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세계사/동유럽 상상 여행

23. 적들에게 죽음을 알리지 않았던 오스만의 지배자, 술레이만 대제

딸기21 2013. 5. 20.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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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가까운 시대??로 접어듭니다!


23. 16세기 중반 유럽에서 정점에 오른 오스만 투르크 제국


드디어 이 사람의 시대가 됐습니다. '술레이만 대제'로 알려진 술탄 술레이만1세 Süleyman the Magnificent (1520-66년 재위)... 술레이만은 '솔로몬'의 터키식 명칭이죠. 술레이만 치하에서 오스만 제국은 유럽으로의 팽창을 계속합니다. ‘노예 군단’으로도 불렸던 잘 훈련된 예니체리 보병부대와 기병부대를 필두로 한 술레이만의 군대는 유럽의 적들과 만나 연전연승을 거뒀습니다. 


군사적 성공을 거듭하며 그의 제국은 다뉴브 분지 깊숙한 곳으로 영토를 늘렸습니다. 술레이만은 유럽의 지배자들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인물이었습니. 오스만 제국에서는 그의 통치 기간 건축, 예술, 법학, 문학, 외교, 상업이 활발하게 꽃피어 말 그대로 황금기를 이뤘습니다.


(예전 터키 여행할 때 <인사이트 가이드> 터키편에서 본 것인데, 보통 오스만 술탄들은 하렘에 수많은 처첩들을 두었다 하지요. 그런데 가장 위대한 황제로 꼽히는 술레이만 대제는 처첩들을 물리치고 스스로 일부일처제를 선언했답니다. 왜냐면, 부인 록셀라나가 대단대단한 여성이었기 때문이라는데, 자세한 것은 모르니 이만 생략;;)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지만... 머리가 저렇게 무거워서야... /위키피디아



술레이만의 아버지는 ‘야우즈(냉혹한) 셀림’으로 불렸던 셀림1세 Yavuz Selim(1513-20년 재위)입니다. 아버지가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영토확장에 주력했다면, 그 아들인 술레이만은 유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1521년 술레이만은 헝가리 남부 접경지대의 핵심 요새인 베오그라드를 함락시켰습니다. 1526년에는 모하치 Mohács 전투에서 야기에워 왕조의 루이2세가 이끄는 헝가리군이 전멸하고 국왕까지 숨지면서 헝가리와의 간헐적인 국경 전투도 사라졌습니다. 모하치를 얻어냄으로써 오스만은 다뉴브 분지의 심장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었습니다. 헝가리 수도 부다를 점령한 뒤 술레이만은 헝가리를 제국에 병합하는 대신, 일단 트란실바니아 속주의 왕 야노스 자폴랴 János Szapolya (1526-40년 재위) 밑의 속령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자폴랴 세력과 합스부르크 왕가의 페르디난트1세 Ferdinand I (1526-64년 재위) 사이에 헝가리 왕위를 둘러싸고 분쟁이 벌어지게 됐다지요. 1527년 페르디난트의 군대가 부다를 점령하고 자폴랴 세력을 무너뜨리자 트란실바니아는 술레이만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술레이만 대제(Süleyman the Magnificent)


술레이만 대제는 1495년 흑해의 해안도시 트레비존드(트라브존)에서 태어났습니다(오래전 축구선수 이을용이 뛰었던 터키의 트라브존 스포르라는 클럽을 혹시나 기억하시는 분들 계신지... 바로 그 트라브존이고요, 금실을 아주 얇게 꼬아 만든 섬세한 금세공품들로 유명한 곳이랍니다).

형제들을 모두 죽여 ‘냉혹한 셀림’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아버지 셀림1세에게는 아들이 하나뿐이었기 때문에 술레이만은 계승권 다툼 없이 평화롭게 오스만 제국의 술탄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술레이만의 인생은 정복 전쟁으로 점철됐습니다. 즉위하자마자 맘루크 왕조(아랍의 노예들이 세운 왕조)를 재건하려는 시리아, 이집트의 반란을 제압했고, 1521년에는 본격적인 발칸 정벌에 나섰습니다. 그는 평생 12차례 대정벌에 참여했고, 전장에서 최후를 마쳤습니다.


술레이만은 헝가리 정복 전쟁을 준비하고, 합스부르크 왕가에 맞서 비밀리에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습니다. 투르크 제국과 유럽 패권국 사이에 맺어진 최초의 동맹이었습니다. 


'프랑코-오토만 동맹'의 두 주역인 프랑스의 프랑수아1세(왼쪽)와 술레이만 대제.
이렇게 찍은 사진그려진 그림이 있는 것은 아니고요, 그림 두 장은 어느 재치꾼이 합성;해놨네요. /위키피디아



1529년 5월 술레이만은 군대를 이끌고 다뉴브 북쪽으로 나아갑니다. 그해 9월 부다는 짧은 봉쇄 뒤 곧바로 술탄의 수중에 떨어집니다. 술레이만은 합스부르크 제국으로 밀고 들어갔갑니다. 하지만 상대의 저항도 만만찮았습니다. 게다가 겨울이 다가오고 있어, 비엔나 봉쇄에 실패한 채 철군합니다. 


