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상상 여행

46. '체코슬로바키아'라는 나라

딸기21 2015. 10. 18. 16:17

46. 1920-1939년 체코슬로바키아와 뮌헨 


나라는 물론이고 나라 '이름'도 생겨났다 사라지지요. 동유럽 공산국가들이 잇달아 해체되고 탄생하던 시기가 생각납니다. 어릴 적 제가 학교에서 배웠던 이름들,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소련 같은 이름들은 사라지고 그 나라들은 여러 조각으로 갈라졌습니다.


그 중 '체코슬로바키아'라는 나라 이야기입니다. 베르사유 강화조약이 체결되기 전까지 이런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나라는 역사적으로 존재한 적이 없었고, 문화적 전통이나 선례(先例)도 없었습니다. 열강들은 보헤미아-모라비아와 슬로바키아의 국경을 합쳐서 국경선을 그었지만 보헤미아-모라비아와 슬로바키아는 최소한 10세기 이전에 갈라졌고 이후 한 나라였던 적이 없었습니다.



토마슈 마사리크. /미 의회도서관(http://www.loc.gov/pictures/item/ggb2006012031), Bain Collection


체코슬로바키아라는 나라의 모태가 된 것은 체코계인 토마슈 마사리크 Tomáš Garrigue Masaryk 와 에드바르트 베네슈 Edvard Beneš, 슬로바키아계인 밀란 슈테파니크 Milan Rastislav Štefánik 등 프랑스, 미국 등지를 떠돌던 국외 망명자들의 통합 운동이었습니다. 베네슈는 오스트리아 점령통치에 맞선 저항운동의 지도자였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로부터 독립하다


1918년 10월 28일, 제네바에서 카렐 크라마르 Karel Kramář를 의장으로 하는 회의가 열렸습니다. 크라마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회에 의원으로 있던 체코의 정치인입니다. 제국의회에 들어가 있었지만 동시에 여러 슬라브 국가들의 연합을 주장하며 '신 슬라브주의 New Slavism'를 외치기도 했습니다. 크라마르와 베네슈가 '체코슬로바키아'라는 독립국가를 이루기로 합의했고, 오스트리아 측과 보헤미아(체코) 간 협상이 시작됐습니다. 며칠 만에 오스트리아 측은 물러났고 체코슬로바키아 건국이 선포됐습니다. 11월 18일, 마사리크가 새로 탄생한 나라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초대 총리는 크라마르가 맡았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건국선언. 사진 digital-guide.cz


이렇게 해서 세워진 체코슬로바키아의 헌법은 1차 대전 뒤 동유럽에 건국된 어떤 나라의 헌법보다도 자유·민주주의적이었으며, 체코슬로바키아는 동유럽에서 드물게 제 기능을 발휘하는 민주정부의 모델이 됐습니다. 하지만 이 나라는 태생적으로 민족 갈등의 소지를 안고 있었다.


★토마슈 마사리크 Tomáš Garrigue Masaryk (1850-1937년)


체코슬로바키아 건국의 아버지. 슬로바키아의 하층 가정에서 태어난 마사리크는 브르노의 독일계 대학을 졸업하고 비엔나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비엔나 대학과 프라하의 체코 대학에서 교편을 잡다가 1889년 정계에 입문했습니다. 


범슬라브주의를 비판하면서 청년 진보주의자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으며,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 건국을 주도했습니다. 유대인 탄압에 반대했고 정치를 하면서도 학문 연구를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1918~34년 4차례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1933년 나치가 독일에서 정권을 장악하자 깊은 우려를 나타냈던 선각자 중 하나였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두 부분, 즉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한 국경 안에 살게 됐으나 화학적 결합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건국 인사들은 통합을 해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으나 오래지 않아 한계가 분명해졌습니다. 


