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상상 여행

41. 베르사유의 분할과 독립국가 폴란드

딸기21 2014. 11. 25. 17:46

41.  베르사유의 분할과 독립국가 폴란드


현대 유럽의 정치 지도가 그려진 것은 1차 대전에서 승리를 거둔 ‘연합국’ 진영의 세 나라, 즉 영국과 프랑스와 미국의 베르사유 회의(1919-21년)에서였습니다.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14개조 평화원칙’에서 이것이 미국의 1차적인 참전 목표라고 선언했습니다. 윌슨의 선언은 ‘연합국’의 적인 ‘동맹국’ 내 억압받던 민족들의 민족적 열망을 고취시켰습니다. 이는 ‘동맹국’의 군사적 잠재력을 약화시켜 결과적으로 ‘연합국’이 승전하는 데에 보탬이 됐고, 윌슨과 한 편에 섰던 나라들도 민족자결의 원칙을 베르사유 평화회담의 기본 전제로 모두 받아들였습니다. 


우드로 윌슨의 '14개 조항'

 베르사유조약 영어판(사진/위키피디아)


하지만 유럽의 승전국들은 민족국가라는 윌슨의 이상주의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자기네 국가의 이익을 챙기는 데에 충실했습니다. 베르사유 회의에서 정해진 동유럽 지도에는 민족국가의 이상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서방 국가들은 1차 대전 뒤 동유럽을 멋대로 구획하면서 ‘민족자결의 원칙’이라는 구호를 이용했던 것에 불과했습니다. 


'승전국을 위한' 민족자결의 원칙이 동유럽을 가르다


물론 설혹 ‘연합국’이 객관적인 제3자 입장이었다 해도 복잡다단한 동유럽 민족분포로 보아 국경선을 그리는 작업은 쉽지 않았을 겁니다. 합스부르크 제국과 러시아, 오스만 투르크 제국 안에는 뚜렷한 내부적인 경계선 없이 오랜 세월 섞여 살아온 여러 민족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다가 승전국들의 입장은 ‘객관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으니... 


Dr Johannes Bell signs the Treaty of Versailles in the Hall of Mirrors, with the various Allied delegations sitting and standing in front of him. /William Orpen /Wikipedia


승전국들은 동유럽의 국경선을 놓고 자기들 간에 이해가 엇갈릴 때는 인기투표 같은 방식으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승전국과 패전국들 간 이해관계가 갈라질 때에는 주로 승전국의 입맛대로 결론이 정해졌습니다.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그리스는 ‘승전국’에 속해 국경 획정에서 이익을 봤지만 독일, 헝가리, 불가리아의 뜻은 대체로 무시됐습니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신생국들은 인위적으로 그려진 국경 안에 여러 민족 집단들을 끌어안고 있었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에는 체코계·슬로바키아계·독일계·헝가리계·루테니아계가 혼재했고, 유고슬라비아에는 세르비아계·크로아티아계·보스니아계(보스니아 무슬림 포함)가 함께 살아야 했습니다. 루마니아에는 루마니아계·헝가리계·독일계·불가리아계와 투르크계가, 폴란드에는 폴란드계·리투아니아계·벨라루스계·우크라이나계가 뒤섞여있었습니다.


인위적인 국경 안에 여러 민족이 섞이게 만든 '전후 지도'


베르사유의 승전국들은 이 신생국들이 지도가 뒤죽박죽으로 얽혀있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나라 이름만 봐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체코계와 슬로바키아계의 나라였습니다. 1929년 유고슬라비아로 이름을 바꾼 나라는 당초 국명이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이었습니다. 베르사유 회의 뒤 1989년까지 이 두 나라의 물리적인 분열은 현실화되지 않았으나 갈등은 늘 존재했습니다. 


★유고슬라비아


이처럼 기구한 이름이 또 있을까요. 유고슬라비아는 1918년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이란 이름으로 건국됐고 1929년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왕국은 1941년 2차 세계대전 당시 추축국의 공격을 받아 무너졌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1945년 ‘유고슬라비아 민주연방’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주의 공화국이 세워졌습니다. 6개 공화국으로 구성된 이 나라는 이듬해 ‘유고슬라비아 연방인민공화국’으로, 1963년 다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연방공화국’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유고 연방은 냉전이 끝난 뒤인 1992년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마케도니아·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이 분리 독립하면서 사실상 해체됐습니다. 이들이 빠져나간 뒤에도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공화국은 유고 연방이라는 이름으로 잠시 묶여 있다가, 2003년 세르비아-몬테네그로로 국명을 바꿨습니다. 2006년 몬테네그로가 국민투표를 통해 갈라져나가면서 유고 연방은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베르사유 체제로 탄생한 이 '새로운 독립국가들'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볼까요. 


먼저 폴란드입니다. 


