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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오스만 투르크 제국, 동유럽을 삼키다

딸기21 2013. 4. 8.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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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13-15세기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흥기


(우왕... 이 연재를 시작한지 벌써 1년이 되었어요... 50회 분량인데, 아직도 1년은 더 해야겠군요 ㅋㅋ)


구미에서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오토만(Ottoman) 제국’이라 부릅니다. 오토만이라는 말은 투르크족의 지도자인 오스만1세 Osman I(1258-1326. 1281-1326년 재위)의 이름을 서양인들이 잘못 발음한 데에서 나온 거라고 합니다오스만1세는 아나톨리아의 북서쪽 모퉁이, 유럽과 비잔틴 가까이 있던 셀주크 투르크족 나라의 지도자 중 하나였는데, 훗날 대제국이 되는 나라를 일으키면서 기독교 세계의 숙적으로 떠오릅니다. 


이런 그림을 세밀화라고 하지요. 오스만1세의 초상입니다. 터키 이스탄불의 톱카프 궁전 박물관에 있는 그림이고요, 위키피디아에서 퍼왔습니다.




오스만이 셀주크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것은 1299년. 몽골(원나라) 군대가 서진하면서 쳐들어온 것이, 오스만이 투르크족을 규합하는 계기가 됐다고 합니다. 그를 따르는 병사들이 늘었고, 오스만은 이들을 효율적이면서 충성스런 군대로 조직했습니다. 이미 이슬람으로 개종한 투르크족은 지하드(聖戰·성전)를 통해 이슬람 세계를 확장하려는 야심을 키웠습니다.


오스만 제국이 크게 성장한 것은 오스만1세가 죽은 뒤 자리를 물려받은 아들 오르한1세 Orhan I (1281-1362. 1326-60년 재위) 때였습니다. 오르한이 이끄는 이슬람 군대는 오늘날의 터키에 있는 부르사를 손에 넣고 아나톨리아에서 비잔틴 세력을 완전히 쫓아냈습니다. 


오르한 치하에서 오스만 전사들은 남동부 유럽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그 뒤로 250년에 걸쳐 그들은 유럽 기독교 세력을 상대로 승승장구했지요. 지도자 10명이 대를 잇는 동안 영토를 굳건히 지켰습니다. 발칸 동유럽 왕국들이 저마다 영광을 누린 적은 있지만 3대를 못 간 것과는 사뭇 다르군요.


이것이 오스만1세 때의 판도이고요


이것은 오르한1세 때의 판도입니다. 확 커졌죠? (지도 위키피디아 참조)


오스만 군대를 불러들인 것은 역설적이지만 비잔틴 제국이었습니다. 요한네스 칸타쿠제누스(요한네스6세)와 요한네스 팔라이올로구스(요한네스5세)가 황위를 놓고 내전을 벌였는데, 요한네스6세가 1345년 이들을 용병으로 부근 겁니다. 그 때 처음 유럽에 발을 들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여우를 잡자고 호랑이를 불러들인 것... 1349년 오르한은 다시 요한네스6세를 지원한다며 군대를 보내 세르비아의 두샨을 침략했습니다.


요한네스6세가 1354년 세 번째로 도움을 요청하자 오르한은 아시아와 면한 유럽 대륙 끝자락의 갈리폴리(터키 이름으로는 갈리볼루라고 하지요. 훗날 1차 대전 때 영연방 연합군이 참패를 당한 갈리폴리 전투의 그곳~)를 아예 차지하고 앉아 요새로 만들었습니다. 갈리폴리는 남동부 유럽에서 투르크족의 군사작전을 위한 영구 기지가 되어버렸습니다. 오르한이 죽을 무렵에는 오스만 세력이 유럽에 성공적으로 침투해 잘 조직된 국가를 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비잔틴은 그들의 자비에 맡겨진 신세였습니다.


자, 이제 순정애정에로소설 <아도라>의 애독자들은 잘 아는 무라드1세 Murad I (1326-1389. 1360-89년 재위)가 나옵니다.


