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상상 여행

25. 폴란드, 스웨덴, 코사크, 러시아... 폴란드와 러시아의 기나긴 악연

딸기21 2013. 7. 10. 15:20
25. 16-17세기 폴란드의 성쇠

한동안 머물렀던(?) 투르크제국과 이스탄불을 떠나, 다시 폴란드로 가봅니다.

야드비가 공주와 야기에워 공의 결혼을 통해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합쳐지면서 '정략결혼을 통한 왕실-국가간 결합'이라는 시스템이 만들어졌다고 했지요. 1565년 루블린 조약으로 통일이 공식화되면서, 폴란드 귀족들의 관료 체제가 리투아니아 귀족사회에도 뿌리를 내렸습니다. 왕자공주 혹은 왕과 여왕의 결혼이 '나라끼리의 결혼'으로 이어졌다고 하지만 그 나라 사람들이 몽땅 다 끼리끼리 결혼한 것도 아니고... 리투아니아는 이후 모든 영역에서 가톨릭 국가인 폴란드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는 처지가 됐다고 보는 것이 역사가들의 시각입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일방적인 관계라는 게 있나요. 폴란드인들은 리투아니아를 좌지우지한 데에 따른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골치아픈 짐을 하나 떠맡은 겁니다. 동쪽에서 러시아 모스크바 공국과 리투아니아 간에 몇 백 년에 걸쳐 분쟁이 이어져왔는데, 이걸 해결하는 짐을 폴란드가 떠안게 됐습니다. 이로 인해 폴란드 서쪽(오늘날의 독일)의 국경 부근에서 계속돼온 분쟁에서는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Unia Lubelska, '루블린의 결합'  National Museum in Warsaw. /위키피디아


1572년 몰락하기까지 야기에워 왕조가 다스린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유럽에서 가장 취약하고 내부적으로 분열된 나라였습니다. 왕좌를 지키기 위해 귀족 관료들에게 정치적 특권을 주었던 것은 완전한 패착이었습니다. 1505년 왕실은 귀족들에 밀려 귀족 의회인 ‘세임’을 국가의 최고의사결정기구로 공인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훗날 재앙으로 귀결됐습니다. 지방 귀족들의 이기적인 분파주의 때문에 나라의 단합은 물 건너갔고, 중앙 정부의 정치권 권위는 무너졌습니다.

폴란드 사회는 부유한 귀족계급과 못 가진 평민으로 극단적으로 양분됐습니다. 정부 개혁은 불가능해졌고 봉건적 군사시스템은 화석화됐으며 결국은 폴란드의 존립 자체가 봉건 영주들과 이웃나라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지어지는 상황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야기에워 왕조가 끝나자 폴란드 귀족들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국내외에서 불러온 취약한 국왕들을 잇달아 옹립했습니다. 1558-1582년에는 발트 해에 부동항(不凍港)을 얻으려는 속셈으로 러시아의 차르 ‘잔혹왕’ 이반4세 Ivan the Terrible (이반 뇌제·1547-84년 재위)가 일으킨 리보니아 전쟁 The Livonian War 에 말려들었습니다. 1558년부터 1583년까지 기나길게 이어진 리보니아 전쟁은 오늘날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가 있는 옛 리보니아 지역을 놓고 벌어진 러시아와 주변 국가들의 전쟁입니다. 러시아에 맞섰던 상대편은 덴마크-노르웨이연합국과 스웨덴 왕국, 야기에워 체제로 합쳐진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폴란드 왕국이었습니다.

폴란드는 몇 년 동안 소득도 없는 전쟁에 질질 끌려 다니면서 값비싼 희생을 치른 뒤 반러시아 전선에 스웨덴을 끌어들임으로써 간신히 승전을 거뒀습니다. 이후 러시아는 군사적으로 소진한데다 이반의 죽음으로 강력한 중앙정부가 무너져 ‘수난의 시대(1598-1613년)’에 접어들었습니다.


Martin Kober가 그린 지그문트3세의 초상. /위키피디아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만, 러시아와 폴란드의 악연은 질깁니다.... 러시아의 수난기는 폴란드의 중흥기였습니다.

