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세계사

조지 부시의 걸프전 개전 선언

딸기21 2012. 8. 28. 12:45
1990년 8월 2일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 Abd al-Majid al-Tikriti. 1937-2006)이 산유국 쿠웨이트를 침공했습니다. 며칠 지나지 않아 미군이 사우디아라비아에 파견됐습니다. 쿠웨이트 유전을 이라크의 공격에서 보호하고 사우디 국경에 대규모로 집결해 있는 이라크 군대를 저지한다는 명목이었죠. 이른바 ‘사막의 방패(Desert Shield)’ 작전입니다.

8월 6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이라크에 경제제재를 취했고, 이라크가 금수(禁輸) 조치(엠바고·embargo)를 위반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면 해군을 동원해 페르시아 만(통칭 영어 고유명사로 ‘걸프(Gulf)’라고 하면 미국 멕시코 만(灣)을 가리키는 용어였으나, 걸프 전(戰) 이후 페르시아 만을 지칭하는 용어가 됐습니다. 페르시아 만은 아라비아 반도와 인도 아대륙 서북쪽 아시아 대륙 본토 사이에 위치한 좁은 바다죠. 카타르, 바레인,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등이 모두 이 바다에 위치한 아랍 국가들입니다. 이들 '걸프아랍국'과 마주하고 있는 이란은 아랍국이 아닌 이란(페르시아) 민족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사우디 등은 페르시아 만이라 부르는 것을 거부하고 있습니다)을 봉쇄할 수 있도록 하는 결의를 채택했습니다.


'사막의 방패' 작전에 투입된 미군 F-15E 이글 전투기들. 
CNN 등의 화려한(빌어먹을;;) 중계방송으로 인해 걸프전은 '게임처럼 관람하는 전쟁'이 돼버렸죠.
하지만 이 '게임' 화면의 뒤편에선 사람들이 죽어나갔습니다...



다음 달인 9월 조지 H. 부시(George Herbert Walker Bush. 1924-) 미국 대통령은 의회 연설에서 미국과 세계를 향해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이 중동의 귀중한 석유자원을 주무르도록 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라크가 비난 속에서도 쿠웨이트에서 철군하지 않자 부시는 걸프 파병 규모를 두 배로 늘렸습니다. 11월 29일 유엔 안보리는 1991년 1월 15일까지 이라크 군대가 쿠웨이트에서 철수하지 않을 경우 회원국들이 ‘모든 가능한 수단’을 동원해 몰아낼 수 있도록 허용했습니다.

1991년 1월 12일, 유엔이 준 시한을 사흘 앞두고도 이라크와의 외교적 협상이 결렬되자 미 하원은 250대 183으로 이라크에 대한 군사력 사용을 지지하는 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상원에서는 52대 47로 통과됐습니다. 1월 15일 기한이 지나자 미군 53만9000명과 미군 외 연합군 27만 명이 걸프에 집결했습니다. 2차 대전이후 최대 규모의 파병이었습니다.

이튿날 미국은 ‘사막의 방패’ 작전을 ‘사막의 폭풍(Desert Storm)’ 작전으로 바꿨습니다. 미국이 작전명을 변경한 것은 이라크의 걸프 침공을 막는다는 방어적인 입장을 넘어 적극 공격에 나서겠다는 뜻으로 풀이됐고요. 연합군 공군기가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인근의 방어시설, 통신시스템 등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H. 부시 대통령은 1991년 1월 16일 오후 6시 45분(미국 동부시각), 바그다드 시간으로는 1월 17일 새벽 2시 45분 공습이 시작되고 난 직후 걸프전의 개시를 알리는 연설을 했고, 이 내용은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됐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분명합니다. 사담 후세인의 군대는 쿠웨이트를 떠날 것입니다. 쿠웨이트는 다시 자유를 찾을 것이며 정통성 있는 정부가 복원될 것입니다. 이라크는 결국 유엔이 결의한 모든 요구를 따르게 될 겁니다. 그리고 평화가 다시 찾아올 것입니다. 우리는 이라크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평화롭게 협력하며 살아가길 원합니다. 그래서 걸프의 안보가 강화되고 안정이 이뤄지길 바랍니다. 왜 지금 행동에 나섰느냐고, 왜 기다리지 않았느냐고 묻는 이들도 있겠지요. 대답은 분명합니다. 세계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중략)