폴란드는 18세기에 러시아, 프로이센(독일), 합스부르크(오스크리아-헝가리 제국) 세 진영에 의해 갈갈이 찢겼죠. 1차, 2차 폴란드 분할이라고 불리는 역사적 사건에 의해 폴란드 땅은 이리 잘리고 저리 뜯긴 처지였습니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와 폴란드를 분할해 가졌던 세 열강은 모두 쇠락했습니다. 독일은 1차 대전으로 기진맥진해 있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갈라졌지요. 러시아는 레닌의 볼셰비키 세력과 반 공산주의·친 차르 진영 간 극심한 내전으로 분열돼 있었습니다.

친독 반러 성향이던 폴란드사회당 지도자 요제프 피우수트스키 Jósef Piłsudski 는 '대폴란드 민족국가'를 세우겠다는 계획 아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친러 민족민주당의 로만 드모프스키 Roman Dmowski 와 협상해 합의를 이끌어냈습니다. 1918년 11월 독일의 지원을 받는 폴란드 섭정협의회는 러시아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는 동시에 우크라이나에 선전포고를 하고 갈리시아를 공격했습니다. 


선전포고 며칠 만에 섭정협의회는 폴란드 공화국 수립을 선언했으며, 군 통수권을 모두 피우수트스키에게 넘긴 뒤 사퇴했습니다. 폴란드는 갈리시아에서 우크라이나인들을 축출한 뒤 서쪽으로 더 진격해 독일로부터 포즈난을 빼앗고 대폴란드 수립을 선언했습니다. 피우수트스키는 1919년 초 연합정당을 구축, 임시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요제프 피우수트스키 Józef Klemens Piłsudski (1867-1935)


폴란드의 혁명가·정치가입니다. 1918년 11월에 새로 수립된 폴란드의 초대 대통령을 지냈습니다. 가난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러시아에 대한 반발심 속에 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887년 역모죄를 뒤집어써 시베리아 동부로 유배되기도 했습니다. 5년 뒤 돌아와 독립운동에 투신, 폴란드 사회당(PPS)의 지도자가 됐습니다. 


요제프 피우수트스키 /위키피디아


1905년 사회주의혁명과 독립 중 어느 쪽을 중시할 것이냐를 놓고 당에 내분이 일어나 좌파들이 탈당하고 피우수트스키가 이끄는 민족주의 진영이 당권을 장악했습니다. 


1차 대전 뒤인 1918년 11월 독립 영웅으로서 임시정부 대통령에 추대됐습니다. 하지만 의회를 무시, 독재 성향을 보였으며 1926년 퇴임 뒤에도 종신 국방장관으로 군권을 쥐고 있었습니다. 1930년에는 자신에 반대하는 중도좌파 세력을 무참히 탄압했습니다. 1935년 사망해 폴란드 왕들이 묻혔던 크라쿠프의 바벨 대성당에 안장됐습니다.


폴란드는 건국과 함께 군사적 팽창정책을 추진했습니다. 전후 동유럽 국경지도가 완전히 굳어지기 전에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실레지아 등지로 진출해 베르사유 조약 이전의 영토들을 회복하고 이를 기정사실로 굳히려는 의도였습니다. 


다시 분쟁에 휩싸인 폴란드와 러시아


하지만 베르사유의 열강들은 폴란드에게 새로운 동부 국경, 이른바 커즌 라인 Curzon Line을 강요했습니다. 이는 폴란드가 주장한 동쪽 영토보다는 훨씬 서쪽으로 당겨진 국경선이었습니다. 국가수반 겸 군 총수권자가 된 피우수트스키는 베르사유 회의의 결정을 거부하고 빌니우스와 우크라이나·벨라루스 서부까지 폴란드 국경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920년 초 폴란드인들은 러시아의 레닌을 상대로 양국 간 1772년 경계선을 국경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레닌은 물론 거부했지만 타협을 위한 노력은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협상은 결국 결렬됐고 폴란드, 러시아, 우크라이나의 광대한 영역에 걸쳐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폴란드 군대는 러시아 볼셰비키 진영이 내전에서 고전하고 있는 틈을 타 우크라이나를 휩쓸어, 키예프를 목전에 둘 때까지 진격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군이 내전에 승리를 거두면서 ‘붉은 군대’를 이끄는 레온 트로츠키 총사령관이 다시 폴란드 전선에 전념할 수 있게 됐지요. 폴란드인들은 진격할 때만큼이나 빠르게 우크라이나에서 퇴각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붉은 군대’에 맞선 저항은 실패했고 폴란드인들은 리투아니아에서도 쫓겨났습니다. 개전 넉 달 뒤 러시아 볼셰비키 군은 바르샤바 코앞에까지 도달했습니다.


