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세계사

아웅산 수지가 꿈을 이룰 날

딸기21 2012. 9. 3. 02:30
아웅산 수지(Aung San Suu Kyi. 1945-)는 1945년 1월 버마에서 태어났습니다. 수지는 2차 대전 당시 버마를 일본 식민지배로부터 해방시킨 독립 영웅 아웅 산(Aung San 1915-1947.) 장군의 딸이죠. 저야 뭐... 한국사람들 대개 그렇듯이 아웅 산의 이름을 버마 독립영웅이라기보다는 '아웅산 폭탄테러'로 더 먼저 들었더랬죠.

오늘은 신문 국제면에 누구보다도 자주 등장하는 사람, 그러나 모습을 보기는 너무 힘들었던 사람, 지나온 행적보다 미래가 더 궁금한 사람, 아웅산 수지 여사 이야기를 해볼까 해요.

영국 지배 하에서 버마 재야 내각을 이끌던 아웅 산 장군은 수지가 두 살 때 정적에 암살됐습니다. 어머니 킨치(Khin Kyi)는 남편이 숨진 뒤에도 새로 태어난 버마 정부 내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정치지도자로 활약했고, 1960년대에 네팔과 인도 주재 버마대사를 지내기도 했답니다 수지도 어머니를 따라 이들 나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수지는 인도 뉴델리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한 뒤 영국으로 가, 옥스퍼드에서 철학, 정치학, 경제학을 공부했습니다.


훗날의 남편인 애리스와 함께 있는 젊은 시절의 수지. 정말 이쁘죠?


신생 버마의 민주주의는 1962년 네윈(Ne Win. 1911-2002) 장군이 이끄는 군사 쿠데타에 짓밟혔습니다. 이후 26년 동안 군부는 버마식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독재를 했습니다. 모든 정당은 해산됐고 1974년 버마사회주의계획당(Burma Socialist Programme Party,·BSPP) 일당 체제가 굳어졌습니다.

수지는 영국 학자 마이클 애리스(Michael Aris)와 결혼해 두 아들을 키우며 영국에서 살고 있다가, 어머니 병수발을 하기 위해 1988년 버마로 돌아왔습니다. 일당 독재에 반대하는 학생 평화시위를 군부가 짓밟아 버마 정국이 피로 물들던 시점이었습니다. 네윈 장군은 이 유혈사태에 대한 저항이 거세게 일자 BSPP 대표직에서 물러났습니다.

돌아온 수지는 그해 8월 26일 랭군(Rangoon. 현재의 양곤(Yangon)이죠. 인구 435만명에 이르는 버마 최대 도시입니다. 오래전부터 버마의 정치, 경제, 사회적 중심지였으나 군부정권이 2005년 갑자기 내륙도시 네이피도(Naypyidaw)로 수도를 옮겨버렸어요. 네이피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몰라 고민했었다능)에서 민주주의를 바라는 수많은 지지자들을 앞에 나섰습니다.


1988년 지지자들 앞에 선 수지.


암살당한 아버지의 커다란 포스터 앞에서 선 수지는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버마 인민협의위원회(People‘s Consultative Committee)를 세울 것을 제안합니다. 그가 버마 민주화 투쟁의 상징으로 떠오른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꿈은 소마웅(Saw Maung. 1928-1997) 장군이 10월 쿠데타를 일으킴으로써 다시 한 번 짓밟혔습니다. 수지가 민족민주연맹(National League of Democracy·NLD)이라는 야당 조직을 결성, 민주화운동 지도자로 나서자 군부는 1989년 그를 양곤의 자택에 감금해버렸습니다. 기나긴 가택연금의 시작이었습니다.

계엄령 하에서는 재판 없이도 3년 동안 가택연금에 처해질 수 있었습니다. 남편과 아들이 1989년 9월 그를 방문했지만 그것이 이들 가족에게는 마지막 모임이 됐습니다. 이듬해 군사정부는 수지와 바깥세상과의 접촉을 아예 차단해버렸습니다.

