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17-18세기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쇠퇴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정점에 올려놓은 술레이만 대제가 1566년 죽고 그의 아들 셀림2세가 즉위했습니다. 그런데 셀림2세의 별명은 '주정뱅이'였습니다. 영어로는 Selim the Sot 혹은 Selim the Drunkard... 아버지의 영어식 호칭이 Suleiman the Magnificent 인 것과 비교하면 참 얼굴 팔리는 별명입니다. 덕망 있는 군주의 치세가 끝나면 꼭 이렇게 쇠퇴를 재촉하는 인물들이 등장하지요. 그것이 어디 개인의 문제이겠습니까마는. 술레이만 대제가 사망한 뒤, 오스만 제국은 점차 안팎에서 쇠락의 길로 빠져들었습니다.
이 사람이 셀림2세... 멀쩡해뵈지요? 그림은 위키피디아에서 가져왔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안으로부터의 쇠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창 융성하던 시기의 오스만 정부가 갖고 있던 독특한 구조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늘 책을 읽을 때마다 신기하게 느껴지는 게 바로 이 건데요. 군 업무를 포함해서, 제국의 일을 실질적으로 맡아 했던 관리들이 주로 술탄의 궁정에서 일하는 노예들이었다는 점입니다. 술탄의 신뢰를 받는 최정예 부대인 예니체리를 이교도인 기독교도 아이들로 만들었다는 점도 그렇고요.
어찌 보면 노예를 동원하는 것은 효율적일 수도 있습니다. 자기 세력기반이나 자산이 있는 사람들에 비해 권력자가 마음대로 움직이 쉬운 것이 노예들이었을 테니까요. 술탄은 이 노예들의 생사여탈권을 손에 쥐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14세기부터 16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오스만 제국의 행정은 유럽에서 가장 중앙집권적으로, 그리고 효율적으로 운영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염두에 둬야할 것은, 오스만의 노예제는 미국 남부의 노예제와는 시스템과는 전혀 달랐다는 점입니다. 오스만 궁정의 노예들은 비하와 멸시를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술탄의 노예들은 오히려 막강한 권력과 부와 사회적 지위를 갖고 있었고, 심지어는 대중들로부터 존경을 받기도 했습니다.
오스만 정부와 군대의 업무는 개인의 능력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 태어났을 때의 위치나 사회적 지위 따위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치적·군사적으로 뛰어난 역량을 가진 술탄들은 노예들이 가진 재능들을 최대한도로 끌어내고자 노력했고, 이를 통해 제국은 더욱 번영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뛰어난 술탄들은 노예를 부려 뛰어난 정치를 했다'는 것입니다.
숱한 서양인들과 후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술탄의 하렘'. 그림 www.turkeyforholidays.com
이 시스템은 16세기 중반 무슬림 신하들이 노예 관리들을 시샘하기 시작하면서 쇠퇴했습니다. 무슬림 신하들은 뇌물과 술책을 총동원해서, 능력을 바탕으로 높은 자리에 오른 노예 관리들을 내몰았습니다. 제국의 안정 기반인 술탄의 절대 권력에 누수가 생겼고 부패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왔습니다. 제국은 내리막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능력 없는 술탄들이 잇달아 집권하면서 상황은 더 나빠졌습니다. 외부로부터 거센 압력이 밀어닥친 시기에 중앙 정부의 권위가 깨진 꼴이니 그 파장은 갈수록 커질 수밖에 없었겠지요.
(이 무렵 오스만 제국의 고민을 엿보게 해주는 것이,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묵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내 이름은 빨강>입니다. 술레이만 대제의 치세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 이스탄불의 세밀화가들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 소설이죠. 책은 세밀화가들의 눈을 통해 ‘베네치아 화풍’으로 상징되는 서양의 새로운 시대정신과 맞닥뜨리게 된 투르크 제국의 불안감을 보여줍니다.)