발트 연안에서 러시아의 위협에 맞서 더욱 공고한 진지를 구축해야 한다는 요구에 따라 스웨덴 바자 왕가의 지그문트3세 Sigismund Ⅲ Vasa (1587-1632년 재위)가 폴란드의 왕위에 올랐습니다.

바자 왕실은 프로테스탄트였는데 반해 지그문트는 예수회 사제들에게 교육받은 독실한 가톨릭이었습니다. 그의 집권기에 폴란드에서는 반(反) 종교개혁 운동이 힘을 받았습니다. 1596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연합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물론,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정교 교회도 ‘동방 귀일(歸一) 가톨릭교회’라는 이름으로 로마가톨릭에 통합됐습니다.

그러고 나서 ‘가톨릭 폴란드’는 ‘정교 러시아’를 정복한다는 종교적 팽창정책에 따라 혼란에 빠진 러시아의 국내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습니다. 폴란드와 코사크 군대는 모스크바 공국에 허울뿐인 왕 디미트리 Dimitri (1605-06년 재위)를 세우는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디미트리의 친 가톨릭 행보는 러시아인들의 반발을 샀고, 스웨덴의 지원을 받는 러시아인에게 차르 자리가 넘어갔습니다. 지그문트는 또 다른 허수아비 차르를 내세워 러시아를 공격하고 스몰렌스크를 차지하고 러시아 귀족들로부터 자기 아들을 차르의 계승자로 삼아도 좋다는 합의를 받아냈습니다. 1605년부터 1618년까지 이어진 이 싸움을 '폴란드-모스크바 전쟁 Polish–Muscovite War'이라고 부릅니다.


1610년 모스크바를 점령한 지그문트3세가 만든 '도시계획도'입니다.
모스크바를 저 지도에서 구상한 'Sigizmundia' 즉 지그문트의 도시로 만들려 했다는군요.
한때 폴란드가 이렇게 잘 나갈 때도 있었네요 ㅎㅎ 얼마 가지는 못했습니다만...



1610년에는 폴란드는 모스크바를 점령했고, 혼란을 틈타 스웨덴도 노브고로드를 손에 넣었습니다. 하지만 지그문트는 아들 브와디스와프에게 갈 예정이던 모스크바 차르 자리를 자기가 차지하겠다며 말을 바꿔 승전의 명분을 퇴색시켰습니다. 이런 행태에 반발한 러시아인들은 1612년 봉기를 일으켜 모스크바에서 폴란드 세력을 몰아냈습니다.

폴란드, 스웨덴, 코사크의 약탈에 시달리던 러시아인들은 러시아 출신의 차르인 로마노프가의 미하일1세(1613-45년 재위)를 옹립했습니다. 그는 러시아계와 코사크 모두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1617년 미하일은 스웨덴과 평화조약을 맺고 노브고로드를 돌려받았습니다. 하지만 모스크바에서 물러난 뒤에도 국경지대 러시아 땅 상당부분을 붙들고 있던 폴란드는 그 이듬해 휴전협정을 통해 점령지를 계속 점유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리고 얼마 못가 폴란드는 스웨덴과 다시 전쟁을 벌이게 됐습니다. 1632년 휴전 기간이 끝나자 러시아인들은 다시 폴란드에 적대적으로 변했습니다. 1634년 양측 간의 ‘영구적 평화’ 약속은 깨졌습니다. 지그문트의 뒤를 이은 아들 브와디스와프7세(1632-48년)는 러시아의 왕위가 원래는 자기 것이라는 주장을 들고 나왔습니다.

폴란드와 러시아의 분쟁은 우크라이나로 옮겨갔습니다. 1630년대 우크라이나에서 가혹한 탄압을 받던 정교 세력은 자포로제의 코사크에 폴란드 동방귀일 교회의 압력으로부터 구해 달라 요청했습니다.

