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1차 세계대전 시기의 동유럽
7월 28일이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지 100년 되는 날입니다. 그래서 요즘 1차 대전에 대한 외신들을 종종 접하게 되네요. 유럽 사람들은 어떤 눈길로 100년 전의 전쟁을 되돌아보고 있을까요.
1차 대전. 세르비아계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계승자였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을 암살하면서 시작됐다고들 하지요. 전쟁을 불러온 '사라예보의 총성'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분분합니다만, 초간단 설명으로 요약하자면...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장차 물려받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점령통치하고 있었고,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는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자기네를 탄압한다며 독립국가인 세르비아와 합쳐서 자기네 민족의 나라를 만들고 싶어했고, 그래서 세르비아계인 프린치프는 대공을 죽였다는 것.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1차 대전은 '아무도 원치 않았던 불상사'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모든 열강이 이 전쟁을 막으려 애를 썼지만 전쟁은 결국 일어났습니다. 선전포고를 했지만 '대전'으로 만들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전쟁의 불길은 활활 번졌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아무도 원치 않았지만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전쟁'이라고 해야 하려나요.
sueddeutsche.de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를 상대로 국지적인 전쟁을 치러서, 세르비아의 민족주의로 인한 위협을 꺾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1914년 7월 합스부르크가가 군대를 일으켜 세르비아를 침공하자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습니다.
이렇게 확전된 배경에는 그놈의 '세력균형'이라는 게 있습니다. 원래는 전쟁을 막기 위해서, 어느 한쪽이 지나치게 강해지는 걸 막기 위해서 약한 쪽들이 손을 잡고 균형을 맞춘다는 의미죠. 그런데 이것이 왜 국지전을 '세계대전'으로 만들었을까요. 각국이 군사행동의 확산을 막아보려고 애썼지만 이미 동맹 관계로 거미줄처럼 얽혀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확전은 불가피했습니다.
러시아는 세르비아와 동맹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맞서 군사행동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독일도 ‘동맹국’의 멤버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편들기 위해 전쟁에 끼어들어야 했습니다. 프랑스는 러시아와 협력관계였으니 역시 개입하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었습니다. 군사를 이동시킨다는 것은 전투를 피할 수 없다는 뜻. 사라예보의 총격 이후 한 달이 지날 무렵이 되자 이미 모든 열강들이 전면전에 휘말려 있었습니다.
분쟁은 발칸 반도에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에 쉽사리 승리를 거둘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두번째 역설이 도출됩니다. 모두가 '빨리' 상황을 정리하고 싶어했습니다. 모든 세력이 신속 공격으로 빠른 승리를 거두는 전술을 택했기 때문에 결국 아무도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비참하고 비용도 많이 들어가는 군사작전이 계속됐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최종적인 승리는 천문학적인 비용과 자원을 조달할 능력이 있는 쪽, 막대한 인명 피해와 오랜 전쟁으로 인한 사회경제적 압력을 감당할 능력이 있는 쪽에게 돌아가게 되겠지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 간의 전쟁은 엎치락뒤치락하며 1915년까지 질질 끌다가, 불가리아의 개입 덕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쪽으로 승세가 기울었습니다. 당초 불가리아는 중립을 표방했으나 동맹국들이 마케도니아를 넘겨주겠다고 약속하며 전쟁에 끌어들였습니다. 에효... 늘 떡밥 신세인 마케도니아...
불가리아는 세르비아의 우측과 후방을 공격했고, 세르비아 군대는 알바니아 알프스 너머 아드리아 해로 후퇴해 영국군 수중에 있던 테살로니키와 코르푸 섬으로 물러섰습니다. 불가리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마케도니아 전역과 세르비아를 점령했습니다.
