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상상 여행

44, 트란실바니아를 둘러싼 헝가리와 루마니아의 갈등

딸기21 2015. 5. 22. 15:58

44. 트란실바니아 문제 


43회 올린 지 석달이 지났네요. 이럴 수가. (이건 제가 게으른 게 아니라 시간이 너무 빨리 가기 때문이라고 우겨봅니다;;) 이리하여 이 동유럽 연재는, 정리해 올리는 저조차 매번 앞의 내용을 다시 읽어봐야 하는 건망증 유발 시리즈로 전락해버렸...


아무튼 다시 기억을 되새겨 보지요.



헝가리는 트리아농 조약으로 빼앗긴 ‘역사적인 영토’들을 빼앗겼고, 마자르 민족주의자들은 이 때문에 분통이 터졌습니다. 그들은 베르사유에서 이 문제를 들고 나와 국제사회의 이슈로 만들어 조약 재협상에 들어가게 하려고 애썼습니다. 또 국제연맹의 소수민족문제 회의에서도 이 문제를 계속 제기했으며 국제사회를 압박하기 위해 여러 언론들에도 호소를 했습니다.




위 지도(출처: www.americanhungarianfederation.org)는 트리아농 조약을 왜 헝가리가 부당하다고 느끼게 됐는지를 보여줍니다. 특히 헝가리가 되찾고 싶어 했던 것은, 맨 위 지도에서 루마니아로 넘어간 땅, 즉 트란실바니아였습니다. 


헝가리가 이렇게 나오자 루마니아 민족주의자들도 그에 맞선 선전전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919~40년 사이 마자르 민족주의자들과 루마니아 민족주의자들은 앞을 다퉈 트란실바니아의 소유권을 뒷받침하기 위한 인구학적, 경제적, 정치적 통계자료들을 쏟아냈습니다. 


땅 빼앗긴 헝가리의 열띤 선전전


이른바 ‘트란실바니아 문제’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헝가리와 루마니아 사이의 이 오랜 분쟁은 외교전선과 미디어 양측에서 치열하게 벌어졌습니다. 이 복잡한 땅, 트란실바니아에 대해 다시 한번 들여다 보지요. 


www.americanhungarianfederation.org


트란실바니아는 11세기 중세 헝가리 왕국 시절 이스트반1세 때 헝가리 영토로 병합됐습니다. 16세기와 17세기 동안 이 지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의 프로테스탄트 거점으로서 외견상 독립에 가까운 자치를 누리며 황금기를 구가했습니다. 1848-49년 헝가리 혁명이 일어나자 이 지역은 합스부르크 왕실과 러시아 로마노프 왕실에 맞선 혁명세력의 요새 역할을 했습니다. 헝가리 민족주의자들에게 트란실바니아는 재고의 여지가 없는 역사적, 민족적 영토였습니다. 



이 땅을 루마니아인들의 손에 내주는 일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마자르 민족주의자들은 1920년부터 1939년 사이 제네바에 있는 국제연맹 소수민족권리분과에 서유럽 여르 언어들로 쓰인 엄청난 양의 자료들을 쏟아 붓고 헝가리 안팎에서 지칠 줄 모르는 여론전을 해 이 문제를 국제사회의 이슈로 부각시켰습니다. 


Apuseni Mountains near Arieșeni, Alba County /WIKIPEDIA


헝가리가 트리아농 조약의 개정을 위해 워낙 적극적으로 나섰기 때문에, 트리아농에서 헝가리의 옛 영토를 작은 조각이라도 받아들었던 이웃의 수혜국들은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헝가리가 트리아농 조약 개정을 이끌어내는 데에 성공할까 걱정하며 만일에 대비해 ‘소연합국’을 결성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동맹은 헝가리의 민족주의를 더욱 부추길 뿐이었습니다.


헝가리인들은 자기네 선조들이 11세기 트란실바니아에 정복할 때까지 이 지역에는 선주민이 없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판노니아의 헝가리아인들을 일부러 트란실바니아로 이주시키고 마자르 방계인 세케이 Székelys 민족들까지 불러들여 식민지들을 만들어야 했으며, 독일계 작센족까지 이주시켜 정치·경제를 발전시켰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습니다.


"우리가 먼저 왔다" "우리 인구가 더 많다"


이런 주장에 따르면 발칸 반도 남부에 거주하던 루마니아인들이 트란실바니아에 상당 규모로 유입된 것은 헝가리인들이 들어가고 난 뒤인 12세기 말~13세기 초반에 이르러서였습니다. 또 이들 신참들은 대개 신분이 낮은 농민들이었기 때문에 루마니아계는 트란실바니아에 미친 문화적, 정치적 영향이 거의 없었다, 따라서 헝가리·세케이·작센 민족이 이 지역의 발전과 방어와 행정의 모든 부담을 졌다고 헝가리 측은 주장했습니다.


오늘날의 루마니아 땅,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비에탄(Biertan)의 작센 교회. /WIKIPEDIA


상황이 이렇게 되자 루마니아도 헝가리의 ‘역사적 소유권’ 주장에 맞서 방어에 나서야 했지요. 루마니아는 트란실바니아의 인구 구성을 가장 큰 근거로 내세웠습니다. 


