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세계사

베나지르 부토의 삶과 죽음

딸기21 2012. 5. 14. 21:36
베나지르 부토(Benazir Bhutto. 1953-2007)는 무슬림 국가인 파키스탄 역사상 첫 여성 지도자였습니다. 

부토의 아버지 줄피카르 알리 부토(Zulfikar Ali Bhutto. 1928-1979)는 1971-1973년 파키스탄의 대통령을 지냈고, 대통령에서 물러난 1973년부터 1977년까지는 총리를 역임했습니다. 부토는 인도의 간디-네루 집안이나 미국의 케네디 가(家)와 같은 정치명문가 출신 여성정치인인 셈입니다. 

그러나 민족주의자로 파키스탄의 중흥을 꿈꿨던 줄피카르는 1977년 모하메드 지아 울 하크(Mohammad Zia-ul-Haq. 1924-1988) 장군의 군사쿠데타로 실각했고, 부토 가문의 비극이 시작됐습니다. 줄피카르는 군부정권에 체포됐으며 ‘정치적 암살을 명령했다’는 날조된 혐의를 뒤집어쓰고 1979년 사형 당했습니다. (제3세계 어느 나라에서 민족주의 성향의 강력한 지도자가 어느 날 갑자기 쿠데타 세력에 밀려나거나 암살당하거나 사형 당한다... 그리고 군부세력이 집권한다... 참 많이도 들어온 스토리입니다.) 

맏딸인 베나지르 부토는 미국 명문 여성교육기관인 래드클리프 여대(Radcliffe·1970년 하버드 대학으로 합병됐지요. 저는 <러브 스토리>의 여주인공이 다녔던 학교로만 기억합니다)에서 비교정치학을 공부했으며,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철학과 경제학, 정치학을 공부했습니다.


젊은 시절의 베나지르. 인상이 참 강렬하죠?



아버지의 정치적인 몰락과 함께 수차례 구금 등을 겪은 부토는 1984년 영국으로 출국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아버지가 창당한 파키스탄인민당(Pakistan People's Party·PPP) 대표직을 맡으며 고국의 정치에 다시 발을 들이게 됩니다.


쿠데타로 집권한 지아 대통령은 파키스탄 주재 미국 대사와 함께 1988년 비행기 사고로 갑자기 사망합니다. 예상치 못했던 사건이 벌어진 거죠. 그러자 부토는 파키스탄으로 돌아와 민주선거를 치르기 위한 운동을 벌였습니다. 


그 해 11월 16일 마침내 군사쿠데타 10여년 만에 민주선거가 치러졌습니다. 파키스탄 최초의 평등선거이기도 했습니다. 이 선거를 통해 PPP가 의회의 다수당이 됐고, 12월 1일 부토가 총리로 취임했습니다. 파키스탄 최초의 여성총리였을 뿐 아니라, 이슬람권 최초의 여성 국가지도자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부토의 나이는 겨우 35세였습니다.


정치에 투신한 후에는 대략 여왕 포스...


총리 취임 뒤 미국의 초청을 받아 워싱턴을 방문한 부토는 미 의회에서 조지 H 부시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연설을 했습니다. 영광의 순간이었습니다. 군부독재정권에 아버지를 잃은, 하지만 용기를 잃지 않고 헌신과 열정으로 민주화 투쟁을 벌인 아시아의 젊은 여성 지도자. 


당연히 그에게 세계의 시선이 쏠렸습니다. 더욱이 당시는 파키스탄과 접경한 아프가니스탄이 아직 옛 소련 점령 치하에 있을 때였습니다(소련은 1979년 아프간을 무력 침공했으며 10년간 점령통치를 하면서 아프간을 초토화시킨 뒤 1989년에야 괴뢰정부를 남겨두고 물러났지요).


화려하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였던 부토는 이 연설에서 자신을 ‘민주주의의 구현’, ‘여성과 젊은이, 주류 무슬림의 대변인’, ‘아프간 독립을 위한 투사’, ‘존 F 케네디의 정치적 계승자’라 묘사하면서 미 의회를 사로잡았습니다. 부토는 또 소련이 아프간에서 철수하도록 미국이 힘을 발휘해야 한다며 미국의 구미에 맞는 주문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아프간 공작’이야말로 오늘날까지 아프간과 파키스탄에서 계속되는 혼란의 원인임을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한 거죠..