잠시 코사크 얘기를 하자면.. 저에게 코사크의 이미지는 '대장 부리바'의 이미지입니다. 니콜라이 고골의 소설이죠. 원제는 'Taras Bulba'인데, 일본판을 중역했는지;; 어릴적 제가 본 책이나 영화는 모두 '부리바'로 돼 있었어요. 어린이용으로 각색된 소설을 보면서 정말 '손에 땀을 쥐며' 긴장하고, 불바의 큰아들이 죽었을 때 안타까워 방바닥을 쳤던 기억이 납니다. 


그림은 본문과는 아무 상관 없는;; 사실주의 화가 일리야 레핀이 1880년대에 그린
'투르크의 술탄에게 편지를 쓰는 자포로제 코사크족'이라는 그림입니다.
'코사크' 하면 꼭 나오는 이미지이고요. 러시아 국립박물관 소장품이라는데, 위키피디아에서 가져왔습니다.



1648년 헤트만(코사크 군대의 사령관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보그단 흐멜니츠키 Bogdan Khmelnitsky 가 이끄는 반 폴란드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봉기에서 열세에 밀린 흐멜니츠키는 1654년 러시아에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리고 페레야슬라프 협정을 통해 우크라이나 동부는 러시아의 보호령이 됐습니다.

★코사크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남부에 있었던 부족·군사 집단을 가리킵니다. 15세기 말 우크라이나 중부 드니에페르 강 유역에 위치한 자포로제에서 처음으로 코사크 세력권이 형성됐고(자포로제 코사크) 16세기에는 돈 강 유역에 돈 코사크가 결성됐습니다.

코사크 구성원의 출신 국가는 다양했다고 합니다. 자포로제 코사크는 원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국가의 지방 봉건세력이었으나 보그단 흐멜니츠키의 반란 때 잠시 ‘코사크 헤트만국가’라는 이름으로 독립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흐멜니츠키 세력은 얼마 못가 진압됐고, 1654년 페레야슬라프 조약으로 러시아에 복속됐습니다. 이후 300여 년 동안 코사크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제가 이 글 올리면서 코사크와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의 '카자흐'가 같은 어원이라고 썼는데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류한수 교수님께서 이 글 보시고, 코사크에 대해 친절히 일러주셔서 고쳤습니다. 류 교수님 말씀도 덧붙여 놓을게요.

"러시아어로 카자크, 영어로는 코사크라고 하는 집단은 민족 집단이 아니라 근대 초에 러시아의 중앙권력을 피해 모스크바의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변경 지대, 즉 러시아와 투르크 사이의 중립지대인 러시아, 우크라이나 남부로 도주한 러시아인 평민들입니다 카자흐는 중앙아시아에 있는 유목 민족집단이지요. 혈통상 러시아인하고는 별개의 민족입니다 카자크와 카자흐는 표기가 비슷해서 혼동하지만 엄연한 의미에서는 별개의 개념이면서 연관성이 거의 없는 집단이지요."

싸움에는 졌지만 자포로제 코사크는 러시아로부터 자치를 보장받았습니다. 이들은 우크라이나의 동포 코사크족과 농민들에게도 러시아 차르에게 충성서약을 하도록 부추겼습니다. 잠시 잘나가는 듯했던 폴란드는 찌그러지고, 이제 이 일대는 러시아 세상이 됩니다. 페레야슬라프 협정 이후 폴란드는 스웨덴, 러시아, 카자흐, 투르크로부터 동시다발 공격을 받아 거의 국가가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특히 스웨덴의 침공으로 인한 혼란은 폴란드 역사에서는 ‘대홍수(The Deluge. 1648-1661)’라 불립니다. 1657년 위기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폴란드의 체스토코바 왕조는 기적처럼 스웨덴에 맞서 반격을 하는데 성공, 국운을 잇고 국가를 안정시킬 수 있었습니다. 1667년 폴란드와 러시아는 안드루소보에서 우크라이나의 중재로 정전에 합의했습니다.

러시아는 스몰렌스크와 함께 키예프를 포함한 드니에페르 강 왼편의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을 확보했습니다. 폴란드는 우크라이나 서부와 드니에페르 강 오른편 땅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19년 동안이나 산발적으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분쟁은 1686년 양측이 안드루소보에서 약속한 ‘영구적인 평화’에 다시 한번 합의하고서야 비로소 끝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