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트리아농 조약 이후, 1920-1939년의 헝가리
동유럽사에서 틈틈이 등장하는 트란실바니아... 이 지역이 어디인지 대충 감을 잡으시려면 이 '상상여행'의 첫 회, '동유럽이란'을 참고하시고요~
다뉴브강 유역의 드넓고 비옥한 땅, 트란실바니아는 늘 여러 세력의 먹잇감이 됩니다. 1916년 루마니아인들은 트란실바니아를 공격했다가 소득도 없이 물러섰습니다. 여기서 결정적인 패배를 한 탓에 그들은 통 목소리를 내지 못하다가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무너지면서 다시 기회를 잡았습니다.
어쩌다 보니 트란실바니아를 집어삼킨 루마니아
루마니아는 트란실바니아 공국을 공격, 이번에는 큰 저항 없이 점령했습니다. 트란실바니아 공국 안에 있던 루마니아계 민족주의자들이 아예 나라를 루마니아에 갖다 바친 꼴이었거든요. 이들은 알바 율리아(트란실바니아 공국의 수도) 의회의 주도권을 잡은 뒤 “트란실바니아는 루마니아에 귀속된다”고 선언했습니다.
Romania - Historical Regions Map
헝가리는 트란실바니아가 자기네들 땅이라 생각하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았습니다. 1차 대전 승전국들은 1920년 베르사유의 트리아농 궁(宮)에서 헝가리의 운명을 결정하면서 ‘현상유지’를 선택했습니다. 되도록이면 말썽이 덜 나길 원했고, 그래서 그들은 마치 민족자결주의의 이상에 충실하기 위한 결정이라는 듯 트란실바니아가 루마니아에 복속되는 것을 인정해줬습니다.
1919년 헝가리에는 볼셰비키 스타일의 공산주의자 벨라 쿤 Béla Kun 이 집권해 슬로바키아, 루마니아와 무모한 전쟁을 벌이다 패했습니다. 헝가리군은 1차 대전으로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였습니다. 헝가리는 한때 부다페스트까지 루마니아 군에 점령당하는 수모를 겪은 뒤 트리아농 조약을 인정하고 트란실바니아를 내주었지요.
Targoviste, Romania - Princely Court Ruins / RomaniaTourism.com
Sighisoara (Transylvania, Romania) / www.RomaniaTourism.com
Maramures (Northern Romania) Traditional Carved Gate / www.RomaniaTourism.com
1920년 6월 4일 체결된 트리아농 조약을 통해 헝가리는 1차 대전의 공식적인 종료를 맞았습니다. 트리아농의 승자들은 지도를 다시 그리면서 연합국 내 민족들에게는 민족자결권을 너그러이 인정해줬습니다. 그 덕에 실제 1차 대전에서 별로 한 일도 없는 루마니아인들은 트란실바니아를 비롯한 넓은 땅을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베르사유 승전국들은 루마니아인들에게 특히 좋은 대우를 해주었지만, 다른 ‘친서방’ 민족들을 챙겨주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크로아티아, 슬라보니아, 그리고 바나트 지방 대부분은 신생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1918년 12월부터 1941년 4월까지 이 이름으로 존재했는데, 통칭 이 때부터 유고슬라비아 왕국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나중에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되는 복잡다단한 지역이지요)으로 들어갔습니다.
슬로바키아는 남부를 비롯한 전역이 헝가리의 주축인 마자르인들의 주 거주지였음에도 체코슬로바키아에 포함됐습니다. 트리아농 조약은 헝가리가 1000년 넘게 지배해온 ‘역사적 영토’의 3분의2를 잘라 다른 나라들에 떼어준 것이었습니다.
땅 빼앗기고 '마자르 국가' 돼버린 헝가리
헝가리는 마자르족이 소수민족으로 살던 지역은 물론이고 주 거주지역이던 곳들까지 상실해 인구의 절반을 잃게 됐습니다. 이렇게 되자 남아 있는 헝가리 영토는 인구의 90%가 마자르족으로 채워졌습니다. 1848년 이래로 마자르만의 나라를 건설하자고 외쳤던 민족주의자들의 주장대로 되어버린 것인데... 하지만 이건 마자르 민족주의자들이 바라던 과정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땅을 빼앗기고 또 빼앗겨서 어쩔 수 없이 '민족국가'가 된 꼴이니까요. 그들은 트리아농에서 정해진 헝가리 국경이 인위적, 강제적이며 너무나 불공평하다고 주장했습니다.
트리아농 이후의 헝가리... 이러니 헝가리가 화가 나, 안 나? www.best-things-in-hungary.com
그래서 헝가리 마자르족은 베르사유 조약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반대세력이 됐습니다. ‘넴, 넴, 소하(nem, nem, soha)’ 즉 ‘안 된다, 안 된다, 절대 안 된다’는 것이 이들 민족주의자들의 구호였다고 합니다. 트리아농 조약을 결국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지만 헝가리는 2차 대전이 시작될 때까지 근 30년 동안 끊임없이, 공개적으로 반발을 표출했습니다.