가족들로부터 떨어져 개인적인 자유를 빼앗기고 언로마저 막혔으나,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그의 목소리는 감출 수 없는 불빛처럼 세상으로 새어나왔습니다. 수지는 1990년 유럽 의회가 주는 안드레이 사하로프 인권상 수상자로 선정됐으며 1991년 노벨평화상, 1992년 네루 평화상을 연달아 받았습니다.

물론 국제사회가 주는 영예도 그를 자유롭게 풀어주지는 못했습니다. 수지는 1995년 가택 연금에서 풀려났지만, 한번 버마를 떠났다가는 재입국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족이 있는 영국에 갈 수도 없었고, 해외의 지인들을 만날 수도 없었습니다. 그가 세상에 발표한 내용들은 대부분 타인에 의해 읽어졌거나, 비디오 또는 에세이 형태로만 전달됐습니다.

이렇게 대독된 말들 중 유명한 것이 1997년 1월 26일 미국 워싱턴 아메리칸 대학 명예법학박사 학위수여 기념연설입니다. 남편 애리스가 대신 읽은 이 연설에서 수지는 버마 민주화 투쟁의 의미, 그것이 자신에게 갖는 의미 등을 설명했습니다. 버마 군부는 1989년 국호를 '미얀마(Myanmar)로 바꿨지만 해외 망명중인 민주화운동가들과 미국, 유럽 등 서방 정부, 해외 언론들은 군부정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버마'라는 호칭을 그대로 썼습니다. 


버마의 민주화를 위해 일하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은 노예상태로 조용하고 안전하게 살기보다는 억압된 사회에서 기본권을 위해 저항하는 것이 비록 위험할지언정 바람직하다고 믿기에 그런 선택을 한 것입니다.

우리의 저항은 정의와 공감, 인간애를 믿는 것에서 비롯된 비폭력 운동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은 물질적 풍요에만 관심 있는 경제적 동물’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는 인간이라는 종(種)에 대한 아주 편협한 시각에 불과합니다. 인간은 깊은 신념과 원칙을 드높이기 위해 잔인한 박해를 참아온 수많은 용감한 이들을 배출한 종이니까요. 그런 이들이 오늘날 제 조국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제게는 자긍심이자 영감의 원천입니다.

버마에서는 학생들의 활발한 참여가 혁명적인 변화를 불러온다는 정치적인 전통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은 랭군대학에서 정치활동을 시작하신 제 아버지 아웅 산 장군 같은 젊은 지도자들 덕에 성공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탁월한 명성을 바탕으로 기존 권력에 강력히 반대하는 기관은 자연스럽게 권위주의 정부의 핵심 공격목표가 되지요. 1962년 집권한 군사 정권은 랭군대학 학생회관을 폭파했고, 그래서 그 건물은 군부 통치 몇 개월 만에 사라졌습니다. 저들은 학생들이 조합을 결성하는 것도 불법화했습니다. 

1988년 버마 국민들은 버마사회주의계획당(BSPP)에 반대해 시위를 일으켰습니다. 시민들이 군사 독재를 뒤엎어버렸습니다. 전국적인 시위의 선봉에는 여러 기본권 중에서도 조합을 결성할 권리를 요구한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훈타(junta·군사정권)의 대응은 그 학생들을 향해 총을 쏜 것이었습니다. 8년이 지나는 사이 억압은 더욱 심해졌으나, 학생들은 여전히 희망과 슬픔을 분명히 말하며 관심을 촉구하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지난달에도 조합 결성권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계속됐습니다. 보안군은 시위대를 해산시키려 폭력을 사용했고, 제가 이끄는 민족민주연맹(NLD) 동지들은 젊은이들의 시위를 조직하는 데 관여했다는 이유로 체포됐습니다. 저는 학생들과 모임을 갖고 토론했다는 이유로 고발됐습니다.

