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글레이저(Elizabeth Glaser. 1947-1994)는 1970년대 인기 TV 시리즈 <스타스키와 허치(Starsky & Hutch)>로 유명한 배우 겸 감독 폴 마이클 글레이저(Paul Michael Glaser)의 부인입니다.
글레이저는 1981년 딸 애리얼을 낳다가 에이즈(후천성면역결핍증)를 일으키는 인간면역바이러스(HIV)에 감염된 피를 수혈 받았습니다. 당시는 에이즈라는 질병이 세상이 알려지지도 않은 때였습니다. 그래서 수혈용 혈액의 HIV 감염 여부에 대한 조사 같은 절차가 없었습니다.
엘리자베스 글레이저. /위키피디아
글레이저가 병에 걸렸다고 진단 받았을 때는 이미 딸 애리얼에게까지 모유를 통해 병이 옮겨간 상태였습니다. 아들 제이크도 병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이 신종 질병의 비밀을 서서히 풀어가는 동안 연방정부가 연구 등 지원을 한 것은 최소한에 그쳤고, 미디어도 에이즈를 ‘동성애자 질병’으로 묘사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정부도, 미디어도 에이즈가 수혈이나 수직감염(어머니에게서 태아에게로 감염되는 것) 등의 방식으로 전염된다는 사실을 비롯해 이 질병과 관련된 정보를 일반인들에게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에이즈에 대해 세상이 관심을 가진 것은 몇 년이 지나면서부터였습니다. 배우 록 허드슨(1985), 록 가수 프레디 머큐리(1991), 가수 피터 앨런(1992), 테니스 스타 아서 애쉬(1993), 발레리노 루돌프 누레예프(1993) 등이 에이즈에 걸린 사실이 알려지면서 세간의 눈이 쏠렸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에이즈가 미국에서 광범위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일반의 인식이 전환의 계기를 맞기까지, 여러 사람의 눈물겨운 노력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라이언 화이트(Ryan White)의 사례입니다.
화이트는 1971년 태어난 지 사흘 만에 선천성 질환인 혈루병 진단을 받았습니다. 병마와 싸우던 그는 13세 때였던 1984년 HIV감염된 혈액을 수혈 받고 에이즈에 걸렸습니다. 6개월 시한부 삶을 선고 받고 병마와 싸우는 동시에, 화이트는 에이즈라는 병에 덧씌워진 사회적 편견과도 싸워야 했습니다.
이후 화이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에이즈에 걸릴 수도 있다는 점을 알리고 에이즈의 예방과 관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홍보하는 전도사 역할을 했습니다. 화이트가 1990년 세상을 뜨자 미 의회는 에이즈 환자 지원을 내용으로 하는 일명 ‘라이언 화이트 법(Ryan White Care Act)’을 통과시켰습니다. 화이트와 친분이 있던 마이클 잭슨은 그를 기리는 의미로 ‘너무 일찍 가버렸네(Gone too soon)’라는 노래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제럴드 포드 대통령의 보좌관이었던 메리 피셔(Mary Davis Fisher)는 남편에게서 에이즈에 전염된 뒤 에이즈 환자 치료와 예방 교육을 공개적으로 요구하는 등 지속적인 활동을 펼쳤습니다. 1992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의 ‘에이즈의 속삭임(A Whisper of AIDS)’이라는 연설은 많은 사람들에게 에이즈에 대해 알린 명연설로 평가받습니다. 피셔는 2006년부터 유엔에이즈계획(UNAIDS) 국제사절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메리 피셔의 연설 'A Whisper of AIDS'
글머리에 소개한 글레이저도 에이즈 문제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팔을 걷어붙인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글레이저 부부는 우선 이 병을 둘러싼 무지가 문제이고, 젊은이든 노인이든 HIV에 걸린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사회적인 낙인이 또 다른 문제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글레이저 가족이 1986년 에이즈에 감염됐다는 공식 진단을 받았을 때만 해도 그랬습니다. 병원에서는 “자세한 사항은 공공연하게 얘기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심지어 한 타블로이드 신문은 1988년 애리얼이 사망하자 그 이유를 공개하겠다며 부부를 협박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부부는 로스앤젤레스타임스와 인터뷰하면서 애리얼의 사인(死因)과 에이즈에 걸린 사연 등을 모두 공개했습니다. 그리고 사회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싸우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들의 용기는 에이즈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물론 정부의 입장변화를 이끌어내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들의 권유로 로널드 레이건 당시 대통령은 에이즈에 대한 대국민 메시지를 촬영하기까지 했습니다. 남편 폴이 감독한 광고에서 레이건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나이가 들고, 삶을 통해 배웁니다. 저는 모든 사람이 에이즈에 걸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어린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서운 것은 질병이지 질병에 걸린 사람들이 아닙니다. 지금이 우리가 새로운 사실을 배울 기회입니다.”