1920 Aftermath of Battle of Warsaw. Polish soldiers displaying captured Soviet battle flags after the Battle of Warsaw. /위키피디아


폴란드인들이 러시아로부터 바르샤바를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피우수트스키 개인의 탁월한 리더십과 프랑스의 군사적 지원 덕이었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바르샤바의 기적’이라고 불린 이 수성(守成) 덕에 전세는 다시 바뀌었습니다. 볼셰비키 군대는 바르샤바 외곽에서 후퇴했으며, 폴란드 밖으로 아예 밀려나 리투아니아로 나갔습니다. 그해 10월 리가에서 평화협상이 열렸습니다. 폴란드에 동부 지역 영토를 추가로 내어준 리가 조약 Treaty of Riga이 1921년 체결됐습니다. 


폴란드가 얻어낸 땅은 예상을 훨씬 넘는 것이었습니다. 베르사유 회의에서 열강이 프로이센에 내줬던 이른바 ‘폴란드 회랑’ 지역과 함께 대폴란드, 갈리시아, 소폴란드와 크라쿠프, 실레지아 일부, 마조비아까지 모두 리가 조약을 통해 폴란드 영토가 됐습니다. 그 뿐 아니라 우크라이나 서부와 리투아니아 일부, 벨라루스 일부 지역도 폴란드에 넘어갔습니다. 1922년 빌니우스와 외곽지역도 주민투표를 거쳐 폴란드령이 됐습니다.


리가 조약으로 늘어난 폴란드 영토.... 우와아... /위키피디아


하지만 이런 승리 속에서도 폴란드가 리가 조약으로 얻은 땅을 서류상이 아닌 실질적인 영토로 획정하기까지는 어려움이 적지 않았습니다. 땅을 지키려면 무력도 있어야 하고, 국내 정치도 안정이 돼야 하고, 외교적으로도 인정을 받아야 하고... 


하지만 당장 얻어낸 땅 안에서부터 분란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단 말입니다. 리투아니아인들을 폴란드 내의 ‘2등 국민’으로 멸시하는 시각이 남아있던 탓에, 빌니우스를 놓고 폴란드 내에서 봉건 시대에나 어울릴 법한 주도권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리투아니아인들도 손에 잡힐 듯했던 러시아·폴란드로부터의 독립의 꿈을 잊지 않았습니다. 


러시아도 독일도, 폴란드 땅을... 분란 남겨둔 리가 조약


러시아가 리가의 협상 테이블에 나온 것은 볼셰비키 혁명과 내전으로 인해 정치·경제적으로 에너지가 소진된 데다, 국제사회가 개입하고 나섰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마디로, 폴란드가 무서워서 나온 것은 아니란 얘기입니다. 17세기 폴란드와 ‘영구적 평화’ 조약을 체결한 로마노프 왕조처럼 볼셰비키 진영도 평화조약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일단 정부를 안정시키는 것이 급선무였고, 폴란드에게 내어준 ‘러시아 땅’을 되찾는 것은 미래의 과제로 남겨두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반면 폴란드가 러시아에게서 영토를 얻어내는 것을 본 서방, 특히 독일은 폴란드 쪽 자기네 국경선을 다시 그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독일은 독일 본토와 동프로이센 지역을 갈라놓는 ‘폴란드 회랑’ 지대가 폴란드에 들어가게 된 것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폴란드의 새 민족주의 정부도 독일 땅 안으로 깊숙이 들어간 길다란 모양의 이 불안정한 영토를 어떻게 지킬 것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게 됐습니다.


커즌라인 Curzon Line


커즌 라인과, 훗날의 폴란드 국경


1차 대전 후 연합국 최고 회의에서 결정한 폴란드와 소련의 국경선. 1919년 영국의 외무장관 조지 커즌 George Nathaniel Curzon (1859~1925) 이 제안한 것으로 오늘날의 국경선과 대체로 일치합니다. 하지만 폴란드는 베르사유 회의에서 이 국경선이 승전국인 소련에는 유리하게, 신생 폴란드 공화국에는 매우 불리하게 결정된 것이라며 반발했습니다.


1차 대전 이후의 폴란드는 영토를 지키기도 힘겨운 처지였습니다. 정부는 모든 인적·물적 자원과 노력을 들여 단합된 힘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폴란드는 123년 동안 세 차례에 걸친 분할 속에 러시아·오스트리아·독일 3국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지역마다 각기 다른 정치·경제·민족적 발전 과정을 겪어왔습니다. 그러니 새로운 폴란드는 영토는 커졌지만 내부 통합력이 약했습니다. 


국가를 통합하려면 그들에겐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에 내어준 땅을 되찾으려 하고 있었기 때문에, 폴란드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길지 않았습니다. 1차 대전과 2차 대전 사이의 짧은 기간은 그들에겐 부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