정치인과 학생들과의 만남이 국가전복 행위로 여겨진다면 그 나라는 참으로 딱한 나라인 셈입니다. 제가 이끄는 정당은 학생들의 희망에 공감하고 있음을 숨긴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세대를 가까이 이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 목적과 노력이 계속되면서 실로 꿰어져 우리 국가라는 하나의 천으로 만들어질 것입니다.


수지라는 상징이 있었기에 세계는 민주주의를 향한 버마 사람들의 힘겨운 노력을 잊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수지라는 '너무나도 강력한 상징적 존재' 때문에 (마치 티베트에서 달라이 라마의 존재처럼) 오히려 버마 민주주의 진영이 제대로 자라나지 못하고 있다는 주장, 그의 이상과 생각과 정치력이 부풀려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기 때문에 '민주화 이후'에 장애가 될 수 있다는 지적 등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예전에 수지에 대한 책을 읽을 때에, 혼자서 너무 오랜 기간 집에 갇혀있다보니 너무 구도자적인 모습으로 가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은 적도 있었습니다

수지는 버마 민주화의 만병통치약이 아니고, 그 자신 이를 모를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저 연설의 한 부분입니다.

저항할 수 없을 정도의 역경에 맞서야 할 때, 국가 기구와 군사력이 합쳐진 권력에 저항해야 할 때 우리 역시 의심에 무릎 꿇기도 합니다. 현재의 구도가 절대적이고 항구적인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그것이지요. 아직도 너무 많은 이들이 현상유지만을 유일한 지혜로 보고 있다는 게 놀랍습니다. 달라져야 하는 것들을 달라지게 만드는 힘을 우리는 믿습니다. 하지만 독재로부터 자유로운 민주주의로 가는 것이 쉽다고 생각하거나, 민주정부가 모든 문제의 종점이 되리라는 환상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다.

가장 큰 도전이 앞에 놓여있다는 것, 우리의 삶이 끝난 뒤에도 안정적이고 민주적인 사회를 세우기 위한 투쟁은 계속되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이 요구될 것을 알고 있고, 낙담하거나 실망할 때도 있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Myanmar's pro-democracy leader Aung San Suu Kyi at a Jan. 4 short films festival in Yangon, Myanmar.(AP Photo/Khin Maung Win)



수지의 정치적 행보와 관련해서 또 하나 논란을 불러온 것이 있다면, 자기네 나라인 버마에 대한 서방의 경제적 제재를 요구했다는 점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것이 옳다 그르다를 정확하게 판단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다시, 그의 목소리를 통해 들어보지요.

자유와 정의를 주장하는 목소리에 지구 저 멀리에서도 공감을 보내오고 있습니다. 사람은 단순히 물질적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 이상의 의미 있는 존재가 되려는 뿌리 깊은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피부색이나 신조에 상관없이, 생각하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인간으로서의 이런 요구를 이해합니다.

정치적 권리가 완벽하게 주어진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운 좋은 분들이라면, 행운을 조금 덜 타고난 까닭에 고통 받고 있는 이 지구의 다른 곳 사람들을 도우려 손을 뻗을 겁니다. 세상에 자신들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떠날 준비가 돼 있는 젊은이들이라면, 자신들만의 경계를 넘어 권리를 빼앗긴 어둠의 땅으로 시선을 돌릴 수도 있을 겁니다. 희망과 기회의 문을 열어젖히게 된 것을 축하하러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이, 버마에서도 젊은이들이 희망과 기회의 기쁨을 알 수 있게 하기 위한 우리의 싸움을 돕고 싶어 할 수도 있습니다.

버마가 가난한 것은 자원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좋은 정부를 만들기 위한 기본적인 제도·관행이 정착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투쟁 중 하나는 그 점을 국제사회에 이해시키는 것입니다.