10년 동안 미국은 3대의 행정부와 6대에 이르는 의회를 거치면서 줄곧 파키스탄과 '용감한 무자헤딘'을 지원했습니다. 무자헤딘(mujahedin)은 원래는 이슬람 성전(聖戰)을 위해 싸우는 무슬림 전사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이 국면에서는 소련을 아프간에서 몰아내기 위해 이슬람 각국에서 모여든 전사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변질됐습니다. 


미 중앙정보국(CIA)은 사우디아라비아 자산가 오사마 빈라덴 등의 자금을 지원받아 사우디, 예멘, 리비아, 이집트,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등지의 무슬림 청년들을 끌어들여 아프간 반(反) 소련 항쟁에 투입했지요. 그러나 이들 무자헤딘들은 소련이 아프간에서 철수하고 공산주의가 몰락한 뒤 미국 단일패권 시대가 되자 미국을 향해 총부리를 돌렸고... 


‘팍스 아메리카나’ 체제의 모순에 반발, 이슬람 극단주의를 추종하게 된 무자헤딘은 알카에다와 같은 테러조직원으로 변질돼 1990년대 각국에서 테러공격을 저질렀으며, 21세기 벽두인 2001년에는 9·11 테러를 감행했다는 스토리 아닙니까. 하지만 부토가 집권할 때만 해도 미국은 앞날을 모른 채 무자헤딘들에게 자금과 무기를 지원하며 밀어주고 있었습니다.


소련 점령에 맞선 무자헤딘들의 항쟁은 아프간 내전으로 비화했고, 혼돈이 계속되는 사이 반 소련 무장투쟁 집단과 군벌들이 난립하면서 아편 재배가 기승을 부렸습니다. 군사집단들이 아편과 그 가공물인 헤로인을 생산, 밀매해 자금을 불렸기 때문입니다. 특히 아프간 님루즈(Nimruz) 주와 파키스탄 발루치스탄(Baluchistan. 파키스탄 행정구역명으로는 Balochistan) 일대의 이른바 ‘황금 초승달 지대’는 세계적인 아편 생산지역이 됐습니다.


비록 괴뢰정부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소련이 10년간의 점령 끝에 손들고 물러난 것은 아프간의 커다란 승리로 받아들여졌습니다. 하지만 이후 1990년대 들어 아프간에서는 군벌들 간 격렬한 내전이 벌어졌고, 1996년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정치조직 탈레반(Taleban)이 전국을 장악하고서야 분쟁이 일단락됐습니다.


부토는 옛 소련과 싸우는 아프간 무슬림 전사들을 충실히 지원해줬습니다. 미국 정계에서도 부통의 이런 입장을 열렬히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부토는 집권 초반부터 국내에서 정치적 압력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지아 독재정권은 축출됐지만 파키스탄에는 그 못잖게 강압적이고 보수적인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들이 있었고, 아프간과의 접경지대에는 전근대적인 부족세력들이 산재해 있었습니다. 복잡하게 얽힌 세력관계 속에서 정작 부토의 발목을 잡은 것은 남편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Asif Ali Zardari. 1955-.)를 비롯한 측근들의 부패였습니다. 


자르다리는 모든 이권사업에서 10%의 이익을 챙긴다 해서 '미스터 10%'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한 반발이 심해지면서 부토 정부는 1990년 곧바로 붕괴해버렸습니다. 하지만 부토는 1993년 선거에서 승리, 다시 총리에 취임했습니다. 2기 정부에서 부토는 파키스탄을 현대화하는 작업을 추진했지만 이로 인해 정적들이 더 많이 생겨났습니다. 더욱이 남편과 관련된 부패 스캔들이 다시 터지면서 부토는 3년만인 1996년 스스로 총리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 발리웃 스타 아이슈와리야 라이가 2008년 베나지르 부토를 다룬 영화에서 

타이틀롤을 맡을 것이라는 소문이 났었는데... 불발로 끝났는지 성사됐다는 얘기는 없네요.... 