국제사회가 망설이는 사이 사담 후세인은 자기 나라에 위협이 되지 못하는 이 작은 나라(쿠웨이트)를 조직적으로 약탈했습니다. 쿠웨이트 사람들을 형언할 수 없는 폭력으로 굴복시켰습니다. 이 과정에서 어린아이들까지 무고하게 살해하거나 불구로 만들었습니다. 세계가 망설이는 사이 사담은 이미 가지고 있던 화학무기 저장고에 훨씬 더 위험한 대량살상무기(WMD. Weapons of Mass-Destruction)인 핵무기를 더하려고 했습니다. 세계가 망설이는 사이, 세계가 쿠웨이트 철군과 평화를 이야기하는 사이, 사담 후세인은 대규모 군대를 쿠웨이트로 이동시켰습니다. 세계가 망설이는 사이, 사담이 버티는 사이, 제3세계의 빈약한 경제와 동유럽에서 갓 시작된 민주주의, 그리고 우리 경제를 포함한 전 세계의 피해는 점점 더 커져가고 있습니다.”


다른 것은 차치하더라도, 이라크의 이른바 '대량살상무기' 의혹은... 훗날 H 부시의 아들인 W 부시의 이라크 침공을 통해 말도 안되는 개뻥으로 밝혀졌죠... (아버지에 이은 아들의 개뻥에 대해선 다음에 별도로 이야기해보도록 하죠;;)


개전 직전인 1990년 쿠웨이트의 미군 기지를 방문한 H 부시. 정말 젊어보이네요... 벌써 20여년 전이라니...



여담입니다만, 걸프전 때 미군 중부사령부(미군의 여러 지역사령부 중 중동·남아시아 군사작전을 담당하는 사령부. 미군 사령부 체계에 관해서는 http://ttalgi21.khan.kr/1120 이 글 참고하세요) 사령관으로서 다국적 연합군 사령관을 겸하며 ‘사막의 폭풍’을 지휘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허버트 노먼 슈워츠코프(Herbert Norman Schwarzkopf. 1934-)라는 인물인데, 별명이 ‘폭풍 노먼(Stormin’ Norman)이었습니다. 걸프전에서의 성공 덕에 합동참모총장직으로 승진할 수 있었지만 거절하고 1991년 8월 곧바로 퇴임했습니다. 2003년 이라크 전쟁 때에는 NBC방송 군사평론가로 변신해 이 사람이 미군 작전을 해설하기도 했지요... 걸프전 때 자기가 때린 지역, 이번엔 어떻게 얻어맞고 있는지를 방송에 나와 해설하는 전직 장성...

다시 걸프전과 부시 이야기로 돌아가볼까요.

조지 H. 부시는 1924년 매사추세츠 주에서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8세 때 공군에 입대했고 2차 대전 당시 태평양 전선에서 50차례 이상 비행했으며 격추되는 경험을 겪기도 했습니다. 전쟁 베테랑이었다는 경력은 두고두고 부시에겐 자산이 되지요(반면 극심한 파더콤플렉스에 시달렸다는 그 아들;;은 군대 경력이 없으면서 전쟁만 2차례 일으켰죠). 이후 예일 대학을 졸업했고 서부 텍사스 지역의 석유 기업가가 됐습니다.

공화당 소속으로 정계에 발을 디딘 뒤 하원의원을 2차례 지냈습니다. 부시가 중앙정계에서 두각을 드러낸 것은 외교 분야에서였습니다. 냉전 시기 중국 특사로 활동했고, 유엔 주재 미국대사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중앙정보국(CIA) 국장을 맡기도 했습니다.

부시는 1980년 대통령 선거에서 로널드 레이건의 러닝메이트로 당선됐고, 레이건의 2차례 임기를 부통령으로 모두 함께 했습니다. 1989년 선거에서 미국의 41대 대통령이 됐습니다.

부시는 걸프전 개전을 알리는 연설에서 ‘새로운 세계질서(new world order)’의 도래를 강조했습니다. 이후 ‘신세계질서’라는 말은 냉전 이후의 첫 미국 대통령인 부시 집권시기의 패러다임을 가리키는 용어로 굳어졌습니다.