문제는 힘의 불균형이었습니다. 체코 민족주의자들은 독립국가를 만들기 위해 슬로바키아와 손을 잡았으나 그들에게 진심으로 '대등한 권리'를 주고 싶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당초의 건국 협정에서 양측이 대등한 권리를 갖는다고 했던 것이 현실을 무시한 처사였다며 힘의 정치를 구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슬로바키아 민족주의자들은 배신감에 분노했습니다. 


세속적이고 도시화된 체코와 보수적인 산악지대 슬로바키아


사실 체코인들은 합스부르크 제국 시절부터 오랜 정치적 경험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수도 프라하는 14세기 이래로 중·동부 유럽의 문화적, 경제적 중심지였습니다. 체코인들과 슬로바키아인들 사이에서 범슬라브주의가 탄생한 곳도 그곳이었습니다. 


프라하의 구시가지 광장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체코인들은 비엔나 의회에 참여하며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습니다. 반면 슬로바키아인들은 헝가리 지배를 받으면서 천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습니다. 헝가리는 제국 의회에서 꽤 큰 정치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그 치하의 슬로바키아인들이 발 뻗을 자리는 없었습니다. 슬로바키아인들은 부다페스트의 헝가리 의회에서 목소리를 내지 못했습니다. 합스부르크 치하 체코인들과 헝가리 치하 슬로바키아인들의 영향력은 굉장히 달랐고, 체코-슬로바키아가 합쳐진 뒤에도 이런 정치력 차이는 온존했습니다.


정치만이 아닙니다. 온갖 영역에 노골적인 불평등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보헤미아는 고도로 산업화, 도시화되고 자유주의적인 분위기였던 반면에 산악지대인 슬로바키아 지역은 농업이 중심이었습니다. 개발이 덜 되고 낙후된 상태였고, 분위기도 보수적이었습니다. 체코 사람들도 대부분이 가톨릭 교도였지만 그리 신실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슬로바키아인들은 독실한 가톨릭이었습니다. 체코인들은 훨씬 세속적이고 물질적이고 성직자들에게 반감이 컸으며 사회주의에도 개방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1차, 2차 세계대전 사이의 전간기에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이 크게 늘었던 것도 체코의 이런 분위기 탓이 컸습니다. 


공화국광장의 화약탑(Prašná brána)에서 내려다본 프라하.


슬로바키아인들은 교회의 지배에 훨씬 익숙했습니다. 성직자들은 슬로바키아 민족주의 진영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체코인들은 새로 탄생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정부와 경제·교육 분야의 요직을 차지했고, 이는 어쩔 수 없이 두 민족 간 갈등으로 이어졌습니다. 


히틀러의 침공과 뮌헨 협정


히틀러가 1938년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했습니다. 그 결과 중·동부 유럽에서는 독일 세력이 압도적으로 강해졌습니다. 그 틈을 슬로바키아에서는 체코와의 불균형적인 관계를 깨려는 분리주의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독일계는 체코계와 슬로바키아를 빼면 최대 민족집단이었습니다.


http://www.atlasobyvatelstva.cz/sites/default/files/52_narodnost_praha_en_0.pdf


1938년 9월 30일 독일 뮌헨에서 체결된 뮌헨 협정 Munich Agreement (체코어로는 Mnichovská dohoda, 독일어로는 Münchner Abkommen)은 기본적으로 주데텐란트 영토 분쟁에 관련된 협정이었습니다.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가 체결했습니다. 1차 대전이 끝난 뒤 국제연맹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여러 국민국가로 나눴습니다만, 히틀러는 그 틈을 비집고 '독일 민족의 자결'을 내세우며 '독일인의 생활공간 Lebensraum'을 확보하려고 시도합니다. 


그 해 3월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독일계가 많이 사는 주데텐란트 Sudetenland를 내놓으라고 요구합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새 전쟁이 날까 두려워서 히틀러의 요구를 받아들여, 독일이 주데텐란트를 차지하게 했습니다. 정작 체코슬로바키아는 이 회담에서 배제됐습니다. 그래서 이 협정을 '뮌헨의 배신'이라고도 부르지요. 



