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세계사

다르다넬스의 승리와 무스타파 케말

딸기21 2012. 5. 5. 10:12

오늘은 제가 엄청 좋아하는 터키 이야기... 2004년에 무려 20일 동안 터키를 여행한 적 있었답니다 ^^

터키, 하면 떠오르는 인물, 일본에서 '토루코의 황태자'라 불렸던 꽃미남 축구선수 일한 만시즈...가 아니고, 터키의 국부(國父)인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 1881-1938)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오스만 투르크라는 노쇠한 이슬람 제국을 현대 터키공화국으로 변신시킨 건국 영웅으로, 국민들에게서 ‘터키의 아버지’를 뜻하는 ‘아타튀르크(Atatürk)’라는 영예로운 호칭을 선사받았습니다. 그래서 케말의 공식 호칭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입니다.

케말은 오늘날의 그리스 테살로니키(Thessaloniki) 지역인 옛 오스만 령 살로니카(Salonica)에서 태어났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장교였던 그는 1908년 술탄 압뒬하미트 2세(Abdülhamit II. 1842-1918)를 몰아내는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대통령 재임시의 아타튀르크. 멋지죠? ㅎㅎ 사진은 위키에서 퍼왔습니다.


당시 오스만은 유럽의 팽창에 밀려 드넓은 영토를 하나둘씩 잃으면서 팔다리가 잘려가고 있었습니다. 13세기 이래로 유라시아의 최강자로 군림하며 중동과 동유럽,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호령했던 오스만은 1900년 무렵에는 그리스를 뺀 발칸반도 일부와 오늘날의 터키, 아라비아반도 외곽지역으로 축소됐고요.

그러다 보니 제국 내에서는 부패하고 무능한 술탄 체제에 대한 비판이 고조됐고, 유럽 강국들처럼 국가를 현대화해야 한다는 각성의 흐름이 퍼지고 있었습니다. 케말을 비롯한 ‘청년장교들’이 일으킨 쿠데타는 이 현대화 프로젝트의 시발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제국은 안팎에서 붕괴되고 있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서자 오스만 밑에서 수백 년 동안 점령통치를 받았던 오늘날의 몬테네그로, 불가리아, 그리스, 세르비아 등이 잇달아 독립전쟁을 일으키고 제국에서 떨어져나갔지요. 하지만 그리스계와 세르비아계, 불가리아계 등의 주민 상당수는 여전히 오스만 영토 내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발칸의 신생독립국들은 오스만에 대항해 1912년 ‘발칸 연맹(Balkan League)’을 만들어 오스만에 맞선 공동전선을 구축했습니다.

발칸연맹이 그 해 10월 오스만을 공격하면서 발칸 전쟁(Balkan Wars)이 일어났습니다. 오스만은 7개월여 뒤에 영국 런던에서 독립국들과 강화조약을 맺었으며 이로써 500여 년 간 통치해왔던 동유럽 영토의 대부분을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강화는 잠시 뿐, 이듬해 6월 두 번째 발칸 전쟁이 시작됐습니다. 불가리아가 마케도니아와의 영토 분할 방식에 불만을 품고 세르비아와 그리스 등 연맹 국가들을 공격하고 나선 겁니다. 오스만과 루마니아가 끼어들면서 전쟁이 확대됐고, 이 와중에 불가리아는 1차 발칸 전쟁으로 얻어낸 영토를 다시 잃었습니다.

쿠데타 뒤 군 지도자로 부상한 케말은 발칸 전쟁 때 오스만의 전략적 요충인 다르다넬스 해협을 방어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우며 국민적 영웅으로 부상했습니다. 하지만 더 큰 전쟁이 오스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스만은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가 1차 대전을 일으키자 그들과 손잡고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혼란에 뛰어들었습니다. 결과는 패배였지만, 케말은 이 전쟁에서도 영국군의 침공에 맞서 맹활약을 했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유럽과 아시아 대륙 양쪽에 걸쳐져 있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의 동쪽, 터키의 북쪽은 세 개의 바다가 두 개의 해협으로 이어져 있지요. 서쪽에는 지중해가 있으며, 동쪽으로 좁다란 다르다넬스 해협을 끼고 마르마라 해(海)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동북쪽 이스탄불 부근으로 더 들어가면 보스포루스(Bosphorus) 해협을 지나 유라시아의 내해(內海)인 흑해(Black Sea)가 펼쳐져 있고요.