모나스티르(오늘날의 마케도니아 비톨라)의 독일군 병사. 1915년. 사진 iwm.org.uk
북쪽에서는 러시아가 1914년 독일 공략에 나섰다가 타넨베르크 Tannenberg 전투에서 참패를 했지요. 양측은 어느 한 쪽도 상대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지 못한 채, 폴란드와 갈리시아 지역에서 1년도 넘게 공격과 반격을 계속했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1914년 7월 ‘동맹국’ 편에 가담해 전쟁에 끼어들었습니다. 그들은 러시아령 카프카스 지역을 공격하는 한편, 중동을 침략한 영국군에 맞섰습니다. 영국은 1915년 갈리폴리 반도(터키식으로는 겔리볼루)를 공격했습니다. 같은 편인 러시아 군에게 바다 쪽 병참로를 열어주고 이스탄불을 공격해 투르크인들에게 치명타를 날리기 위한 것이었지요. 하지만 강고한 투르크 군대의 방어에 부딪쳐 영국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영연방 국가들이 대거 병력을 보냈던 이 갈리폴리 전투에서 영국은 그야말로 참패를 했답니다.
영국은 결국 1916년 초 군대를 철수시켰습니다. 폴란드와 갈리시아에서는 1915년 ‘동맹국’이 미미하나마 전과를 올렸지만, 양측 모두 엄청난 손실을 입은 뒤였습니다. 이듬해 러시아는 합스부르크 군대를 90킬로미터 이상 밀어붙이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너무 큰 피해를 입은 탓에 러시아 군 내부에서는 불만이 고조되고 결과적으로 도덕적 해이가 광범위하게 퍼졌다고 합니다.
이탈리아는 1915년 ‘동맹국’에서 탈퇴해 ‘연합국 Entente’ 편에 붙었습니다. 이듬해 이탈리아 북부 알프스 산악지대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이탈리아 간 전쟁이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양쪽 모두의 비효율적인 군사작전으로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졌습니다.
1914~15년 무렵, 프랑스에 간 영국령 인도 군인들. 1차 대전은 유럽의 전쟁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수많은 '비유럽계'의 피가 흘렀다는 사실. 영국령 중동 즉 '메소포타미아 전선'에도 인도 군인들이 많이 동원됐습니다. 사진/ 미 의회도서관(http://www.loc.gov/pictures/item/ggb2005017886/)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동부전선 즉 러시아와의 전쟁에서도 별반 나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전술의 일관성을 유지하려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독일 군의 뒷받침이 꼭 필요했습니다. 발칸에서 ‘연합국’들은 그리스를 들볶아, 테살로니키에 군대를 보내고 불가리아와 싸우게 만들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군과 독일 군은 북쪽에서부터 밀고 내려왔고, 세르비아 군은 코르푸 섬에서 출발해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고 소규모 러시아 부대와 합류해 그리스령 마케도니아에 전선을 형성했습니다. 외곽에서부터 오스트리아-헝가리에 타격을 주기 위해 멀리 떨어진 루마니아도 참전을 선언하고 1916년 8월 트란실바니아를 침공했지만 짧은 점령 뒤 이듬해 초 다시 후퇴했습니다.
자, 이쯤되면 대체 누가 누구와 손잡고 누구와 싸우고 있는지조차 알기 힘들 정도로 복잡하게 꼬인 상황이 됐지요.
초간단 정리하면
연합국: 세르비아, 러시아(1917년 11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연합국에서 이탈), 프랑스, 벨기에, 영국(+호주, 인도, 뉴질랜드, 남아공, 캐나다), 이탈리아, 그리스, 미국 (사실은 이들 말고도 태국, 일본, 페루, 브라질, 아이티 등등 수많은 나라들이 연합국과 이런저런 조약들로 묶여 있었답니다)
동맹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독일,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
이런 상황이었습니다.
전쟁을 일으킨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제 빨리 손을 떼고 싶어졌습니다. 1917년에 이르자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뒤를 이은 합스부르크의 통치자 카를1세 Carl I (1916-18년 재위)는 ‘동맹국’이 패전을 앞두고 있고 제국에는 재앙이 몰아닥칠 것임을 알아차렸습니다. 하지만 손 잡은 친구놈이 무지하게 독한 놈... 독일을 비롯한 ‘동맹국’ 진영이 완전한 승리를 거두기 전에는 물러서지 않으려는 완고한 입장이라는 것을 카를은 알게 된 거지요. 그래서 어떻게든 빨리 전쟁에서 발을 빼려고 애썼습니다. 그의 통찰이 맞았습니다.
