바니아와 베사라비아 등등을 루마니아 영토로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권위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자유민주주의의 외피를 쓰고 정치안정을 유지하기엔 역부족이었던 것입니다. 부실하고 문제 많은 토지개혁에 대한 반발, 소수민족 억압에 대한 항거, 반유대주의 등으로 인한 소요가 일어나고 정치권에는 암살이 판을 쳤습니다.


이 때 주로 문제를 일으킨 것이 ‘철의 수호대 Garda de fier’라 불리던 극우조직이었습니다. 페르디난드1세의 뒤를 이은 카를2세(1930-45년 재위)는 혹독한 탄압을 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철의 수호대’는 유럽의 초창기 파시즘 운동의 하나였습니다. 카를2세는 1938년 이 조직 지도자의 살해를 명령했습니다.


★철의 수호대 Garda de fier


'철의 수호대'의 상징... 걍 쇠창살이네요;; /위키피디아


1927년 루마니아 극우파 코르넬리우 젤레아 코드레아누 Corneliu Zelea Codreanu 가 설립한 파시스트 조직입니다. 공식 명칭은 ‘대천사 미하일 군단 Mişcarea Legionară’이고, ‘철의 수호대’는 1930년 코드레아누가 창설한 미하일 군단 산하 준군사조직의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1935년에는 정당으로 변신해 ‘조국을 위한 모든 것 Totul pentru Ţară’으로 명칭을 바꿨습니다.


'철의 수호대'는 2차 대전이 일어나는 시기까지 좌익과 자유주의 인사들에 대한 살해·납치 등을 일삼았으며 소수민족 억압과 유대인 탄압에 앞장섰습니다. 녹색 유니폼(Cămăşile verzi)과 로마 병정 스타일의 경례로 상징되는 이들의 활동은 당시 사람들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합니다. 


1990년대 사회주의가 무너진 뒤에 이들을 본뜬 네오나치들이 다시 나타나 같은 이름의 조직을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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