1915년 4월 영국 해군은 흑해 항해권을 확보하겠다는 명분으로 다르다넬스 침공을 감행했습니다. 다르다넬스 해협을 따라 마르마라 해로 들어가면 겔리볼루(Gelibolu. 영어로는 갈리폴리·Gallipoli)라는 작은 반도가 있습니다. 영국군(정확히 말하면 호주와 뉴질랜드군 등을 합친 '영연방군')은 프랑스군과 합세해 다르다넬스 해협 남쪽 아시아 대륙에 있는 쿰 칼레(Kum Kale)와 북쪽 유럽 대륙에 있는 케이프 헬레스(Cape Helles) 양측에서 협공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이미 케말은 겔리볼루 반도의 요지에 휘하 부대를 매복시켜둔 뒤였습니다.

영국·프랑스 연합군은 상륙작전 첫날에만 2000명의 군사를 잃었습니다. 여덟 달에 걸친 공방전 끝에, 1916년 초 케말과 영·프 연합군은 전투를 접었습니다. 겔리볼루 공방전은 연합군과 오스만 양측에 무의미한 희생만 남긴 소모전으로 결론 났습니다. 연합군 4만4000명이 숨지고 10만 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특히 영연방의 일원으로 영국군에 합세해 작전에 참가했던 호주-뉴질랜드군(Australian and New Zealand Army Corps·ANZAC)의 희생이 컸습니다.

오스만 측 역시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비록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오스만 군 5만6000명이 숨지고 14만 명이 다쳤습니다. 케말은 겔리볼루 공격을 막아낸 뒤 장군으로 승진했으며, 1차 대전이 끝난 1918년까지 러시아 전선 사령관과 아나톨리아(Anatolia) 사령관을 지냈습니다.

1920년 오스만은 격변을 맞았습니다. 그 중심에 선 것이 케말이었습니다. 오스만 전역에서 무능한 술탄의 폐위를 요구하는 청원운동과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술탄이 아나톨리아의 일부를 그리스에 할양해주는 협정에 서명하자 격렬한 술탄 폐위 투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케말은 이스탄불을 기반으로 한 술탄 체제를 부정하며 아나톨리아 고원 중심에 있는 내륙 도시 앙카라(Ankara)에서 새 정부를 세웠습니다.

동로마 제국의 후신으로 수백년 간 오스만의 지배 아래 있었던 그리스는 오스만에 구원(舊怨)이 많았습니다. 독립한 그리스와 오스만 사이에 수차례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1921년 케말은 사카랴(Sakarya)에서 그리스군을 물리쳤고, 이듬해인 1922년에는 둠루피나르(Dumlupinar)에서 그리스군을 격퇴했습니다.

그 해 11월 1일, 술탄을 정점으로 하는 칼리프(Caliph·이슬람 군주) 제도는 공식적으로 폐지됐습니다. 1923년 10월 29일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지고, 현대 터키공화국(Republic of Turkey)이 공식 건국됐으며 케말이 초대 대통령 자리에 올랐습니다.

재미삼아 구경하는 아타튀르크의 사인 ^^



집권 첫 3년 동안 케말은 자신이 이끄는 공화인민당(Cumhuriyet Halk Partisi·CHP) 일당 중심 체제를 만들면서 수많은 정적을 투옥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슬람 성법(聖法)에 의해 움직여지는 전근대적인 신정(神政)국가가 아닌 세속주의를 정립하고, 여성들의 복장을 현대화하는 등 수많은 개혁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1928년에는 이슬람을 국교의 지위에서 격하시켰습니다. 지금도 터키 국민의 90% 이상이 무슬림이기는 하지만, 이슬람은 국교가 아니라 지배적인 종교일 뿐이랍니다.

