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상상 여행

24. 터키의 이스탄불, 예전의 모습은 어땠을까

딸기21 2013. 6. 15. 00:13

24. 16-17세기의 이스탄불


요즘 이스탄불 탁심 광장 재개발에 반대하는 시위 소식이 많이 들려왔지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총리가 시위대와 만나 재개발 공사를 '일단 중단하겠다'고 함으로써 잠시 소강국면을 맞고 있는 듯합니다만.


이스탄불... 콘스탄티누스의 도시에서 비잔틴 제국의 수도로, 그리고 오스만투르크 제국 아래에는 이스탄불로. 이 도시처럼 찬란한 도시가 세상에 또 있을까 싶어요. 오래전 이스탄불을 여행한 뒤에 "세상 어느 도시와도 비교할 수 없는 곳"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세상 모든 도시는 저마다의 색깔을 지니고 있다고요? 하지만 이스탄불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터키가 자랑하듯 '두 대륙이 만나는 도시'이기도 하지만 그 역사와 문화와 풍경은 정말이지... 


사진 위키피디아


이를 테면 이런 거지요. 런던과 뉴욕, 현대의 뉴욕과 고대의 로마, 서울과 도쿄, 밀라노와 피렌체, 뭐 이런 식의 비교를 할 수는 있어도, 세상에서 이스탄불과 짝지어 설명할 수 있는 도시가 과연 어디일까... 이스탄불과 비교할 수 있는 도시는 '콘스탄티노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는. 이스탄불 자신의 과거하고만 비교할 수 있는 도시 중의 도시랄까요. (잠시 이 시점에서 생각해봅니다. 그렇다면 과연 바그다드는 어떤 도시와 비교될 수 있을까 하고. ㅎㅎ)



그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볼까요.


술탄 메흐메드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것은 1453년. '정복왕' 메흐메드2세는 유럽의 문화적 정수이자 고갱이인;;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을 오스만이라는 '이슬람 세계국가'의 수도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이스탄불은 이슬람의 신적인 질서를 구현해 '세계'(당시 오스만의 영토가 지금으로 치면 수십개 나라에 걸쳐 있으니 세계제국이라 해도 무방했지요)에 알리는 도시가 될 것이었습니다.


메흐메드2세, 혹은 오스만투르크만의 욕심은 아니었습니다. 과거 비잔틴 제국도 이 도시를 비잔티움이라 부르며 정교 세계관의 전시장으로 삼았습니다. 주인이 바뀌긴 했지만, 여러 측면에서 이스탄불은 콘스탄티노플 시절부터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었습니다. 이 도시는 신국(神國)의 정치·문화가 시작되는 원천이었던 겁니다. 다만 기독교 비잔틴 제국에서 이슬람 오스만 제국으로 바뀐 것 뿐. 


보스포러스 해협에서 바라본 유럽쪽 이스탄불. 미나레트(첨탑)가 6개 있는 걸로 보아 왼쪽이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블루모스크)인가보네요. 터키에선 모스크를 '자미'라고 부른답니다. 사진 위키피디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메흐메드는 사흘 동안 휘하 군인들에게 마음껏 약탈할 시간을 준 뒤 다시 도시를 장악해 새 수도로 꾸미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 상징적인 조치는 소피아 사원의 변화입니다. 비잔틴 황제 유스티니아누스가 세운 하기아 소피아 사원은 이슬람 제국의 모스크인 아야 소피아로 바뀌었습니다. 다른 성당들과 수도원들도 비슷한 운명을 맞았습니다. 


하지만 술탄은 투르크계가 아닌 주민들에게도 안정적으로 경제활동을 계속할 권리를 보장해주었다고 합니다. 사실 이 도시가 망가진 것은 투르크가 아닌 십자군 때문이었습니다. 1204년 십자군에 무참히 약탈당한 뒤 그 상처에서 영영 복구되지 못했던 것이죠. 1261년 라틴 제국이 물러나고 비잔틴 제국이 다시 들어선 뒤에도 재정이 부족한 탓에 지난 날의 영화를 찾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투르크 세력이 들어왔을 때 도시는 사실 텅 빈 껍데기뿐이었을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주민들은 뒤죽박죽이었고 도시의 시설들은 유지보수를 못해 엉망이었다는 겁니다.