서유럽의 신기술은 전통에 기반을 둔 이슬람 사회를 뒤흔들었습니다. 16세기 초반 해운의 발달로 서유럽은 ‘대항해 시대’를 열었습니다. 그들은 극동과 향료 무역을 하기 위해 새 항로들을 개척해, 과거 상권을 장악하고 동서 무역을 독점 중개했던 오스만을 제쳤습니다. 아메리카에서 금과 은이 지중해 동부로 흘러들어와 급격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났습니다. 흥청거린다고 좋은 게 아니죠. 오스만 사회 전체에 현금이 넘쳐나면서 현금 유동량이 크게 늘어난 만큼 세금도 덩달아 높아졌습니다.
17세기가 되자 서유럽에서는 화약 기술도 발달, 무기와 전술이 크게 바뀌었습니다. 기병 중심의 빠른 접근을 특기로 해왔던 오스만 군대는 이런 변화에 발 빠르게 적응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결과는 동유럽에서 오스만의 군사적 우위가 끝나고 서유럽 세력이 득세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프랑스와 영국 등 서유럽 국가들은 열세인 오스만을 상대로 평화조약들을 강요했습니다. 이름만 평화조약이지, 사실은 항복 문서에 서명하라는 것이나 다름없는 요구들이 잇따랐습니다. 오스만은 교역의 이권들을 거의 모두 그들에게 내주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군사 부문에서도 시대에 뒤쳐지고 경제적으로도 목을 옥죄인 오스만 제국은 팽창을 멈추고 조금씩, 하지만 계속해서 작아져갔습니다.
비엔나 전투 /위키피디아
쇠퇴가 본격화된 것은 비엔나 전투에서 참패를 하면서부터였습니다. 1683년 신성로마제국 군대와 연합한 폴란드-리투아니아 군대가 비엔나에서 오스만 제국과 부딪칩니다. 한창 기세를 올리던 신성로마제국의 합스부르크 왕가와, 저물기 시작하는 오스만 세력의 격돌이었던 셈입니다. 결과는 오스만의 참패였습니다. 오스만이 자랑하던 예니체리를 비롯한 대규모 군대는 두 달 간에 걸친 비엔나 봉쇄 뒤 엄청난 손실을 입고 패배했습니다.
(여담이지만 이 전투는 고대 페르샤와 그리스의 마라톤 전투와 함께, 동방에 대한 서방의 우위 혹은 이교도에 맞선 기독교 진영의 승리를 강조하는 테마로 여러 장르에서 등장하지요. 영화로도 만들어졌고요. 마라톤 전투에서 한국인들이 쉽사리 그리스에 감정 이입하면 '야만적인 페르샤'를 적대시하듯, 비엔나 전투를 설명하면서 '야만적인 투르크'에 맞선 유럽 기독교의 승리라고 예찬;;하는 블로그들이 있더군요.)
비엔나 전투는 300년 넘게 벌어진 오스만과 신성로마제국의 전쟁을 결말지은 싸움이 됐습니다. 더불어 이 전투는 신성로마제국의 주인이 된 합스부르크의 유럽 제패를 확정지은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1699년 합스부르크 제국은 오스만 제국을 헝가리와 다뉴브 남부에서 몰아냈습니다.
이것이 1580년 무렵의 오스만 영토입니다.
이것은 1800년 무렵의 영토이고요. 유럽과 아나톨리아쪽 영토가 크게 줄었지요.
투르크인들은 그러는 동안에도 흑해 북부에서 러시아와 끊임없이 전쟁을 벌여야 했습니다. 1702년 막을 내린 러시아와의 싸움에서도 역시 패배해 영토를 크게 잃었습니다.
1711년 러시아의 차르 표트르1세 Pyotr Veliky·Peter the Great (표트르 대제·1682-1725년 재위)가 오스만의 발칸 기독교지역 영토 중 가장 덩치가 컸던 몰다비아를 공략하려다가 실패하고 돌아감으로써 러시아에 빼앗겼던 영토는 다시 회복됐습니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에는 짧은 회복기였을 뿐입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군대가 1716년 다시 다뉴브 강을 따라 밀고 들어왔거든요. 사보이 공 외젠이 이끄는 합스부르크 군대는 페트로바라딘에서 투르크 군에 승리를 거뒀으며 이듬해에는 베오그라드를 함락시켰습니다. 1718년 포자레바치 조약에서 오스만 제국은 바나트와 세르비아 북부, 서왈라키아(올테니아)까지 모두 합스부르크에 내줬습니다.