마자르 민족주의자들은 트리아농 조약에 대해 격렬하고, 때로는 광적으로 반대했습니다. 이는 민족국가에 대한 서유럽의 이상이 얼마나 허구인지, 그리고 또한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주는 사례였습니다.
오로지 한 민족만을 위한 민족주의라는 것은 사실 무의미하고도 위험한 구호입니다. 서유럽에서 시작된 민족국가라는 개념은 애시당초 ‘한 민족 집단만의 국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민족주의와 민족국가의 개념에는 훨씬 더 많은 것들이 들어있었습니다. 특정한 지역에서 진행된 독특한 역사를 특정 집단의 사람들과 연결 짓는 것이 민족주의이고 민족국가의 개념이었습니다. 역사와 민족이라는 두 요소가 결합되지 않고서는 민족국가가 탄생할 수 없는 것이지요.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의 사진... 둘 다 mrwallpaper.com 에서 퍼왔습니다. 부다페스트는 참 아름답군요!
교차하는 민족의 경계선, 누가 어디에 '민족국가'를 세울 것인가
더욱이 유럽, 특히 동유럽에서는 한 민족이 다른 민족들과 섞이지 않고 한 지역을 오랫동안 지배한 경우가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곳곳에서 민족국가의 권역을 둘러싼 분쟁이 벌어졌습니다. 역사도 지역도 너무 많이 겹쳐 있었던 것입니다. 민족국가의 경계선을 그으려 할 때마다 어디에, 왜 긋는 것인지를 놓고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모든 집단이 자기들만의 독특한 인구학적, 역사적, 경제적 정당화 구실들을 내세웠습니다. 이럴 때에 양측 당사자들이 완전한 합의를 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트리아농 조약으로 헝가리는 민족주의자들이 요구했던 대로 마자르족만의 나라가 되었지만, 바로 이런 이유들로 해서 민족주의자들은 만족을 할 수 없었던 겁니다. ‘마자르 민족국가’에 마자르족이 오랫동안 거주했던 지역, 천년 동안 헝가리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차지했던 지역들이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18~19세기의 헝가리 사람들. /위키피디아
그러니 헝가리인들에게 트리아농 조약은 서유럽식 민족국가의 정치적 지향을 무시하고 민족 질서를 유린한 것일 뿐이었습니다. 수 세기 동안 헝가리의 일부였던 영토들이 강제로 잘리어 이제 갓 생겨난 신생국가들, 마자르족과는 전혀 친하지 않은 이웃나라들에 귀속된 것이 사실이니까요. 옛 헝가리 땅을 나눠가진 이웃나라들은 헝가리가 트리아농 조약에 끈질기게 반발하는 것을 보며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민족갈등만 부추긴 체코-유고-루마니아 '반 헝가리' 소연합
그래서 1920년과 1921년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는 프랑스의 후원 아래 헝가리에 맞서기 위한 군사동맹, 이른바 ‘소연합(Little Entente)’을 결성했습니다. 서구 열강들은 이 동맹을 몇 년 동안 역내 안정의 보루로 여기고 지원해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연합은 실제로는 별다른 기능을 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소연합 진영과 헝가리 간 민족 갈등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트리아농 조약 재개정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데다 사방을 ‘민족의 적들’에 에워싸인 마자르 민족주의자들 사이에는 1930년대가 되자 화살십자가당 Nyilaskeresztes Párt 같은 파시즘 운동이 기승을 부렸습니다. 헝가리는 땅을 빼앗김으로써 전통적인 농업 시장을 잃고, 산업의 기반인 자원도 잃어 경제적으로도 취약해져 있었습니다.
미클로스 호르티 / 위키피디아
군부 지도자 미클로스 호르티 Miklós Nagybányai Horthy 등은 공식적으로는 연계를 부인했지만 당시 헝가리 민족주의자들은 아돌프 히틀러 Adolf Hitler (1889-1945년)가 이끄는 나치 독일의 급진적인 국가사회주의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화살십자가당 Nyilaskeresztes Párt
페렌츠 살로시가 1935년 3월 창설한 ‘국가의지당’을 모태로 39년 초에 만들어진 헝가리의 파시스트 조직입니다. 창설 몇 달 만인 그 해 5월 총선에서 의석 30석을 확보, 원내 2당으로 부상했습니다. 팔 텔레키 총리가 이끄는 정부는 이들을 억압하고 현직 의원을 포함한 지지자들을 투옥했으나 헝가리가 독일에 점령되면서 정세가 역전됐습니다.
44년 4월 나치의 괴뢰정부가 출범하자 화살십자가당은 정부의 공식 승인과 군·노동자들의 지지 속에 맹위를 떨쳤습니다. 하지만 45년 2월 소련이 부다페스트를 점령하면서 괴뢰정권과 화살십자가당은 모두 추방됐지요. 나치의 손발이 되었던 화살십자가당의 파시즘은 2차 대전 이후 오랜 시간 헝가리의 치욕적인 과거사로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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