머야머야 별로 안 멋지잖아... (그림 출처는 요기)



무라드는 발칸의 비잔틴권 기독교 국가들, 특히 세르비아와 불가리아가 죽어라 싸우면서 몹시 약해져 있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발칸 주민들은 새우등 터지는 격으로, 점점 무거워져가는 반(半)봉건제의 압력과 생활고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무라드는 1365년 아드리아노플을 점령하고 에디르네로 이름을 바꾼 뒤 오스만 제국의 유럽 쪽 수도로 삼았습니다. 그는 전통적인 투르크 부족 기병부대를 보완하기 위해 '예니체리'라고 불리는 직업 보병군단을 창설했습니다. 점령한 지역의 기독교도 아이들을 붙잡아다가 자기네 엘리트 정예부대로 키우는 놀라운 제도... 처음에는 전쟁포로들로 구성됐으나 나중에는 볼모로 데려온 어린이들이 중심이 됐다고 합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 이보 안드리치의 소설 <드리나 강의 다리>에는 예니체리로 끌려가는 소년들과, 아이를 빼앗기는 동유럽 사람들의 슬프디 슬픈 이별 장면이 묘사돼 있습니다)


무라드는 1372년 발칸 산맥 남쪽 불가리아 지역을 장악, 투르노보에 있던 불가리아 왕실을 무력화하고 차르 이반 시슈만(1371-93년 재위)을 속령의 지도자로 격하했습니다. 그 전 해에 이미 에디르네 외곽에서 세르비아 군을 대파했고요. 이는 마케도니아 진격으로 이어졌습니다. 1386년이 되자 무라드는 소피아와 니슈 지역까지 손에 넣고 세르비아계 라자르 대공 Lazar Hrebeljanovic (1371-89년 재위)을 역시 속령의 지도자로 끌어내렸습니다.




무라드의 제국이 이렇게 커졌다는 건 유럽에 뿌리를 내리겠다는 뜻. 그들은 '쳐들어왔다가 나가는 유목부족'이 아니었고, 이를 유럽인들에게 각인시켰습니다. 자, 그럼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이 막강한 제국에 붙는 세력들이 생겨나는 거죠. 시슈만과 라자르를 비롯한 여러 기독교 국가의 지배자들, 그리고 그 밑의 귀족들과 무사들이 정치·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에 협력하는 쪽으로 돌아섰습니다. 불가리아와 세르비아의 기독교도들은 오스만 제국 내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군사작전에 적극 나서 싸웠습니다. 1389년의 코소보 폴리예 전투로 세르비아는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라자르라는 자가 딴 수작을 합니다. 세르비아, 불가리아, 보스니아, 알바니아, 왈라키아 영주들과 연합해 투르크 세력을 견제하려고 한 겁니다. 무라드는 이미 복속된 라자르의 불충에 분노했습니다. 결국 무라드와 라자르 측이 전투를 벌였고, 라자르는 죽었습니다. 하지만 무라드 또한 투항하는 척 하고 들어온 세르비아인에게 암살됐습니다. 피는 피를 부르고...


무라드의 죽음도 투르크족의 공세를 늦추지는 못했습니다. ‘천둥’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바예지드1세 Bayezid I (1389-1402년 재위) 치하에서 세르비아를 완전히 복속시켰고 1393년에는 불가리아를 병합했습니다. 이어 왈라키아도 속령으로 만들었습니다.


모든 도시의 여왕, 콘스탄티노플은 1391-1398년의 포위공격에도 살아남았습니다. 하지만 그 외 그리스(비잔틴)의 대부분 지역이 오스만 수중에 떨어졌습니다. 헝가리 왕 지기스문트 Zsigmond (1387-1437년 재위)가 이끄는 서방 십자군이 투르크족에 맞서려 했으나 1396년 다뉴브 유역의 니코폴(비잔틴명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패했습니다. 