하지만 배움을 외면하고 시대를 뒤로 돌리는 사례도 적지 않지요. 레이건에 이어 취임한 조지 H 부시 대통령의 4년 임기 동안 에이즈 환자는 급증한 반면, 에이즈 연구에 들어가는 예산은 그리 늘지 않았습니다. 1992년 엘리자베스 글레이저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에이즈에 국가적 관심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며 지원을 호소했습니다.
“저는 그저 평범한 엄마로서 (이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아이를 살리려 싸우는 그런 엄마 말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저는 미국이 얼마나 공정하지 못한지 알게 됐습니다. HIV 보유자에게 뿐만 아니라 동성애자, 유색인종, 어린이 등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미국은 불공평합니다. 유복한 백인 여성이 그들을 대신해서 말하는 것이 이상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저는 힘들게 교훈을 얻었습니다. 미국은 갈 길을 잃고 영혼을 잃는 위험에 처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은 깨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삶과 죽음 사이에서 투쟁하고 있습니다.”
1988년 엘리자베스와 폴은 소아에이즈재단을 만들었습니다(1994년 엘리자베스 사망 이후 재단은 그를 기리는 뜻에서 재단 이름이 ‘엘리자베스 글레이저 소아에이즈재단 재단’으로 바뀌었습니다). 의회에 에이즈 연구기금을 위한 로비를 하고, 의사와 어린 환자들에게는 이 질병과 살아가는 법을 알렸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 삼아 수백만 명에게 환자들을 감싸야 하는 이유와 해서는 안 될 행동 등을 가르쳤습니다.
엘리자베스는 1994년 12월 3일 47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습니다. 하지만 아들 제이크는 살아남아, 어머니의 뒤를 이어 HIV 감염자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이상은 미국 이야기이고... 국내에선 좀 다르죠. 에이즈에 대한 인식은 '동성애자들, 흑인들 걸리는 죽음의 병' 정도에서 여전히 머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쉬쉬하고, 관리가 잘 되지 않고...
엘리자베스 시절까지만 해도 에이즈 치료·관리법이 발달하지 않았지만 이후 과학자들의 노력 덕에 ‘칵테일 요법’을 비롯한 치료요법과 치료제들이 개발됐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사실상 에이즈가 치명적 질병이라기보다는 장기간 관리가 필요한 만성질환 수준으로 취급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에이즈에 대한 편견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에이즈 치료제가 비싸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이 때문에 남아프리카공화국, 브라질, 인도 등은 값싼 제네릭 약품(특허기간이 만료된 의약품을 복제해 만든 약)을 대량생산하기 위해 선진국 거대 제약회사들과 싸움을 벌였으며, 세계무역기구(WTO)에서도 개발도상국에서의 제네릭 약품 생산을 인정해주게 됐습니다. 하지만 제3세계, 특히 에이즈 환자의 70% 이상이 거주하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는 감염자들이 여전히 치료제를 얻지 못해 죽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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