트리아농 조약이 체결될 당시 트란실바니아 주민의 55%는 루마니아계였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트라야누스 황제 Marcus Ulpius Nerva Traianus (98-117년 재위) 시절 로마제국이 이 지역을 정복해 160년간 점령통치를 하기 이전까지 이 일대에는 다크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루마니아인들은 훗날 라틴화된 다크족이 자신들의 선조라고 주장했습니다. 


서기 271년 로마제국이 떠난 뒤에도 다크족은 그 곳에 남았으며, 3세기부터 9세기까지 게르만족과 아시아계 민족들의 잇단 이동 속에서도 산악지대에 숨어 버티면서 명맥을 유지했습니다. 그들은 11세기 헝가리인들이 쳐들어왔을 때 트란실바니아 저지대에서 다시 주요 세력으로 부상했습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루마니아 민족이야말로 트란실바니아의 원주민이었고, 트란실바니아는 루마니아인들의 진정한 고향이라는 겁니다.


Marble statue of a Dacian warrior surmounting the Arch of Constantine in Rome. /WIKIPEDIA



(잠시 딴 길로 새자면- 다크족 Dacian은 로마제국에 점령당할 때까지, 기원전 82년부터 서기 106년까지 잠시 다키아 왕국이라는 나라를 꾸리기도 했습니다.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황미나의 '이오니아의 푸른별' 주인공이 다키아 공주였던 것 같네요.)


1939년 헝가리와 루마니아 양측은 모두 독일과 손을 잡았습니다. 헝가리의 민족주의-국가사회주의자들은 독일 나치 세력과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고, 루마니아는 경제적으로 독일과의 유대가 필요한 처지였습니다. 히틀러 또한 양측을 모두 필요로 했습니다. 헝가리는 동유럽 특히 남동부 유럽에서 독일의 영향력을 유지하는 지렛대가 될 것이었고, 루마니아는 장차 동부 전선으로 진군할 적에 석유와 인력을 공급해줄 보급선이 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줄을 잘 못 선 헝가리, 줄을 잘 선 루마니아


1940년 헝가리와 루마니아 사이에 트란실바니아를 놓고 분쟁이 일어나 일촉즉발의 위기로 치닫자 히틀러가 적극 중재에 나선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 그 해 8월 30일 비엔나에서 히틀러는 ‘비엔나 명령(Dictatul de la Viena. 영어로는 2차 비엔나 명령 Second Vienna Award 혹은 Vienna 이라고 합니다. )’으로 알려진 협상을 통해 남동부 세케이를 포함한 트란실바니아의 40%를 헝가리에 넘기도록 했습니다. 이 지역은 트란실바니아 내에서도 특히 헝가리계 주민이 많아서, 인구 250만명 중 52%는 마자르족이었습니다.



루마니아 조사에선 트란실바니아에 루마니아계가 더 많게 나오고, 헝가리 조사에선 반대로 헝가리계가 더 많게 나왔습니다. 양측 모두 자기네 인구가 많다고 주장했습니다. /WIKIPEDIA


헝가리와 루마니아는 히틀러의 강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히틀러는 이로써 분쟁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비엔나 명령으로 해결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헝가리인들이나 루마니아인들 모두 이 명령은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며 2차 대전에서 독일이 승리하면 상황이 바뀌리라 믿었습니다. 양측 모두 불만을 품었습니다.


헝가리인들에게는 불행한 일이었지만 독일은 패전했습니다. 반면 루마니아는 전쟁 막바지에 반독 전선으로 입장을 바꿈으로써 연합국 편에 섰습니다. 1944년 말 트란실바니아는 루마니아에 보상으로 주어졌습니다.


영화 포스터입니다... ㅎㅎ


그 후 이 문제는 2차 대전 후에 반강제적으로 '정리'됐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나자 헝가리와 루마니아 모두 소련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가게 됐기 때문입니다. 양측의 민족주의적인 요구는 ‘사회주의 형제애’라는 이름으로 일단 봉합돼 물밑으로 가라앉았습니다.


(지금 현재는 어떨까요? 루마니아로 들어간지 근 100년... 2002년 센서스에서 트란실바니아 인구는 약 722만명. 그 중 루마니아계가 압도적 다수인 75.9%이고, 헝가리계는 19.6%로 줄었습니다.)


★연합군 편에 선 루마니아


1940년 루마니아의 베사라비아는 소련에 점령당했고, 트란실바니아 북부는 독일·이탈리아의 강요로(‘비엔나 명령’) 헝가리에 넘어갔습니다. 남부 도브루자 또한 불가리아에 넘어갔습니다. 잇단 영토상실에 내부적 반발이 고조되자 루마니아 국왕 카를2세는 이온 안토네스쿠 Ion Antonescu 장군을 불러들여 진압을 명령했습니다. 



안토네스쿠는 카를을 설득해 왕위를 미하이 왕자에게 내주도록 한 뒤, 정권을 장악하고 파시스트 독재를 실시했습니다. 1941년 안토네스쿠는 히틀러 편에서 반 소련 전쟁에 참전했으나 1944년 독일에 승산이 없어보이자 연합국 편으로 전향했습니다. 소련은 루마니아의 ‘공로’를 인정, 2차 대전이 끝난 뒤 헝가리가 가져갔던 트란실바니아를 다시 루마니아에 돌려주게 했습니다.

이로써 안토네스쿠는 국민적인 영웅으로 부상했고, 권위주의 정권을 구축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전범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1946년 총살을 당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