꽃 향기를 맡고 있는 메흐메드2세... 정복왕의 낭만이로군요. 그림 위키피디아



투르크 제국은 도시를 손에 넣은 뒤 곧 재건에 착수했습니다. 메흐메드는 능숙한 장인, 상인, 공예가들에게 도시의 공공·사유 자산들을 나눠주며 재건에 나서도록 유도했다고 합니다. 민족·종교를 막론하고 이스탄불 성곽 안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이스탄불은 이내 다(多)민족적, 다문화적인 분위기 속에 정치·경제·문화 모든 면에서 제국의 중심이 됐습니다. 영토를 널~리 널~리 확장해놓은 덕분에 이제 이스탄불은 국경지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평화롭고 안전했습니다.


이스탄불은 점차로 이슬람 도시로 변해갔습니다. 수많은 교회들이 모스크로 변했고 미나레트(모스크의 첨탑)들이 도시의 실루엣을 바꿨습니다. 모스크 단지(모스크에는 대개 이슬람 학교와 구호단체 사무실 등이 딸려 있거든요)들과 우물, 대상(隊商)들이 묵어가는 여관, 공중목욕탕, 공공 급식소와 요양소, 무덤과 영묘(靈廟), 이슬람 금욕주의 수도사들의 집회장, 도서관 같은 건물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습니다. 


메흐메드는 옛 비잔틴 왕궁은 방치 혹은 파괴한 뒤 성 사도 교회 등 이스탄불의 옛 비잔틴 건물들에서 뜯어온 재료들로 새 왕궁 에스키 사라이(궁전)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되지도 않은 1459년, 그는 옛 비잔틴 제국의 광장 터에 더 큰 궁전을 짓기로 했습니다. 비잔틴의 망가나(Mangana) 왕궁이 있던 자리에 육중한 성벽과 넓은 공원과 정원들로 둘러싸인 톱카프 사라이가 솟아올랐습니다. 


톱카프궁전의 위용은 말로 설명하기 힘들어요... 16세기의 궁정 그림입니다 ㅎㅎ



해협에서 바라본 톱카프. 위쪽 언덕 위에 보이는 것이 톱카프 궁전입니다. 사진 위키피디아



톱카프는 두 종류의 공간으로 구성돼 있었습니다. 술탄의 침실과 여인들이 기거하는 하렘, 서재, 정자 등이 있는 황제의 사적인 공간들이 첫 번째 공간이고요. 추밀원 회의실, 금고, 영빈관, 부엌, 호위병들의 막사, 무기고 등이 있는 업무공간이 두 번째 공간입니다. 이곳이야말로 제국의 정치적 중추였습니다. 성문 중에는 외국에서 온 전권대사들만이 드나들며 특별한 대접을 받는 곳도 있어, ‘장엄한 문’이라 불렸습니다.


비잔틴 시절 하기아 소피아와 망가나 궁전이 그랬듯, 오스만 시대 이스탄불의 정치, 군사, 종교, 문화도 아야 소피아와 톱카프를 중심으로 돌아갔습니다. 정예부대인 예니세리도 이곳에 머물렀습니다. 근처에 있는 히포드롬(그리스어에서 나온 단어인데 마상 경기장을 가리킵니다)에서는 장대한 볼거리들이 열렸습니다. 


The Hippodrome in Ottoman times, 16th century miniature by Matrakçi Nasuh. 그림 maritimehotelistanbul.com



왕궁 부근에는 종교적, 정치적으로 중요한 건물들이 늘어섰습니다. 해외 정복에서 약탈해온 물건들, 정복된 영토에서 보내온 세금과 공물들은 이스탄불의 아름다운 모스크와 왕궁, 종교기관들을 짓는 데에 쓰였습니다(지금도 톱카프 궁전의 '보석방'에는 제국의 온갖 지역에서 가져온 눈부신 공물들이 가득합니다)


도시를 가꾸는 일에 누구보다 열성을 보인 사람은 술레이만 대제였습니다. 대제는 왕실 건축가 미마르 시난 Mimar Sinan (미마르는 '건축가'라는 뜻인데, 시난이 워낙 유명한 건축가여서 '미마르 시난'이라는 이름으로 아예 굳어졌습니다)을 시켜 후대에 길이 남을 걸작들을 만들게 했습니다. 시난의 설계로 1557년 지어진 술레이마니예 모스크는 이스탄불의 스카이라인을 바꿨습니다. 비잔틴 제국이 하기아 소피아를 통해 부와 권력을 과시했듯, 대제는 이 모스크를 지어 정점에 이른 제국의 힘과 영광을 드러내보였습니다.