어떤 다국적 기업들은 억압적인 정부와도 거래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기업들은 버마와 경제관계를 맺으면서 자신들이 실질적으로 버마의 민주화를 도울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미 경제적, 정치적 권한을 독점한 엘리트 부유층을 더 부유하게 만드는 식의 투자는 합법성과 정당성이 떨어집니다. 또한 건전한 민주주의의 주춧돌을 놓는 데에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구합니다. 지적인 자유와 인도적 이상을 펴는데 자신의 능력을 쓰고 싶은 분들이라면 버마의 군사 정부와 거래하는 기업들에 원칙적으로 반대해주십시오.

여러분의 자유를 저희들의 자유를 증진시키는데 써 주십시오.


과거 남아프리카공화국 백인 정권에 대한 서방국가들의 금수 조치(물론 이런 대응을 이끌어낸 것은 남아공 흑인들의 끈질긴 투쟁과 거기 공감한 미국과 유럽의 시민들이었습니다)가 아파르트헤이트 통치를 끝내는 데에 큰 몫을 한 전례가 있습니다. 하지만 버마는 아직까지 버티고 있습니다.

각국은 버마를 경제적으로 지탱해주는 중국을 욕합니다. 한국도 욕 먹어 쌉니다만... 한국은 중국(그리고 홍콩)과 태국에 이어 버마 입장에서 보면 3번째로 큰 교역상대랍니다. 우리는 자국민 억압하고 총 쏴 죽이는 정권들과 거래하는 걸 '자원외교'라 하고, 그런 나라에서 장사하거나 자원 캐내는 기업들을 칭찬하는 나라지요...

버마 정부는 마이클 애리스가 전립선암에 걸려 아내를 만나고 싶어 할 때조차 수지를 방문하는 걸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애리스는 결국 아내를 보지 못한 채 1999년 사망했습니다. 수지는 가족과의 이별을 ‘버마의 자유를 위해 치러야 할 희생 중 하나’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2000년 9월 그는 다시 가택연금에 처해졌습니다. 19개월 뒤 자유의 몸이 됐지만 그 뒤에도 3개월 동안 비밀리에 구금됐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가택연금을 당했습니다.

2007년 버마에서는 불교 승려들의 주도 아래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열렸고 12년간의 가택연금에서 수지를 풀어주라는 국제적 압력도 높아졌습니다. 전 세계 12개 도시에서 연대 시위가 벌어졌지요.

수지는 버마에서 종종 ‘도(Daw)’ 아웅산 수지로 불립니다. ‘도’는 미얀마에서 존경하는 여성에게 붙이는 존칭어라고 합니다. 아웅산 수지라는 이름 자체도 ‘작은 승리들의 빛나는 집합’이라는 뜻이라네요.

2010년 11월 버마 군사정권은 총선을 실시하면서 마침내 그를 가택연금에서 풀어줬습니다. 집 안에 갇힌 죄수가 된지 20여년 만이었고, 총선을 실시하는 것 역시 20여년 만이었습니다. 수지는 NLD 당사로 출근하는 등 정치활동을 재개했고 2011년 7월에는 막내아들과 함께 양곤에서 북쪽으로 700km 떨어진 고대 도시 바간(Bagan)으로 여행을 나서기도 했습니다.

버마 군정이 형식적으로 민정에 이양되는 절차도 있었습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 같은 이들이 버마를 방문하면서 민주화 노력에 도장을 찍어주기도 했습니다. (얼마 전 MB도 버마를 방문했지요;;)

하지만 아직 버마 민주화의 길은 멀어 보입니다. 군사정부는 여전히 NLD와 수지의 정치활동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미국 인권단체 ‘프리덤하우스’에 따르면 버마의 인터넷 보급률은 1%에 불과하다는군요.  ‘아랍의 봄’ 같은 아래로부터의 민주혁명이 버마에서도 일어날까요...