영국과 프랑스가 뮌헨에서 히틀러와 야합한 까닭에 슬로바키아는 잠시나마 독립을 누릴 수 있었으나, 독립선언과 함께 실제로는 나치 점령통치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의 독립은 히틀러가 권력을 누렸던 짧은 기간만큼 밖에는 지속되지 않았고, 곧 다시 체코슬로바키아로 합쳐지게 됩니다.


브라티슬라바의 데빈 Devín 성을 그린 그림. /브라티슬라바 시 웹사이트(www.visitbratislava.com)


뮌헨 협정 이전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관계는 다른 내부적인 요인으로 인해서도 더욱 악화됐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 내에서 사실상 세 번째로 큰 민족집단인 루테니아인들은 슬로바키아인들보다 더 심한 불이익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체코와는 사실 역사적인 인연이 별로 없었습니다. 루테니아인들은 슬로바키아인들과 마찬가지로 헝가리인들과 오래 전부터 역사적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그들의 땅은 슬로바키아보다 더 깊은 산지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루테니아인들은 혈연적으로는 우크라이나인들과 가까웠지만 슬로바키아계가 주류를 이루는 동방가톨릭교회 소속이었기 때문에 민족정체성 면에서는 슬로바키아계와 가까웠습니다. 슬로바키아인들 중에는 문화적으로 보아 루테니아인들이 사실상 슬로바키아인들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체코에 압도되고 민족적으로는 슬로바키아에 억눌리면서 루테니아인들의 존재는 갈수록 희미해져갔습니다.


브라티슬라바의 구시가지. 가운데 보이는 것은 '미하일의 문'이라고 합니다. /브라티슬라바 시 웹사이트(www.visitbratislava.com)


슬로바키아 남부에 광범위하게 퍼져 살던 마자르(헝가리)계는 체코슬로바키아 건국 뒤 찬밥 신세가 됐다는 불만이 컸습니다. 그래서 새 나라가 세워진 뒤에도 마자르 민족주의를 고수했습니다. 뮌헨 협정에 따라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를 둘로 나누자 슬로바키아의 헝가리계는 재빨리 히틀러 편으로 붙었습니다. 1938년 히틀러는 슬로바키아의 마자르계 거주지역을 헝가리에 내주었습니다. 그 땅이 루테니아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카르파티아 산맥 기슭에 위치한 루테니아는 1939년 헝가리에 강제로 합쳐졌습니다. 그러나 병합은 짧았고, 2차 대전에서 독일이 패하면서 루테니아의 운명은 다시 바뀌지요. 이렇듯 복잡한 체코슬로바키아 내의 민족 구성이 정치적 불안과 분열로 이어졌고, 나치 독일의 대두라는 국제정세와 맞물렸던 것입니다. 



뮌헨 협정에 따라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를 해체하는 데에 더 유용한 도구가 되었던 것은 보헤미아 국경의 삼림지대와 주데트, 오레 등지에 살던 독일계였습니다. 주데텐란트의 독일계 주민들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일 영토가 줄어들면서 원치 않게도 '독일 밖'에 살게 된 것이었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마사리크, 베네슈 정부는 경제적으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독일계를 통합하기 위해 계속 노력을 했지만 주데텐란트의 독일계는 끝내 나치의 극우민족주의 쪽으로 돌아섰습니다. 이들은 결국 체코슬로바키아가 2차 대전 기간 나치의 점령으로 와해되는 데에 한 몫을 했습니다. 


1939년 나치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를 독일에 병합했습니다. 뮌헨 협정으로 체코와 슬로바키아를 쪼갠 히틀러는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간 오랜 영토분쟁 대상이었던 비옥한 테신(폴란드식으로는 치에신) 지역은 따로 떼어내 폴란드에 넘겨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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