1980년대 말 소련과 동유럽 공산권이 무너지면서 1990년대 세계는 미국 단일패권 체제라는 새로운 시대를 맞았습니다. 걸프전은 미국이 이른바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에 도전하는 ‘불량국가(rogue countries)’를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 근육질을 과시한 전쟁이었습니다. 부시는 유엔의 ‘평화유지’ 역할을 중심으로 한 신세계질서를 강조했지만, 유엔이 자체적으로 무력을 갖지 않은 상황에서 유엔의 평화유지 역할은 곧 미국이 세계 경찰 역할을 한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냉전 시절, 즉 걸프전 이전까지 사담 후세인은 미국의 확고한 동맹이었습니다. 1979년 대통령에 오른 사담 후세인은 1980년대 내내 중동에서 미국의 이익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란이 1979년의 이슬람 혁명 이후 반미국가로 변하자 이란을 대신해 미국을 대변하는 역할을 했던 겁니다.

1980년 무모하게 이란을 침공, 8년간의 전쟁을 치른 것도 미국의 선동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습니다. 실제로 미국은 이란과 싸우는 이라크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아이러니하지만 당시 이라크를 도우며 미 정부의 특사 역할을 했던 인물은 2003년 미국 국방장관으로서 이라크 침공을 주도한 도널드 럼스펠드(Donald Rumsfeld. 1932-)였습니다.

[오들오들매거진] 후세인을 둘러싼 삼각관계


미국의 사냥개 역할을 하던 사담 후세인이 왜 쿠웨이트를 침공했는지에 대해서는 분석이 엇갈립니다. 쿠웨이트와 이라크 사이에는 유전지대의 국경선을 놓고 오랫동안 분쟁이 있어왔습니다. 사담 후세인은 미국이 쿠웨이트 점령을 눈감아 줄 것으로 오판했다는 해석이 많습니다. 그래서 쿠웨이트 침공이라는 무리수를 뒀는데, 미국은 이를 용납지 않고 새로운 세계질서 속에서 단일 패권 미국의 위력을 보여주는 계기로 활용했다는 겁니다. 사우디를 비롯한 아랍국들도 이라크를 미국이 눌러주길 바랬고요.


'사막의 폭풍' 작전에 집결한 다국적군.



2차 대전 후의 냉전구조가 깨어진 뒤 일어난 첫 대규모 전쟁이었다는 것 외에, 전쟁의 표상(이미지)이라는 측면에서도 걸프전은 이전의 전쟁들과 달랐습니다.

걸프전의 상징은 크루즈 미사일과 CNN 방송이었습니다. 사실상 지상군은 거의 들여보내지 않은 채 먼저 첨단무기로 이라크를 초토화시켰고, CNN 방송을 통해 이 과정이 전 세계 시청자들에게 생중계됐습니다. 피터 아넷을 대표로 한 CNN 취재팀은 바그다드 폭격을 생방송으로 비췄습니다.

펑펑 터지는 미사일 소리와 섬광을 두고 아넷은 “바그다드 하늘은 불꽃놀이를 하는 것 같다”고 전했습니다. 카메라에 비친 미사일 폭탄 세례를 축제의 불꽃놀이로 묘사한 겁니다. CNN은 전쟁을 컴퓨터 게임처럼 다뤘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어쨌든 걸프전을 통해 세계적인 뉴스 채널로 부상했습니다.

하지만 이라크 군을 무력화하기 위해 6주 동안 지속된 ‘사막의 폭풍’ 작전은 어디까지나 제한된 전쟁이었습니다. 미군은 이라크 국경을 넘기는 했으나 바그다드로 진격해 사담을 제거하지는 않았습니다.

정치학자 즈비그뉴 브레진스키(Zbigniew Brzezinski)는 부시가 정치인으로서는 엇갈린 평가를 받을지 모르지만, 외교관으로서는 탁월한 역량을 갖고 있었으며 국제질서를 보는 시각은 냉철하고도 정확했다고 높이 평가하더군요. 부시는 보수적인 공화당원이기는 했지만 정통 보수파로서 훗날의 네오콘(신보수주의자들)과는 맥이 다른 현실주의자였다는 겁니다.

하지만 걸프전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미국 내에서 부시 집권기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았습니다. 경기침체에 세금인상 등의 요인 때문에 부시는 1992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빌 클린턴(Bill Clinton)에게 패했고, 단임 대통령에 그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