술레이만은 헝가리 북부에서 전쟁을 계속하다가, 1533년 아시아에서 이란과 전쟁이 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페르디난트와 화약을 맺고 합스부르크 제국의 헝가리 북·서부 지배권을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헝가리 왕국의 3분의2는 다시 자폴랴 치하로 들어갔고, 합스부르크령 헝가리도 술레이만에 공물을 바치는 속령으로 격하됐습니다. 아, 이 동네는 정말 어쩜 이렇게 복잡한지...


페르디난트는 자신의 형 카를5세(1519-56년 재위)가 황제로 있던 신성로마제국, 교황청, 베네치아와 반 오스만-반 프랑스 동맹을 맺고 1537년 술레이만에 맞서 전쟁을 재개했습니다. 


1540년 자폴랴가 죽고 이듬해 합스부르크 군대가 계속 무모한 도발을 해오자 술레이만은 자폴랴가 다스렸던 헝가리 중부 지역을 제국에 합쳐버리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후 3년 간 지지부진한 전쟁이 이어졌습니다. 서아시아에서 또 이란과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술레이만은 유럽 전선에서는 다시 합스부르크 제국과 휴전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1544년 그는 페르디난트와 분쟁 이전 상태로 돌아간다는 조약을 맺었습니다. 이로써 페르디난트는 매년 공물을 내는 대신 합스부르크령 로열 헝가리를 계속 통치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 조약으로 오스만-합스부르크 분쟁은 잠시 잠잠해졌습니다. 트란실바니아는 자기네 왕자를 지도자로 세우고 투르크의 속령 지위에 머물렀습니다. 왈라키아와 몰다비아 지역의 루마니아 공국도 자신들의 지도자들을 대공으로 올리고 술탄에게 공물을 바쳤습니다. 


1580년 무렵의 오스만 제국 영토(www.allaboutturkey.com). 1580년이라면 술레이만 대제가 아니라 그 다음다음 술탄인 무라트3세 시절이어야 하는데, 설명이 좀 이상하네요....



오스만은 트란실바니아에 투르크 군대를 상주시키는 대신 다뉴브와 우크라이나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루마니아 영토에 요새를 짓고 소규모 방어부대만 배치했습니다. 발칸의 세 속주는 투르크인들에게 매년 공물을 바치기만 하면 되었고, 그 나라 지도자들은 오스만 술탄의 인가 없이도 왕위를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다만 식량을 비롯한 몇 가지 물품은 제국으로 보내야 했습니다. 그 대신 투르크인들은 속주들에 정치·사회·문화적 자치를 허용했습니다. 


속령들이 제국에 대한 재정적·군사적 의무를 지키고 제국에 해를 미치는 외교적 행동을 하지 않는 한 투르크인들은 속령의 군주들의 통치행위에는 일절 간섭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발칸 전체에서 크로아티아와 달마티아 일부만이 술탄의 직접 통치를 받았습니다.


1551년 페르디난트가 다시 전쟁을 일으켜 트란실바니아를 2년 동안 점령했다가 쫓겨났습니다. 1555년 카를5세가 퇴위하면서 페르디난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1556-64년 재위)도 겸하게 됐는데, 오스만과의 무의미한 싸움이 간헐적으로 이어졌습니다. 술레이만과 페르디난트는 그러다가 1562년 다시 현상유지에 합의, 프라하 평화조약을 체결했습니다. 페르디난트는 1564년 죽을 때까지 오스만의 속령인 헝가리 북부 로열 헝가리 지역을 다스렸습니다. 


그의 뒤를 이은 막시밀리안2세 Maximilian II (1564-76년 재위)는 1566년 다시 오스만과의 전쟁을 선언했습니다. 이미 72세가 된 술레이만은 시제트바르의 요새에 포위돼 있다가 막사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하지만 이틀 뒤 오스만 군대가 시제트바르 시타델(성채)을 장악해 승리를 거둘 때까지 그의 죽음은 비밀에 부쳐졌습니다. 나의 죽음을 적들에게 알리지 말라...였던 걸까요.


오스만 제국은 이후에도 서유럽에 큰 위협이 되었고 폴란드 남부와 우크라이나가 새로 그들 손에 넘어갔습니다. 하지만 유럽에서 오스만 세력은 술레이만 시절 정점에 오른 뒤, 그의 사후 내리막을 걸었습니다. 대제를 이은 아들 셀림2세 Selim the Drunkard (1566-74년 재위)는 ‘주정뱅이 왕’이라는 별명이 딱 어울리는 인물이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해전(海戰)


술레이만이 유럽 쪽 영토를 늘리는 동안 오스만의 함대도 지중해와 홍해, 인도양에서 제해권을 계속 확대해갔습니다. 


지중해의 섬 몰타를 봉쇄한 투르크 군인들. 16세기의 프레스코화/위키피디아



1538년 오스만 함대는 알바니아 해안에서 기독교 국가의 연합함대를 격파하고 지중해 해상권을 장악했으며 알제리 등 아프리카 북부를 점령했습니다. 술레이만은 바다를 장악함으로써 아시아-유럽-아프리카를 잇는 교역 이익을 챙길 수 있었습니다. 교역 이권을 지렛대 삼아 유럽국가들 간의 분열을 조장하는 화려한 외교전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인도양을 넘나드는 투르크의 함대들을 그린 그림도 있네요. 하지만 투르크는 기마전사라는 인상이 강한지라, 역시나 '해전'의 이미지는 좀 어색하다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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