사진은 http://www.aishwaryaraibachchan.net 에서.



정치적 혼란이 몇 년간 반복된 뒤에, 1999년 군 지도자였던 페르베즈 무샤라프(Pervez Musharraf. 1943-.)가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습니다. 무샤라프는 2001년 6월 형식뿐인 선거를 치러 대통령 자리에 올랐습니다. 정통성 없는 무샤라프는 미국의 아프간 공격이 시작되자 무슬림 국민들의 반대 속에서도 미국을 지원하며 거액 원조를 받아 챙기고 정권을 유지했습니다. 


부토와 그 일가는 무샤라프 체제가 목을 죄어오자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두바이로 망명을 떠났습니다. 사실상 나라를 쫓겨나 8년 넘게 해외를 떠돌던 부토는 파키스탄 내에서 반 무샤라프 움직임이 거세지자 귀국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영국과 두바이를 오가며 무샤라프 측과 권력분점 협상을 벌인 끝에, 부패 혐의를 없애주는 조건으로 귀국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2007년, 부토는 파키스탄으로 돌아왔습니다. 파키스탄인민당을 이끌고 다음 해 총선을 준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10월 18일 귀국 당일 참석한 집회에서 폭탄테러가 일어나 지지자들 136명이 숨지는 참극이 일어났습니다. '돌아온 부토' 앞에 놓인 위험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아프간과의 접경을 넘나드는 극단주의 세력은 '이슬람 대의를 배신한' 부토를 살해하고 파키스탄을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싶어했습니다. 귀국을 하긴 했지만 무샤라프와의 갈등도 아직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무샤라프는 이 테러를 비롯한 혼란상의 책임을 물으며 부토를 가택 연금시켰습니다.


1972년 인디라 간디(왼쪽)와 만나는 줄피카르 알리 부토(간디와 악수를 나누는 사람), 그리고 그 오른쪽 옆의 젊은 베나지르 부토. 사진은 http://metaexistence.org 에서 퍼왔습니다.

1972년 인디라 간디(왼쪽)와 만나는 줄피카르 알리 부토(간디와 악수를 나누는 사람), 

그리고 그 오른쪽 옆의 젊은 베나지르 부토. 사진은 http://metaexistence.org 에서 퍼왔습니다. 


두 달 뒤 가택연금에서 풀려난 부토는 수도 이슬라마바드 바로 근처에 있는 라왈핀디(Rawalpindi)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어 유세를 하던 중 암살됐습니다. 라왈핀디는 파키스탄 군 사령부가 있는 군사중심지로, 무샤라프 대통령의 거처가 있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숱한 음모론이 나왔지만, 알카에다와 연계된 이슬람 극단세력의 소행으로 잠정 결론이 났습니다. 아프간 알카에다는 부토의 암살을 자신들이 저질렀다고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부토의 암살 배경을 무샤라프와 부토의 권력 분점 협상, 그 배후의 미국으로까지 확장해 봐야 한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아프간, 파키스탄 등에서의 무장 테러세력의 확산을 막으려던 미국은 무샤라프 정권을 정치·경제적으로 지원했고, 부토와의 협상 역시 파키스탄의 정국 안정을 위해 미국이 주선한 것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부토는 군사 정권도 비판했지만, 과격 이슬람주의자들에 대해서도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고 이슬람 무장 세력들은 부토에 대한 테러를 공언해왔습니다. 미국이 끼어 무샤라프와 부토의 만남을 주선한 것이 오히려 이슬람 세력의 반발만 부추기는 모순을 낳은 셈이지요.


파키스탄은 2008년 1월 8일로 예정됐던 총선을 2월 말로 연기하는 등 큰 혼돈에 빠졌고 국제사회도 테러를 일제히 비난했습니다. 이후 2월 18일 치러진 총선에서 파키스탄인민당이 여당을 큰 표 차로 누르고 승리를 거뒀습니다. 부패의 표상이었던 부토의 남편 자르다리가 이어 치러진 대선에서도 승리,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국민들 중 상당수는 자르다리를 곁눈질로 흘겨보고 있고, 부토의 아들을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많아서 그 후견인 자격으로 자르다리가 정권 잡고 있는 형국이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