블루모스크와 톱카프에서 벗어나 언덕으로 올라가면 술레이마니예 모스크가 있습니다. 사진 위키피디아. 이스탄불에서 가장 좋아했던 곳. 저희 집 안방에는, 이 모스크 안에서 찍은 아빠와 딸의 다정한 모습을 담은 사진이 걸려 있답니다.



이스탄불이 이슬람 제국의 수도이긴 했지만 종교적, 민족적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지난해 읽은 영국 작가의 소설 <코렐리의 만돌린>에는 터키에 살다가 그리스로 넘어온 그리스인 할머니 얘기가 나오더군요. 오스만 시절의 이스탄불은 유대 지구, 아르메니아 지구 등으로 주민에 따라 구역이 정해지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핵심 구역은 육지 쪽 성벽의 끝자락, 도로의 종착점에 위치한 파나르(Phanar)였습니다. 부유한 그리스 상인들이 여전히 그리스 정교 대주교의 가르침을 받으며 그곳에 구역을 형성했습니다. 


그리스계는 16-18세기 오스만 제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당시 오스만은 제국, 그리스는 그 점령지였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터키와 그리스가 앙숙입니다만... 옛 오스만 제국에서 그리스계는 제국의 제해권을 담당하면서 해외 상업 활동을 주도했다고 합니다. 해군 지휘부나 황궁의 외교 담당자들도 그리스계였습니다. 통역, 행정가 중에도 광범위하게 외부와 접촉해온 그리스인들이 많았습니다. 


파나르의 정교 공동체 조직 회원이었던 주민들을 파나리오테스(Phanariotes)라 불렀는데, 이들 그리스계는 18세기에는 막대한 재력으로 투르크인들을 밀어내고 왈라키아와 몰다비아 공국의 왕위를 사들이기도 했습니다. 파나르는 이슬람이 아닌 그리스 정교의 교회 질서에 따라 운영됐습니다. 오스만은 ‘밀레트(종교공동체·민족)’라는 독특한 개념을 두어 이슬람이 아닌 다른 신앙을 인정했고, 민족을 불문하고 정교 등 모든 종교공동체들에 자치를 허용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제국 안에는 이슬람 성법(聖法)에 따라 다스려지는 이슬람 신정(神政) 사회와 성법 밖에서 각각의 종교법에 의해 통치되는 비이슬람 사회가 공존했습니다. 둘 사이의 충돌을 막기 위해 메흐메드2세는 무슬림이 아닌 신민들을 정교, 유대인, 아르메니아 밀레트로 나누고 각 종교공동체의 지도자들이 주민들을 관리하게끔 했습니다.

 

밀레트 중 가장 큰 정교 밀레트는 제국이 거둬들이는 세금의 주요 원천이었습니다. 그래서 정교 사회의 지도자들은 오스만 정계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심지어 정교의 총대주교는 비잔틴 시절보다 오히려 오스만 치하에서 발칸 정교 세계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합니다. 


★밀레트(millet)


터키어로 ‘종교공동체’ 또는 ‘민족’이라는 뜻인데, 오스만 투르크 제국 시대에는 무슬림이 아닌 다른 종교·민족 집단을 통칭하는 말이 됐습니다. 밀레트는 제국 내에서 자치권을 누렸고 자신들만의 고유한 법률을 가졌으며 각기 자신들의 방식대로 지도자를 뽑아 통치를 받았습니다.

그 대신 밀레트의 지도부는 중앙 정부에 세금을 내고 지역의 안정과 안보를 책임졌습니다. 하지만 1856년 오스만 제국이 행정개혁을 하면서 이슬람법이 아닌 서구식 세속법이 도입됐고, 밀레트들의 자치권도 거의 없어져 제국법 아래로 들어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