★카를1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통치자입니다. 헝가리 국왕으로서는 카로이4세라 불린답니다. 프란츠 요제프1세의 증손자로, 삼촌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암살당하는 바람에 황위를 물려받게 됐습니다(그런데 실은 페르디난트도 자기 사촌이 자살하는 바람에 황위 계승자가 됐다는 사실).
카를은 열강들 사이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프랑스와 은밀히 협상을 벌였으나 1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프랑스 편에 붙어 알자스-로렌 지방을 내어주려 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제국의 한 축인 오스트리아의 반발을 샀고 독일과도 사이가 벌어졌습니다. 1918년 폐위된 뒤 마데이라에 유배됐다가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1차 대전 초기만 해도 미국은 먼로주의의 전통에 입각해 중립을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루시타니아호 침몰 사건'이 일어나 반독일 감정이 거세진 데다 아시아에서 일본이 급성장한 데에 대한 경계감이 커지면서 여론이 참전 쪽으로 돌아섰습니다.
우드로 윌슨 Woodrow Wilson (1913-21년 재임) 대통령은 1917년 4월 6일 결국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에 끼어들었습니다. ‘연합국’ 진영의 승리가 굳어질 무렵 전후처리를 위해 베르사유 회의가 열렸고, 윌슨은 여기서 ‘14개조 평화원칙’을 발표했습니다. 그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민족자결의 원칙’이죠.
식민 통치에 신음하던 이들에게 희망을 준 이 원칙은 그러나 철저하게 ‘승전국 위주의 원칙’일 뿐이었습니다. 윌슨은 세계 평화를 위해 국제연맹 창설을 제의했지만 정작 미국은 의회의 반대로 가입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원칙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패전한 ‘동맹국’ 영토였던 지역에는 윌슨의 14개조에 규정된 ‘민족자결의 원칙’이 적용돼, 폴란드 독립 국가가 만들어졌습니다. 윌슨의 14개조는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제국에 맞서 함께 싸웠던 여러 민족 집단들의 독립 열망을 부추겨 분열을 강화하는 계기로 작용했습니다.
1917년 초 러시아의 상황은 패전을 앞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보다 더 나빴습니다. 전쟁에서 막대한 인적·물적 자원을 소모한 데다, 수송 시스템이 마비돼 수많은 군인들이 병참을 제공받지 못해 굶어죽고 여러 도시가 기아에 빠졌습니다.
러시아는 또 내부적으로 몹시 복잡한 상황이었습니다. 당시가 어떤 때입니까. 바야흐로 혁명의 시대였습니다. 3월 혁명과 11월 혁명, 이 두 차례 혁명으로 계급 간 적대가 물위로 떠올랐습니다. 차르 체제를 무너뜨리고 권력을 잡은 혁명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 Vladimir Lenin 은 볼셰비키 권력을 굳히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러시아에 매우 불리한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1918년 3월 독일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Brest-Litovsk 평화조약을 맺고 서둘러 전쟁을 끝내려 했습니다.
1차 대전 당시의 러시아군. 사진 iwm.org.uk
당시 발칸 전선에서는 연합국들의 전면적인 공세 속에 독일 군과 불가리아 군이 와해되던 참이었습니다. 결국 그 해 9월 독일과 불가리아는 휴전 협정에 서명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소수 민족집단들의 독립 열망이 터져 나오면서 붕괴했습니다. 체코계, 슬로바키아계, 크로아티아계, 슬로베니아계, 루마니아계 등 제국 내 민족집단들은 1918년 12월 윌슨의 민족자결 선언에 고무돼 일제히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헝가리와 오스트리아의 독일계도 각기 제 갈 길로 갈라졌습니다.
'내맘대로 세계사 > 동유럽 상상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42. 땅 빼앗기고 등 떼밀려 '민족국가' 된 헝가리 (0) | 2014.12.25 |
---|---|
41. 베르사유의 분할과 독립국가 폴란드 (0) | 2014.11.25 |
39. 지금부터 100년 전, 일촉즉발의 동유럽 (0) | 2014.06.10 |
38. 1912-1913년의 발칸 전쟁 (1) | 2014.05.29 |
37. 1908-1914년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0) | 2014.04.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