유럽 입장에선 다행스럽게도 바예지드의 유럽 진격은 1402년 몽골의 아나톨리아 침공 때문에 잠시 늦춰졌습니다. 그가 죽은 뒤 1402-13년 왕위 계승 분쟁이 일어나면서 오스만의 발칸 팽창이 중단됐고, 그 사이 세르비아는 잠시나마 다시 독립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회복왕’ 메흐메드1세 Mehmed I(1412-21년 재위)가 투르크족을 이끌고 다시 진격해오면서 발칸 기독교인들의 짧은 휴식은 끝났습니다. 메흐메드1세는 오스만 제국이 장악했던 유럽 영토들에 대한 지배를 다시 공고히 했습니다.


그의 아들 무라드2세(1421-51년 재위)는 1430년 베네치아와 싸워 테살로니키와 에게 해의 섬 대부분을 빼앗았습니다. 숨가쁜 팽창입니다. 1442년에는 헝가리 침공 작전에 성공했으며 2년 뒤에는 불가리아의 항구도시 바르나 외곽에서 헝가리가 주도한 마지막 십자군을 무너뜨렸습니다. 무라드가 사망할 무렵 비잔틴 제국의 영토는 콘스탄티노플 외에는 거의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자, 이제 무시무시하고 냉혹하고 잔혹한 메흐메드2세가 등장합니다. ‘정복왕’ 메흐메드2세(1451-81년 재위)는 콘스탄티노플을 정복, 이슬람 오스만 제국의 수도로 만들며 비잔틴의 제위를 빼앗았습니다. 1453년 그는 주위의 모든 보급로를 끊어 콘스탄티노플을 봉쇄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오스만의 포병 부대는 한때 난공불락이었던 육지 쪽 성벽을 대포로 뚫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로 입성하는 메흐메드2세. Jean-Joseph Benjamin-Constant 라는 화가가 1876년 그린 작품. 그림 /위키피디아



왜 잔인하고 무섭다 하냐고요? 이 황제가 남긴 무시무시한 일화가 한두 가지가 아니거든요... 저는 더 말하고 싶지 않아요 -_- (참고로 '메흐메드'는 예언자 무함마드를 투르크식으로 읽은 거랍니다. 메흐메드2세의 전쟁에 대해선 스티븐 런치만의 <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을 추천합니다. 공략전에 대한 설명이 살짝 미흡한 감은 있지만 그래도 재미있습니다. ㅎㅎ)


아무튼 그해 5월 29일, 비잔틴 제국은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11세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황제는 성벽을 방어하다 영웅적인 죽음을 맞았습니다. 도시는 이스탄불로 개명됐고 투르크인,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그리고 발칸의 여러 기독교계 민족들로 다시 채워졌습니다.


새 수도를 세운 메흐메드2세는 발칸 반도 정복을 마무리하고자 유럽 깊숙이 나아갔습니다. 세르비아가 마침내 점령돼 오스만에 합쳐졌고(1456-58)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도 정복됐습니다(1458-61년). 게오르기오스 카스트리오티스 Georgios Kastriotis가 이끄는 알바니아 군은 거세게 저항하다 패배했습니다(1456-63년). 베네치아 세력도 지중해 동부에서 발을 뗐습니다(1463-79년).


★콘스탄티노플 역사연표


330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김

381년 테오도시우스1세, 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개최

680년 콘스탄티누스4세, 3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예수는 신이자 인간이라는 양의론 선포

870년 바실리우스1세, 4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통해 동방 교회의 독립성 주장

1054년 동방교회(비잔틴 정교)와 서방교회(로마가톨릭)의 ‘대분열’

1204년 4차 십자군, 콘스탄티노플 점령 뒤 라틴제국 건국

1453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메흐메드2세, 콘스탄티노플 점령 뒤 이스탄불로 개명

1923년 무스타파 케말 Mustafa Kemal Ataturk, 터키 공화국을 선포하고 앙카라로 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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