하지만 오스만의 군대는 아직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이 조약으로 인해 이번엔 합스부르크와 러시아 사이에 분란이 일어나 1736년 전쟁이 벌어졌거든요. 러시아가 흑해 북부에 영토를 늘리는 데에 성공하긴 했지만 오스만은 양쪽 적들을 공격해 1737년 승리를 거뒀습니다. 1739년 베오그라드 조약을 맺으면서 합스부르크는 베오그라드와 세르비아 북부, 올테니아를 투르크인들에게 되돌려줬습니다.
그 뒤의 혼란기에 오스만은 유럽 내부 싸움 덕을 좀 봤습니다. 오스트리아 왕위를 둘러싼 왕위계승 전쟁(1740-48년)과 뒤이은 7년 전쟁(1756-63년)이 일어나자 오스만의 적인 유럽의 거의 모든 왕실들이 분란에 휘말린 겁니다. 덕택에 오스만은 발칸에서 잠시 평화로운 시기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768년 러시아의 예카테리나2세 Ekaterina II Alekseyevna(예카테리나 대제·1762-96년 재위)가 오스만 영토로 달아난 폴란드 반군들을 쫓는다며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로 군대를 보냄으로써 평화는 깨졌습니다. 술탄 무스타파3세 Mustafa III (1757-74년 재위)는 이에 맞서 선전포고를 했지만, 이미 힘이 달려 러시아군이 두 공국을 수중에 넣고 크리미아까지 점령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스타파3세(1717-1774년)
오스만의 군주도 근대의 변화에 발맞추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술탄 아흐메드3세의 아들로 에디르네에서 태어난 무스타파3세는 분석적이고 합리적인 인물로서, 군 근대화와 행정개혁을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제국은 서유럽과의 경쟁에 뒤져 쇠락의 길로 접어든 뒤였습니다.
러시아의 공격을 받은 술탄은 어떻게든 확전을 피하려 했으나 러시아가 크리미아를 넘어 폴란드까지 넘보자 선전포고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패전이었고, 술탄은 오래지 않아 껍질뿐인 제국을 남긴 채 톱카프 궁전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루마니아의 브란에 있는 유명한 '드라큘라 성'. 브란은 트란실바니아와 왈라키아 지역이 만나는 곳에 있습니다. 300여년 전 합스부르크 세력과 오스만 세력이 거센 쟁탈전을 벌였던 곳이랍니다. 사진 coolmansion.com
러시아가 이런 성공을 거두자, 물론 전적으로 그 때문인 것만은 아니지만,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2세 Friedrich der Große(프리드리히 대왕·1740-86년 재위)도 동유럽의 오스만 영토를 노리고 나섰습니다. (음... 곳곳의 대제 대왕들이 총출동하는 느낌;;)
프리드리히는 먼저 동유럽에서 예카테리나를 견제하기 위해 폴란드에 팔을 뻗쳤습니다. 내친 김에 이스탄불까지 정복해 발칸에 거대한 정교 제국을 세우려던 예카테리나는 코사크의 반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안으로 물러섰습니다. (이 시기, 러시아가 세력을 부풀리며 돌진해오는 것이 보이지요. 하지만 러시아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요 ㅎㅎ)
1774년의 큐축카이나르자 조약(Treaty of Küçük Kaynarca)은 오스만의 쇠락에 결정타를 날렸습니다. 이 조약은 오스만이 더 이상 유럽의 열강이 아니라는 걸 그대로 보여줬습니다. 러시아는 흑해 연안의 광범위한 지역을 얻어냈고, 흑해 해상권도 따냈습니다. 또 조약의 모호한 문구를 자신들에 유리하게 해석,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 내 정교 세력을 대변할 대표를 이스탄불에 파견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게다가 오스만은 제국 전역의 정교 교회 재산에 대한 보호를 약속해야 했습니다. 오스만은 이제 말 그대로 종이호랑이, 그것도 수염 뽑힌 호랑이로 전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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