(8년 전 여행 때 만났던 가이드가 떠오르는군요. 신분증에 '이슬람'이라고 종교가 표시돼 있었습니다. "공식 통계상으로는 국민 95%가 무슬림이다. 하지만 나는 모스크에 가지 않는다. 출생신고할 때 부모님이 이슬람으로 신고했기 때문에 통계상의 무슬림일 뿐..." 제가 '국민학교' 다니던 무렵엔 종교 선택란 중에 '유교'가 있었고, 발표되는 통계에서도 '유교'가 꽤 많이 나왔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 비슷한 거겠죠 ㅎㅎ)

같은 시기에 케말은 아랍어 표기를 폐지하고 터키어를 로마자 알파벳으로 쓰는 표기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이슬람 역법(曆法) 대신 서기 역법을 도입했고, 1930년에는 여성들에게도 참정권을 부여했습니다. 현대 터키의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근간이 케말에 의해 만들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외교적으로도 터키의 친(親)유럽 노선의 근간이 케말 시절에 만들어졌습니다. 케말은 1930년대 유럽에서 나치즘을 비롯한 파시즘이 발호하기 시작하자 1차 대전의 적이었던 영국, 프랑스와의 관계를 강화했습니다. 1933년 케말은 “나는 순수한 감정과 우정을 가득 지니고, 열린 마음으로 세계를 바라본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1934년 터키 의회는 케말에게 ‘아타튀르크’라는 호칭을 선사했습니다. 터키에선 아타튀르크를 모욕하는 발언이나 행동은 법으로 금지돼 있습니다. 1990년대 이래로 터키의 '보수화'가 한창이다 보니... 2005년에는 이 법에 위반된다는 이유로 유튜브와 지오시티 등의 사이트 접속이 한동안 차단된 일도 있었습니다.

이스탄불 탁심광장의 케말 동상. 사진/위키피디아



그런데... 훗날의 이야기입니다만, 청년장교로 상징되는 군 엘리트들의 주도로 현대 터키공화국이 세워진 것이다보니, 그래서인지 아무튼 터키 군의 자부심은 유별난 것 같습니다(태국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종종 전개되는 것 같습니다만;;). 터키 군은 '세속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합니다. 케말이 세운 국가의 근간, 즉 이슬람 신정이 아닌 세속주의(서구식-근대-입헌민주주의-공화국)가 이슬람주의자들에 위협받는다고 판단되거나 정정이 불안해서 도저히 정치인들 못 믿겠다 할 때면 군부가 나서서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1960년, 1971년, 1980년에 그런 쿠데타가 있었지요.

우리가 생각하는 박정희 식의 군사쿠데타나 중남미 군사쿠데타와 다른 것이, 군부가 나서서 '상황을 정리하고' 나면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가고 민정에 이양됩니다. 장기집권 군사독재를 꿈꾸는 쿠데타는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이걸 민주주의라고 칭찬하기는 좀 꺼림칙하고... 하지만 이슬람주의보다는, 군부가 나서서라도 세속주의를 지키는 것이 더 나은 것은 사실이고... 아무튼 판단하기는 좀 애매합니다.

가장 가깝게는, 1997년에 비슷한 사건이 있었지요. 당시 복지당을 이끌던 네즈메틴 에르바칸 총리가 세속주의에 반하는 이슬람주의 언동으로 물의를 빚었습니다. 그러자 술레이만 데미렐 대통령의 요청으로(재미있죠?) 군부가 나서서 에르바칸을 사퇴시키고 다시 선거가 치러졌습니다. 쿠데타라고는 보기 힘들지만 군부가 나선 것은 사실인... 이 사건을 가리켜서 '포스트모던 쿠데타'라 부르기도 한답니다. 이듬해인 1998년 헌법재판소(터키에서는 군부와 함께 법원이 세속주의의 지킴이 역할을 합니다)의 결정으로 에르바칸의 정당은 아예 해산됐고, 주요 간부들은 정치활동이 금지됐습니다.

케말로 시작해서 '쿠데타'로 이어졌는데, 그나마 에르바칸 시절에는 군부가 나서서 '정리'라도 했지만... 지금 터키에서 상당히 오랜기간 이슬람주의 성향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총리가 집권하고 있습니다. 터키가 케말의 노선대로 갈까요, 아니면 '이슬람의로의 회귀'로 향할까요? 

잘은 몰라도, 저는 후자의 경향성이 계속되진 않을 것 같습니다. 터키만의 얘기가 아니라, '이슬람으로의 회귀'는 이슬람권 전역에서 나타나는 '오래된 듯하면서도 새로운 현상'이자 하나의 '반동'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이것은 매우 길고 복잡한 이야기이니, 다음 기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